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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with them they cannot fast. on an old cloak.
말씀의 초대 사무엘은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당신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울은 주님을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주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사울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였기에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도록 배척하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지금 혼인 잔치의 신랑인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기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 단식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단식은 절제의 수단입니다. 단식한다고 사람을 괴롭히고 이웃을 성가시게 한다면 취지가 무색해집니다. 사람을 위한 단식입니다. 사랑을 나누려는 ‘절제의 훈련’입니다. 백 번을 단식해도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없다면 그냥 ‘굶는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단식으로는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 ‘경주용 말’을 비행기로 실어 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비행 내내 적정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고, 바닥에는 배설물 흡수제가 깔렸다고 합니다. 말들에게 쾌적한 비행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용이 꽤 들었을 것입니다. 경주용 말들은 이렇듯 귀한 대??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혹사당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새 포도주 같은 힘 - 황지원 신부-
새벽에 일어나 미사 복사 봉사를 하기 위해 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예쁘기 그지없습니다. 제의방에서 미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을 때면 예전과 다르게 많은 친구가 꿈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금 현실성이 없더라도 이루고 싶은 꿈 하나쯤은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예전에 비해, 요즘 친구들은 너무 현실에만 갇혀 있어서 그런지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초등학교 일제고사가 실시되면서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더욱더 아이들을 꿈 꿀 수 없는 현실로 내모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크림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난 러시아는 1에이커당 2센트씩 총 720만 달러라는 돈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당시의 알래스카는 얼음으로 뒤덮이고 모피사냥꾼이나 겨우 드나드는 쓸모없는 땅이었지요. 그 때문에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발도 거셌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스워드는 그 비난을 혼자 뒤집어써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래를 ‘스워드의 바보짓’, 알래스카를 ‘스워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놀려댔지요. 하지만 그러한 비난이 칭찬으로 돌아서기까지는 불과 2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알래스카에서 대규모 금광과 유정이 발견되고 인근 해역의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교통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 평가가 몇 백 년 후에야 내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지금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어 후회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지금 당장 어떤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어리석은 일일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당대에 가장 많이 들었던 분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당시의 지도층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기에 끊임없는 반대를 받아야만 했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합니까? ‘왜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 하면서 이제 예수님이 아닌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대목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참회와 보속의 행위로 단식을 권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대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데에 집중하는 그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식의 목적에 부합한 삶이 더욱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단식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욱 더 중요한 것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사무엘 예언자는 말씀하시지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기준에 맞출 때 섣부른 판단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큰 수확은 우리에게 상처를 안겨 준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다(조셉 지콥스)
최신 인기가요 -김광태-
얼마 전 아주 재미있는 책을 찾았습니다. <최신 인기가요 500곡>. 그러고 보니 신자들의 성화에 떠밀려 부르게 되는 노래란 다 이 시기의 것들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저의‘최신 인기가요’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50대 후반에서 70대 신자들과
사람을 바꾸라"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 -김찬선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술은 새 부대에 -전삼용신부-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셨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내면적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 곧 나의 감추어진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떤 분을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몰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신앙인으로 살자
<서설처럼 맑고 깨끗한> -양승국신부-
오전 미사 때만 해도 싸락눈이었는데, 점심시간 아이들과 짜파게티를 먹으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꽃송이가 휘날리듯이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외출이 가능한 아이들과 수도원 정문을 나서는데, 창문가에 붙어선 아이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저희들을 쳐다봅니다. 마음이 짠해왔습니다. 외출을 나가면서 신나하는 아이들, 몸에 밴 방랑기를 억지로 참아내느라 힘겨워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기분이 씁쓸해졌습니다. 아이들의 소원대로 빨리 세월이 흐르고, 상처를 추스린 아이들, 재충전된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보다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길 기도했습니다. 너무 지나친 기대인지는 모르겠지만 날아간 또 다른 넓은 세상에서는 지금 내리는 함박눈처럼 순수하고 올곧은 젊은이들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수용하기 위해 우리의 낡은 그릇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어제까지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협소하고 편협된 사고방식,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삶의 양식을 새로운 양태로 바꾸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때로 부차적인 것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목숨까지 거는 분들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소홀히 여기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온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는 분들의 삶을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볼 때 마다 눈물나게 하는 "꼭 한번 만나고 싶다"란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던 한 스님의 모습이 계속 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뺑소니 차량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했던 한 소년이 치료비를 댈 돈이 없어 난감했었는데... 관대한 마음으로 거금의 치료비를 감면해주신 병원 원장 선생님...그 선생님의 은혜를 못잊어하며 가족들이 애타게 찾았었는데... 마침내 문을 열자 당시 병원 원장님 선생님은 인자하신 스님의 모습으로 변해 계셨습니다.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어찌 그리 제 마음을 꼭꼭 찌르던지요. "내가 자네에게 베푼 도움은 꼭 나에게 갚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갚도록 하게."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너무 애를 쓰지 마십시오." 마치 서설처럼 맑고 깨끗한 스님의 모습이 오늘 이 눈오는 날, 우리가 새롭게 설정할 삶의 목표이길 바랍니다.
