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1)
요 13:31-38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 13:31-38 / [새 계명] 유다가 방을 나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때가 왔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를 둘러쌀 것이다.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32) 자신의 영광을 내게 주실 것이다. 이 일은 머지 않아 곧 이루어진다. 33)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떠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떠나가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말하였던 것과 같이 너희가 나를 찾더라도 찾지 못할 것이다. 34)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으로 너희가 네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6) [베드로의 장담;마26:31-35,막14:27-31,눅22:31-34] 시몬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네가 나와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네가 나를 따라올 것이다.' 37) `왜 지금은 제가 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고 베드로가 말하자 3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죽겠다고 했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내일 아침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유다가 예수를 팔러 나갔습니다. 그가 없는 만찬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상대로 고별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온전한 순종인 십자가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있게 될 영광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영광을 받으셨도다(31-33)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를 하나님은 높이셨습니다. 예수의 순종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 모두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 영광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이어지는 사건인 부활과 승천으로 온전히 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35) 발을 씻김으로 상징된 십자가의 대속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사건인 동시에 공동체에도 적용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효력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미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이면서 공동체적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구원의 길이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서로 사랑이라는 새 계명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한 새 계명인 서로 사랑은 본문 이후에 계속 나오면서 강조됩니다(14:15, 21; 15:10, 12). 새 계명은 도덕적 지침이 아닙니다. 새 계명이 지시하는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랑입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이 사랑은 그들을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 곧 예수의 제자들로 그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6-38) 예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예언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두 사람의 실패가 나옵니다. 이 시점까지 예수의 죽으심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다와 베드로는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의 ‘끝까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의 실패는 어둠 속에서 파멸로 끝났습니다. 반면 예수의 ‘끝까지 사랑’을 받아들인 베드로의 실패는 요한복음 마지막 장 디베랴 바닷가에서 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예수께서 하신 약속의 길로 내달렸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실패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끝까지 사랑을 기억하며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새 계명을 주신다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로 이루어지는 새 이스라엘이라는 새 공동체는 기존의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 본을 보이신 대로 주종의 관계가 뒤집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 행동을 통해 모범을 보이시며 새로 도입하신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설 교 >
사랑의 기준
김상복 목사
지난 주간에 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이사회와 제3차 로잔세계대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로잔대회에는 2백 개 국가에서 4500명이 참석했습니다. 초청받은 국가 중에서 불행하게도 한 나라만 참석을 못했는데, 중국입니다. 초청받은 중국기독교 지도자 2백여 명이 이미 등록을 하고 비자, 항공권 등 모든 수속을 마쳤지만 공항에서 중국정부의 저지를 받고 여권을 회수당했다고 합니다. 대회 참석자들은 행사 기간 중 하루저녁 중국과 전 세계의 핍박받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멸시를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폭행과 죽임을 당하고 집과 교회가 불에 타는 일들도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의 많은 형제들이 어디선가 숨을 죽이고 몰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신앙의 자유를 주심을 감사하십시다.
지난 50년 동안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교회성장, 민주화, 경제부흥. 신앙의 자유를 통해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동시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나라도 한국뿐입니다. 처참한 가난에서 일어나 경제가 부흥하여 10위권에 들어간 나라도 한국뿐입니다. 교회성장, 민주화, 경제성장, 이 세 가지가 지난 50년 사이에 한국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총 주심을 여러분이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럽 각국은 지금 여러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1백만 명이 거리에 나와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은퇴자들을 먹여 살릴 길이 없어서 정년을 2년 늘렸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극단적인 정책을 사용하지 않으면 나라가 파산 당한다는 의견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논쟁이 심했는데 결국은 국회에서 정부안을 통과를 시켰습니다.
영국은 앞으로 4년에 걸쳐 공공기관 직원 50만 명을 해직시킨다고 합니다. 특히 군예산의 8%를 단계적으로 삭감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지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야단법석입니다. 독일, 스페인, 그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산다고 하는 유럽 국가들이 지금 이렇게 어렵습니다. 이란 대통령은 그런 유럽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서구 문명은 망했다. 희망이 없다. 앞으로는 모슬렘 문화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여러분도 이란 대통령이 유엔에서 이렇게 연설하는 것을 들으셨지요?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 G20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우리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38선 북쪽에 살지 않음을 감사하십시다. 38선이라는 경계선 양쪽으로 나뉜 남과 북은 그 차이가 수십 배입니다. 정치제도 하나를 잘못 선택해서 북한은 전 세계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쪽도 과거에는 도움을 받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도우면서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또 감사할 일들이 많습니다. 금년은 풍년입니다. 북한은 먹을 것이 없는데 우리는 쌀을 쌓아 둘 창고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창고 비용이 더 든다고 하니까 "이미 쌓아 둔 쌀을 북한에 보내자, 북한 정부를 생각하면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지만 국민을 생각해서 주고 우리의 창고에는 새 쌀을 쌓아 놓자"고도 합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어쩌면 이렇게 차이가 납니까? 우리가 오늘 북한에 살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고 오늘 감사 주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아직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일할 수 있는 직장과 능력이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이미 은퇴하신 분들도 감사하십시다. “내가 할 일을 다 마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젊어서는 시키는 일을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은퇴 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제게도 이제 그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인생을 살 수 있는 것,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우리에게 가족이 있음을 또한 감사하십시다. 여러분에게 가장 편한 곳이 어디입니까? 집입니다. 이번에 제가 열흘 동안 해외에 나가 있으면서 4개의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요! 제일 좋아요. 가족이 함께 하는 가정이 있고 거처할 집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어떤 호텔도 가정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감사할 것은 나를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대상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원히,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내가 부족하고 잘못도 있고 실수를 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향한 희망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너를 다시 세워주겠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다시 설 때까지 기다리고 참고 돌아오는 나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 심지어 창녀까지 사랑하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야! 새롭게 사는 길이 있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사람들을 너를 정죄해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예화 가운데 집을 나간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집 나가서 망나니짓 하고 재산을 탕진해도 아버지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늘 밖을 쳐다보며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탕자를 보고 달려 나갔습니다. 아들이 뛴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뛰어 나가 아들을 안고 받아주고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것, 그것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할 때도 있습니다. 