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한국명 박문자, 건국훈장 애국장)
박열의 아내로 1922년 2월부터 박열과 의기투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4월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불령사를 조직, 불령사는 한국 내 형평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노동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의문사했다.
데이지 호킹
마거릿 샌더먼 데이비스
외국인 선교사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됐으나 국제적 갈등의 가능성으로 일제가 풀어주었다.
1920년대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계속해서 항일 운동을 하였으나 호킹은 1941년 영일관계 악화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고국으로 귀국, 마거릿은 교장으로 지내던 일신여학교의 폐교로 귀국했다.
셀던 파머 스펜서
3.1운동 직후 미국 미주리주 공화당 상원 의원직으로 두 차례 미국 의회에 대한제국의 독립 문제를 제안하였으며, 1920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 대한제국 조선 친우회가 개최한 집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를 비판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1921년 12월 미국 워싱턴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이 보낸 ‘대한의 호소(Korea's Appeal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를 책자로 만들어 미국 상원 의회 측에 배포하였으며, 1922년 2월 동 호소문을 미국 의회 의사록에 삽입되게 하는 등 독립을 적극 지지했다.
쑤징허
남경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재학 중이던 1944년 같은 학교에서 유학하던 조일문과 만났다. 이후 쑤징허는 남경시에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일본제국 육군의 동향을 수집하는 한편,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조선인 청년들을 모집하고 그 청년들을 호송하는 등의 지하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건국훈장 대통령장)
당초에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입국하였으나 일제의 횡포를 목격한 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부수는 1만부를 넘어 최대 신문사가 되었고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합병된 1910년까지 여섯 해 동안 일본제국에 침략당하는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 을사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등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고종 이형(이희)의 친서를 <대한 매일 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실어 일제 침략을 해외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끔 노력했다.
본인이 영국인이었던 점을 적극 이용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중에 병을 얻어 결국 병으로 사망하게 됐다.
윌리엄 린튼
외국인 선교사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를 후원하고 한국의 독립을 외신을 통해 주장했다. 군산 만세 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귀국하여 8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였다.
윌리엄 린튼의 친손자가 22대 국회의원 당선인 인요한이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석호필)
선교사, 수의사, 위생학자.
제암리에 직접 방문하여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관한 글을 올리며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하였으며 현재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캐나다 기자)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맨처음 대한제국을 방문하였고, 추후 재입국해 정미의병에 관해 취재했다.
출판한 저서 《베일을 벗은 동양》의 부록에서 매켄지는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간행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 주목해, 당시 그 현장을 목격한 캐나다인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 제국이 일으킨 학살 사건의 진상을 세간에 폭로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로, 우리나라의 장로교 최초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기독청년회인 YMCA를 조직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등의 직을 지냈다.
이 뿐만 아니라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등을 편찬했으며,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고, 서울 경신중학교을 만들어 교육에 큰 기여를 했다.
호머 배절릴 헐버트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조선에 맨 처음 입국했고 추후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업무를 맡았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됐다.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호머 헐버트는 미스터 선샤인 선교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후세 다쓰지(건국훈장 애족장)
일본의 인권 변호사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 후 검사로 일하다가 검사를 관두고 변호사가 됐다.
1911년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작성하여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추후 의열단원 김지섭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시함과 동시에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사후 2004년에 그의 업적이 인정받게 되었고,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