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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
15세기 중엽 조선의 정치문화는 2곳으로 양분되어 경쟁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한곳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이고, 다른 한곳은 논산·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지역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같은 지역 내에서도 또다른 파벌이 만들어지면서 파벌의 지역성이 약간은 혼미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선말기까지 이 두 지역을 근거로 커다란 2개의 문화가 형성되어 온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우리는 흔히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구분한다. 영남학파는 남인계열로, 기호학파는 서인계열로 정치적 파벌을 형성하여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충청남도의 현존하는 반가 대부분은 서인계열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니게 된다. 조선시대 정치가들 중 많은 사람은 서인계열이었던 것이 그 이유다. 파벌정치를 논하자는 뜻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충남지역의 주거를 볼 때 우리는 또하나의 '눈'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 대표적인 실례가 사계 김장생 선생의 두계 은농재를 비롯하여 대전 회덕의 동춘선생 고택, 소재동의 우암선생 고택 그리고 논산 노성의 윤증선생 고택 등이다.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우암선생 고택은 일제 때부터 도시계획 등으로 인해 퇴락되어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을 뿐이다. 영남지방에 비해 여유있는 배치, 지형조건에 순응하려는 공간구조, 구조적으로 소박한 조형성 등이 충청지방 반가의 건축적 특징이다. 아산의 맹씨행단은 고려시대의 반가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손자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고 전해온다. 맹씨행단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개수를 하였지만 고려건축의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민가의 평면구조는 서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홑집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태백준령을따라 형성되어온 겹집구조와는 차이를 보여주는 평면이다. 그 중에서도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은 조선 후기의 반가와 서민주택이 혼재된 동족마을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조선 중기 당대 예학의 중심지
동춘당은 스승 사계를 닮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사의 절차를 그에게 물어 시행할 정도였다.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정책을 논의할 때 송준길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택은 그 전에 건립되었으나 별당인 동춘당은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하여 정침 앞쪽에 지었다. 계족산 등줄이 동남으로 흐르다가 또하나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이 봉우리가 계족산 제2봉 해발 320미터의 응봉산(鷹峰山)이다. 응본산의 한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구릉을 만들어 송촌동의 배산을 형성하게 된다. 응봉산 계곡 뒤에서 발원한 샘은 윗중리 뒤로 흘러 법동천을 만들고, 응봉산 계곡 앞에서 발원한 개천은 윗중리를 지나 오정동 양지말에서 유등천과 합수하여 금강으로 빠진다. 이 마을에서 보면 계족산은 조산이고, 응봉산은 진산이다. 옛날 회덕현에서 보면 계족산이 진산이지만 윗중리에서는 계족산이 조산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응봉산 자락을 등지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1995년에 시작한 택지개발로 인하여 주변이 모두 평탄지로 변해버렸다. 상전벽해라는 말과 같이 최근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이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사당 2채와 앞쪽에 따로 떨어져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 그 서측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이 문을 통해야만 된다. 안채는'ㄷ'자형 평면이며 3칸으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고 안방 뒤로는 골방이, 앞으로는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 동측으로는 안쪽에 건너방, 부엌, 행랑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안주인이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돌보는 곳이다.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강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도덕적 규범을 이곳에서 터득하게 되는 곳이다. 안채의 동측에 2개의 사당이 있다. 하나는 동춘선생의 위패를 모신 별묘이고, 다른 하나는 선대 조상을 모신 가묘이다. 둘다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앞쪽에 퇴칸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묘(祠廟)는 구역내에서 약간 뒤쪽의 동편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배치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배치규범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주택에 나타나는 공간적 특징중 하나는 내(內)와 외(外)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외의 구분은 집의 규모나 귀천에 관계없이 나타난다. 다만 심하고 덜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동춘선생 고택에서는 이와같은 공간의 내외 구분이 아주 명확히 보여지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격담을 둠으로서 내외를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을 '공간의 질서'라 한다면 이 질서는 유가적 교훈이 공간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별당인 동춘당은 고택 정면에 담으로 둘러져 있다. 조선조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5량집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주위를 간결하게 담으로 둘러치고 담안의 뒤쪽으로 물러 동춘당이 앉아있다. 마치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위를 꾸미지 않고 다만 소나무를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다. 