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났다. 새누리당을 지지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지금 허탈한 마음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권 심판을 바라며 민주통합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다 차려놓은 밥상'을 걷어차 버린 저 어이없는 모습에 허탈할 것이다. 진보의 약진을 바라고 통합진보당을 지지한 사람들도 비록 지금까지 얻은 의석 중에서는 제일 많은 의석이지만 창원과 울산의 패배는 큰 상처로 다가올 것이다.
새로운 진보의 구성을 위해 진보신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한민국 1퍼센트라는 것을 확인하며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새로 출발한 녹색당은 0.5퍼센트였다. 아무리 녹색 이슈가 새로운 주제라고 하더라도 한국에 녹색의 정치를 지지하는 사람이 0.5퍼센트라는 것은 아무래도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선거 이후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홍대의 한 음식점은 총선 다음날 '총선 후유증으로 금일 휴업'이라고 문 앞에 써 붙이고 하루 쉬기까지 했겠는가?
총선 결과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의 영향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평가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거치면서 SNS는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공론장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지 않고 주목받았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젊은 층의 선거 참여였는데 이걸 주도한 것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였기 때문이다. 투표 인증샷 놀이부터 투표 독려 그리고 '투표율 70%가 넘으면 뭘 하겠다'는 유명인들의 '공약'까지 이번 총선에서도 SNS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 결과로 오히려 SNS의 영향력이 이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급부상했다. 결국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아는 사람끼리 노는' 네트워크이지 결코 새로운 영역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는 평가다.
실제로 이번 총선 이후에 내가 아는 한 젊은 친구는 자기의 SNS만 쳐다보면 "녹색당이 집권 여당"이고 "진보신당이 제1야당"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과장된 사례이다. 하지만 SNS에서 정치적 세력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민심'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는 분석은 한국 사회의 네트워킹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짜 정치'라고 일갈하는 책이 나왔다. SNS에 대한 호들갑과 실망에 대해서도 SNS 자체가 가진 한계가 오히려 진정한 '정치'를 방해한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나아가 총선 결과에 실망하는 것 자체가 가짜 정치를 진짜 정치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투여한 탓이라고 말하는 책이 나왔다.
▲ <민주주의에 반하다>(하승우 지음, 낮은산 펴냄). ⓒ낮은산
오랫동안 한국에서 풀뿌리 자치 운동과 생활협동조합 그리고 직접 행동을 연구하고 실천해 온 하승우가 쓴 <민주주의에 반하다>(낮은산 펴냄)가 바로 그것이다. '직접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쓴 이 책의 주장을 따라 이번 총선에 대한 우리들의 '허탈감'과 '분노'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실제 정치에 대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총선을 '통해' 세상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선과 같은 정치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정치란 아주 간단한 것이다. 자기 삶의 문제를 놓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회의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SNS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건 회의가 아니라 품평에 불과하다. 누가 누가 잘했다거나 못했다거나 혹은 이렇다 저렇다고 품평하는 것이지 '회의'를 하는 게 아니다. 품평이 주로 '남'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회의란 '우리'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회의가 사라지고 품평만 남은 곳에서는 아무리 '가카'를 까고 투표를 독려한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니 그 공간에서 가능한 정치란 딱 고만큼만의 정치인 셈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놀란 대목이 바로 이 '회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말보다 실천'이라며 회의하는 것은 '회의주의자'라고 폄하하는 정서가 팽배한 우리 '전통'에서 그는 회의야말로 운동이며 정치이며 지배 계급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힘이라고 일갈한다.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민중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언어로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기를 쓰고 '회의'를 탄압했으며 회의하는 자들은 다 '빨갱이'로 몰아간 것이다.
하승우가 책에서 말하는 회의는 아주 간단하다. 둥글게 모여 앉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마치 회의라는 본능을 타고 난 것처럼" "항상 둥글게 모여앉아 회의"를 한다고 말한다. 그 회의를 통해서 "생각을 나누고 규칙을 짜는 행동"을 하면서 "우리가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보고 강한 힘을 만들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회의를 하는 것 자체, 이것이 정치이고, 이것이 힘을 키우며 우리가 힘이 있음을 확인하는 기쁨의 과정이며, 너와 나를 바꾸는 과정 그 자체이다. 하승우에 따르면 회의는 그 이전부터 "마을 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촌회나 동회, 계 등 여러 공동체 조직에서 회의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는 자신들의 "공동의 삶"이 논의되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서로 격려하는 시공간, 그것이 바로 회의인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것을 남의 경험이 아니라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던 한국의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직접 행동이나 자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서구의 이론을 설명하거나 서구의 '모범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었다면 하승우는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이것을 보여준다.
멀게는 1922년에 있었던 소안도 토지 계쟁 사건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돌려받기 위해 무려 13년간 소송을 벌였다. 그들은 소송 자체도 공동체적으로 했기 때문에 승소하여 땅을 돌려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동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갔다. 어장도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어 공동 어장으로 운영하였다. 공동의 이익을 활용하기 위해 소송에서 이긴 다음에 맨 처음 한 것도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부르던 '소년단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노동과 학문으로 직업을 삼고 정의와 사랑으로 정신을 삼아 같이 먹고 같이 살자 평화 세계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완연하구나.