엊그제 두바이에서 26살 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아버지 방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일도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흔들리지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심지어 부모가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임을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 있습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마저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고 여러분이 사랑할 대상이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인생은 살만 합니다. 왜 그런가?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성경에 나타난 사랑에 대해서 구석구석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하고 가르치긴 했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통해 사랑에 대해 공부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잘못된 사랑인가, 참된 사랑인가, 정의를 사랑하는가, 불의를 사랑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인간을 제대로 사랑하든가 잘못 사랑하든가의 차이 뿐이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엉뚱한 대체물을 사랑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피조물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은 천체나 금은목석으로 만든 가짜 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악을 사랑한다”, “거짓을 사랑한다”, “거짓 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의 대상을 알고 진심으로 참된 사랑을 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참된 사랑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짜를 사랑하거나 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인간은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저절로 안 되는가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을 혼자 두고 “네가 알아서 해!” 하면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두 가지가 성경 전체의 요약이니라.” 즉 하나님 사랑, 인간 사랑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아직 성경을 잘 몰랐을 때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혼란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얼마나 복잡하고 신경이 쓰이는지요. 목사님들이 오셔서 설교를 하셔도 같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 목사님은 이렇게, 저 목사님은 저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혼란스럽고 신앙생활이 어려웠습니다. 물론 제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요. 후에 신학공부를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신앙생활이 복잡한 것이 아니구나!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전부다. 그래서 사랑, 이것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 사랑을 계발하고 사랑의 샘을 만들어서 늘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솟아오르게 하라.’ 복잡한 것 없습니다.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나? 인간도 스스로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스러워서 사랑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자를 보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그 여자의 몸에서 사랑스러움이 철철 넘쳐요. 그래서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둘째는 아름다워서 사랑합니다. 왕이 에스더를 사랑합니다. 왜 사랑하는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름답지 않은 사람,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사랑스러웠는데 10년이 지나니까 이젠….” “20대에는 아름다웠는데 50이 되니까 그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사랑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 “너희들이 알아서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만 사랑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이 제대로 될까요?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사랑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는 제대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하고 모두가 사랑을 받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의 정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오~래 오~래 고통스럽게 참고…”(love suffers long). 이것이 사랑입니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오래 참아주는 것이 사랑의 1번입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love bears all things)라고 합니다. 참을만한 것을 참아야지 어떻게 모든 것을 참습니까?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끝까지 견디느니라”(loves endures all things). 오래 오래 고통하면서도 참고, 모든 것을 다 참고, 끝까지, 끝까지 참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인데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그냥 맡기면 너무 힘들어서 못합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야만 사랑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온 세계가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모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돈, 집보다 사랑이 모자랍니다. 인간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만 찾아서 사랑하려고 하니까 사랑이 없다, 사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놓지 않으시고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목숨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느냐? 오늘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베드로가 얼마나 실망했겠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목숨을 내놓고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지만 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어. 오히려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지.” 베드로는 정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늘 사랑이 모자라서 몸부림 치고, 혹시 어디 사랑이 없는가? 아름다운 것이 없는가? 사랑할 만한 것이 없는가? 두리번거리면서 잘못된 사랑을 추구하고 따라다니다가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 놓고 끝냅니다. 인간의 사랑은, 마치 아버지의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하다가 배가 고파서 마지막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워 보려고 한 탕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이 그 사랑의 본을 보이셨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가슴에 역사하셔서 사랑의 샘을 트여 주실 때만 거기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면 성령께서 삶속에, 가슴속에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 형제, 이웃을 사랑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원치 않아서가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싶어도 바로 그날 밤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인간이 스스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모든 가치 중에 최고의 가치인 사랑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가슴에서 날마다 솟아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은혜 베푸셔서 제 사랑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가족을, 성도들을, 이웃과 가문을, 이 민족과 세계를 사랑하도록, 저에게 사랑을 채워주옵소서. 저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 발전시켜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여러분 가슴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간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식을 것이고 모자랄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사랑의 결핍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엉뚱하고 잘못된 사랑의 대상을 찾아 사랑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사랑할 대상인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 성령을 주셔서 내가 사랑의 도움을 청할 때마다 성령께서 사랑의 능력을 주십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이는 인간처럼 살 수가 없습니다. 집은 오래 되고 무너지면 처참하지만, 무너진 인간은 무너진 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가슴속의 사랑과,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로 남은 평생에 풍성한 사랑의 축복을 꼭 체험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요 13:31-35 / 김흥규 목사
<배신과 부인 가운데 얻게 될 영광>
오늘은 부활절 후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요 13: 31-35절은 부활절이 끝난 다음에 읽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셨던 일을 다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차라리 부활절 이후보다는 사순절에 다루어야 옳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고별 대화’(farewell conversation) 중에 한 부분인데,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 ‘떠나가심’(departure)을 소개하고 있기에 특히 부활절과 오순절 성령강림절 사이에 읽기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할 것을 예고하신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예수님의 예고의 말씀을 듣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 13: 31절 바로 전에 있는 30절은 때는 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배신할 것을 예언하신 바로 그 날 밤에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본문 말씀 바로 뒤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예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이야말로 가장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신 말씀 사이에 끼어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쓸쓸하고 외로운 밤, 가장 믿었던 제자들이 차례로 배신할 것을 예언하신 그 괴로운 날 밤에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31-32절을 보면 이 쓸쓸하고 외로운 밤, 예수님은 무려 네 번씩이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었던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을 예언하시는 그 중간에, 가장 쓸쓸하고도 외로운 밤에 영광을 받으신다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말씀이지요.