별당 건축은 주택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이기도 하며 나아가 가장의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접객, 독서 한유(閑遊), 관상 등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는 부지 내에서도 경관이 좋은 곳을 택하고, 간혹 인공연당과 가산을 만들어 두기도 한다. 주택내에서의 생활기능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공동대화의 장소로, 또는 지역의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 것이 별당이다. 동춘당의 굴뚝은 초석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 유학의 은둔적 사고를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예를들면 남이 보는 앞에서는 편히 놀고, 먹고, 자는 행위를 부덕시했기에 따뜻하게 불을지펴 편히 쉬는것도 극히 자제해야 했다. 굴뚝이 높으면 불이 잘 지핀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서 '따뜻한 온돌방'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자제하는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다. 그려면서도 기능적으로는 굴뚝의 높이를 조절함으로서 온돌의 열기를 한꺼번에 빼앗기지 않고 서서히 유지할 수 있다. 동춘당에서는 창호 하단의 궁판을 의외로 크게 만들었다. 보통 이만한 궁판이면 상하 2단으로 처리하는데 1단만으로 처리한 것이다. 조선시대 반가에서는 유학적 덕목을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들면 남여공간의 엄격한 구분, 장유유서의 공간적 위계성 등이다. 이 고택에서는 또한 기호지방의 공간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옹색하지도 않은 입지조건, 건물 배치의 여유로움, 안마당의 공간적 여유, 근접을 피한 별당의 배치 등에서 기호지방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 주택에서는 가묘외에 별묘를 두고 있다. 별묘는 국가에서 공신의 위패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한 것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이를 '불천위(不遷位)'라고 한다. 동춘당의 가치는 구들과 마루가 접합되어 건축되었으면서도 남방적인 지역성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고상식(高床式)으로 꾸민점에 있다고 하겠다. 동춘당 주변에는 당시 사대부가의 별당이 여러개 현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별당건축은 당시 건축술의 정수를 기울여 조영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구이다. 동춘당의 규범적인 건축형식은 주변에 산재한 다른 별당 보다 정갈하고 균제감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중리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이 일대가 구획정리 되면서 바둑판과 같은 도시로 변모하고 말았다. 일찍이 선조들의 풍수적 국면을 고려한 마을구조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 건축의 고유한 정체성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 이왕기, 대전의 고건축. 「꾸밈 53호」 1985.4. 단청이 남아있는 유일한 주거건축
쌍청당 송유는 고려 때 진사인 극기(克己)의 아들로 태어나 26세때 부사정(副司正)이 되었다. 그는 절개가 강직하여 신덕왕후 강씨의 위패가 종묘에 모셔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달촌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송총동의 동춘당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입지조건과 주변환경은 동춘당을 참고하면 된다. 쌍청당 역시 원래는 뒤로 구릉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 택지개발로 인하여 바로 옆으로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앞에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입지의 원형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건물은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남향하고 있다. 서편에 위치한 본채의 대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앞을 지나면 본채의 동편에 조그만 일각대문을 두고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놓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쌍청당은 그리 여유로운 공간은 아니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서있다. 건물 뒤에는 구릉을 이용하여 화계를 만들어 두었고, 그 외에는 별도의 조경을 하지 않았다. 쌍청당 서측에는 일제때 건립된 사랑채(원일당)를 비롯하여, 안채, 창고, 연자방앗간이 있고 사랑채와 쌍청당 사이에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최근 안채를 헐고 조금 뒤에다가 'ㄱ'자 모양의 안채를 새로 지었다. 이 쌍청당은 다른 주택건축에서 볼 수 없는 단청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조선 초에는 단청이 유행하여 일반 민가에서 너도나도 단청칠을 하게 되었다. 단청 원료는 중국에서 수입해 쓰는 형편이므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비싼 고급 장식재였다. 이러한 사치를 보다못해 세종11년 공조에 명하여 [공사옥우(公私屋宇)에는 주칠(朱漆)을 물용(勿用)케하라]고 하였다. 이후부터는 일체 단청을 못하도록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의 단청은 다시 칠한 것이지만 민가에 이같이 단청이 되어 있는것은 대단히 희귀한 것이다. '雙淸'이라는 말은 박팽년이 쓴 당기(堂記)중 '하늘과 땅사이에는 바람과 달이 가장 맑다'는 데서 따온 것이다. 편액은 중추부사 박연(朴堧)의 글씨다. 쌍청당이 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시의 건축미학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점도 있지만 근처에 많이 남아있는 이와 유사한 별당건축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만들면서 이후에 지어지는 별당의 모범적인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구들과 마루가 접합되어 건축되었으면서도 남방적인 지역성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고상식으로 꾸민점에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사괴석을 한단 쌓아 만든 외벌대 기단이다. 초석은 막생긴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썼다. 기둥머리에는 대량과 도리를 사개맞춤으로 하고 공포는 초익공을 짜 올렸다. 내부의 전체 칸수는 6칸이 되는데 이 중 동측의 4칸은 마루로 하고 서측의 2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뒤편에 반침을 내 달고 반침 밑에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이러한 평면모양은 인근에 있는 동춘당이나, 송애당, 제월당과 같은 별당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온돌방과 마루 사이에는 문을 달아 두었는데 두폭짜리가 2개 모두 4폭이 된다. 이 문은 한쪽을 열어서 밑을 들어 매달면 마루와 방이 하나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집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커다란 공간은 유용하게 쓰인다. 