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 이 시집
사랑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을 위한 사랑 노래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2022, 문학과지성사)
김효은(시인, 문학평론가)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1. 프롤로그 :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사랑의 노래
‘아들-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인류 구원 프로젝트를 실행한 ‘아버지-신’의 그 숭고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한 아들의 희생으로 다수의 자녀(인류)를 구원하기란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과연 마땅한 일인가를 따져본다. 반면, 죽은 아들,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서의 피투성이 아들의 육신을 끌어안고 우는 성모 마리아의 날것 그대로의 고통과 신음에 대해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거대한 깊은 슬픔에 대해서도.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신이 아닐 테다. 어쩌면 단지 귀찮고 게을러서 신은 대리인으로 어머니를 세우고, 사랑이라는 감정 코드를 개발하여 인류에게 이식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 신의 등가물 혹은 대체물이라면, 신의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사랑, 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충직한 복종과 사랑에 대해, 그토록 많은 사랑의 층위와 위계, 종류들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그러나 사랑의 차원과 층위들, 영역과 위계와 범주에 대해서 우리는 감히 함부로 말하거나 분류할 수 없고, 이를 결코 측량하거나 재단할 수도 없다. 우리가 신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듯, 사랑의 끝 간데도 물론 온전히 알 수 없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이라고 그 영역을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의 가변적 정의가 그나마 일부는 성립될 수 있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신,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도 가닿지 않을 심연 속에서, 쓸쓸하게 앉아 있을 당신을 떠올린다. 한 불행이 폭풍우로 지나간 자리,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의 신을) 송두리째 잃고, 폐허 속에, 검은 우물 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당신을 생각한다. 이 불행이 신의 뜻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개인의 부주의로 일어난 실수나 과오에 불과한 것인지, 인력으로는 피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의 재난일 뿐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두 눈에 뿌려진 검은 재, 그리고 자욱한 연막으로 인해 도저히 그들은 눈을 뜰 수 없고, 모호해진 진실은 가라앉거나 묻힌다. 생존자들 역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며 내내 괴로워하거나 자학의 날들을 보내야 하는, 의미를 잃은 날짜들이 그들 곁에 혹은 우리 곁에 숫자로 적재된다. 혼자 남은 사람은 언제나 혼자다. 그에게 어떤 애도도 결코 시작되거나 종결될 수 없고, 혹여 애도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종결되지 않는다. 불행이 내치고 간 자들, 사랑의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그 자신이 사랑의 허물로 남겨진, 텅 빈 껍데기의 사람 하나가 그 슬픔의 자리를 덩그러니 그림자로 채우고서 한 자리에, 박제되어 있다. 흐르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누구라도 혼자인 ‘그’에게 혹은 혼자인 ‘나’에게 다가와 준다면, ‘시詩’로서, ‘시詩’와 함께 다가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있어 준다면,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다고 믿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처럼, 시詩가 내민 그 손길을 덥석 잡고서 다행이라고, 우리는 다시 구원을 말할 수 있을까.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그녀는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통해, 애도와 함께 애도의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채우는 사랑에 대해, “그런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시는 결국 “사랑과 삶”을 잃은 누군가의 곁에서 “사랑과 삶을 발음하”(「봄에 죽음 아이」)는 일임을, 타자를 향한 발음과 발화는 결국 노래와 시로 “함께 있”(「그러니까 시는」)어주기, 손 내밀어주는 일일 뿐이라는 것, 그 또한 더러는 외로운 작업이라는 것을 그녀의 시는 일깨워 준다. 지극히 아름다운 형식과 목소리로 불행히도 불행은 노래가 되어 기억되고 기록된다. 노래가 기꺼이 지불해야 할 삶/사랑/슬픔에 대해, 그 잔혹한 선입금의 계산법에 대해, 이전 시집에서 시인은 이미 노래한 바 있다. “세상의 절반은 사랑/ 나머지는 슬픔”,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세상의 절반」), 전자와 후자 그 둘은 “너”의 안에서 만나 고이고 맞붙어서 다시 하나의 노래가 되어 흐른다. 어쩌면 지독한 불행이 오기 전에, 혹은 타인의 불행 그 건너에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훔쳐 가는” 형식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시는, 음악은, 잠시나마 환멸을 녹이는 마약성 진통제처럼 “부드러운 하나님”(「음악」)이 되어 다가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시”는 형국을 한, “음악은 - 밤의 망가진 다리”라는 묘사에서처럼, 전원을 켤 때만 작동되는 소극적이고 불완전한 신, “무의미”한 ‘무엇’으로 진술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영에 의하면 시는 가혹한, 희망이고 사랑이다.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불행 속에 버려진 사람들에게도 “함께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신神보다는 훨씬 “좋은”, 사랑과 위무의 노래가 된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