<엄마 닮아 정말 다행이다>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에는 마음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한 아이와 함께 외출을 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대체로 한가지입니다. 우선 답답하니까, 우선 자기들 하고싶은 대로 하지 못하니까, 우선 휴대폰이나 오토바이를 갖고 싶으니까, 무조건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갖은 감언이설로 어떻게 해서든 꼬시는 것이 제 일입니다. 돌아오는 길이 막혀 식사시간을 놓친 저희 둘은 동네 한 식당에 들어가서 뼈해장국을 한 그릇씩 시켰습니다. 배도 출출했겠다 게눈 감추듯 뚝딱 해치우고 뚝배기 사발째 들고 남은 국물을 후루룩 후루룩 들이키고 있는데, 배달 나갔던 아저씨가 들어왔습니다. 입담 좋은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저씨 오랜만에 오셨소. 야는 누구요? 아들이요?" 뭐라고 대답하기도 그래서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제게 아저씨는 한술 더 뜹니다. "아들 한번 야무지게 생겼네. 근디, 야는 지 엄마 닮았는가벼." 그리고는 아이한테 꼭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아그야, 너, 엄마 닮은 거 정말 재수 좋은거다. 만일에 니 아부지 닮았다면 어쩔 뻔했냐?" 식당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각각의 아이들을 향한 개별적이고 각별한 사랑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만날 때 각 아이들이 지닌 상처와 고통을 개별적으로 어루만져주는 노력이 얼마나 부족한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교사와 아이 사이에 일대 일, 부자간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교육, 학교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교육과정의 개별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사나 학부모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만나야 아이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보다 깊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상처를 보다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의미하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구약시대를 완전히 마무리하면서도 완전히 뒤엎는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니셨던 새로움은 구약시대의 사고방식이나 구약의 안경을 벗어버리지 않는 이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 큰 새로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니셨던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이겠습니까? 그간 감히 얼굴도 마주볼 수 없었던 하느님, 혹시라도 그분을 대면하는 날은 바로 우리 삶이 끝나는 날로 여겼었는데, 그 하느님이 한 인격체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다정한 친구처럼 사랑하는 연인처럼 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찾아오신 하느님이시기에 새롭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한 인격체로 찾아오신 너무도 은밀한 하느님, 너무도 개별적인 하느님이시기에 새로움이십니다. 그간 상선벌악의 기준에 따라 무척 엄격한 하느님으로 생각했었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너무나 자비로운 하느님이셨기에 새롭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으로 인해 이제 아무리 지은 죄가 진홍빛 같다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멸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이신 이유는 바로 그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움이신 이유는 측량조차 할 수 없는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입니다.