그러나 이 문을 닫으면 온돌방은 아늑한 공간으로 변하고 당주(堂主)는 따?하게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된다. 대청 마루의 정면과 동측의 각칸에는 2분합 여닫이문을 달아 두었다. 문살은 촘촘하게 살을 만든 띠살문이다. 마루의 뒤쪽 2칸에는 2분합 골판문을 달았는데 골판문이란 널찍한 문살에 얇은 판자를 유리처럼 끼운 것을 말한다. 비록 후대에 보수가 있었지만 주변에 남아있는 별당 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것으로 그 후에 지어진 별당의 규범적인 형식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별당 중에서 단청이 되어 있는 사례는 이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 주변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쌍청당을 비롯한 몇 개의 조선시대 건축문화재가 개발구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도시개발은 문화재보호를 무시하고 도시기능과 계획의 편의성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계획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쌍청당 주위는 바둑판과 같은 도시가 되었고, 건축문화재를 위협하는 높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인근에 송애당이 있고, 조금 떨어져 동춘당과 송용억가옥 등이 있어 이 일대가 역사 문화환경으로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으나 이제 그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 이왕기, 대전의 고건축. 「꾸밈 53호」 1985.4. 우암과 북벌을 논했던 유서깊은 김경여의 별당
조선조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 때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경여(金慶餘)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가 환도후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짓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당호를 송애당이라 하고, 자신의 호도 이때부터 송애당이라 했다. 송애당 김경여는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사계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러한 관계로 송시열, 송준길과는 동학이며 항상 같은 계열로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병자호란후 효종은 은밀하게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노론의 거두로서 정치적 입지가 막강했던 우암 송시열 또한 북벌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하였다. 우암은 북벌문제를 가깝게 지냈던 동춘당 송준길, 송애당 김경여와 심각하게 상의 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논의는 이 세사람의 고향에서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송애당이다. 따라서 송애당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을 논하던 역사적인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건축사적으로는 기호지방 별당건축의 가장 전형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이 건물로 당시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건축미학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쌍청당과 불과 100미터 떨어진 곳에 인접해 있다. 동춘당과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입지조건은 쌍청당과 유사하다. 원래 뒤로 구릉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 택지개발로 인하여 바로 옆과 뒤로 도로가 지나가고 앞에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버렸다. 특히 주변 도로가 처마높이로 지나가는 바람에 송애당이 푹 꺼져버린 모습이 되고 말았다. 정침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별당인 송애당만 남아있다. 주위는 담장이 송애당을 에워싸고 있다. 최근 택지개발을 하면서 대문 바로 앞에 조그만 잔디밭을 조성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높은 건물들로 채워져 버렸다. 인접해 있는 쌍청당, 동춘당과 같은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에 5량집 구조로 되어있다. 다만 대청의 위치와 온돌방의 위치가 앞서 두 건물과 바뀌었고 반침(상부반침 하부 아궁이 함실)이 다른 별당에서는 반칸이 밖으로 튀어나온데 반해 여기서는 반칸이 들어가 붙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후면을 제외한 3면은 좁은 퇴마루를 돌려 설치해 두었다. 대청의 창호는, 정면2칸을 4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로 하고, 측면과 후면은 장판문 쌍여닫이로 하였다. 온돌방과의 사이는 3분합 맹장지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온돌방 전면에는 머리중방위에 쌍여닫이 띠살문, 측면은 외여닫이 띠살문으로 되어 있다. 가공석 2단으로 된 기단위에 방형주초석을 놓고 8치각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조각된 양봉(梁棒)이 내외로 돌출되어 있다. 세부적으로는 쌍청당보다 오히려 동춘당과 비슷한 구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청 천정은 연등천정인데 합각부분만 우물반자로 마감하였고 온돌방은 우물반자위에 종이 바름을 하였다. 용마루 끝에 붙어있는 기와는 마치 잡귀라도 쫓을 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적당히 퇴색된 목재의 색깔이 고건축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송애당주변 역시 도시개발로 인하여 바둑판식 도로와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송애당 경계선과 인접하여 4차선도로가 처마높이로 지나가고 있다. 역사적 문화환경을 무시한 도시개발로 인하여 귀중한 문화유산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단적인 사례이다. 참고문헌 : 이왕기, 대전의 고건축. 「꾸밈 53호」 1985.4. 임금의 사치를 지적한 송규렴의 별당과 고택