이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또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꾸로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수님께도 영광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호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영광을 받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하필이면 왜 이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밤, 가장 믿었던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는 이 괴로운 밤에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시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해야지만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는 밤은 배신과 부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치의 밤이 아니라 영광의 밤입니다!
<새집과 장미가시>
오늘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배신과 부인으로 얼룩져 있는 쓸쓸한 밤입니까? 하지만 바로 그 때가 영광을 받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남들이 우러러 볼 때가 아니라 외면하고 손가락질 할 그 때가 실상은 영광의 밤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나무 위에 집을 짓는데 좀처럼 부서지지 않는 집을 짓습니다. 심지어 태풍이 불어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집은 여간해서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새들은 일부러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미의 향기는 꽃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서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1온스의 장미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장미향수는 수없이 가시에 찔리는 고통 끝에 얻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장미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칸산맥에서 장미를 채취하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새벽 2시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 2시 한밤중에 장미는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지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한밤중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이 가장 강한 바람이 불 때 가장 견고한 새집을 지을 수 있고, 가장 깊고 외로운 밤에 장미가시에서 가장 진한 향기가 나듯이 예수님 역시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는 그 외로운 밤에 당신과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것도 함께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향기도 가장 큰 시련 한 가운데에서 뿜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척추 장애로 신장이 134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김해영 씨가 쓴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아버지가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땅바닥에 내던져서 척추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키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초등학교를 끝으로 학교공부를 중단했습니다.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는 고달픈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고, 어머니는 정신병자가 되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김해영 씨는 네 살 때부터 정신 이상자가 된 어머니 대신 식모살이를 하면서 동생 넷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에 금메달을 땄고 세계적인 편물기술자가 됐습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인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지금은 아프리카에 직업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김해영 씨야말로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밤을 영광의 한낮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배신당하고 부인당할 것을 예언하시는 밤에 영광 받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을까?” 이렇게 푸념하시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이토록 가시가 많은 나무에 어떻게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을까?” 생각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장미꽃에 왜 가시가 있을까를 보지 마시고, 어떻게 가시나무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꽃이 필 수 있을까를 보시기 바랍니다! 배신과 부인의 슬픈 밤 한가운데에서 밝아오는 내일 아침 얻게 될 영광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새 계명인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34-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얼마 있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하나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로운 계명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어온 말입니다. 결코 새로운 계명이 아님에도 예수님은 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먼저 이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전혀 새로운 사랑입니다. 요 13: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죽기까지 희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성 어거스틴의 해석을 빌릴 경우 두 가지의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의 전부요 하나밖에 없는 양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 바쁜 와중에 수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계셨지만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특수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결코 도매금으로 넘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사람의 특별한 상황을 헤아려 세심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숲만 보는 사랑이 아니라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나 풀 한 포기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어거스틴에 따르면 예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피부색이나 민족, 국가, 종교, 지위나 신분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 취미가 같고 같은 고향 사람만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의 화신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제 새로운 사랑의 정의(definition)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요?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든지 당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계명이기 때문에 새 계명일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할 때 전혀 새로운 시대와 공동체를 열 수 있기 때문에도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랑을 합니다. 물물교환, Give & Take, 주거니 받거니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는 이와 같이 편협한 사랑을 뛰어넘어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무제약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부터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수님은 멀리 가서 이방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가까운 사람들끼리, 형제자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必要愛와 膳物愛>
C. S. 루이스는 두 종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필요애’(need love)와 ‘선물애’(gift love)입니다. 필요애는 말 그대로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소유욕 때문에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필요애는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다시 말해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선물애, 즉 선물을 남에게 안겨주듯이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선물로써의 사랑은 결핍되고 부족하기 때문에 마구 채우려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 넘쳐나는 것을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주기 위해 베푸는 사랑입니다.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욕심 사납게 빼앗아 오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메워주고 보충해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항상 남에게 선물로 베풀고 나누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필요애가 아니라 선물애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 차고도 넘치는 생명을 값없이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베푸는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필요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욕심 사납게 빼앗아오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저 남에게 나누어줘 차고도 넘치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내게 가장 중요한 선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듯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내리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임덕순 목사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을 때 앞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데 꼭 예수님 같았습니다. 가까이 보니 예수님이셨습니다. 깜짝 놀라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틴 말로 ‘쿠오바디스 도미네’ 라고 묻자,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는 로마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고 대답하시더랍니다. 크게 깨달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폴란드의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장편소설 ‘쿠오바디스’의 줄거리입니다. 그 ‘쿠오바디스 도미네’가 36절에서 나온 말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보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 하셨는지와, 지금 열정에 차 있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어떻게 보셨는지도 보여줍니다. 만약 이 본문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교회의 참된 의미도 잘 모를 것이며, 자신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어떻게 보셨는가 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십자가처럼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결코 비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도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
‘그가 나간 후에’ 란,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 후를 말합니다. 이제는 진짜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지실 십자가는 비참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본문에 영광이라는 말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라는 말씀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받았고’라고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시는데, 아직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결심을 굳히셨고, 가룟 유다도 그 일을 하려고 밖으로 나갔으므로 이제 십자가는 돌이킬 수 없는데, 그것을 두고 이미 영광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동안은, 인간이 너무나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할 길이 없어서,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자비와 사랑은 가리어지고 공의만 행하셔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 앞으로 사람들이 그 예수의 공로를 믿어 죄를 용서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하게 되어 천군천사와 만민의 찬양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내게 되었으니 그게 아들에게도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2)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당신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죽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 비참한 상태에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에서 가지셨던 영광을 회복시키시고, 교회의 머리요 세상의 심판주로 높여주실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절망이나 비극이나 모욕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당신의 면류관과 영광으로 보셨고, 그 십자가 때문에 이루어질 놀라운 결과를 확신가운데 소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가룟 유다가 나간 직후에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보기에 십자가는 정말로 미친 짓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합니까?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또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한명만 죽인답니까? 