몸이 찌뿌듯해서 복장을 갖춰 입고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가 얼마나 신나던지……. 이번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조금 힘이 들더군요.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고요. 그래서 자전거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초콜릿도 하나 먹고 물도 마시면서 주위 경관을 바라보면서 쉬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앞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30분 정도를 갔을까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제가 자전거를 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걸어서 30분을 앞으로 갔던 것이지요.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전거를 세워 두었던 곳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자전거를 이미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발 이번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쉬었던 곳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전거가 그 자리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전거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꿈이었습니다.” 저의 어제 꿈이었습니다. 꿈에 깬 뒤에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자전거가 잘 있는지 창고로 내려가 얼른 확인해 보았습니다. 역시 자전거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있었습니다. 역시 꿈 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확인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내게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즉, 물건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감사하고, 소위 불행하다는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본당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이렇게 감사할 이유가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데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불평과 불만을 던집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모두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불평과 불만의 이유가 될 것인가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모두가 혼인 잔치에 참여한 손님과 같은 마음으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문제점만 찾으려하니 기쁘지도 또한 감사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감사의 삶을 지향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공정함이 힘찬 물줄기를 형성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킹 목사)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양승국신부- <달라진 얼굴> 서원을 앞두고 긴 피정을 마친 형제들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피정이 얼마나 좋았던지 얼굴 색깔까지 다릅니다. 피정의 결실도 대단합니다. 한 형제는 평소 자신이 제일 아끼는 옷 한 벌을 제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피정기간동안 하느님 외에 부차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느님께만 충실하겠다는 표현으로 옷을 가져온 것입니다. 한 형제는 그러지 말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랬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면의 어두움과 죄를 직면하게 되었고, 큰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얼굴도 뵙게 되었다. 부끄러운 지난 삶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치유해주신 주님, 이런 주님 자비에 대한 보답으로 절제된 생활을 선택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서원을 앞두고 ‘과거의 나’란 낡은 옷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옷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형제들의 모습이 참으로 빛나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어제와 결별하고 산뜻하게 새 출발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분신 예수님, 우리를 향한 그분 사랑의 눈빛은 얼마나 강렬한지 모릅니다. 그분의 절절한 사랑으로, 불타는 눈빛 한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는 또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한번 그분의 맛을 본 사람은 세상 모든 시름을 다 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그분 가까이, 어떻게 하면 조금만 더 오래 그분 옆에 머무를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 남겨질 유일한 과제입니다. 10년 만에 사법고시에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연수원으로부터 언제까지 입소하라는 초대장(공문)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찼겠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 각자도 하느님으로부터 초대장 하나씩을 받았습니다. 연수원 입소보다 훨씬 소중하고 기분 좋은 구원에로의 초대장입니다. 하느님 나라 입장을 위한 티켓입니다. 사법연수원 입소를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겠지요. 합격증서도 필요하겠지요. 신분을 증명할 신분증도 필요합니다. 깨끗한 양복도 한 벌 필요하겠습니다. 와이셔츠며 구두도 필요합니다. 연수기간 동안 필요한 잡다한 생필품도 필요하겠지요. 법학사전이며 참고서도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필요한 것, 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과거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 입국이란, 즉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충만한 삶입니다. 자비로 똘똘 뭉쳐진 하느님과의 합일로 인한 완전한 기쁨의 나날입니다.
마음은 몸을 따라야 한다 -오기백 신부-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금방 이해했습니다.
대사제처럼 되려면 -김찬선신부- 새 술은 새 부대에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었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하는 말 -조정희 수녀-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별들이 쏟아질 듯 머리맡 가까이 와 있었다. 별빛이 어슴푸레해진 후 일어나 화마루 공소에서 도보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사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나라가 되도록, 그리고 우리 수도회 회원의 성화와 일치를 위하여’라는 공동 지향을 두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 공동체와 고3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기억하며 걸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농부가 약간의 땅뙈기를 일구고 암소 몇 마리를 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직업이 의사인 사촌이 방문하여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사는지……. 좀 더 재산을 불린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사촌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 수 있는지를 물었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화를 하면서 내 생각만 옳다고 우기지 맙시다.