제월당은 조선조 숙종때 문관이며 대사헌을 지낸 제월당 송규렴(宋奎濂)의 별당이고, 옥오재는 그의 고택 당호이다. 제월당은 송규렴의 호이고 옥오재는 송규렴의 아들이자 대제학을 지낸 아들 송상기의 호다. 송규렴은 송준길에 글을 배워 25세때 명경과에 급제하였고 승지, 대사헌을 지냈다. 송규렴이 대사헌직에 있을 때 임금인 숙종에게 근래의 4가지 폐단을 건의했다. 이것이 유명한 시폐사조(時幣四條)이다. 하나는, 덜 받으라는 세금을 더 거두고, 임금이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다. 둘은, 관청인원을 조정,경비를 절약하고, 임금의 사유재산도 국비에 보태라. 셋은 임금의 사치를 배격하고 솔선수범하여 낭비풍토를 없애라. 넷은 지방관리들이 세금을 횡령하니 철저히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세태와 크게 차이가 없다. 동쪽에 위치한 계족산 능선이 주택의 뒤를 흐르면서 배산을 형성하고 서쪽으로 시야가 터진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물에 동측으로 인접하여 지나가고 최근 대전 신탄진간 8차선 도로가 건물의 일부를 잠식하면서 지나가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이렇게 동서 양측으로 큰 도로가 지나가면서 입지적 조건과 공간구성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현재는 정침(사랑채. 안채)과 별당, 사당, 행랑채가 남아있다. '一'자형 사랑채(옥오재) 북측에 붙여 'ㄷ'자형 안채가 연결되고 사랑채 정면 남측에 별당인 제월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전 신탄진간 산업도로가 나기 전에는 제월당 주변에 사괴석 담이 둘러져 있었고, 대문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제월당 서측에 별도로 있었다. 산업도로 개통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공간배치가 변모되었다. 사랑채와 별당 사이의 동측편에 사당이 있다. 흔히 사당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가까운 곳이나 안채의 치우친 후면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여기서는 위치와 좌향이 조금 다르다. 즉, 사랑채 동남쪽에 서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제월당 남측에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별당 앞에는 연못이 있었으나 근래에 들어와 메워 없어져 버렸다. 별당인 제월당은 정면3칸, 측면2반의 팔작지붕에 5량집 구조이다. 평면은 전체가 6칸집으로 우측 4칸은 대청이고 좌측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온돌방 뒤쪽으로 한칸을 더 내어 상부는 반침, 하부는 아궁이 함실로 쓰고 있다. 토단까지 합하여 약 한자반 높이로 기단을 쌓고 그위에 역시 방형 주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주초석에 맞추어 7치각 방주를 세웠고 기둥머리에 조각없이 단순한 양봉(梁棒)이 내외로 돌출 되었다. 소로받침 없이 기둥과 대들보 위에 굴도리를 얹어 결구하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다. 대청의 창호는 온돌방쪽을 제외한 3면은 모두 띠살문 들어열개로 되었고 온돌방과의 사이는 전칸이 3분함 맹장지 들어열개로 되어있다. 외부와 통하는 온돌방의 창호는 쌍여닫이 2개와 외여닫이 1개가 달려있고 모두 띠살문이다. 대청의 천정은 합각부분에서 만나게되는 복잡한 부분을 충량(衝梁)과 결구하여 우물천정으로 하고 온돌방의 천정은 종이반자로 마감하였다. 사랑채는 제월당과 담을 사이에 두고 바로 뒤 북측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5칸, 측면1칸에 좌측에서 4칸은 퇴마루가 놓여 있다. 좌측2칸은 대청마루이고 가운데 2칸은 사랑방이다. 사랑채 우측은 부엌이고 그 상부는 사랑방에서 다락으로 사용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중문을 끼고 붙어서 'ㄷ'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와 사이에 안마당이 있고 그 뒤쪽으로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를 제외하면 'ㄱ'자형 평면이 되는데 동쪽인 우측으로 여섯개의 방이 병립되어 있고 북쪽편에 부엌1칸, 방2칸, 대청3칸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연결되면서 5칸의 퇴마루가 부엌쪽으로 붙어있다. 이곳에서는 다른 양반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남녀 공간의 엄격한 구별이 다소 누그러져서 건물간의 연결이 여유가 있고 개방된 느낌을 준다. 가묘는 별당과 사랑채 사이의 동측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묘 앞에는 몇 단의 돌계단이 있고 묘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묘는 정면 1칸에 앞으로 툇마루가 있고 맞배지붕의 조그만 규모이다. 이 가옥은 숙종때 건립된 것으로 별당을 가지고 있으며 별당은 이 지방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형태이다. 동춘당은 송준길, 기국정은 송시열, 송애당은 김경여, 쌍청당은 송유의 별당으로 모두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별당의 평면형태도 유사하다. 이러한 별당을 가지고 있는 고택들이 한 지역에 인접해 있어 특이하다. 기호학맥의 중심지였던 역사성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지역의 특징적인 가옥형태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귀중한 역사문화 유적이 인접한 도로개설로 인해 대지면적의 거의 절반이 잘려 나갔다. 도시개발에 의해 문화유산이 훼손당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사적 문화환경을 훼손하면서 도로를 직선화하는 도시개발은 지양해야할 것이다. 한 번 훼손된 역사 문화환경은 영원히 복구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이 문화재에서 다시 한번 실감해 본다. 참고문헌 : 이왕기, 대전의 고건축. 「꾸밈 53호」 1985.4. 사랑채가 2개인 동춘당의 후손가옥
동춘당의 동편 약간 뒤쪽에 위치한 이 가옥은 동춘선생의 둘째 손자 송병하(宋炳夏)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송병하는 1646년(인조24)에 태어나 우암의 문인이 되어 수원부사, 의주부윤을 거쳐 장락원정을 지냈다. 이 가옥의 입지형국은 동춘당과 유사하며, 큰사랑채, 작은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 없이 남측에 위치한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서편에 큰 사랑채가 있고, 동편에 작은 사랑채가 나란히 좌우로 병렬 배치되어 있다. 작은 사랑채에 딸린 중문을 지나면 뒤편에 안채가 'ㄱ'자로 앉아 있고, 안채의 동편을 돌아 뒤로 돌아가면 구릉위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가 2채인 것은 사랑채의 기능이 다른 반가에 비해 매우 많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개 안채 공간이 사랑채 공간보다 큰데 비해 여기서는 사랑채 공간이 훨씬 크다. 이는 남자들의 수가 많았거나, 활동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랑채 하나를 더 만드는 것으로 부족한 기능을 해소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족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아마도 조선 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주택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문중의 장자는 아니지만 후일 전형적인 가부장적 대가족을 수용하는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큰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동편의 2칸통은 대청마루이고, 서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서측 후편 모서리부분은 아궁이 함실을 두고 상부는 다락과 일부 벽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편의 4칸 정면에는 퇴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마루의 정면과 방사이 창호는 4분합 들어열개로 하고 동측 창호는 4분합문이다. 대청 후면에는 보통 골판문인데 여기서는 세살문이다. 기단은 막돌로 바른층쌓기를 하고 방형 초석위에 방주를 썼다. 기둥 상부는 사개맞춤으로 보와 도리를 기둥에 끼워만들었다. 정면 주도리 밑에는 장혀를, 퇴보 밑에는 보받침을 끼워 구조를 튼튼히 하고 있다. 1고주 5량집 구조이다. 