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몇 년 전에 아빠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의 연주를 찾아보다가
임현정 님이 연주하는 라흐마느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들었단다.
아빠 귀가 막귀이긴 하지만,
임현정 님의 파워풀한 연주는 딱 아빠 취향이더구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워낙 유명하니까, 선율이 익숙했고
다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도 나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라흐마니노프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단다.
아빠가 음악가의 삶과 음악에 담긴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좋아하는 편이잖니,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도 검색해 보았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 중에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이 없었어.
음… 책이 무수히 출간되고 있지만, 아직 원하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구나.
우리나라 출판업계 더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아무튼… 아빠가 원서를 읽을 수도 없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신간 코너에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된 것을 보았단다.
낯익은 얼굴이 책 표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어.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되었구나.
책 표지 색상이 심각한 표정의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더구나.
너희들도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빠가 짧게 이야기해줄게.
1. 좌절과 성공
라흐마니노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출신으로
1873년 4월 1일에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태어난 시기가 참 절묘하구나.
아빠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 황제, 계속된 혁명, 소비에트의 탄생 등 러시아 국내에도 굵직한 사건이 많았던 시기이고,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많던 시기였어.
좀더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서 음악 활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음악에 그 시대의 색이 덧칠해져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평화로운 시기에 음악 활동을 했다면 다른 색의 음악을 했을 수도…
…
라흐마니노프는 쇠락 위기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단다.
특히 어머니가 장군의 외동딸로 재력이 있으셨지만,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단다.
육 남매 중에 네 번째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별거를 하셨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사셨대.
어렸을 때 누나 2명이 일찍 병으로 죽어 라흐마니노프는 충격을 받았어.
이런 저런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어.
그래도 음악의 재능이 있어서
즈베레프라는 음악가의 제자가 되어 음악을 하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스승을 통해 차이코프스키 등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들도 만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16살에 즈베레프와 의견 충돌로 결별하게 되었단다.
…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라흐마니노프는
고모의 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안정을 찾았단다.
고모의 자녀들, 그러니까 라흐마니노프의 고종 사촌들이 4명이 있었는데,
모두 라흐마니노프에게 잘 해주었단다.
그 중에 나타샤와는 나중에 결혼도 하였단다.
안정을 되찾고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도 제대로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했어.
작곡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1895년 1번 교향곡을 작곡했어.
2년 뒤인 1897년 1번 교향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혹평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당시 지휘를 맡았던 글라루노프가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작품의 실패로 라흐마느니프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좌절했다고 하는구나.
첫 번째 작품인데 너무 실망하긴 이른 거 아닌가, 힘 내야지…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해줬겠지?
그렇게 격려해 준 사람 중에 톨스토이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달 박사의 최면치료로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사촌인 나타샤도 적극적으로 라흐마니노프를 도와주었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작곡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에 만든 곳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고 하는구나.
처음 2악장과 3악장만 먼저 만들어 연주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년 뒤에 1악장을 추가하여 완성했다고 했어.
이 곡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한 단계 올라선 음악가가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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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 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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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성기
1902년 나타샤와 결혼했단다.
사촌 간 결혼했다는 것이 오늘날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가 싶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도 사촌 간 결혼은 할 수 없었대.
어렵게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1903년에는 첫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1904년 3월에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를 맡게 되었단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러시아는 혼돈과 불안의 시기였단다.
사회는 빠르게 현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제정군주가 통치하던 모순된 사회…
1905년 노동자들의 불만이 퍼져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총으로 대응하면서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단다.
이런 혼란은 라흐마니노프에게도 영향을 주었어.
약 3년간 독일 드레스덴에서 지내다가 러시아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1909년에는 처음 미국 순회 공연을 갔는데,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되었단다.
이 시절 또 하나의 대표곡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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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77)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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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유럽 이곳 저곳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그 공연들도 중단되고 말았단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대상자였기 때문에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마음에 늘 불안해 했다고 하는구나.
결국 징병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1차 세계 대전과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대.
…
1917년 2월에는 러시아에서는 군주제가 막을 내렸단다.
라흐마니노프도 구세대 유물이었던 군주제가 끝난 것을 환영했단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혁명 세력의 주동자들인 농노들은 지주를 압박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장인도 지주였고,
그들의 집도 저택이라서 농노의 공격 대상이었단다.
그들도 언제 공격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외국에 가 있는 것을 고려했어.
1917년 9월 5일 러시아에서 마지막 연주를 했단다.
곧바로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라흐마니노프는 식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단다.
이 전에 미국에서 순회 공연에서 큰 인기를 끌어서
미국에 정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
여러 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하였단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정신적으로도 정착하고 안정을 찾는 것도 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더욱이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를 무척 사랑했는데…
3. 나이 들수록 더 열정적인
미국에서의 생활은 음악에 대한 열정, 그 자체였단다.
미국은 이미 녹음 기술도 발명이 되어서
유명한 음악가의 음반 산업도 활발했어.
라흐마니노프도 피아노 녹음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지만 러시아와 유럽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나 봐.
1930년에는 스위스 루체른 근교에 빌라를 새로 지었는데,
빌라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세르게이와 아내 나타샤의 이름을 합쳐 세나르라고 지었단다.
이곳에서 교향곡 3번을 작곡하는 등 많은 작곡 활동도 했대.
1930년대면 그의 나이도 이제 육십 대에 들어섰어.
몸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지.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치명적인 관절염도 있어서
의사가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권고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음악과 연주에 열정이었단다.
무대에서 죽는 것이 그의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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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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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루체른의 생활은 히틀러에 의한 유럽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되면서 마무리 되었단다.
1939년 8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그가 미국으로 떠난 지 일주일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이때 함께 오지 못한 둘째 딸 타타냐와 루체른의 빌라 세나르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하는구나.
1942년에는 베벌리힐즈 에 주택을 장만하고 죽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어.
1942년 데뷔 50주년이 되던 해라서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도망 온 러시아에서도 축하 선물을 보내주었다고 하는구나.
1943년 피부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2월 5일 생애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3월 28일 눈을 감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죽기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구나.
…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 피아니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평생 마음 한 곳이 허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야.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웃는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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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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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책의 첫 문장: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상상 속 그의 손끝에 있는 건반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각별히 선호한 독일제 베히슈타인이 아니라, 1934년 라흐마니노프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악기를 가능케 한다고 칭찬했던 민첩한 액션으로 무장한 스타인웨이의 감응력 좋은 현대식 피아노였을 것만 같다.
책제목 : 라흐마니노프
지은이 : 리베카 미첼
옮긴이 : 이석호
펴낸곳 : 포노
페이지 : 392 page
책무게 : 392 g
펴낸날 : 2023년 09월 15일
책정가 : 22,000원
읽은날 : 2023.11.13~2023.11.15
글쓴날 : 2023.12.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