사랑이라는 새 부대 -구경국 신부-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원숭이가 냇물에서 물고기를
친절하신 예수님의 대화법 -김현숙 수녀-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깐죽거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짐짓 저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시비를 걸어온다. “…`하는데, 왜 …`하지 않아요?” 그럴 때 “너나 잘하세요.” 하며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고 싶어진다. 낯익은 것일수록 더 새롭게 봤으면(마르 2,18-22) 회두, 회개 -이철구신부- 새로운 삶, 회개의 삶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유 루시아 수녀 - ◆예수께서 단식을 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캥겨 더 찢어지게 된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낡은 가죽부대에 비유하십니다. 누구 빽입니까? - 이찬홍 신부-
우리의 삶에는 당연히 지켜야할 규범, 질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규칙, 질서들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좀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야,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고, 빽이 대단하네!’ 라는 농담을 합니다. 빽과 관련된 체험이 제게도 있습니다. 광주 공항은 안개가 자주 끼다보니, 종종 비행기가 결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날도 그랬습니다. 오전 12시까지 학교에 오라는 통보를 받아서, 10시경에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안개 때문에 제가 타고 갈 비행기가 결항되어버렸습니다. 순간 공항은 발권 창구에서 고함치는 사람... 여기 저기 전화하는 사람... 오후 비행기의 대기자 신청하는 사람 등으로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대기자 신청하러 가보니, 대기석이 마감되어 버려, 도저히 그날 학교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순간, 저는 ‘이러다가 학교에 못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물론, ‘교구에서 알아서 해 주겠지.’ 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 함께 계신 양 신부님께서 성소국장 신부님이셨기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신부님, 비행기 결항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좀 기다려!’ 라는 말씀에 전화를 끊고 30분 후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 ‘너네 4명 오후 비행기 예약했다. 그편에 타고 학교에 가라!’ 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창구에 가서 힘차게 외쳤습니다. ‘오후 3시 30분 광주요’ 저의 말에 승무원은 놀라며,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표를 구했습니까? 우리도 자기 빼기가 힘든데....’ 그 말이 제게는 ‘참 빽이 대단하십니다.’ 라는 말로 드렸습니다. 그때, ‘빽이 좋긴 좋구나.’는 생각과 함께 양 신부님의 대단함(?)을 느끼며 학교에 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진정 믿고 의지해야할 빽이 하느님이셨는데, 그 순간에는 하느님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할 규칙이었는데도, 의연 중에 ‘양 신부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라는 교만한 마음이 깊었던 것 같았습니다. 복음에도 빽과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식규정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 기간이 되면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를 지키지 않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소위, “무슨 빽으로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는데... “내가 바로 신랑인데, 나와 함께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단식할 수 있느냐? 먼 훗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때, 단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은 메시아, 곧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한... 잘 맞이하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단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믿고 의지하는 영원한 빽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모든 사람이 지키는 규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떠한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사람들의 삶을 넘어서는 특수한 빽을 갖고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 안에 가장 중요하고 든든한 빽을 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의 편... 나를 도와주시는 분을 빽으로 모시고, 그 빽의 힘으로... 능력으로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의지하는 빽은 무엇입니까? 어렵고, 큰일이 닥칠 때, 도와달라고... 청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김정식 님의 ‘예수 내 작은 기쁨’ 이란 노래는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밤길을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등불 밝혀주는 이 내가 미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해 아파하는 이 내가 고난에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이 *음을 생각하니 내 맘에 한 빛이 가득 차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네. 예수 내 기쁨 예수 내 평화 날 위해* 등불 밝히는 아파하시는 기도 하시는 예수 내 희망 예수 내 생명 작은 나의 기쁨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 평화요, 가장 든든한 빽이 아니겠습니까?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양승국신부-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잔치> 단식 한번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젠가 위장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식이 최고’라는 누군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어야 했는데, 워낙 귀가 얇다보니 ‘단식이 최고’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 그냥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나름대로 절차가 있었습니다. 초보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엄청 많았습니다. 교육도 필요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단식이다’ 하고 바로 단식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을 했었는데, 과정이 진행될수록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더군요. 사흘까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었는데, 사흘이 고비더군요. 사흘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거지? 내 주제에 단식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단식. 그냥 이대로 그냥 살지 뭐. 아프면 아픈 대로. 그러다 안 되면 죽지. 안 그래?” 그 뒤로 단식기도 자주 하시는 분들, 정말 우러러보이더군요. 단식, 그것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독한 사람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웬만한 의지력이 아니면 정말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단식하시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열흘도 아닙니다. 장장 40일간 단식을 하셨습니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체험하신 단식, 목숨을 건 단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주 단식 하셨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 정말 괴로울 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주 광야로 가셨습니다. 단식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단식의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꽤 일상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하루를 속죄의 날(10월 1일)로 정해 의무적으로 단식했습니다. 