대청의 천정은 추녀와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에 우물반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연등천정으로 하였다. 온돌방 천정은 모두 반자위에 종이바름으로 마감하였다. 각실의 꾸밈새나 구조기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건축으로 보인다. 작은사랑채는 정면 8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구성은 동측에서부터 마루, 건너방, 마루방, 작은사랑방, 골방, 책광으로 배열하고 제일 서측 1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칸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측 5칸 정면에는 퇴마루를 설치하여 각 방과 기능적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기단은 2자 높이로 막돌 허튼층 쌓기한 다음 방추형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구조는 큰 사랑채와 같은 사개맞춤으로 만든 구조이다. 각 방은 모두 창호를 달아 기밀성을 유지하고 있다. 큰사랑채 보다는 앞서는 건물로 추측된다. 작은 사랑에 붙은 중문을 지나면 바로 뒤편에 'ㄱ'자형 안채가 있다. 안채의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하고 동편에 2칸의 건너방, 서편에 찬방(2칸), 안골방(1칸), 그리고 부엌을 배치해 두었다. 건너방과 찬방 앞쪽, 그리고 찬방 뒤로는 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무고주 3량집 구조에 동편은 팔작지붕, 서편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근래에 들어와 보수를 하면서 기단부와 창호를 현대식으로 바꾸어 전통적인 멋이 다소 감소되어버린 감이 있다. 기단은 넓은 판석을 붙치고 안마당에는 보도블럭을 깔았다. 초석은 원래의 방추형을 쓰고 기둥도 방주를 쓰고 있다. 안채의 동편을 돌아 올라가면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사당이 있다. 전면에 퇴칸을 둔 작은 규모이지만 1고주 5량집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외형적으로 보아서는 전형적인 사당형식이다. 전면 퇴칸 바닥은 마루로 하지 않고 흙바닥으로 하였는데 최근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대층 다듬어 사용한 기단이고 방형초석을 놓은 다음 방주를 세웠다. 측면과 후면의 하부 외벽에는 약 4자높이로 돌을 쌓아 하방벽으로 삼고 정면 2칸에는 각각 4분합 세살문 들어열개를 달아 두었다. 이 주택의 안채는 개수로 인하여 원형을 많이 상실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특징으로 보면 오히려 이 주택 내에서 다른 건물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가옥의 배치구조는 폐쇄적인 영남지방의 그것과는 달리 개방적이다. 2동의 사랑채는 횡으로 병렬 배치되어 더욱 큰 개방감을 주고 있다. 사랑채가 2동인 것은 사랑채의 기능을 확대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사랑채의 기능이 커진 것은 이 가옥이 지역의 문화적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호지방 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문화재이다. 바로 옆에 위치한 동춘선생 고택과 더불어 송촌마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주택은 1995년부터 시작된 '송촌지구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시가화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응봉산의 맥이 이 가옥의 뒤로 형성되어 마을의 배산을 하고 있지만 최근 택지개발로 인하여 배산이 모두 깎이어 전혀 다른 주변환경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개발로 인해 역사적 문화환경이 훼손되거나 파괴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건축은 역사성과 장소성이 중요한 환경요소인 만큼 이러한 역사적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계획초기단계부터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한 보존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도시의 건축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는 점으로서의 문화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도록 도시환경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전에 있는 안동권문의 역사유적
유회당은 조선조 영조 때의 명신 권이진(權以鎭)의 호이다. 그는 1668년(현종9) 대전 탄방동에서 출생하였다.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말기 전목재(錢牧齋)의 '명발하유회이인(明發下有懷二人)'에서 따온 것으로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유회당 권이진은 부승지, 형조, 예조, 공조 참의 등을 거쳐 경종때에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 왔다. 그 후 호조참판, 대사간,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우참찬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광군수, 동래부사, 안동부사와 경상,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4) 이인좌와 정희량의 난 때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734년(영조10) 이곳 무수동에서 67세로 운명하였다. 대전의 남쪽에 있는 안산이 보문산이며, 보문산 정상에서 서남방향으로 제일 아래에 무수동의 넓은 뜰이 있다. 뜰을 앞에두고 보문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구릉에 서남형으로 유회당이 배치되어 있다. 뜰 건너편에는 유등천이 굽이쳐 흐르고, 그 지천 하나가 들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풍수적으로 보면 보문산이 조산이고 유등천이 외수가 되며, 그 지천이 내수인 셈이다. 이 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유회당 바로 옆에 종가가 위치하고 있다. 유회당은 다른곳보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구릉지에 배치되어 집으로 오르기 위해 계단을 놓아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연못 가운데를 지나 유회당으로 진입된다. 유회당 후면 남측에 'ㄱ'자 평면의 조그만 삼근정사가 있고, 북측에 장판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 3동의 주위에는 담을 둘렀다. 유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각각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다. 팔작지붕에 무고주 5량집 구조이다. 정면, 좌우의 퇴칸을 제외하고 전체가 여덟칸 집인데 가운데 4칸은 대청마루로 좌우측의 각 2칸씩은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 온돌방은 '구시제(求是齊)', 우측은 '불기제(不欺齊)'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양 측면의 온돌방 아궁이 함실은 정면의 퇴마루 아래에 설치해 두었다. 구릉지에 위치함에 따라 정면 기단을 높이 만들고 후면 기단은 자연히 낮아진다.