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토요일 (12일째)
이르쿠츠크 시내 구경하기
새벽에 잠이 깨어 누워있으니 승무원이 바이칼이라고 말해준다.
모두 깨어 밖을 보니 어슴푸레한 새벽의 바이칼이 보인다.
오늘 저녁이 되어야 이틀 전에 입었던 옷을 벗을 수 있다.
샤워는 커녕 세수도 못했다.
불편했냐고?
결론은 무지 편했다는 거다.
같은 옷을 삼일 동안 입고 씻지 않고 대충 물휴지로 닦고 지내니 시간이 널널한데다 삶이 참 단순해진다.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의 65시간도 이제는 걱정이 안 된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일곱시 좀 넘어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하니 택시들의 호객 행위가 한창이다.
이르쿠츠크는 인구가 60만명 정도 되는데 대학이 20개나 있으며, 하바롭스크나 브리야트족 학생들도 많아 동시베리아의 교육 중심 도시라고 한다.
도시의 첫 인상이 참 신선하고 좋다.
택시를 타고 강을 건너 이르쿠츠크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맡겨놓고 호텔 안내원에게 지도를 펴서 호텔 위치와 키로프 광장까지의 도보 시간을 물어 보았더니 친절하게 영어로 가르쳐 준다. 키로프 광장까지 가는 길에 예쁜 목조 건물들이 많아 즐겁게 사진도 찍으며 걸었다.
울란바토르와는 달리 이곳은 곳곳에 길 표지만이 설치되어 있어 시내 구경을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다.
키로프 광장은 볼셰비키 당원이자 소련 공산당원인 러시아의 정치가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에서 따온 곳으로 광장 주변에는 주 정부 청사, 스파스카야 교회(Spasskaya Church),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 바가야부레니에 사원 등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분수가 있으며 수많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러시아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멋지게 광장이나 공원을 꾸미고 있어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처음 눈에 띈 곳은 림스키사원.(로마 가톨릭 교회라고도 함)
이르쿠츠크에 단 하나뿐인 카톨릭 성당으로, 쫓겨 온 폴란드인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원래 목조 건물이었던 것이 화재로 소실되자 성금을 모아 다시 석조로 건축한 것으로 19세기 대표적 양식인 네오고딕 양식이며 오르간 홀에서는 요즘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한다.
내부도 구경하고 싶었으나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외관만 감상하고 바로 옆에 있는 바가야부레니에사원으로 향했다.
바가야부레니에사원은 외부의 채색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교회로 시베리아의 바로크 형식의 보석 같은 건물이라는데 나는 외부보다도 내부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감동에 휩싸였으니 바로 미사 중 부르는 찬송가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의 목소리.
러시아 정교회는 사람의 목소리를 신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소리라 생각하여 찬송가에 오르간과 같은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충분히 공감이 갈만큼 숭고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천상의 목소리에 교회 건물을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다.
키로프 광장 주청사 뒤쪽에 있는 승리광장에는 사시사철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이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과 싸우다가 죽은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거리의 무명용사 공동묘지에서 불을 릴레이로 가져왔으며 그곳 공동묘지의 흙도 가져왔다고 하는데 하바롭스크에도 영원의 불이 있는 걸 보면 러시아라는 곳은 온 동네에 레닌 동상이나 레닌광장이 있듯이 곳곳에 영원의 불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르쿠츠크 출신 20만명이 참전하여 그 중 5만명이 전사했다니 영원의 불을 켜 놓고 추모하는 시민들의 마음에 가슴이 저려온다.
키로프는 볼세비키 혁명 이후 백군이 장악하고 있던 이르쿠츠크에 잠입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완전히 장악하고 백군의 수장 콜차크 제독을 제거한 사람으로, 이르쿠츠크에서는 레닌 못지않은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여기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그가 제거한 정적 콜차크 제독의 동상이 서 있으니 시대가 빚은 두 영웅의 운명에 만감이 교차한다.)
몇 발작만 걸으면 스파스카야 교회이다.
스파스카야 교회는 석조 양식의 정교회인데, 이르쿠츠크뿐만 아니라 동시베리아 전체에서 보존 가치가 가장 높고 오래된 건물로 외벽에 벽화가 장식된 유일한 교회라는데 오늘 본 교회 중 단연코 제일 아름답다.
