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상록수 고 노무현 대통령 상록수 이런 맘이었을 텐데....... 1987년 6ㆍ10 민주화 항쟁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주화시위.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 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1월 14일 -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인 박종철,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 2월 7일 -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 3월 3일 -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및 시위. 4월 2일 -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부모 130여 명,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 요구하며 철야 농성. 4월 13일 - "개헌논의 유보"를 내용으로 하는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4·13 호헌 조치). 4월 14일 -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 4·13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 발표. 4월 24일 - 가칭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발생 5월 18일 -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 은폐되었음이 폭로됨. 이에 군사독재정권인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자주 일어남. 5월 23일 -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및 6월 10일에 규탄대회 갖기로 결정. 5월 26일 - 전두환 대통령,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고 이한기 신임 총리로 교체. 5월 27일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발표. 6월 9일 -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7월 5일 사망 항쟁 기간 6월 10일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 성공회 서울교구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시민들도 택시운전사들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리거나, 여고생들이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서울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 이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6월 26일 -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월 29일 -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8개항의 시국수습 내용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재야 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착수와 양심수 전원석방 및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성명 발표. 항쟁이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수습 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지만,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항쟁의 의의 6월항쟁으로 군사적 독재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 형식적으로는 노태우정권의 연장으로 귀결되 군사주의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 내용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자주,민주,통일이라는 현대사의 좌표가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이제 반미, 자주라는 구호로 대중속에 급속히 파급되고 통일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의 정체가 온전히 드러난 이상 맹목적인 친미나 숭미가 더이상 통하지 않고 통일과 자주의 중요성이 부각된 된 것이다. 6월항쟁으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민중운동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항쟁은 노동자,학생,시민,빈민,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만한 현상이 되었다. <위키백과 출처> 1987. 6. 29 선언 이후에 양희은의 많은 노래들이 해금이 되었다...... 사실 1987. 6 월에는 북소리와 취루탄소리에 우리가 부르던 노래는 묻혀버리기도 했었지만........ 양희은 아침이슬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방랑하는 마음 https://cafe.daum.net/bangrangja22 카페정보 방랑하는 마음 플래티넘 (공개) 카페지기 보리수 회원수 47,301 방문수221 카페앱수233 검색 카페 전체 메뉴 ▲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자 유 게시판 스크랩 1987.6.10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책상 서랍 속의 노래│ 익명 추천 1 조회 78 11.06.10 12:46 댓글 1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출처: 시인의 파라다이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댓글1 추천해요1 스크랩1 댓글 천사가아인악녀 11.06.11 02:30 첫댓글 그때가 그립습니다. 뭉치면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출처: 시인의 파라다이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첫댓글 그때가 그립습니다. 뭉치면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