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봉개동 1290-1번지 및 208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교육기관·경찰주둔지 터
봉개동에 있었던 동보서숙(東普書塾)은 1934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에는 마을 유지들이 학교를 건립하기로 하여 동리 주민(5000여원)과 오사카에 살고 있는 동포(교실건축비 전부)로부터 의연금을 모으고 1,500평 정도 넓은 부지에 기공하였다. 1935년 5월 1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동보의숙(東普義塾)이라고 소개되었는데 이 학교를 다닌 주민들은 개설 당시에는 동보서당이라 불렀고, 1939년 5월에는 동보서숙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高漢球씨 증언)
이 기사에는 ‘2,3년 내에 제2보교의 출현을 기대중’이라 했는데 이는 제주북교 외에는 제주시내에 보통학교라 이름 붙은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동보서숙이 공립학교로 전환될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뜻으로 판단된다. 인근 마을에는 이와 같은 학교(개량서당)가 없었기 때문에 회천, 용강, 월평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다녔다. 개설 당시에는 4년제였으므로 여기를 마치면 화북공립국민학교 5학년으로 진학하였다.
북쪽 길의 약간 서쪽에 치우쳐 〈봉개공립국민학교〉간판(광복 이후)이 달린 정문이 있었으며, 남동쪽에는 교실, 남서쪽에는 사무실(교무실)이 있었고, 서쪽 끝에는 향사가 있었으며, 가운데서부터 현재의 봉개마트를 포함하는 북쪽까지는 운동장이었고 운동장 동・서쪽에 각각 목제 축구골대가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북서쪽에는 하인으로 불리던 김〇〇씨의 집이 있었다.(동보서숙 학생이었던 1936년생 高漢球씨 증언 2020-03-14)
서숙의 장은 숙장이라고 불렀는데 초대 숙장 김대흥(金大興) 선생을 시작으로, 2대 숙장 고도호(高道浩), 3대 숙장 양동규(梁東圭), 4대 숙장 김학진(金學鎭), 5대 숙장 변석찬(邊碩燦), 6대 숙장 김형진(金亨鎭) 선생까지 여러 숙장님들을 모시고 봉개동은 물론 인근 마을 청소년들의 교육장으로 한문 서당을 실시하여 왔는데, 일제강점기 일제의 압력으로 한문서당이 폐지되고 일본어(日本語) 학교가 설립되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말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학교가 펴낸 우리 마을 이야기. 2014년)
향회가 초빙한 숙장 김응배 선생이 1945년 9월부터는 교장으로 1946년 2월까지 근무하였으며, 1946년 5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삼양교 교장인 한응섭 선생이 교장을 겸임하였다.(高漢球씨 증언) 봉개초등학교 홈페이지에는 1945년 9월 9일에 개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동보서숙이 봉개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48년 5,6월 경 1개월 정도 철도경찰 100여명이 이곳에 주둔하였다. 주둔 경찰은 걸핏하면 청년들을 잡아다 혹독하게 고문했고 일부는 제주농업학교 수용소로 이송하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 마을에서는 닭이나 개를 총으로 쏘아 잡아먹는가 하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을 요구했다. 심지어는 젊은 여자를 욕보이기 일쑤였다. 마을 젊은이들이 점차 피하게 되면서 청년들은 마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제주4・3유적Ⅰ)
1948년 10월 1일 4・3의 와중에서 교실이 전소되었고, 이어서 10월 15일 폐교와 함께 삼양교로 편입되었다. 1949년 3월 1일 본교로 복교하였고, 1950년 4월 10일 현부지(10,230m²)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봉개초등학교 홈페이지)
《작성 2020-03-14, 보완 202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