그의 추종자들까지 모두 죽일 것이 뻔한데, 왜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서도 제자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것입니까? 유다에게는 십자가란 가장 비참한 것이요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예수를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야만 제자들을 잡아갈 때, 자기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변명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사랑하셨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으며,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위대한 결과들을 내다보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자비가 실현되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순종한 아들도 영광스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주가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도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결과들을 아시는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주저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귀한 십자가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죽음이고, 그 죽음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내다보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십자가 뒤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겪은 것도 있고, 실패한 경험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을 것이며, 오늘 겪고 있는 너무나도 힘든 환경이 주는 아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만일 진정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반드시 나를 유익하게 할 것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성경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나의 고난은 결코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으로 끝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형편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고난에 대하여 분노하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바울 사도가 ‘자기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해질 때’라면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 것처럼, 자신의 고통과 약점을 도리어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두고 봐라,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영광을 드러낼 것이고, 나도 곧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강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제자들에게 하나의 계명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4-3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서 그들을 떠나시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앞으로 교회를 이룰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당회를 어떻게 구성하라든지, 재정은 어떻게 운영하라는 등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교회에 주신 새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주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정도는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생님이시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것저것 요구 하실 수 있는 권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들을 다 포기하고 도리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주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다 찾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서울역 지게꾼에게도 자릿세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은 쥐꼬리 만 한 권리만 있어도 자신의 권리를 다 챙깁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의 모든 권리와 야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권리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낮은 데 앉아서 발을 씻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완전히 무장해제를 한 상태로 삽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진지합니다.
여러 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는 같은 자식이라도 다른 방법으로 대합니다. 자식들의 기질을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질이 다릅니다. 사람은 열 명이 모이면 열 명이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기질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상대의 약한 부분까지 알았다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약점을 용납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렇게 하려고 결심했는데, 실제 상황에 부딪치면 약이 오르고 미워하는 감정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결심과 미워하고 싸우는 행동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 자존심이 살아있고, 내 주장이 살아있고, 내 체면이 살아 있으면, 주님이 요구하신대로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싫어하고 미워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까?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돕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도우려는 계획을 세워보았습니까? /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내 기분에 따라서만 계속 살 것입니까? 상대가 내 마음에 맞게 행동하면 잘해주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워하며 계속 싸워갈 것입니까?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고, 그것은 주님의 제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35)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한 교회의 표지가 이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교회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냐 아니냐는, 조직이나 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단지 서로 사랑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무리라면 분명 예수님의 제자이고, 세상 사람들도 알아본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와 너무나 맞지 않아서 그 사람을 상대하려면 비위가 상하고 화까지 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피하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들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찾아와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더럽고 역겹고 못된 짓만 해서 하나님의 원수였는데도,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대신에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이웃이 나와 다르다고 미워하면서, 주님께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너무나 나와 다르고 역겨울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하고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누가 보더라도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따지려고 하면 따질 것이 너무 많습니다. 책잡고자 하면 책잡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알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상대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진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는 ‘교회를 욕하던 입을 닫고’ 내가 오늘 예수님의 제자를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한가람 성도들은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베드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
너희가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신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 혼자만 감당해야 하는 죽음이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베드로도 이런 죽음으로 순교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다 아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지금은 왜 못 따라갑니까? 지금 당장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따집니다. 그때 베드로는 정말로 주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대답해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
주님은 지금 베드로가 품고 있는 열정도 아시지만, 그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가도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은 의욕이 대단하지만 잠시 후에 위험이 다가오면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에 대해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주님은 사단이 날뛰고 있다는 사실과, 베드로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질 것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쳐오는 시험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베드로의 힘으로는 감당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당신이 가시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때는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에게는 의욕도 있고 계획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열등감을 치료해주시고,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주실 때에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욕은 세상에서는 통합니다. 세상에서는 의욕이 있고 열정적인 사람은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중요하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사람을 다루는데 있어서 천재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고, 누구를 치면 전체의 조직이 와해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게 사단입니다.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순진한 사람의 의욕이라는 것은 사단에게는 신나는 장난감입니다. 의욕이 너무 앞서는 사람은 사탄의 공격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욕이 많은 사람은 교만도 많습니다. 자기 의욕대로 안 따라준다고 원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봉사를 무시하는 교만이고, 사단은 이런 의욕이 넘치는 사람을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격하는 주요 공격루트로 이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날 밤, 주를 위해서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장담하며 의욕을 보이던 베드로가 가장 먼저 쓰러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지혜나 계획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과만 동행하십니다. 혈기나 술수에는 그토록 능한 마귀도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마귀가 항상 패배하는 방법입니다. 의욕이 넘치는 사람은 사단이 교만을 넣어 교회를 붕괴시키는 지렛대로 사용하지만, 선배들의 헌신을 감사히 여기며 형제의 발을 씻기는 겸손한 사람은 사단이 두손들고 떠나고 성령이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보기에도 역겨운 사람을 피해서, 나를 알아주는 곳, 내가 빛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앞에서 주님이 어디론가 가고 계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보기도 싫은 사람들, 네가 피한 그들을 위하여 네가 포기한 십자가를 또 지러 간다고 하실 것입니다. 나 혼자 내 마음대로 살고, 내 의욕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아서 가려고 내가 포기한 그 십자가를 주님이 다시 지려고 우리 앞에서 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두 질문을 평생동안 하면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요 13:31-35 / 김영규 목사
영광을 얻었고(31-32)
가룟 유다가 예수님 곁을 떠나자마자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지금 영광을 받았고...받으셨도다.”(31) 영광이란 말은 어떤 일이 완성된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일이 진행 중인데 영광이란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이겨야 영광입니다. 사업은 성공해야 영광입니다. 시험은 합격해야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선언하신 것은 어떤 완성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가 떠난 시점에 주님은 어떤 완성을 내다보셨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의 제거입니다. 12제자 중에 섞여 있던 가라지가 뽑혀버렸습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면 순도는 높아집니다. 유다가 떠남으로써 12 제자라는 작은 집단이 깨끗해졌습니다. 나아가서 유다가 떠남으로 더 큰 인류의 죄악이 제거되었습니다.(히9:26, 요일3:5)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예수님은 그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탄은 멸망당하고, 인류를 더럽힌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의 배반은 악이 제거되는 영광입니다.