또 기근이나 전쟁, 가뭄, 대형 참사와도 같은 천재지변을 겪을 때,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동참의 표현으로 단식일을 선포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면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생활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식의 전문가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지금 단식하느라 이렇게 괴롭다, 이렇게 힘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뭘 물어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대답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이 지금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런 꼴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은 비통함으로 찢어집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삼시세끼 챙겨먹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더 이상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기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안하게 밥을 먹겠습니까? 이처럼 단식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애통함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다들 단식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 저리도 게걸스럽게 잘들 먹느냐고 대놓고 따집니다. 하수들의 차원 낮은 질문 앞에 고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표현, 알쏭달쏭한 표현, 그러나 심오한 표현, 신앙의 진리와 핵심이 담긴 차원 높은 답변을 펼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성을 넌지시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더불어 그분의 활동무대가 시작됨으로 인해 이제 구약 시대는 마감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간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목숨 바쳐 해오던 단식도 이제는 그칠 때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시는 의자에 앉아 행복한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는 일입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과도 같은 흥겨운 잔치 주최한 주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은 하객들이 기쁜 마음으로 와주는 일입니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일입니다. 준비된 여흥에 기꺼이 동참하며 열심히 놀아주는 일입니다. 사흘 밤낮을 두고 준비한 음식 앞에서 열심히 먹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잔치에 온 누군가가 ‘아, 나 지금 단식기도 중이야’ 라면서 물 잔만 들고 있다면, 주인 입장에서 김이 팍 셀 것입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다든지, 다들 인상을 구기고 있다면 잔치 주인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노릇일 것입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 앞에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귀한 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기쁜 얼굴로 잔치를 만끽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중섭 신부-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시대에 살고 오늘을 오늘답게 사는 삶 -상지종신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는 법입니다."
이 말씀은 새로이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작자 미상의 "오늘"이라는 시 한편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너 소유한 모든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오늘’이니
너의 구원자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두 도적사이에서 자주 십자가에 달리운다.
기쁨은 오직 오늘의 것, 어제나 내일이 아닌 다만 오늘 너는 행복할 수 있으리니.
우리네 슬픔의 대부분은 언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려 온 것 일뿐, 너의 오늘을 고스란히 간직하라. 너의 음식, 너의 일, 너의 여가를 향유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느님께서 오늘을 네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안에 있도다.
오늘은 너의 것이니 거기서 기쁨을 취하여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고통을 취하여 사람이 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 나라라는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내려주실 완성된 미래는 오늘 안에서 서서히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오늘에 충실하여야 하며, 오늘에 충실하기 위해 오늘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구세주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통회와 슬픔의 단식을 했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오늘’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알 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결혼식장에서 통곡하고 초상집에서 환호성을 올리는 미련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신앙인이라면 주님과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웃어야 할 때라면 웃어야 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오늘 이 시간을 오늘을 사는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는 법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어머니의 지혜 -문화순 수녀- 알래스카의 여름 하늘은 흰구름 운동장이다. 높은 산이 많고, 산 넘어 구름 공장이 있는지 매일매일 뭉게구름이 끝없이 피어오른다. 구름이 하늘을 도화지 삼아 온갖 그림을 그리는데 멀리서 바라다보면 목화꽃이 무더기로 핀 것 같기도 하고, 배고픈 날은 솜사탕 같기도 하다. 구름을 보면서 나는 늘 아버지의 꽃상여를 생각한다. 이른 봄 아버지를 선산으로 모시던 날, 하얀 꽃상여를 따르던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상두꾼의 상엿소리며 방울소리가 듣기 좋아 귀를 기울였다. 이로써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고 오빠들과 새언니들이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었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이수락 신부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생각과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옷이나 신발은 몸에 잘 맞아야 하는데 얼마 전까지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옷과 신발은 상식적으로는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지나치게 크고 긴 옷을 입고 그것이 더 멋있다고 유행에 잘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또 신발은 어떤 것을 주로 신었습니까? 자기 발보다 한참 큰 사이즈를 신어서 걸음걸이마저 이상하게 변형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심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도 기이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이 인기가 있다고 방송과 매체에서 이야기하면 자신의 적성과 재능은 무시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합니다. 심지어 대학의 여러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도 많은 수가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공무원 임용고시를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소신을 가자고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매사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여건을 고려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말씀을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하는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거나,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 자기만 안하면 괜히 뭔가 뒤처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시류나 유행을 타지 않고 소신껏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신념이 흔들려서는 안 될 테니까요.