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방형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기둥 위에는 창방을 얹었는데 초각없는 양봉과 함께 대들보를 사개맞춤으로 끼웠다. 대청 앞쪽 2칸에는 창방과 주심도리사이에 각각 3개씩의 소로를 끼웠다. 주심도리는 4각형의 납도리를 쓴 반면 중도리와 종도리는 원형의 굴도리를 썼다. 대들보 위에는 중보를 올리고 판대공을 세워 장혀와 함께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청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온돌방의 천정은 천정을 낮게하여 회바름으로 마감했다. 대청의 앞쪽 두칸은 공히 4분합 띠살문으로 하고 그 외의 문은 분합문을 달았다. 모든 창호의 모양은 띠살문으로 하였다. 유회당의 뒤편에 1715년(숙종41)에 지은 삼근정사(三近精舍)가 있다. 이 삼근정사는 'ㄱ'자형 평면의 아주 작은 건물인데 가운데 방을 배치하고 양쪽 좌우에 마루를 깔았다. 이 건물에는 삼근정사외에 수만헌(收漫軒), 하거원(何去園)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삼근정사 의미는 유회당 권이진의 선친인 권유의 산소와 물과 꽃밭이 가깝다는 뜻이며, 수만헌은 범석호(范石湖)의 시 [松淑永寄孤窮滂滂 泉石終收漫浪身]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며, 하거원은 춘추전국시대에 타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선영에 돌아오는 고사에서 근거한 명칭이다. 유회당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장판각에는 문중 선조들의 문집과 유회당 문집이 보관되어 있다. 정면 세칸 측면두칸의 조그만 건물이다. 유회당과 담을 사이에 두고 서측에 기긍재가 있다. 기긍재에는 'ㄱ'자형 평면의 본채와 정면 5칸의 문간채를 두고 있다. 기긍재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유회당 앞쪽 마을에는 유회당 후손의 주택과 조그만 정자인 광영정(光影亭)이 있다. 광영정은 정면, 측면 각각 1칸으로 지붕은 초가를 올렸다. 광영정 4면에는 각각 다른 편액이 붙어 있는데 동은 수월란(受月欄), 서쪽은 관가헌(觀稼軒), 남쪽은 인풍루(引風樓), 북쪽은 광영정이다. 광영정은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徘徊)'라는 고시에서 인용하였다. 보이는 방향에 따라 전경을 잘 표현한 이름이다. 정자의 북측에 작은 연못 배회담(徘徊潭)이 있다. 지붕 위에는 절병통을 올려 두었다. 초석은 장초석을 쓰고 루각 밑으로 조그만 도랑이 지나간다. 연못과 바닥 밑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이 정자와 어울려 한국 건축의 멋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유회당 후면의 언덕을 넘어가면 유회당 권이진이 건립한 거업재(居業齋)와 여경암이 있다. 이 또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이 마을은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마을 앞으로 대전시 남부순환도로가 지나가 마을 경관을 훼손하고 말았다. 아직 본격적인 택지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멀지 않은 장래에 개발될 조짐도 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이 일대의 역사문화 환경이 파괴되기 전에 보존계획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 보문산유적. 1994 호서지방의 흔치않은 '口'자형 날개집
사랑채의 기와에서 '숭정87년(崇禎八十七年)'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연대기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이 가옥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1705年에 이 가옥이 초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상량문에서 '숭정기원후4을축(崇禎紀元後四己丑)'이라는 묵서명이 나와 1829년에 크게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을 크게 보수한 사람은 민치준으로 그는 양산, 덕천, 임천, 전주, 금산 등 12고을 원을 지냈고, 나중에 공조참의, 가선대부, 내장원경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이 가옥을 에워싸고 있는 지리적 환경을 보면 필서봉을 배산으로 뒤로는 구릉이 배경을 이루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뜰 앞으로는 백마강이 굽이쳐 흘러 지나간다. 가옥뒤로 급한 구릉이 있고, 전면은 마을과 들로 형성되었다. 마을 앞으로 왕포천이 서에서 동으로 감돌아 백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가옥이 위치한 부여읍 중정리 마을은 여흥 민씨와 용인 이씨가 주성을 이루고, 타성들이 함께 거주하는 혼성마을이다. 지금도 이 두 성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민칠식가옥 인근에 여흥 민씨의 종가가 있으나 퇴락되고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다. 이곳에 민씨가 터를 잡게된 것은 민칠식씨의 4대조인 민용묵때부터이다. 민용묵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그 4남이 앞에서 언급한 민치준이다. 현 주인 민칠식씨의 3대조로 이때에 이 가옥을 크게 보수하였다 한다. 전해오는 말로 이 가옥은 원래 용인 이씨의 소유였으나 민씨에게 소유를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가옥에는 정침을 비롯하여 행랑채, 그리고 서측에 별채가 있다. 행랑채에 솟을대문이 있고 이를 들어서면 횡으로 긴 행랑마당 중간에 단을 하나 만들고 그 뒤쪽에 사랑채를 비롯한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와 붙어서 연결된 담장은 안채의 뒤쪽으로 연결되어 안채를 감싸면서 둘러져 있다. 정침은 '口'자 평면으로 앞쪽에 사랑채, 뒤쪽에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 정면은 양쪽으로 사랑채와 곳간이 길게 빠져나와 있는데 이런 평면의 집을 '口'자집 중에서도 '날개집'이라 한다. 이런 날개집은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면이지만 충청지방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담으로 구획하였다. 사랑채는 3개의 방이 'ㄴ'자로 배치되고 동측에 대청마루, 서측과 북측에 마루방이 각각 배치되었다. 사랑방 전면에는 퇴마루가 대청마루와 서측 마루방을 연결하고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화강석을 방형으로 다듬어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방형초석을 놓았다. 초석에 맞추어 방주를 세우고 기둥상부에서는 도리와 퇴량을 '十'자로 사개맞춤 하였다. 대청마루의 창호는 띠살문 4분합문으로 하고 외부에 접하는 각 방에는 이중창호를 달았다. 이중창호의 외문은 띠살 분합문이고 내문은 '用'자살문이다. 방과 방사이의 문은 장지문으로 하였다. 대청마루의 천정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고 방의 천정은 반자위에 종이바름으로 마감하였다. 사랑채 서측에 붙은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두고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 가운데 2칸에는 안대청을 두고 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에 안방과 부엌이, 동측에 3칸의 큰 마루방이 날개로 붙어 있다. 마루 앞쪽으로 사랑채와 연결되는 익랑에 건너방이 있고 건너편 서측 익랑에 2칸의 곳간마루와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과 안대청마루 앞으로는 퇴마루가 놓여 있는데 이 퇴마루는 안채의 모든 방들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기단은 낮게 외벌대로 만들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기둥 상부에서는 사랑채와 같이 도리와 퇴량을 '十'자로 사개맞춤을 하였다. 