둘째로, 사탄의 제압과 인류 구원의 완성입니다. 인류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쫓겨났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의 심판을 받았고, 죄 때문에 두려움과 허무와 공포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관찰했던 로마의 백부장은 그 죽음을 보면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주님의 십자가는 위대합니다. 그 십자가로 가는 길이 바로 유다의 배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떠나간 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순간이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영광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시간 세계에서 잠깐의 고난보다 영원한 승리가 영광입니다. 배반당하고 죽는 것도 영광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자신이 배반당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장은 고통이나 영원히 평안한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가난해도 영원히 부요한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박해를 당해도 영원히 권세를 누리는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것이 영광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광을 볼 줄 아는 신령한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이어서, 주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먼 타국에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7:33-34)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결하려는 줄로 알았습니다. (8:21-23) 제자들 역시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를 의미할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죽으실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떠나신다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리겠습니다.”(36-37) 하면서 장담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니까, 뭔지도 모르고 마시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에 이르기는커녕 하루도 못 되어 예수를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요한 역시 잔을 마시기는커녕 멀찍이서 십자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고독한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승천입니다.(14:2, 3:5, 7:33-34, 8:21-23)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4:2) 그러므로 주께서 처소를 예비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주님이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영계와 물질계를 오가시고, 내세와 현세를 오가시며, 사망과 생명 사이를 왕래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따를 수 없는 세계입니다.
아무튼, 주께서 떠나겠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근심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특히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유언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34절에 나오는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제자들에게 당부한 새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자체는 새 계명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에게 명하셨던 옛 계명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 ‘사랑’이라는 단어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며, 항상 쓰이는 말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랑’은 누구나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말과, 주님이 명하신 사랑은 내용이 다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 바로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죄인들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건 우애, 부모 사랑, 자녀 사랑의 얘기는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합한다 해도 주님의 죽음과 견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발적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제물이 되기 위해서! 무슨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는 죄인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저는 처음 예수 믿고 얼마쯤 교회 생활을 하다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이 신앙을 계속 지켜야 될 까닭이 무언가? 꼭 기독교에만 빠져야 되는가?” 그러다가 저는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을까? 나를 끔찍이 아끼시는 어머니도 나대신 죽지 못합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아들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을 가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성인군자가 이 못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단 말인가! 예수님 밖에 없다. 그래 예수님만 믿자! 주여, 나는 죽을 때까지 주님만 굳게 믿겠습니다.” 주께서 만난 사람들을 보세요. 살인강도 바라바, 탐관오리 삭개오, 마태, 남성 편력에 빠진 수가성 여인,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여자, 나병 환자, 혈루병자, 38년된 병자,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 교만에 도취된 유대인들, 귀신들려 공동묘지에 버려진 자. 이들을 위해서 죽음을 자청하신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새로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마5:44)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 사랑에는 못 미칩니다. 원수사랑은 누구도 실천해보지 못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결점이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다소나마 나를 미워하고 반감을 품은 사람은 더더욱 사랑치 못합니다. 원수란 수굽니까?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나를 보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 사람 망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기(禮記)에 보면 ‘불구대천지수’란 말이 있습니다. 같이 하늘을 대하고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버지의 원수, 형제의 원수, 친구의 원수는 꼭 갚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 어떤 원수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무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양심이 마비된 원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원수, 허랑 방탕한 원수, 아집과 교만으로 찌든 원수, 신성모독의 원수! 영원한 하나님의 배신자들. 이런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결코 실행된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랑입니다.
셋째로, 이유 불문하고 먼저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사랑합니다. 그나마 내게 이익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주님은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0,19) 우리는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도 서로 먼저 손 내밀기를 싫어합니다. 친한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고 나서도 먼저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항상 갈등 속에 돌아갑니다. 주님은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사랑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교회의 법이요 교회의 표식입니다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불신 세상을 향한 계명이 아닙니다. 세상은 어차피 사람의 계명이 지배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후에 시내산 아래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 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애굽의 법, 즉 세상 법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법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신 새 백성입니다. 구약시대 선민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선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영적 이스라엘이 지켜야 될 계명이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참 교회의 표지는 사랑입니다. 몇 천 명 몇 만 명이 모였으니까 참 교회가 아닙니다. 당회가 조직됐으니까 참교회가 아닙니다. 교리가 잘 되어 있으니 참 교회가 아닙니다. 유명 인사가 많으니까 참 교회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겉모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증표는 될 수 없습니다. 참 교회는 사랑 위에 세워져 있어야합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사랑하고, 양과 양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5) 주님은 ‘교인’이나 ‘신자’란 말을 사용치 않으시고 ‘성도’란 말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제자’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과 행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를 따라야 돼요. 예수님은 사랑의 법으로 사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교회도 주님이 주신 사랑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구나!’하고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인끼리 서로 싸우면 참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따르는 사람들인고?” 참 교회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 밖의 세상은 철저하게 세상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유대교인들은 613개조의 율법으로 사회를 다스렸습니다. 로마는 기가 막힌 법 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래된 서구 사회는 오늘날 가장 법치주의가 잘 시행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나라들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헌법과 각종 법을 만들어서 다스리는 우리 사회는 과연 잘 나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단군 시대에 법은 여덟 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함무라비 왕은 돌기둥 하나에 나라 법을 다 기록했습니다. 오늘의 법은 트럭에 실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악해져만 갑니다. 왜 그럴까요? 법이 잘못 된 것일까요?