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왜 하는지 목적과 명분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것이 소신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소신을 갖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다짜고짜 당신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식은 속죄와 참회의 표시로서, 진정한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지 않으면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가 하라고 하니까, 또는 다른 신자들이 그렇게 하니까 등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행하는 단식이나 참회를 반기실 리 없습니다. 아주 작은 기도나 선행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소신껏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언덕길에서 무거운 수레를 힘차게 끌고, 한 꼬마가 뒤에서 열심히 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언덕을 다 오른 두 사람은 다정히 앉아 서로 땀을 닦아 주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하도 정겨워서 지나가던 사람이 앞에서 수레를 끌었던 어른에게 “저 아이가 당신 아들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 저놈이 바로 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있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답니다.”하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행인은“저분이 네 아버지로구나. 아버지를 도와주는 네가 무척 대견스럽구나!”하고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예? 저분은 제 아버지가 아닌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이겠습니까?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인들에게, 특히 고정된 가치관에 얽매인 지도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는지를 잘 알아들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에 깃든 낡은 것을 모두 비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내가 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선과 악, 성과 속,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는 천국의 복락만을 좇는 개인적 구원관입니다. 셋째는 원죄만을 강조해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숙명론에 빠지는 일입니다. 넷째는 율법주의, 교리주의, 광신주의입니다.
축제와 단식의 긴장감 -박상대신부-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시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된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마르 2,16)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단식(斷食, fasting)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구원과 축제의 현재만 있으므로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은 신랑을 빼앗긴 신부처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슬퍼하며 단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시대를 기뻐하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으면서 축제와 단식의 긴장 속에서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유 광수신부-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왜 사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왜 사는가? 라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런 질문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이다. 즉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진실히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이며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 상대이기 때문에 떨어질 래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시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나던 일을 말하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 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 사람도 없었으며 소금으로 문질러 줄 사람도 없었고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 너를 애처롭게 보아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떨어지던 날, 너는 들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이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 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 몸을 감싸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 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에제 16,4-10)
하느님은 인간의 한쪽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의 한쪽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늘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이고 행복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하느님한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한테 사랑받을 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귀함이며 동물과 다른 점이다. 즉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한테 사랑받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을 신랑으로 삼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이고 인간의 품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하고 그것이 곧 행복이고 생명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신랑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 30, 19-20)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하느님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면 인간이 되고 돈을 사랑하면 되고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이 되고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의 노예가 된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닮아 가고 하느님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이루워 질 수 없었던 모습이 이루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과 하느님이 함께 하는 성찬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이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제는 헌옷을 입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새 옷을 입어야할 때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할 때이다.
새 천조각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구멍을 채우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충만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 천조각은 비록 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천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충만함이다.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생명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코후6, 17)
복음을 듣는 자세가 있다. 즉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새 천 조각이란 복음이고 헌 옷이란 자기의 고정관념, 생각, 자기의 삶의 틀, 선입관 등이다. 복음을 들었으면 자기의 고정 관념에 얽매여 있지 말고 복음의 생각으로 바뀌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복음 묵상할 때보면 복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활에 맞게 말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복음 묵상이 아니라 일종의 생활 나눔일 뿐이다. 복음 묵상을 했으면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한다. 복음 묵상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고 복음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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