세상에. "같이 먹고 같이 살자"라는 이 단순하고도 멋진 말이 아이들의 입에서 불렸다니. 이처럼 소안도의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생활을 나누고 공동체를 배우는 공간이었다. 아니, 하승우의 평가를 따르면 "소안도 자체가 하나의 학교로서 함께 배우고, 생활하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기운"을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학교가 그 자체로 또 어떻게 "공동체 같은 학교"였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소안도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한 강습회나 토론회가 끊이지를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운동을 이끌 수"있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는 것 자체, 공부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었고 정치였고 배움이었다.
일제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2003~2004년에 있었던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투쟁이 있다. 정부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72.04퍼센트의 시민이 참여하고 91.83퍼센트가 반대하는 주민 투표를 성사시켰다. 물론 법적인 구속력은 없었지만 주민들의 실제 의사가 확인됨으로써 정부로서는 큰 압력을 받게 된 셈이다.
무엇보다 이 투표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모든 것을 주민들이 준비했다는 것이다. 우편 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원 봉사자들이 2만 가구가 넘는 집들에 일일이 투표 안내문을 전달하고 투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자체 제작하였다. 선거 명부조차 없는 완전한 백지상태에서 진행되었지만 부안의 주민투표는 정부의 선거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엇보다 두드러졌다. 글을 모르거나 시력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찬성과 반대를 색깔로 구분해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정부 없이 정치, 즉 자치를 실현시킨 셈이다. 따라서 하승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나 통치"가 아니라 "정치와 자치"라고 말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 책에서 하승우는 우리가 "좋은 정치"라고 생각하는 몇몇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첫 번째가 이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주권' 개념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놓고 촛불을 들었을 때 우리가 목청 높여 불렀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신성한 주권'말이다. 하승우는 주권이라는 개념만으로는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일은 요원하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권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민중의 것이 될수 없었던 언어"다. 주권이란 결국 국가와 중앙 정치를 중심에 놓은 말이다. 결국 민중은 "주권을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권을 배워야하는 존재" 즉 "훈육과 훈련"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주권 개념은 인민 주권이라는 그 약속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민중이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따라야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주권 개념에 대립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 "존엄"이다. 그는 "정치의 가치는 존엄"이라고 말한다. 주권은 집단으로 실현될 뿐 개인의 존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주권의 가장 큰 약점은 누가 민중인지를 정할 권리가 민중에게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법에 의해 국민이 주권자라고 선포하지만 누가 국민일 수 있고 누가 국민일 수 없는지를 정하는 것은 국민 자신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민중일 수 있는지를 결정할 잣대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권력은 끊임없이 누군가는 민중, 혹은 시민이 될 수 없다면서 그들을 시민/민중의 영역에서 추방하고 배제한다.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가 작동하는 영역은 "적과 우리 편"이 아니라 "포함과 배제"인 셈이다. 근대 국민 국가의 탄생 과정은 누가 국민인지를 정하는 과정이었고 개인의 권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주권의 근거지였던 공동체도 파괴했다는 것이 하승우의 평가이다. 그 결과 "인민 주권이란 국가의 권리"가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참여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참여는 좋은 말이지만 "누구만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사실 참여란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 그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마치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여성과 노예, 어린이를 배제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 참여민주주의는 중산층이나 활동가들의 것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참여"를 "구경"하는 관람객이 되었다.
실제로 이번 총선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민주통합당에 법조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다음 권력에서 중요한 것은 검찰을 필두로 한 사법 권력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근본적 한계인 전문가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전문가주의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 정치의 주체와 대상이 전도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즉,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어야하는 상황 말이다.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법과 정치의 언어"를 먼저 배워야한다. 여기에서부터 맨 먼저 "민중"들은 정치로부터 나가떨어지게 된다.
이 책의 내용과는 벗어나지만 사실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 운동이 빠진 가장 큰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변호사들이 인권 운동이나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법적 소송을 중심으로 운동이 진행되면 운동의 당사자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소송이란 철저하게 법의 언어로 진행되는데 그 언어는 일반 민중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문법과 어휘를 가지고 있다. 소송의 당사자들이 이야기를 하면 법조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과거에 목격했다.
"아, 그 이야기는 되었고, 이것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당사자의 어떤 경험이나 기억은 법의 언어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당사자가 법의 언어에 맞춰서 말을 해야 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은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에 당사자들이 마침내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솔직히 소송에 이기고 싶다. 그래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이 일을 왜 물고 늘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내 존엄이 짓밟혔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분하고 자존심 상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경청이다. 변호사나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역할이자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들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최초로 "공적으로 경청"하는 역할이다. 그의 말을 공적으로 들어줌으로써 그의 공민권, 혹은 시민됨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전문가들은 일종의 무당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 전문가들은 그들의 역할이 "문제의 해결"이지 공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그의 자존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여 역시 마찬가지다. 참여하는/할 수 있는 자들은 법과 정치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배제된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감동적인 일 중의 하나는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이 청소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진보신당 대표 홍세화가 말한 것처럼 "배제된 서사"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였다.
자크 랑시에르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듯이 "몫 없는 자들이 몫을 요구하는 것으로서의 정치" 말이다. 참여 민주주의에는 이런 정치가 들어설 여지는 지극히 협소하다. 그래서 하승우는 이런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앙 집권적인 권력 구조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안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직접 행동, 그리고 불복종 운동이다.
자. 결론을 말해보자.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다시 둥글게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둥글게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경험은 공유되고 지혜로 변모한다. 앞선 이야기에 나의 경험이 이야기로 보태지면서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승되어 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정치하는 힘이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 자, 품평을 그만두고 '둥그런' 회의를 조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