이 슬픔의 앙상한 다리는 어느 꽃술 위에 내려앉았나
내 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부분
진은영은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라는 헤르바르트의 시구를 인용하며,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라고 이번 시집의 자서自書에 그만의 시학, ‘고통’과 ‘사랑’과 ‘곁’의 시학을 나직하게 고백한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돌들의 동그란 무릎,”들, 쓸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 곁에서 무엇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시詩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니까 시는”, 그녀가 쓰는, 살아남은 자의 서정시는, 그리하여 그 모든 죽음을 넘어선, ‘나’와 연결된 타자의 의미, 사랑과 연대와 공감, 기억과 고통과 위무에 관해 말하고 노래한다.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이 “늘 혼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그들을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가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며,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일반 명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단 한 사람이 고통과 불행 속에 있다’에 주목하는 사람. 불행과 불운이 건드리고 간 사람, 깊은 우물 속에 남겨진 자의 앙상한 고통의 “꽃술 위에” 조심스레 “슬픔의 앙상한 다리”로 “내려앉은”, “그러니까 시는” 다만 “여기 있다”. 고요히, 절망이라는 당신 곁에. 진은영의 시는 ‘지금 여기’의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끊임없이 죽음과 절망을 상기하고 소환한다.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죽은 아이들의 얼굴”들,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의 자욱한 이미지까지 오롯하게 그녀의 시에는 콜라주 되어 있다. 그녀는 웅성거리는 “별”들의 빛남 아니 “벌”들의 울음소리를 그녀의 시속에 끊임없이 소환하고 상기한다. 사랑의 전문가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런 것이라는 듯이.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 진은영, 「사랑의 전문가」 부분
시적 주체는 ‘내가 사랑하는 너’, ‘네가 사랑한 나’를 매 순간 마주하고 상기한다. 기억한다. 상기와 기억은 윤리적인 노력이다. “슬픔과 망각”을 섞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애도와 윤리, 너와 나의 사랑은 기억 속에서 마법처럼 지속된다. 수전 손택은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그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으며,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화해와 망각은 어쩌면 사랑과 애도의 정 반대편에 있는 것이리라.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슬픔에 대하여, 혹은 사랑에 대하여, 시인은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거”(「당신의 고향집에 와서」)라고, 점액질의 고백들을 잔뜩 늘어놓을 거라고 속삭이듯 노래한다.
2. 고백 : “사랑의 민달팽이”로 당신의 등 위를 지나가기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 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부분
자기 연민이나 자위의 시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를 넘어선 타자를 향한 노래, 서로의 상실을 위무하고 슬픔에 연대하는, 공적 애도의 노래를 진은영은 그만의 섬세한 감각과 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서정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더러 그녀의 시는 달콤한 연애시戀愛詩로도 읽히기도 한다. 불행과 불운,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 무고한 희생들, 개인과 역사의 거대한 상실과 유혈을 이토록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일이 그녀에게서는 가능해진다. 미학과 윤리학과 정치학과 시학이 만나는 자리, 삶과 죽음, 사랑과 슬픔이 만나는 자리에 그녀의 시편들이 성좌처럼 밤하늘 가득 그려진다. 문득, 이전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작과 비평, 2012)에 수록된 시 「오필리아」를 떠올린다.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붉은 물 위를 흘러가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텅 빈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사간다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
- 진은영, 「오필리아」 전문
한 죽음이 이토록 아름답게 그림으로 또는 시로 음악으로 형상화되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그 또한 예술이 머금은 피의 양식임을, 양식糧食이자 양식樣式으로 존재하는 그것들의 사랑의 점자들을 일부러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 슬픔과 비극을 훼손이 아닌 아름답게 재현하고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는 일 역시, 사랑과 애도의 영역 안에 있다. 시로 “함께 있음”, 사랑의 존재 양식으로서의 시詩는, 우리가 뜯어먹을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일지도 모른다. 시가 잔인함과 피폐함, 극한의 리얼리티만을 핍진하게 사실적으로 단순히 진술하거나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데 그친다면, 그 또한 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사진이나 르포, 프로파간다, 기사 등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진은영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미학적인 것과 핍진하고 사실적인 것, 형식과 내용, 사유와 일상과 감각이 만나는, 문학의 “아토포스”를 열어주는 시인인 것이다. 