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솜이불
주 영혜
가을 하늘이 참 맑다. 이렇게 따사로운 가을이면 이불 빨래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가 없다. 작년 이사 오던 날, 하늘은 예고에도 없었던 장대비를 속이 타게 뿌려댔다. 그때 가장 큰 생채기를 입은 건 솜이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오랜 추억을 뒤로한 채 아쉬움을 가득 담아 버려야만 했다. 33년 세월을 안아주던 엄마의 손길이 깃든 엄마의 솜이불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엄마는 맏며느리였다. 머슴들과 식모까지 포함해 13식구를 보살피며 밭일까지 해야 하는 쉼이 없는 삶을 사셔야 했다. 또, 시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평생 주말 부부로 사셨다. 어린 자식들은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어느 정도 성장한 자식들은 교육을 위해 도회지로 떠나보내져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부재를 느끼며 아빠와만 지냈다. 따뜻한 부모님이셨지만 우리는 선의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보다 시부모님을 위해 젊음을 바치신 엄마의 삶은 한 여인으로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여느 가정처럼 함께 모여 살 수 없음에도 희생과 순종으로 최선을 다하셨던 엄마는, 그래도 어진 성품을 지니시고 시골 부모님을 잘 모셨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또 효부상까지 타셨다. 하지만 도리와 의무감의 무게가 얼마나 어깨를 짓눌렀을까? 차마 내어놓지 못한 눈물 삭힌 억울함이 어찌 없었으랴? 효부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감내해야 했던 우리 엄마의 세월이 안쓰럽다.
70년대는 전쟁 드라마가 선풍을 일으켰다. 그 드라마를 방영할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TV 있는 집에 모여서 그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어린아이들 정서에까지 만연해있었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도, 이렇게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드라마를 본 날이면, 자주 악몽을 꾸곤 했다. 꿈속에서 엄마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을 때는 무덤까지 따라 들어가서 서럽게 울다가 베개를 흠뻑 적신 채 잠에서 깬 적도 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겐 하늘이었고 우주였다.
엄마가 내 혼수로 솜이불을 손수 만드셨던 날에도 나는 이불에 어린아이처럼 덜렁 누워 재롱을 부렸다. 행복하게 잘 살라며 이마를 진하게 부비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아쉬움도 가슴속에 삭히시고 환한 미소만 보이셨다. 그 따뜻한 추억들이 나를 삶의 회오리에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게 지켜주는 삶의 버팀목이 돼 주었던 것 같다.
우리 딸이 6개월쯤 되었을 때 엄마에게 꿈속에서도 피하고 싶은 병마가 찾아왔다. 막내딸인 내가 모시긴 했지만, 기어 다니는 딸을 업고 돌봐드려야 했고 미숙함이 많았다. 지금은 유튜브나 TV 등에서 항암 관련 정보나 자연치유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의학 발달도 정보도 부족해 다양한 시도도 못 해 봤고 그것이 못내 가슴 시리도록 아쉽다. 남편과 자식 하나를 먼저 떠나보내는 인고의 사다리를 겨우겨우 건너왔건만 ‘선한 끝은 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신께서는 장수의 축복조차 엄마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를 일곱 달밖에 지켜드리지 못하고 천국으로 떠나보내 드려야만 했다. 그때는 10년을 대소변을 받아내더라도 살아 돌아오셨으면... 할 정도로 그리움이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었다. 그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도, 슬픈 음악만 흘러나와도 이미 내 볼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요즘 길에서 연세 드신 할머니를 뵈면 장수하신 것만으로도 축복받으신 분으로 여겨진다. 일찍 떠나신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게다. 지금 살아계셨으면 맛난 음식도 사드리며 흐뭇해하시는 모습도 마주할 수 있을텐데... 두 모녀가 나들이하며 예쁜 추억도 만들고 노년의 행복을 듬뿍 만끽하게 해드릴 수 있을텐데... 60대 중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쉽게 떠나신 엄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생인손처럼 아프다.
늘 딱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친척들로부터 ‘살아있는 천사’라 불리셨던 우리 엄마. 우리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하셨음에도 “그 집에서는 더없이 귀한 아들일텐데” 하시며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셨다. 이처럼 사람은 부모가 있기에 누구나 다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던 당신의 소신을 몸소 보여주셨던 그런 분이셨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금식을 하시면서까지 온몸과 온 맘을 다해 기도하셨다. 그 은혜로운 모습이 지금도 든든하게 촛불되어 밝혀준다. 이 딸을 위해 도시락을 싸 들고 오셔서 추위에 떠시며 학교 앞에서 기다리시던 엄마의 모습이, 현실인 듯 울컥해진다. 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음에도 ‘엄마’를 목 놓아 불러보고 싶다. 당신의 한스러운 고생이 고름 섞인 딱정이처럼 상흔으로 남아서일까? 시집가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며 내 속옷 빨래까지 손수 해주셨던 우리 엄마. “한없이 내어만 주시던 당신의 사랑이 엄마의 솜이불 되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리움 꾹꾹 눌러 담은 작은 엽서 한 장, 가을바람 편에 띄어보내 보고 싶다. 엄마에게 전해주길 기대하면서...
첫댓글 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음에도 ‘엄마’를 목 놓아 불러보고 싶다. 당신의 한스러운 고생이 고름 섞인 딱정이처럼 상흔으로 남아서일까? 시집가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며 내 속옷 빨래까지 손수 해주셨던 우리 엄마. “한없이 내어만 주시던 당신의 사랑이 엄마의 솜이불 되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선생님, 따뜻하고 든든한 큰언니처럼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