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32) - 봄을 맞이하며 읊어보는 한시
오늘(2월 11일)은 정월대보름, 아침 식탁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더위 사라며 웃음을 나눴다. 정월대보름은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명절, 떨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조촐한 식탁모습을 전송하며 강건하고 풍성하기를 축원하였다. 여러분도 그러하기를.
입춘 지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다가오는데 전국이 혹한과 폭설로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마음은 봄, 아내와 눈보라를 맞으며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는 고시조를 합창하였다. AI에 이은 구제역의 확산으로 대보름민속행사가 취소되고 탄핵정국을 둘러싼 촛불과 태극기 집회의 날선 공방 등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春來不似春) 날들이 어수선하다. 그래도 꽃피고 새 우는 봄날은 오리라.
정월대보름날 아침, 눈 내린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아 몸을 풀었다
이번 주에 펴낸 동생의 문집 ‘성실하고 행복한 삶’에 초봄에 읊어보는 한시들이 들어 있다. 그 중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와 ‘봄바람의 큰 품격(春風大雅)’이라는 제목의 글이 때에 맞아 이를 소개한다.
1.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다가오는 3월초의 날씨는 아직도 쌀쌀하다. 지난 2일 고전연구회에서 봄은 봄인데 어쩐지 봄 같지 않다는 뜻의 ‘춘래불사춘’의 원전을 소개받고 요즘의 시기에 어울리는 한시 몇 개가 생각나서 그 운치를 같이 느껴보고자 한다.
약 2000년 전 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는 북방에서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는 흉노와의 화친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후궁 중 절세미인인 왕소군(王昭君)을 흉노 왕에게 보냈다. 그때 한나라의 원제는 볼모로 보낼 궁녀를 궁중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한 사람을 선정하게 되었는데 그 후궁이 바로 왕소군이다. 왕소군은 원래 절세미인이었으나 궁중화가인 모연수가 뇌물을 받은 적이 없는 그녀의 얼굴을 일부러 밉상으로 그렸다. 모연수가 그린 그림을 보고 원제는 가장 밉게 생긴 왕소군을 흉노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파견 대상자로 선정된 후 대면하고서야 왕은 그녀가 절세미인인 줄을 알게 되었다. 왕은 아름다운 후궁을 흉노에게 보내기가 아까웠으나 외교적인 결정사항을 번복할 수 없어 왕소군을 볼모로 보내고 나서 모연수를 죽였다고 한다.
모국의 평화를 위해 희생양이 된 왕소군은 중국인의 칭송대상이었기에 이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그를 기렸다. 이역만리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왕소군의 심정을 후대의 시인 동방규(東方叫)가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로 남겼는데, 이 시에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지 못 한다는 유명한 구절 ‘춘래불사춘’이 들어 있다.
昭君怨(왕소군의 서러움)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옷매무새를 소홀히 하게 되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예전의 어여쁜 몸매는 자취를 감추었네
왕소군의 심정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비록 봄이 와도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없다’는 해석이 될 수 있다. 지난해의 미국 발 금융위기로 아직도 전 세계가 경제 한파의 고통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의와 절망감에 빠져있는 현 상황에서, 먼 옛날 왕소군의 심정을 헤아려서 만들어진 ‘춘래불사춘’이 2000년 후인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여운을 주고 있다.
2. 봄바람의 큰 품격(春風大雅)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봄바람의 큰 품격은 세상만물을 품을 수 있으며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가을 물의 물무늬는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리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70대 초반에 행서(行書)로 쓴 대련(對聯) 몇 수 가운데 이 춘풍대아(春風大雅)는 추사체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다. 조선조 후기에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고 신동으로 소문난 성장환경의 영향인지 박식한 추사는 장년기까지 타인의 작품에 날카로운 비평을 삼가지 않았다. 그런데 말년의 이 작품에서는 봄바람 같은 넓은 도량을 뜻하는 바람 풍(風)자가 부드럽기 그지없는 필체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10여년의 유배 생활로 노년에 성격이 부드러워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뜻을 음미해보면 ‘시(대아의 숨은 뜻)는 봄바람 같아야 하므로 대상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하고, 역사 기록(문장의 숨은 뜻)은 추상같이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여튼 머지않아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님 품 같은 따스한 햇살 아래 살랑대는 봄바람의 신비한 조화를 체감할 것을 기대해 본다.
동생의 글을 통해 2,000년 전에 왕소군이 느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때, 10년 전에도 전 세계가 경제 한파로 고통을 겪으며 실의와 절망을 겪은 날들, 추사의 봄바람처럼 따스한 노년의 품격을 새기며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첫댓글 정월대보름..더위를 팔지 못한 아쉬움에 품격잃은 카페지기는 세상만물을 품을 수 있는 봄바람의 품격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얼어붙은 마음에도 봄이 올까요? ㅋ 기품있는 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