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인화의 새로운 지평, 간(簡)·정(情)·일(逸)의 미학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남지 손우영 작가는 현대 서화계의 거장 소연 김영자 선생의 의발을 이어받아 문인화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 30여 년간 문인화 외길을 걸어온 그가 선보이는 현대적 문인화의 바탕에는 기존 작품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세 가지 미학적 정수가 자리 잡고 있다. 형(形)과 의(意)를 절제하여 붓길을 여백으로 승화시키는 ‘간(簡)’, 작가의 사유와 지향을 정감 있게 투영하여 독창성을 이루는 ‘정(情)’, 그리고 주객합일의 경지에서 사물을 고차원적 형상으로 일궈내는 ‘일(逸)’의 미학이 바로 그것이다.
1. 간(簡)의 미학
과거 문인화에서 ‘간(簡)’의 풍격은 송·원 시대에 이르러 완벽한 기틀을 마련했다. 간결하고 순수한 수묵만으로 단숨에 그어 내린 붓질은 감상자에게 번개 같은 운필의 속도감을 전한다. 불과 두세 번의 획으로 물상을 서사했음에도 감상자는 그 여운을 깊게 체화하게 되며, 남송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이르러 이러한 ‘간’의 절정을 마주하게 된다.
남지 작가의 묵란(墨蘭)은 이처럼 간결함이 지닌 미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거침없는 몇 가닥의 획으로 난의 기품을 형상화한 뒤, 화면의 대다수를 여백으로 남겨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최소한의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비록 필치가 수밀(秀密)하거나 정교하지 않을지라도, '뜻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는(意足)' 경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묵직한 진실성은 오히려 절제된 필선 사이에서 선명해지며, 여백이 품은 광활한 기운은 화폭을 넘어 강렬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2. 정(情)의 미학
‘정(情)’이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자 사물과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다. 예술 표현에서 정감(情感)은 작가의 사상과 의지를 투영하여 작품에 독창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핵심 요체다.
문학과 달리, 문인화와 서예는 오직 점과 획이라는 '형질(形質)'만으로 작가의 성정(性情)을 대변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청나라 서예가 포세신(包世臣)이 ≪예주쌍집(藝舟雙楫)≫에서 "성정이 형질에 도달하고, 형질은 성정에 근본한다"라고 전했듯, 형질과 성정의 긴밀한 교감이 문인화의 오묘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일 속에서 현대 문인화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선명한 답을 제시한 이는 많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 남지 작가가 화두로 던진 ‘상정(尙情)’은 현대 문인화의 새로운 이정표라 할 만하다. 개성과 주체성이 존중받는 이 시대에 문인화의 미래 역시 백화제방(百花齊放)처럼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공존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지 작가의 <매화 연작>과 빗줄기를 머금은 대나무를 그린 <우죽(雨竹)>은 현대적 감각에 부합하면서도 관객의 정감을 깊이 자극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상정’의 화풍은 과거 전통의 기준이었던 ‘상의(尙意)’를 넘어 작가의 주체 정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3. 일(逸)의 미학
그림을 품평하는 네 가지 기준인 능(能)·묘(妙)·신(神)·일(逸) 가운데 ‘일’은 단연 으뜸이다. 예부터 일품(逸品)은 자연스러움을 최고 가치로 여겼다. 세속의 상법(常法)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며, 인위적인 법도를 벗어나 화려한 채색보다는 수묵과 담채의 초탈한 미감을 자연스럽게 얻어내는 경지다.
형상과 기교의 정교함을 뜻하는 ‘능품(能品)’에서 한 단계 나아가 기교를 잊기 시작하는 ‘묘품(妙品)’에 이르고, 사물의 정신을 완벽히 전하는 ‘신품(神品)’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최고봉이 바로 ‘일품(逸品)’이다. 기교에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은 자유로워지고, 작가의 정신과 사물의 본질이 하나로 어우러져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객합일(主客合一)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손과 마음이 비로소 유기적으로 응답하며, 조물주가 창조한 듯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모방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형태, 즉 ‘신(神)’의 형상이 태어난다.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완전하게 승화하여 얻어지는 이 최고의 형상이 바로 ‘일(逸)’의 미학이다. 엄밀히 말해 ‘일’은 ‘신’의 가장 완숙한 표현이며, ‘신’은 ‘일’에 다다르기 위한 요체인 셈이다.
이러한 ‘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남지 작가의 최근작 <길을 묻다>, <침묵> 등의 화폭에서는 형상의 세밀한 묘사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일격(逸格)이 주는 깊은 묘미가 뿜어져 나온다. 형사와 기교를 내려놓은 담백한 화면은 형상 그 너머에 있는 아련하고 깊은 메시지를 조용히 건넨다.
남지 손우영 작가의 문인화는 여전히 끊임없이 요동치며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세밀하고 정교한 형상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화면 위에 펼쳐내는 간(簡)·정(情)·일(逸)의 미학은 갈증 난 시대의 예술계에 시원한 가뭄 끝 단비 같은 청량감을 선사한다. 그가 걸어갈 앞길에 더 큰 예술적 무궁함이 함께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서예세상( 서예세상 | - Daum 카페 작가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