1.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에 건너고 싶다"
극 초반 염석진(이정재) 대장이 암살 작전에 추상옥(조진웅)을 끌어들이면서 말한 내용
이 대사는 독립운동가 김경천(1888~1842) 장군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 나온다.
김경천 장군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학교에 입학
3.1운동이 일어난 후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에 머물면서 만주의 한인들이 그에게
"나뭇잎이 떨어지면 군사행동을 하기가 불리하니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한 번 넘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한다.
김경천 역시 그 말에 동의하였으나 당시 무기구입 등의 문제 등으로 그럴 형편이 못된다고 한탄한다.
이후 만주의 한인사회에서 횡포를 부리던 마적떼를 소탕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 러시아 백군白軍,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경천아일록에서는 처절했던 무장투쟁 과정과 고국과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기록하고 있다.
2. "민나 도로보데스" (모두가 도둑놈이다)
염석진이 밀정임이 발각되자 아편굴에서 상해 일본영사관 직원에게 전화로 했던 말
이 말은 충청도지역의 대지주였던 친일부호 김갑순(1872~1960)가 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친일부호 김갑순
충청도 아산, 부여, 공주 등에서 군수를 지낸 관료 출신
세금을 징수한 경험을 살려 충청도 지역의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 그 중 대전 지역의 2/3가 그의 땅이었다고 한다.
토지 매입, 땅값 상승으로 엄청난 차익을 얻어 충청남도 제1의 부호가 되었다.
그리고 각종 친일, 관변단체에 활동하면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다.
김갑순의 "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타락하고 나쁘다고 매도함으로써 자신의 파렴치한 행동을 어떻게든 희석시키고자 하였다.
3. "물지 못할거면 짖지도 말아야죠. 인생은 요령이지 않습니까"
밀정 노릇을 그만두고 친일경찰로 변신하면서 친일파 강인국에게 했던 말
이 대사는 구한 말~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윤치호의 일기에 나온다.
윤치호
1920년 8월 10일자 일기에
"조선인을 자극하는 언사와 정책, 선전을 계속한다면, 절대로 조선인의 호감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인이 필요 이상으로 일본인을 적대시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담을 기억해야 하고, 물 수 있을 때까지는 짖지도 말라는 냉철한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
구한 말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 등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노골적인 친일노선으로 선회, 그의 말대로 짖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한편 그는 당대의 천재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머리가 비상해서 4달 만에 영어를 배우고 통역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두고 당시의 국제 정세와 한국의 무력함에 좌절한 천재라고도 한다.
4.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해방 후 마지막 암살 작전을 수행하는 장면에서 염석진이 한 이 말은 해방 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친일파로 기소된 최남선이 쓴 '자열서'에 보인다.
자열서는 일종의 반성문으로 이 글에서 최남선은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되어 이제 민족정기의 호령이 굉굉히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 앞에 숙연하지 않을 것이냐"고 했다.
조국의 광복을 뜻밖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해방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이 자열서에서 자신의 변절이 '학문'과 '지조'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학문을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자열서 전문의 내용은 오로지 그의 변절이 불가피했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데 일관하고 있다.
참회와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