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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뜻한 아버지!
저희 살레시오회를 포함한 살레시오 가족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성인 및 복자, 가경자, 하느님의 종 등 교회로부터 성성에 대한 공식적 인정을 받은 인물이 많은 편입니다.
헤아려보니 성인 10분, 복자 19분, 가경자 13분, 하느님의 종 9분.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돈보스코의 선한 영향력에 견인되어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룩한 분들 가운데 착한 목자이자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유명한 분이 돈보스코의 3대 후계자이신 복자 필립보 리날디(1856~1931) 신부입니다.
이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따뜻한 부성애는 정말 각별했습니다. 단 하루라도 그와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 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오라토리오 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 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지원자가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살레시안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형제가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그를 대성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의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지원자는 다시 죽기보다 들기 싫었던 라틴어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애 오랜 양성 과정을 다 마친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돈보스코요, 제2의 필립보 리날디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어제 오늘 복음은 계속 착한 목자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많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뜻한 아버지!
부성애,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단어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뿐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따뜻한 부성애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0,11-18
이런 목자들은 조심해야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올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0-11)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값어치, 즉 '정체성'과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자존감을 도둑질하는 가짜 목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은 세 부류의 지도자를 통해, 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피를 쏟으며' 우리를 하느님이라 불러주는 목자만을 따라야 하는지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유형: 자존감을 짓밟아 영혼을 멸망시키는 교사
도둑의 특징은 양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부족해, 너는 문제가 많아,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말하며 상대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들이 바로 가짜 목자입니다.
영화 '위플래쉬' (2014) 속 플렛처 교수는 최고의 드럼 연주자를 만든다는 명목하에 제자 앤드류를
혹독하게 몰아세웁니다.
그는 제자의 뺨을 때리고 부모를 욕하며, 그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짓밟습니다.
플렛처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다."
그는 인간의 한계와 열등감을 자극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제자의 인격과 영혼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것이 도둑의 모습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한계 속에 가두고 지배하려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출처: 데이미언 셔젤 감독, 영화 '위플래쉬' 2014)
두 번째 유형: 말로만 높여주고 피는 쏟지 않는 거짓 교사
가장 교묘한 가짜 목자는 '달콤한 말'로 자존감을 세워주는 척하지만, 정작 그 자존감의 값을 치르기 위한 희생은 전혀 하지 않는 '삯꾼'입니다.
영화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 (1969)에서 에든버러의 여학교 교사인 진 브로디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정예 부대다, 너희는 최고(Creme de la creme)다"라며 환상적인 자존감을 불어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녀를 숭배하며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브로디 선생은 아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실력'이나 '고결한 인격'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로맨틱한 환상과 정치적 선동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습니다.
결국 그녀가 키워낸 자존감은 모래성과 같았습니다.
한 제자는 그녀의 부추김에 넘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허무하게 전사하고, 다른 제자들은 스승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증오자로 변합니다. 브로디는 제자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에 비친 '위대한 스승'이라는 자기 영광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피 흘려 제자를 지키지 않고 말로만 추켜세우는 지도자는 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겁한 거짓 목자일 뿐입니다.
(출처: 로널드 님 감독, 영화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 1969)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인 요한복음 9장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을 빚으실 때의 그 재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소경의 망가진 눈을 '재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뜬 그에게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기상천외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요한 9,9).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은 "Ego Eimi",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쓰시는 성호인 "나는 나다"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 눈이 만들어지는 순간,
자신이 단순히 눈먼 거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바로 이런 분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죄인이고, 너는 흙에 불과하며, 너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벌레다"라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 눈에 발라주시며 "너는 나다.
너는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해주시는 분입니다.
이 정체성을 주는 분만이 우리의 참된 목자입니다.
세 번째 유형: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자신의 피를 쏟는 참된 목자
참된 목자는 양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부어
그 가치를 증명해내는 분입니다.
「예화 3: 교육의 목자 마리아 몬테소리 - "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신적 존재란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첫 여성 의사였던 마리아 몬테소리는 로마의 빈민가 산 로렌초에
『어린이의 집』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당대 사회가 '교육 불능'이라고 낙인찍은 아이들에게 "너는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작품이다"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단순히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이들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의사로서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모두 내던졌습니다.
무릎 관절이 닳도록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어 다녔고, 아이들의 작은 손 근육 하나가 발달하도록 밤을 새워 교구를 직접 깎아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그녀를 미쳤다고 비웃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피)을 쏟아부어
아이들의 자존감을 실재하는 능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스승의 피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마침내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천재들로 부활했습니다.
(출처: 마리아 몬테소리 저, 『인간 마음의 흡수』)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
주님은 입으로만 "너는 소중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심으로써, 우리의 몸값이 하느님의 아들의 생명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공포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주님이 피로 보증해주신 나의 자존감을 먹는 것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희생은 하지 않는 세상의 가짜 목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지배하려는 도둑들을 떠나십시오.
