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강론>(2024. 11. 7. 목)(루카 15,1-10)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10)”
1)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자들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두 가지 가르침을 주려고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1)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2)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도 잃은 양들일 뿐이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특히 성직자들 가운데에는,
자기도 ‘잃은 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 쪽에 두고,
잃은 양을 ‘다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잃은 양’이 된 적이 없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교만과 위선 자체가 ‘잃은 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고,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그들도 구원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독점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고,
무엇이든 예수님에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려고,
또 트집거리를 찾으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라는 어떤 바리사이의 말이 있습니다(루카 7,39).>
2)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이 말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 7절의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의인들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회개의 완성’에 도달한 의인들은 언제나 항상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 하나’를 되찾은 기쁨도 ‘큰 기쁨’입니다.
<무엇이 더 큰 기쁨이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로 내가 잃은 양이다.” 라는 말에 연결하면,
주님께서는 ‘나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고,
또 내가 회개한 뒤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크게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내가’ 죄를 짓고,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크게’ 슬퍼하시고, 회개했다가 다시 죄를 지으면
‘더 크게’ 슬퍼하십니다.
3)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나 목적이,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기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회개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그것은 나 자신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주님께서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주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 낼 것도 없습니다.
<병에 걸린 내가 병원에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이고, 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갑니다.
그리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지 의사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게 되면,
의사도 기뻐하지만 ‘나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출처]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