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기둥-아버지학교 23
이정록
겨울 논바닥이 얼음지붕을 덮었습니다.
벼 그루터기가 수만 기둥으로 섰습니다.
낮달이 지나간 밑동에 닷 마지기 얼음이 손을 짚었습니다.
썰매 날과 쇠꼬챙이가 다시 아픈 기억을 찍어댔지만,
상처도 수평을 잡으면 견딜 만하다고 햇살 끌어다 덮습니다.
물꼬를 틀었던 도랑이 검은 핏줄로 살아납니다.
움벼*들이 서까래가 되어 아이들의 발목을 받들고 있습니다.
실뿌리들이 발끝 잇대어 얼음주춧돌을 놓았습니다.
닷 마지기 논두렁이 벌떡 일어서서 일주문 기둥이 되면
하늘 꼭대기 너테** 얼음지붕에 햇살 눈부시겠죠.
“얼음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단다.”
아버지의 말씀 뚝뚝 녹아내리겠죠.
*움벼 : 가을에 베어낸 그루에서 움이 자란 벼.
**너테 : 얼음 위에 다시 물이 얼어서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얼음.
ㅡ출처 : 시집『아버지 학교』(열림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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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얼음놀이는
저수지나 강, 논바닥에서 주로 하는데
가장 안전한 곳이 논바닥이다
화자가 시에서 요란하게 얼음기둥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아주 단단하게 언 상태가 눈에 선하다
논바닥이 온통 얼음기둥으로 받치고 있는데
게다가 얼음이 여러 겹으로 얼었는데
위험할 까닭이 없다, 여기서
쇠꼬챙이로 짚어 당기면 썰매 날이 잘 미끄러져
얼음놀이는 신났다
‘상처도 수평을 잡으면 견딜 만하다고 햇살 끌어다 덮습니다.’
하루종일 얼음이 칼날에 상처 나면 햇살이 녹여서
밤새 차가운 기온으로 그 상처를 메꾸어 준다
또 새날이 오면 얼음판이 깨끗해진 논바닥에서
맘껏 지치고 달리고 미끄러지고 논다
“얼음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단다.”
겨울이 겨울다울 때는 얼음도 얼음다워서
걱정이 없다
겨울이 물러날 때가 되면 녹아서
더러는 젖은 옷으로 집으로 가게 되는데
야단맞는 일이 허다했다
얼음도 얼음끼리는 맞물어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지는 일이 별로 없다
얼음처럼 단단할 처지가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고 사는 게
세상을 건너가는 방법일 것 같다
아버지의 말씀은 경험으로 아시는 것이니
내 마음 속에 녹아내려서 제대로 스며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