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3-7 베드로가 집을 나섰고 다른 제자도 뒤 따라 나서 둘은 함께 달렸는데 뒤 따르던 다른 제자가 앞서 무덤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무덤 입구에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았다.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머리 수건과 수의가 각각 따로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전 말씀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에 찾아가서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 옮겨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원어의 3절 앞에는 “그러므로” 라는 말이 있다. 마리아의 말을 들었으므로 베드로와 요한도 간 것이다. 두 제자가 무덤에 가는 모습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모습이다. 2절에서 마리아가 달리기 하는 그림이 이제 두 제자들의 달리기 그림으로 이어진다. 3절에서는 베드로의 이름이 먼저 나왔고 나갔다는 말은 단수이기에 베드로만 먼저 집을 나선 것이다. 베드로의 급한 성격으로 보아 베드로가 먼저 집을 나선 것이다.
원어에서는 그 다음에 “그리고 다른 제자도” 라는 말이 나온다. 다수의 영어 번역들과 한글 개역이나 새번역은 두 제자가 함께 나선 것처럼 번역했다.하지만 원어는 베드로만 먼저 나섰다는 것이고 이어서 “그리고 다른 제자도” 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는 다른 제자 역시 집을 나섰다는 말인데 반복되는 집을 나섰다는 말은 생략한 것이다. KJV는 원어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 그 다음에 무덤을 향해 갔다는 말은 복수이기에 둘이 함께 무덤을 향해 갔다는 것이다.
4절에는 두 사람이 함께 계속 뛰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먼저 집을 나섰기에 베드로가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앞질러 달렸다고 했다. 역시 육상 경기를 중계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베드로의 뒤를 따르던 다른 제자가 앞서 달리는 베드로를 추월했다고 중계방송하고 있다. 다른 제자가 달리기를 더 잘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였기에 이 제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보다 앞서서 달려간 것이다. 이 제자는 무덤에 먼저 도착했다.
5절에서 이 제자는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 수의인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 제자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소심한 성격인 것 같다. 당시 무덤의 구조는 입구는 좁고 둥글게 되어 있고 안쪽은 네모난 방이 있었다. 예수님의 시체는 오른쪽이나 왼쪽 벽에 입구쪽을 향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 제자가 본 것은 예수님의 발 있는 쪽의 수의를 본 것이다. 머릿 수건을 보았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5절에서 본다는 말은 자세히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6절에 보면 요한의 뒤를 따라 달려오던 베드로가 도착했다. 베드로는 볼 것도 없이 무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성격이 급하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던 베드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6절에서 베드로도 세마포를 보았다. 그러나 6절에서 베드로가 보았다는 말은 5절의 보았다는 말과는 달리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이 역시 중계방송을 하듯 “베드로 선수 예수님의 수의를 좌 우로 훑어보며 자세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현재형으로 기록했다. 요한은 수의의 아랫 부분만 보았겠지만 베드로는 수의 바로 앞에 서서 전체를 자세히 살펴 본 것이다.
베드로가 본 결과가 7절에 나온다. “또 머리를 샀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라고 했다. 요한이 무덤 입구에서 볼 때 이 수건은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래 그림처럼 머리가 입구의 벽쪽을 향해 따로 놓여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당시 유대인들은 시체의 머리를 수건으로 터번을 만들 듯 칭칭 감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1:44절에 보면 죽은 나사로가 수건을 동인채 걸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그냥 덮어놓은 것이라면 스스로 벗고 나왔을 것인데 이는 칭칭 감겨 있었기에 스스로 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수건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해도 그 수건을 혼자서 푸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풀었다 해도 그 풀은 수건을 다시 잘 정리해서 머리 있는 쪽에 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녁에 샤워할 때 옷을 벗어 잘 펴서 샤워장 앞에다가 윗도리는 위에 아랫도리는 아래에 놓고 양말도 발이 있는 자리에 잘 놓을 사람 있는가? 그냥 벗어 던졌다가 샤워하고 나와서 빨래 통에 던질 것이다. 더구나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무덤에 얼굴을 감았던 붕대 같은 긴 수건을 다시 잘 정리해서 머리 있던 자리에 따로 놓고 또 옷은 그 아래에 원래 놓여있던 모양대로 놓을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나친 정리습관을 가진 결벽증 환자이시다.
문제는 또 있다. 만약 예수님이 나사로처럼 살아나셨다면 머릿 수건만 풀어 놓고 옷은 벗어 놓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어느 누가 죽었을 때 입었던 옷이니까 재수없다고 벗어 버리고 벌거벗고 다닐까? 따라서 수의가 원래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 놓여있고 머리를 쌌던 붕대 같은 수건은 머리가 있던 곳에 따로 놓여 있었다는 것은 부활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처럼 시체가 벌떡 일어나 옷을 벗어 놓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분명히 예수께서 새로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셔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20:19, 20절에서 벽과 문을 뚫고 통과하신 것처럼 옷을 통과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옷도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셨기에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대로 그 자리에 정리되어 있고 옷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던 것이다. 몸만 빠져 나오셨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몸은 전에 있던 그러한 육신이 아니다. 영광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되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의와 머리를 쌌던 천만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둘 수 없다.
또 어떤 이들은 도둑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도둑들은 귀중품을 훔쳤지 시체를 훔치지는 않았다. 만약 도둑이 들었다면 마구 풀어 헤쳐 시체에 있는 귀중품을 빼 가지고 가고 시체와 옷은 그 자리에 흩어진 채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마법을 하던 사람들은 시체를 훔쳐가기도 했다고 한다. 더구나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은 시체는 특별히 더 큰 마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어 시체를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 시체를 그냥 들고 가지 머릿 수건 벗겨놓고 옷도 다 벗겨서 정리해놓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수의가 그대로 놓여 있고 머릿 수건도 정리된 채 머리가 있던 쪽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옷을 뚫고 빠져나갔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안된다. 이는 예수의 시체를 사람들이 훔쳐갔는데 제자들은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설은 말이 안된다. 머리를 붕대처럼 쌌던 수건은 머리에 놓고 수의는 그 아래 그대로 놓여있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