오직 여러분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만을 목자로 삼으십시오.
"너는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착한 목자”라 부르신다. 이 목자는 단순히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분이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성취될 사랑의 완성을 미리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를 삯꾼과 대비시켜 말씀하신다. 삯꾼은 양에 대한 사랑이 없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14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목숨을 준다.’고 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다. 이는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기꺼이 내어놓으심을 뜻한다.”(In Ioannem Hom. 59,3) 곧, 예수님의 희생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헌신이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라고 말씀하시며, 이 관계를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비유하신다.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친밀한 일치를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은 은총을 통해 우리를 아신다.”(In Ioannem Tract. 45,3) 곧, 우리의 신앙 고백 안에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더욱 깊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16절)라고 말씀하시며, 한 목자 안에서 한 양 떼를 이루는 보편적 구원의 뜻을 드러내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구원의 공동체 안에 불러들여 오리라는 약속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교회는 하나이고, 신앙도 하나이며, 모든 백성을 견고한 몸의 일치로 모으신다.”(De unitate Ecclesiae 23) 착한 목자는 모든 양을 모아 일치된 공동체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 받은 명령을 자유롭게 완수하신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 착한 목자는 당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시며, 그들을 하나의 양 떼로 모아 한 목자 아래 일치시키신다.”(6항) 곧, 십자가의 순명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사랑의 절정이며,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근원이 된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우리는 이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야 한다. 때로 세상의 이리와 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착한 목자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심리학자 마크 셀리그먼이 고안한 ‘감사의 방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울증 치료법이 있습니다. 먼저 눈을 감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제대로 감사 인사를 건네지 못한 사람을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단, 생존해 있는 사람 중에 고르게 했습니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면, 그 사람에게 약 삼백 단어 분량의 감사 편지를 쓰라고 한 뒤에 찾아가 편지를 읽어주라고 했습니다. 몇 달 뒤, 감사를 표시한 사람과 감사를 받은 사람의 행복도를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전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감사와 행복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치료법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기를 참 힘들어합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이유를 들지만, 자기에게 올 행복을 걷어차는 것입니다. 특히 욕심 등의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게 되면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삼 남매를 둔 과부가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호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호떡 파는 과부에게 한 노신사가 다가와 “아주머니, 호떡 하나에 얼마죠?”라고 물었습니다. 천 원이라고 말하자, 노신사는 천 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아주머니가 “아니, 호떡 가져가셔야지요.”라고 말하자, 노신사는 “아니오. 괜찮습니다. 먹는 셈 치겠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1년 동안 계속 노신사는 방문했습니다.
흰 눈이 내리는 겨울날, 노신사는 전과 마찬가지로 천 원을 테이블에 놓고 가려는데, 아주머니가 황급히 말했습니다.
“손님, 호떡값이 올랐는데요?”
우리도 이처럼 감사할 대상과 감사한 이유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요한 10,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인 당신의 모습과 삯꾼의 모습을 날카롭게 대조하십니다. 삯꾼은 돈(삯)을 위해 일합니다. 양들과의 관계는 철저히 ‘계약’과 ‘이해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이리(위기)가 나타나면 그는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게 됩니다. 그에게 양은 쓰고 버릴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당신의 ‘소유’이자 ‘가족’으로 여기십니다. 이리가 올 때 도망치는 대신 양들을 대신해 이리에게 찢기는 길을 택하십니다. 조건 없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생명)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착한 목자이신 주님입니까? 아니면 삯꾼인 세상입니까?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참된 목자의 맹목적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역시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이란 무엇일까? 그건 한 순간의 일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과정이다(김연수)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4.27.월.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착한 목자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한 마리 양을 위해
온 생명을 거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착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그것은 빼앗기는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는사랑입니다.
착한 목자의 삶은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 내어줌으로
완성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아픔을 아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위험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양들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양들은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을 들을 때
다시 길을 찾습니다.
착한 목자의 길은
자기 중심을 내려놓고
우리를 살리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양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돌보시는 분,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분입니다.
끝까지 떠나지 않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존재입니다.
착한 목자
착한 양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10,16)
'옴니부스 옴니아!'
오늘 복음(요한10,11-18)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14-15)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10,16)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와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과 구원이 유다인들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넘어 모든 이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이신 분', 곧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나의 사랑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너에게로 열려져 있어야만 합니다. 끼리끼리를 뛰어 넘어 나와 다른 너에게로도 향해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11,18)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십자 나무에 매단 유다인들은 자기들끼리 안에만, 율법이라는 틀 안에만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어지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고, 착한 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들을 잘 따라가는 착한 양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1-18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