그러한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에까지 불릴 아름다운 노래, 노래의 끝을 이어가는, 인류가 인류에게로 죽기 전에 미리 상속받을 일종의 유산, “훔쳐가는 노래”야말로 바로 시詩가 아닐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약자들, 소수자들, 혹은 애도 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실종자들, 난민들, 쓰레기가 되는 삶들(바우만), 잉여로 치부되거나 잊히거나 말소된 익명의 사람들, 호모 사케르들(아감벤), 위로할 수 없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 소외와 외로움, 이유 없는 불행이 휩쓸고 간 잔해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재에 뒤덮인 사람들, 천재지변, 악재와 압제와 인재, 전쟁과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은 분명 우리 곁에 존재했고,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나, 너, 우리는 고통 속에서 연결되고 결속된다.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인류는 재난과 질병, 고통과 위협 속에 오히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여실하게 확인했다. 국경 너머의 일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타인의 고통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기후 위기, 질병, 재난, 전쟁 등 이 모든 고통은 ‘나’의 것이 될 농후한 가능성으로 이미 연결되었다. 타인이 아닌 타인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덜 외롭게, 덜 슬프게, 함께 하려고 애쓰는 마음, 애쓰는 노래, 애쓰는 시간, 무고한 죽음을 기리고 달래고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고 모순과 폭력에 저항하고 죽음과 상실을 추모하는 그 모든 노력을 우리는 기꺼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위로와 위무와 애도의 노래, 함께 부르는 노래를, 우리는 기꺼이 진은영식의 ‘사랑’의 노래, ‘곁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밀실에서의 독백이 아닌, 함께 부르고 함께 듣는 그 사랑의 노래를 우리는 기꺼이 시詩라고 불러도 될까. 시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와 당신 사이에 함께 있어 줄 것인가.
3. 청혼請婚 혹은 청혼請魂의 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전문
「청혼」이라는 시,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서시를 읽는다. 표제작이 된 위 시의 제목 ‘청혼’에는 괄호 속 한자가 없다. ‘청혼’의 사전적 정의를 찾으면, 두 개의 한자어가 뜬다. 청혼請婚과 청혼請魂. 문득 시인이 ‘청혼’이라는 제목의 의미에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한자를 병기倂記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사랑한다는 일, 한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을 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서, 기꺼이 “유리 조각”이 잔뜩 담긴, “쓴 잔을 죄다 마시”고 어쩌면 그를 대신하여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일을 각오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장한 일일지도 모른다. 혹은 너를 만나기 이전의 ‘나’의 상징적인 죽음, 그것은 제의와 약속을 의미하고 선언하는 일일 수도 있다.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는 일은, 네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은 하여, 내가 너를 만나온 그 모든 시간 속에 이미 분리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안에 하나의 시공간으로 점철된 것이리라.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 ‘단 한 사람’,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 단 한 편의 서약, 한 줄의 시詩, 고백을 들려 ‘주는’ 일, 발화하는 동시에 수행성으로 서로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사랑의 노래야말로 ‘청혼’이 아닐까.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밤 10시 무렵,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걷는 사람들이 걷는 사람에게 깔려 158명이 숨지고 196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상자들은 대부분 10대와 20대 건강한 젊은이들이다. 그 자리에 없었으면 그들은 몇 년 후에는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시 제목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청혼’을 하고 ‘청혼’을 받고 반지를 서로 나눠 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몇 년 뒤 어느 시월의 마지막 날에는 그 아이를 무동 태우거나 유모차를 밀며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핼러윈 사탕을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깔깔거리면서 그 거리를 다시 걸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금 여기’ 이곳에 없다. 그들의 꿈과 미래는 누가 앗아갔는가. 2022년 10월 29일을 지나, 2014년 4월 16일로 다시 시간이 역행하는 것을 목도 한다. 제주도 수학여행을 위해 세월호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 304명이 사망하고 142명이 부상했던 당시의 참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마지막이길 바랐던 참혹한 사건이 얼마 전 이태원 거리에서 다시 벌어졌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사랑의 하느님은 어디로 가셨나. 배는 침몰하고 도심 한복판에서 죄 없는 젊은이들이 압사당하고 예수도 아닌 부처도 아닌 죄 없는 ‘이삭’들이 죄 없는 ‘예수’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 무고한 피 흘림은, 환원할 수 없는 희생은 대체 누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도 없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4. 다시, 시와 사랑과 당신과 신에 관하여