홑처마에 무고주 5량집 구조이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과 동자주를 혼용하고 있다. 안대청 정면 창호는 띠살문이고, 후면은 골판문이다. 대청마루 천정은 연등천정이고 온돌방은 반자위 종이바름으로 마감하였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동에서 4째칸에 솟을대문을 달고 좌우에 행랑방, 창고를 두고 있다. 이 가옥 서측에 별도로 담을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별채가 본채와는 좌향을 약간 달리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별채의 평면은 3개의 방을 두고 대청마루 앞뒤에 퇴마루를 두고 있다. 기단은 화강석을 방형으로 다듬어 2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 이다. 이 가옥의 정침은 호서지방에서는 드물지만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날개집이다. 그러나 단면구조는 기호지방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날개집이 이곳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 초창때 이 집을 지은 주인이 영남지방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호서지방의 반가는 대개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 평면 2개를 배치하던가, '一'자형 사랑채 뒤에 '?'자형 안채를 조합하는 튼 '口'자집이 많다. 장식이 가미된 조선 후기의 초가
백마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군수들 마을 주변에는 동산이나 구릉이 없는 평지로 이루어지고 이 마을 중심부에 이 가옥이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현재 이 가옥은 안채와 헛간채, 광채가 각각 별도로 배치된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멘트로 만든 동측과 북측의 담은 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서측은 골목길을 따라 곡선으로 둘러져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초가집에 추녀끝에 사래를 달아 추녀를 들어올리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닌데 이 가옥의 안채에 이러한 기법이 보이고 있어 특이하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가운데 안방을 두고 서측에 사랑방, 동측에 부엌을 배치하였다. 안방과 사랑방의 앞뒤로는 퇴마루를 두고 있는데 사랑방이 뒤로 커지는 바람에 사랑방 후면의 퇴마루는 폭이 아주 좁아졌다. 안방과 부엌 사이에는 반침을 두고, 안방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단은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석 2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놓은 다음 방주로 기둥을 삼았다. 다만 동측의 부엌에 사용한 기둥은 원주이다. 기둥머리에서는 납도리와 퇴량을 十자로 사개맞춤을 하고 보아지는 끼우지 않았다. 평면이나, 구조적으로 볼 때 부엌은 나중에 증축하면서 달아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안채를 처음 지을 때는 사랑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처음부터 부엌을 둔 건물로 지었다면 재료나 구조적으로 동일한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야함에도 이 안채에서는 서로 다른 기법이 쓰여지고 있다. 정면과 측면의 창호는 띠살문으로 하고 부엌에는 장판문을 달았다. 특히 문설주는 연귀로 짜 맞추고 안방문의 하단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초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사랑방 문에는 머름이 없다. 이 안채는 이러한 구조적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서측 약간 뒤로 정면3칸, 측면 1칸의 헛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헛간채 역시 초가집이고 추녀를 들어올려 곡선을 주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헛간채는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최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기단은 안채와 마찬가지로 대충 다듬어 만든 화강석으로 2벌대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에서 납도리와 보를 '十'자로 사개맞춤을 한 다음 서까래를 올렸다. 창호는 정면에만 두었는데 한쪽은 띠살문이고, 다른 한쪽에는 장판문을 달았다. 대문 입구에 외양간과 창고로 사용하는 'ㄱ'자 평면의 광채가 배치되어 있다. 이 광채 역시 일제때 증축한 것이며 1995년 크게 보수하였다. 조선 중기이후 건축에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면서 차츰 주택건축에도 이러한 장식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초석을 잘 다듬어 쓴다던가, 기둥에 쇠시리를 새기고, 창호 주변 문설주 등에 여러 가지 문양과 장식조각이 들어가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초가의 경우 장식은 잘 하지 않고 있으나 정계채 가옥에서는 특이하게도 이러한 조선후기의 장식적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소론(少論)의 종가 -내외공간의 주기론적 연결성-
조선 숙종때 성리학자인 명재(明齊) 윤증선생(1629∼1714) 고택이다. 윤증선생은 한양 정선방에서 윤선거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부 윤황의 유언을 받들어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하였다. 1663년 학행으로 수차 벼슬을 주었으나 사퇴하고 1676년 니산의 유봉으로 이사하여 후진을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다. 후에 다시 조정에서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세상에서 백의정승으로 추앙을 받았다. 사후에는 문도들이 용계서원을 세워 그를 모시고, 인근의 노강서원에도 윤증선생을 향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윤증이 말년인 18세기초에 건립한 것이다. 후일 건물을 보수하면서 일부 세부기법 등이 조선 후기의 기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건축적 특징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고택이 있는 교촌리 남쪽으로 개자들이 펼쳐지고, 들 가운데로 노성천이 흘러 지나간다. 북편으로 약한 구릉이 솟아 니산(尼山)이 되고, 니산 자락이 주택의 배면을 형성하고 있다. 니산 자락이 남으로 흘러 마을의 계면부를 형성하면서 서측에 노성향교를, 동측에 고택을 점지하였다. 고택의 동편으로 작은 구릉을 넘어가면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궐리사(闕里祠)가 자리잡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정려각을 비롯하여 노성향교등 조선시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 고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택의 정면에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고대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채가 중심축에서 동측으로 치우쳐 배치되고 사랑채 서편에 문간채가 이어져 안채 앞을 가로막으며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주변에는 담을 두지 않아 가옥 전체가 개방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두고 있다는 집주인의 심성을 표현하는 것 같다. 