세상 법치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법은 양심을 전제로 만들어집니다. 법은 최소한의 제한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그 선을 넘지 말라고 만듭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악한 인간들은 법을 하한선으로 보지 않고 상한선으로 봅니다. 최소한 지켜야만 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최대한 어길 대상으로 삼아요. 법은 어기려는 사람에게 못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회에서 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기려는 자들이 법률가를 동원하여 어길 궁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죄형 법정주의’나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법을 어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구세주와 같은 원칙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육체를 가둬 놔도 마음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제도나 형식으로 얽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몸을 묶는다고 마음까지 묶일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죄를 짓는 일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영혼으로 죄를 짓습니다. 육체를 묶고 처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혀 개선되지 않습니다. 개선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 법의 맹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천국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구성원들은 하나님 자녀들입니다. 이들을 세상 법으로 지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법, 새 계명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 법이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천국 백성은 남이 강제로 묶어야만 되는 노예들이 아닙니다. 스스로 영혼에서, 양심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법은 철저하게 자기 제어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고전13:4-6) 사랑은 완벽한 자기 제어의 법입니다. 이 법이 바로 교회의 법입니다. 교회는 천국 시민이 지상에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왕국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임금이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왕국 시민입니다. 주님은 자기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셨습니다. 교회는 왕국이로되 사랑의 왕국이요, 왕권이 있으되 사랑의 왕권이 지배합니다. 오늘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이러한 교회 통치의 원리를 알고 교회를 세워간다면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교회만의 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적용되는 공동체의 원리입니다. 가정의 법도 사랑의 법이어야 합니다. 가정의례 준칙이 가정의 법이 될 수 없고, 모세의 율법도, 논어 맹자도 가정의 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 이전에 사랑의 토대가 있어야 됩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을 제쳐놓고 도리를 따진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사랑 없는 매나, 사랑 없는 섬김은 불행일 뿐입니다. 대발이 아버지가 호랑이 같아도 집 나간 딸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니까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가정을 아름답게 합니다. 기업도 역시 사랑으로 운영돼야합니다. 요즘 부쩍 인간 경영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 회사라지만, 기업이 사람을 위하지 않는다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경영자가 근로자를 귀찮은 생산 도구로 생각하거나, 근로자가 경영자를 배부른 돼지로만 생각한다면 살벌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법치주의 세상이라 해도 법으로만 다스려진다면 지옥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형사 노릇을 하던 조선인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잡지 않고 도망치게 한 일을 놓고 마음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서로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됐지만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종교인, 교육자, 학생, 근로자. 모든 계층의 부조리와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허물을 들추어 매질하기 전에, 먼저 이들을 동족으로서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매를 때려도 미워서 때리지 말고, 사랑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사회 지탱의 방법입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행복의 계명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학교도, 사회도 사랑으로 다스려질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이 주신 영원한 새 계명입니다.
증거를 보여 주세요
요 13:31-38 / 김상복 목사
지난 주, 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 총회가 태국에서 열렸습니다. ‘한 분의 주, 하나의 몸, 하나의 목소리'(One Lord, One Body, One Voice)라는 주제로 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WEA는 1846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1951년에는 로마가톨릭,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함께 세계 3대 기독교 기구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회 중, 저는 이태리의 회장을 만나서 어떻게 복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국가인 이태리에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동네 천막에서 열린 전도집회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시민권을 얻는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주의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께서 고초 당하신 것은 내가 죄사함과 영생을 받아 천국 시민이 되도록 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예수를 자기의 영원한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세계 127개국에 약 4억 2천만 명의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대륙별, 국가별 협의회들이 있고 100여개의 국제적 단체들이 WEA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한국도 회원국이며 저는 아시아협의회 대표로서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복음주의자의 정체성과 연합사역과 정책을 나누기 위해 6년에 한 번씩 총회를 열고 있으며, 이제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총회 마지막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가 WEA의 회장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기대도, 예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공천위원들이 이미 저를 후보 로 내정해 놓았고 두 명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보니, 그동안 서양인들이 계속 회장을 맡아왔고 아시아인은 한 번도 회장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동안 아시아신학연맹 회장, 지난 7년 동안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등 이사의 신학계와 교회 양쪽을 섬겨 왔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국제적인 사역에 회장과 의장으로 섬겨 왔습니다. 저에게 개인소개와 당선소감을 말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할렐루야교회 담임 목사입니다. 제 생각에 아시아 교회들이 대단히 기뻐할 것 같습니다. 아시아는 면적이 전 세계의 19%밖에 안 되지만 세계 인구의 61%가 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에서 1846년 이래 처음 회장이 나왔으니까요.”
할렐루야교회는 세계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주보 첫 면에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한국교회를 섬기는 교회, 세계교회를 섬기는 교회’라고 썼듯이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기도하며 은혜 받고 주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지만, 우리는 우리 지역과 한국과 세계를 섬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우리 교회를 앞장세워 아시아 전역의 교회들을 많이 섬기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목사님은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니까 꼼짝 말고 여기 앉아 있으세요.” 했더라면 제가 아시아와 세계를 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제가 세계를 섬길 수 있도록 허락과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해서 세계를 섬길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할렐루야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국제적인 일에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번 총회에서 느낀 점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끄러움입니다. 일주일 내내 회의에 참석하고 수많은 연설과 보고와 패널 토론을 들으면서, 한국교회는 강하나 세계와 연합해서 연약한 자들을 함께 섬기는 일에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작은 나라들도 약자와 병자와 억압 받고 불쌍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우리끼리는 잘 하지만 바깥 세계를 잘 섬기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선교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국제적으로 연합과 협력하는 일에는 부족한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서 기독교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에도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슬렘 및 불교와 힌두교의 극단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욕하고 때리고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라크의 기독교인들 수천 명이 산속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 중에 25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종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95%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보복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고난 저편에는 영광이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가룟유다는 성만찬을 마치자마자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떠났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셨다. 나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이면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예수님은 “고생만 많이 하고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고난으로 보지 않습니다. 고난을 넘어 십자가 저편에 부활 승천 영광이 있음을 믿습니다. 당장의 어려움과 슬픔과 외로움을 보기보다 어려움들을 통과하면 저편에서 반드시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진 않아요. 그러나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앙입니다.