시와 사랑과 당신, 그리고 신神에 대해서 생각한다. 박해하고 모함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 우리가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신을 사랑하기란, 한결같이 추앙하고 숭배하기란 맹목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애초에 신은 ‘갑’이기 때문에, ‘을’인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은 오롯하게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 존재, 섬기고 숭배해야 하는 존재. 얼굴조차 없는 존재.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목소리만으로 근엄하게 존재하는 존재, 지문도 동공도 없이 강제된 음성으로만 존재가 인증되는 신의 형체 없는 아우라를 생각한다. 신의 아들, 동시에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어쩌면 원수는 아버지, 신일까?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처벌하고 진실을 규명하고 원수가 다시 또 누군가의 원수가 되지 않게 사회악,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타파하고 그들이 판치는 세상을 단죄하고 불의에 맞서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는 원수에게 고통받은 자, 불행에 휩쓸린 자,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으로 기꺼이 사랑을 실천할 일이다. ‘내’가 인간인 한에서 ‘나’는 단 한 사람의 ‘너’를 그리고 ‘너’에게 비친 연약하고 외롭고 왜소한 ‘나’의 취약성을 부인할 수 없고 또한 그러한 ‘너’를 ‘나’는 사랑하고 연민한다. 사랑은 교감이고 교류이고 타자를 통해 ‘나’ 스스로는 혼자서 가닿을 수 없었던 또 다른 ‘나’에게 새롭게 닿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랑은 그렇게 없는 세상 하나를 펼쳐낸다. 사랑은 나와 타자 사이에 일종의 통로, 교각으로 연결된다. 적어도 사랑의 노래는 한세상을 건너게 하는 혹은 견디게 하는 교각이자 뗏목 같은 기능을 한다. 사랑의 교각은 사랑의 노래와 메시지는 만드는 자와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이 혹은 따로 얼마든지 향유하고 경유할 수 있는 통로를 연다. 시詩 또한 그러하다. 시는 세계와 세계, 나와 타자, 시인과 독자를 연결하는 길이다. 위로와 애도의 노래를 짓는 자, 부르는 자, 듣는 자, 혹은 그들 모두는 텍스트 안에서 ‘사랑’의 노래로 만난다.
불행과 절망과 죽음은 약자와 빈곤한 자들에게 더 가깝다. 그것들은 예고 없이 불시에 닥쳐온다. 최근 한 이십 대 여성 노동자가 국내 제빵기업의 제조 공장에서 2교대로 근무하다가, 소스 배합기에 빠져서 사망했다. 안전 펜스만 있었어도 빨려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기형도는 일찍이 절망과 불행의 출처가 ‘안개’에 기인한다고 노래했다. 거대한 ‘안개’ 속에서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고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어”도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결코 순전히 ‘안개’의 탓은 아니다”(「안개」)라고 그는 노래했다. 시인은 다만 반어와 역설과 비유와 상징과 수사를 통해 절반의 발화만을 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안개”를 빌려와 “개인적인 불행”으로 치부된 사건과 죽음을 고발한다. 은폐했던 거짓과 폭력들, 인공 ‘안개’로 뒤덮인 세상에 시인은 텍스트를 통해 저항하고 고발하는 동시에 끝나지 않는 애도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아이러니로 아이러니를 말한다.
신은 있는가. 시인은 재차 묻는다. 아니 신이 있다는 전제하에 시인은 신을 욕하고 단죄하고자 한다. 진은영 시인은 무능한 신을, “개장수 하느님”(「봄에 죽은 아이」)이라고 칭하며 그에게 묻거나 자조한다.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의 여부에 관하여, “슬픔의 시험문제”는 왜 존재하는지, 과연 신은 그 질문에 정답을 맞힐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으로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중략)…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 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 진은영, 「봄에 죽은 아이」 부분
넷플릭스 영화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손안에 쥔 유리구슬의 홀수와 짝수를 가리는 게임, 그러나 누가 이기든 상관은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리고 게임에서 이긴 나머지 사람도 다음 게임에서 50퍼센트의 확률로 반드시 죽는 게임이다.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혹은 모두가 죽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공식적으로는 살인, 살해가 아니다. 사망자는 생존 게임에서 졌고 퇴장된 것뿐이다. 지루한 신은 언제 어디서건 서바이벌 게임판을 펼친다. 죽어야 할 말의 개수는 본인 내키는 대로, 한 줌, 두 줌 혹은 통째로 들이붓거나 흩뿌려진다. 한순간,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진다. 영화 『지옥』에서도 태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신생아에게조차 무작위로 죽음은 낙찰되고 배정된다.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에 관해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이 출제 해놓고도 어차피 신은 그 자신이 그런 문제를 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T.S 엘리엇은 일찍이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했다. 봄은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계절이지만, 더러는 이유나 원인을 물을 수 없는 “착한 아이”들의 죽음이 대지를 피로 물들이기도 한다. 다만 남아있는 자들은 매해 반복해서 돌아오는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그런 노래를” 함께 부르고 추모하고 연대하고,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멈추지 않고 들려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신이 아닐까.