동쪽 벽의 웅장한 벽화는 다음 세 가지 주제로 묘사되어 있다는데 왼쪽에는 시베리아 원주민인 브리야트인의 세례식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이르쿠츠크 최초의 성자의 모습이 있으며, 중앙에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이제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우리는 추위에 떨게 되었는데 배고픔 못지않게 추위에 공포증이 있는 나는 돗자리를 망토로 둘러쓰게 되었고, 나랑 키가 고만 고만한 말숙샘도 추위에 떨고 있어 둘이서 돗자리 하나를 쓰고 걸으니 뒤 따라 오는 영순샘이 웃겨 죽겠단다.
거기에 배까지 고파 더 서글픈 마음이 들었는데 그 순간 눈에 띈 케밥집이 있어 가게로 돌진하여 케밥을 먹으니 나 태어나 그렇게 맛있는 케밥은 처음이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을 코 앞에 두고 우리는 한참을 방황했는데 문제는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 때문에 몇 번을 망설이다 목숨을 걸고 대로를 횡단했는데 간이 콩알 만해지는 순간이었다.
수도원 입구에서 제일 처음 우리를 맞은 건 콜차크 제독의 동상.
제독 탄생 13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 건립한 것인데 백군과 적군의 내전에서 황제를 위해 혁명군과 싸운 사람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소비에트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이제는 여유로운 시대적 분위기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영화 제독의 연인의 감동과 여운 때문인지 콜차크 제독의 동상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면 테카브리스트 트루베초코이의 아내 에카쩨리나의 무덤과 무명용사의 무덤이 보인다. 쿠릴 열도와 알레스카를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켜 러시아의 컬럼버스라고 불리는 셀레호프의 무덤이 가장 크고 화려하게 세워져 있는데 우리가 관심있게 쳐다보니 옆에 있던 러시아인이 짧은 영어로 자랑스럽게 셀레호프에 대해 설명해 준다.(그러면 뭐하나? 알레스카는 지금 어이없게도 미국 땅이 되어 있는데.)
내부가 아름다운 수도원을 구경하고 난 뒤 호텔을 나선 후 계속 참고 있던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화장실은 바깥 한 귀퉁이에 위치에 있었는데 줄을 서 있으니 앞에 있던 러시아 여자가 한사람 더 들어오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는데...
맙소사!
변기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사이엔 벽도, 그 무엇도 없었다.
순간 급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러시아 여자 능청스레 웃으며 바지를 내리기에 나도 당당한 척 하며 나란히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데 이 여자 가스까지 시원하게 방출하신다.ㅋ
아! 드디어 외국인과 엉덩이까지 트는구나.
버스를 타고 시티투어에 나섰다.
요금은 12루블.
비 오는 이르쿠츠크 거리를 구경하다 다시 반대방향에서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이틀 만에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니 몸이 상쾌하다.
비가 많이 내려 잠시 쉬다 비가 약해진 걸 보고 가로수길을 걸어 알렉산더3세 동상으로 향했다. 가로수길은 강과 숲을 동시에 보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길이다.
1908년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기념하기 위해 철도의 건설 후원자로 여겨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을 세웠는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에 법령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가 1960년 이르쿠츠크의 오랜 명물이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2003년 10월에 그 오벨리스크 대신에 원래의 알렉산드르 3세의 입상을 복원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바보짓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멋진 카페 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조사한 자료에 분명 오벨리스크는 철거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무슨 망각의 귀신에 씌었는지 일행들을 인솔해 오벨리스크를 찾아 나섰으니, 여기에 호기심 천국인 미경샘과 끝장 정신이 소유자 비송님까지 합세하여 철거된 오벨리스크를 찾겠다는 의지를 불 태워 강변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으니 예쁜 카페 마을을 만나게 되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이날 참 보람 없이 발품을 팔 뻔 했다.
너무도 예쁜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카페마을.(이곳이 나무 마을 130번 거리임을 바이칼 호수를 다녀온 며칠 후에야 알았다.)
그리고 덤으로 발견한 예쁜 크레스토즈비젠스카야 교회.
250년이나 된 오랜 교회를 얼마나 관리를 잘 했는지 잘 꾸며진 정원과 성당을 기분 좋게 구경하고 중앙시장을 찾아 나섰다.
중앙시장까지의 거리가 제법 되는데다가 8시에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어서 시장을 목전에 두고 발걸음을 돌려 큰 슈퍼에서 간단하게 시장을 봤는데 여기서 구입한 사과가 최고였다.
새콤달콤한데다 육질까지 아삭 아삭했는데 이후 이곳만큼 맛있는 사과를 러시아에서 살 수 없었다.
첫댓글 교회에서 들었던 것이 레퀴엠은 아니었을까? 죽은자를 위한 미사 같았는데, 아니었나? 장소가 헷갈리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