지금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뉴스만 너무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영광을 믿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이 예수님 신앙의 모습입니다. 어려울 때 어려운 것만 보지 마시고, 그 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많은 지혜와 능력을 받고 부활과 생명과 영광을 얻으리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사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랑의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나 자신을 바쳐 피 흘려 너희 죄를 사하고 영생으로 인도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희생하며 살아가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아나? 사랑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하고 탄식소리 들려도 할렐루야교회에서는 사도행전적 사랑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힘들어하는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 안에 진한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이런 가정이, 이런 교회가, 이런 직장이,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감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 이 땅에 사랑의 공동체가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향하여 사랑을 갈구 합니다.
저는 WEA 총회 중에 수많은 간증과 보고와 계획들을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아픔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한 여성은 7년 전에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에이즈는 성관계, 특별히 동성애 때문에 걸리기도 하고 주사바늘이나 수혈을 잘 못해도 걸립니다. 이 여성은 남편 때문에 에이즈에 걸렸는데 다니던 교회에서 알고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교회는 착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오면 안 돼!” 하니까 이 여성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치료를 받고 잘 지내며, 교회가 에이즈 환자를 품고 사랑하고 돕도록 운동을 전 아프리카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유엔은 그녀를 ‘에이즈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이 분의 간증을 듣고 회개를 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 에이즈 환자가 있다면 어떨까요? 배척할 것인지, 품고 기도하고 사랑할 것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지난주에 처음으로 복음주의협의회에서 에이즈에 대한 토론을 했습니다. 잠간 사이에 한국에도 에이즈 환자가 5천명으로 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이 사람들을 받아주는 곳이 별로 없었으나 이제 교회의 호스피스들이 이들을 받아서 살 곳을 준비해 주고 예수를 만나 천국 가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엄청나게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연약한 자, 병든 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볼 때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성차별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여성의 권리가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요즘은 각 분야에서 여자들이 두각을 나타내서 남자들이 기를 못 펴는 판입니다. 여자에게도 동일한 기회를 주니까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들어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극심한 억압으로 고생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앞장서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총회에서 야라 후세인이라는 요르단의 미혼 변호사를 만났는데,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했습니다. 한동대학교 법과대학에서 2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다시 와보고 싶어 해요.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요단 여 변호사를 친한파(親韓派)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외국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야라 후세인은 여성 변호사로서 상처입고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앞서 싸우면서 아랍의 어려운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는 인생입니다. 야라 후세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스리랑카 여성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만났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더군요. 아주 지성적으로 생긴 분인데 식사할 함께 때도 조용하셨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그분이 간증을 했는데, 그도 미혼 변호사로서 스리랑카의 인권과 종교의 자유와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활동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 스리랑카에서 추진했던 ‘반개종법’(Anti-conversion Law)은 불교도들이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없고 기독교도들이 불교도들에게 전도를 못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교회는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다른 종교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말만 해도 감옥에 갑니다. 그런데 이분이 스리랑카의 기독교와 가톨릭교와 협력해서 싸운 결과 이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믿어 복음을 깨달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인이 가는 곳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립니다. 기독교는 전 세계에 좋은 소식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복음이요 기독교인들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기독교는 복음이요, 한 나라의 자유와 인권을 확보하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어쩌다 한국에서는 ‘개독교’라 불리게 되었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 회개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행동으로 나타내게 도와주시옵소서. 한국 교회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제 입술에서 강렬하게 나왔습니다.
여성과 어린이, 소외당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 재난을 당한 자, 정의와 인권과 종교 자유의 회복을 위한 ‘마이카 챌린지’(Micah Challenge)에 전 세계 41개 국가가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회원도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도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생존권, 종교와 언론의 자유, 경제적인 권리, 음식을 먹고 살 권리, 생산적인 재산권, 교육받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 일할 권리 등 인간의 기본권을 위해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내가 이름도 모르는 저 사람들이 저렇게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있구나!’
저는 인간의 기본권 하나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인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소식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은 기본권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모두에게 영생을 값없이 주십니다. 복음은 인권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인권의 복음을 꼭 듣도록 여러분의 세계에서 열심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국가의 공공정책을 위해 앞장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 엄청난 고생과 투옥을 마다 않고 헌신하여 인종차별정책을 완전 종식시켰습니다. 캐나다에서는 ‘동성결혼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했습니다.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면 인류가 어떻게 될까요? 인류의 씨가 마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 채우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동성끼리의 결혼을 합벅화해 가는 추세입니다. 캐나다의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 가족제도를 강화해야 나라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 동성결혼은 부당하다”고 앞장서서 주장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법은 통과되었지만 복음주의자들은 하나가 되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못 간다.”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선생님!” “지금은 너희가 모르지만 다음에는 따라올 수 있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 따르고 순종하겠습니다.”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열정이라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도 회개하고 그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복음이 되려는 열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 죽겠다고 하지만 나는 너의 연약함을 안다. 네가 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죽는 거야! 이것이 사랑이야! 너는 육신이 약해서 나를 위해 죽기가 힘들어. 그러나 나는 너를 위해 죽겠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과 영광으로 너를 구원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삶에 변화가 있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갈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흘러서 예수님 제자됨의 확실한 증거인 사랑을 전파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증거를 보기 원합니다. 예수 믿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열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삽시다
요한복음 13:33-34, 잠언 10:12 / 안효관 목사
이런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뽑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광고를 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원자들 가운데서 올림픽 경기를 통해서 12명을 선발하기로 하셨습니다.