사랑의 하나님이 너무 오래 안식하시는구나
무한 속에서 선잠으로 뒤척이시고
월요일은 오지 않네
내일 아침이면, 결코 만나러 가려는데 따듯한 달걀이 깨졌는데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아
노란 고양이들이 울고
비가 오고
사막은 결코 젖지 않고
툭툭 떨어진 붉은 머루알들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는 저녁의 긴 장화 아래 터지고
구름이 일꾼들처럼 흩어지고
월요일은 없네
마지막으로 끈 담뱃불이 하늘의 짙은 허공에서 반짝, 였네
태초에 화재는 없었네 홍수만 있었네
- 진은영, 「월요일에 만나요」 부분
태초의 하느님, 종이를 만드셨다.
종이로 수많은 별들을 접다가 피곤해지셨다.
종이 위에 은유의 침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지셨어.
…(중략)…
고요한 침엽수들로 찌르고 싶다,
인정머리 없는 하느님의 눈동자를.
꿈의 대홍수- 잠가뒀다 일제히 열리는 자동 수도꼭지 같은 거 말고
그가 고통으로 눈 못 뜬 채 뿌리는
국지성 호우에 익사하고 싶다.
임시 사막의 작은 하늘 아래서
나는 기다린다.
육화된 질문,
한 줄의 문장이 언제쯤 흘러내릴까.
존재의 메마른 진흙 위에
신이 잠든 노란 달밤 위에
한 줄기 비로-
한 줄기 피로-
- 진은영, 「종이」 부분
신은 피조물의 불행을 즐기기보다는, 세상일에 무심하고 무료하고 다만 “피곤해지셨”(「종이」)을뿐, 신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러는 욥의 경우처럼 불행으로 그의 종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인간의 불행에 개입하지 않는다. “태초의 하느님, 종이를 만드셨”고 그는 “종이로 수많은 별을 접다가 피곤해지셨”고 단지 “종이 위에 은유의 침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진” 사실 외에는 책임이 없다. 그는 신이므로 직무 유기의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2016년 4월, 그가 흘린 침에 ‘302’페이지의 종이가 젖었고, 침수됐고, 책은 송두리째 찢겨나갔다. “고요한 침엽수들로” “인정머리 없는 하느님의 눈동자를” 가차 없이 찔러버릴 수만 있다면, 시적 주체는 그 피에 익사해도 좋겠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신에게 심장이나 눈코입이 있을 리 없다. “육화된 질문,/ 한 줄의 문장이 언제쯤 흘러내릴까”라고 끊임없이 되묻고 질문하면서, 신이 접었던 별이었던 종이를 펼쳐 다시 배를 접고 배는 둥둥 떠서 “노아의 방주”보다 오래오래, 신의 눈동자를 향해, 돌진한다 쳐도 항해는 지난하게 이어질 뿐, 인간은 신에게 닿을 수 없다. “정맥같이 흘러가는 슬픔 하나”가 망망대해를 떠간다. 슬픔의 악보를 시인은 그려 넣는다.
5. 에필로그 : 이어가는 노래, 사랑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식을 잃은 사람의 고통이 만약 내 것이라면 나는 그 슬픔을 과연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시, 노래는 결국 애도와 마찬가지로 슬픔을 객관화하는 작업이다. 리비도를 회수하고 회수한 리비도를 재투자하는 일종의 결연하고도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늘 혼자”인 사람의 고통의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다가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 쓰”고 그들을 위해 애도와 위로의 노래를 짓고 불러주는 일이 가능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진은영 시인은 “우리는 별과 죽음을 교환할 것이다”(「방법적 회의」, 『훔쳐가는 노래』)라고 전언한 바 있다. “죽음”과 교환된 “별”들을 떠올리고 바라본다. 노래를 부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립된 슬픔 속에 허우적대는 그 단 “한 사람”에게 가닿길 바라는 “청혼”과도 같은 간절한 노래, 사랑의 시학이 진은영의 이번 시집에는 뜨겁게 오롯하게 담겨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시가 존재한다. 무엇을 노래하든, 시는 결국 사랑의 장르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사랑의 노래. 노래는 언제나 마지막으로 불린다. 사랑이 늘 그렇듯이. 촛불이 다 타기 전에 당신도 당신의 고백을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