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1835.11.29 ~ 1908.11.15)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
등치제와 광시제의 섭정을 지냈고 광시제가 입헌파 캉유웨이와 입헌 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실질적으로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西太后)는 여러 가지 면에서 측천무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측천무후가 '사악한 찬탈자'인 동시에 '훌륭한 통치자'였던 반면,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사치에 우선한 '탐욕스러운 통치자'였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녀로 인해 청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녀로 인해서 왕조의 몰락이 반세기 정도 늦춰졌다는 견해도 있다.
그녀의 출신배경이나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은 측천무후의 것과 비슷하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엽혁나랍(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의 아버지 혜정(惠征)은 감찰 업무를 수행하던 하급 관리로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난아가 태어난 시기는 유럽 열강들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인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이 터지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굴욕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난아는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였는데 나이는 자희보다 네 살이 많았으며 이제 막 제위를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무능하지도 않은 평범한 황제였다. 또한 부지런하고 대단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