첫 번째 경기는 기도대회였습니다. 지원자들은 모두 기도를 유창하게 잘 했습니다. 발음도 정확하고, 말하는 속도도 잘 조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이상을 담고 있는 고상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대회를 통해서 우승자나 합격자를 가려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 가운데에는 진정으로 마음을 쏟는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경기는 예배대회였습니다. 지원자들은 예배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왔습니다. 아름다운 예배의복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고, 음악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예배대회를 통해서도 합격자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 마음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경기는 교육대회였습니다. 계속된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잘 준비된 사람들만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을 들여 포스터도 준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청각 교육을 위해서 비디오도 빌려왔고, 어떤 사람은 소그룹을 동원하여 연구수업을 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합격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합격자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올림픽 심판을 맡아 제자를 뽑으려던 예수님은 심신이 너무 지쳐서 쉬면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강가로 나가셨던 예수님의 눈에 놀라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고기를 잡는데 온 마음과 정성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말씀을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군사, 하나님의 동역자' 모두가 우리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등도 신앙인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명칭들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자"라는 말일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제자"를 '스승으로부터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mathetes)라는 말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으로부터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이상을 함께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삶 전부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힘들고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을 내놓을만큼 철저하게 예수님께 자신 전부를 위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붙여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바라볼 때 정말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준 것입니다.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단순히 예수 믿는다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 안에 거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3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두 번째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이 세 가지 길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지킨다는 것은 곧 그의 사랑 안에 거하여 그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도 같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15:8절 바로 다음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에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여 그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저이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야,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 예수처럼 사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 서로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 모습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손을 내어뻣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감싸안는 사랑의 포옹이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요한복음 13장-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하라"는 말씀이 5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 44번이 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어하셨던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깨달은 사도 요한은 평생을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교회의 젊은 청년들에 사도 요한을 부축하여 강단에 모셔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도 요한이 강단에 서기만 하면 늘 "자녀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왜 늘 같은 말씀만 하십니까?" 이때 사도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만 잘 지키면 주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계명도, 더 아름다운 신앙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34절에서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낮아지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말씀을 하시기 바로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4절 이하에서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잡수고 계셨습니다. 이게 제자들과 먹는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의 손에 붙잡혀서 총독 빌라도와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셔야 하고,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라고 하는 가장 처절한 사형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일어서시더니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발을 씻겨주는 이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계실 때에 쿨쿨 잠이나 자고 있을 것입니다. 스승이라고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혀 끌려가실 때에는 자기들도 잡힐까봐 두려워서 모두 도망칠 그런 못난 놈들입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천한 계집종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은 자리까지 따라가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주님처럼 잡혀서 고초를 당할 것이 두려워서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베드로의 발을 정성껏 씻겨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이미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은 30개를 받고서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런 배신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게 될 것이고, 자신은 그 때문에 십자가에 고초를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롯 유다의 발까지 씻겨주셨습니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발을 가장 섬세하게, 가장 오랫동안 씻겨주셨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에는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고, 그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배신할 자까지도 다 씻겨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풍속에는 종이나 하인이 주인과 주인을 찾아온 손님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이시면서도 제자들을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낮아지신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낮아지는 사랑입니다. 권력을 사용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돈으로 매수한 사랑도 참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낮아짐으로 얻어지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낮아짐의 사랑을 실천하셨고, 또 우리에게 "내가 너희 발을 씻겨 낮아짐의 사랑을 보인 것처럼, 너희로 낮아짐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낮아짐의 사랑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낮아짐의 사랑은 나를 배신하고 내게 상처를 준 그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그 사람보다도 더 낮아진 자리에 내려가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랑, 주님을 부인할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시고, 스승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의 발을 씻겨주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그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바로 그런 낮아지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이미 우리의 가슴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건 이방인도 다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주님께서 낮아지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낮아진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 주님의 사랑은 한 번 사랑하신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들이 배신해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좌절하고 절망해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못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주님 곁을 떠난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또 친히 자기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삶을 내팽개치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그러니까, 6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로 가서 옛생활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갈릴리 바다에까지 찾아가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달은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대답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배신한 것도 아시고,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는 못난 놈인지도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저는 그런 놈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세 번이나 똑같이 질문해도 베드로의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베드로를 믿었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회복시켜주신 주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주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배신하며 나를 버릴 때에라도 내가 너희를 끝까지 참아주며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그런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은 우리 마음에 따라 사랑해도 되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우리들 중에 어느 누구도 주님과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면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작은 사랑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헨리 포펜'이라는 선교사가 중국 오지에 가서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수'라는 말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사랑으로 문둥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심지어 죄인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만 말하지 않았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씀을 듣는 부락의 사람 중 남자 하나가 "맞아요. 그 사람은 우리 동네에 살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펜 선교사가 당황해하면서 "아니요. 그 분은 저 유대나라에서 살았고, 2000년 전에 죽었답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아니예요. 그분은 2년 전에 죽었어요.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았어요"라고 대답하면서 "저를 따라오세요. 그 분의 무덤은 여기에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서 가 보았더니 공동묘지에 의료선교를 하는 한 선교사의 비석이 서 있고, 그 분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명령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면 그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제 사랑이 흘러 넘치면 그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의 그 낮아지신 사랑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렇게 낮아지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그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낮아진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도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은 자답게, 우리가 서로 끝까지 참아주며 인내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서로 낮아지고 참아주는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사랑이 없어 목말라하는 세상에 사랑을 공급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