사랑채는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3면에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서측의 마루바닥을 높이 들어올려 하부에 아궁이 함실을 두고 있다. 높은 축단위에 정면4칸, 측면 2칸으로 동에 대청, 가운데 2칸에는 사랑방, 서쪽칸은 높은 루마루와 사랑부엌이 배치되고 중문간과 접해 방 2칸을 연결했다. 이 가옥에서 사랑채의 배치는 동편에 치우쳐 있지만 진입과정에서 보이는 입면에서는 그리 치우쳐 보이지 않는다. 즉, 서측의 부속공간과 그 건물의 측면이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좌우 대칭적인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이 또한 균제된 입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정면의 칸수를 짝수인 4칸으로 계획하여 정면길이와 높이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비례를 조정하였다. 만약 정면의 칸수를 3칸이나 5칸으로 만들 경우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비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몸채는 좌우를 비대칭으로 만들어 엄격함을 순화시킨 배려도 읽을 수 있다. 사랑채 서편에 붙어있는 문간채를 지나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자 형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집이 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익랑채를 연결하였다. 안채의 대청이 특히 크다. 이 때문에 안마당이 개방되고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서측 익랑에는 안방을 가운데 두고, 웃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서익랑의 평면은 전후로 퇴칸을 두고,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동익랑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평면은 안마당쪽으로 전퇴를 두어 마루를 깔아 안대청과 연결시키고 있다. 동서 익랑채 부엌상부는 모두 루다락을 설치해 두었다. 안채의 구조는 양통집과 같이 맞보로 이어진 3평주 3량인데 대청 중앙은 긴 보가 건너가고 5량집으로 구성했다. 막돌허튼층 기단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이다. 사랑채 구조도 1고주 5량집으로서 안채와 유사하다. 방주의 높은 초석과 장대석 축대, 댓돌사용이 고급스럽다. 중앙 2칸을 꺾음 대문간으로 사용한 중문채도 맞거리 5간으로 모임지붕이고 안채 서편에 있는 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박공지붕인데 구조는 안채와 같이 3량집이다. 이 주택의 특징으로는 호서지방의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당을 생략하고, 대신 사랑채 공간을 조금 크게하여 별당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사랑채의 입면구조는 팔작으로 처리하여 안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가깝게 붙어있고, 행랑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입면구조를 아름답게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채를 별도로 떨어진 듯 처리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심축선은 이 두 건물을 비켜가고 각 건물의 세부는 비대칭으로 처리하여 상황조건에 충실하려는 주기론적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건축공간의 배치에는 시대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조선조의 유가사상은 주택공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면에서 후면으로의 종방향, 좌(동)에서 우(서)로의 횡방향에 따라 각 공간의 위계성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대지의 여러 가지 조건이 고려사항이 되기도 한다. 한편 고택 앞에는 연못과 연못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 지방 반가에서 간혹 보이는 특징이다. 참고문헌 :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제4집.논산군편. 1990 풍수를 고려한 술골(酒谷)의 튼 '口'자집
이 집은 조선 숙종과 영조때 무관을 지낸 이삼장군(1677∼1735)의 고택이다. 이삼 장군은 감역(監役)을 지낸 이사길의 아들로 태어나 윤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29세때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비롯하여 포도·어영·훈련대장, 형조참판,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거치면서, 이인좌난 평정, 화차제조 등에 큰 공헌을 세웠다. 이 고택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727년 영조임금이 하사한 것이라 한다. 계룡산 줄기가 남으로 길게 내려오다 한 번 솟으면서 국사봉을 만들고, 이내 그 끝을 맺는다. 국사봉의 서편으로 낮은 구릉이 만들어지다가 개자들을 만나면서 그 자락을 내리고 만다.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주곡리는 말 그대로 '술골'이다. 조선조때 이름은 주막리, 동주막. 서주막. 마근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골은 입구가 마치 병목같은 형국이며, 마을을 들어서면 북편으로 가옥이 배치되어 있고 남측으로 농경지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 10여개의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 가옥은 마을의 중심부에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서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마을 계면부 구릉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자 평면의 안채를 연결한 튼'口'자집이다. 동편에 정면 4칸의 문간채를 세우고, 안채의 동북편 구릉위에 담을 둘러친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가옥의 대지는 다른 가옥에 비해 급한 구릉이다. 고택의 앞을 지나 동편에 위치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측면과 안채의 익랑채가 보이고,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의 전면부에 대문이 있는 것에 비해 이 가옥에서는 동편 측면에 솟을대문이 있다. 이 대문간은 최근 복원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동편 3칸에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전면에 퇴칸을 달아 높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툇마루 아래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랑채 서편의 4칸은 온돌방을 두지 않고 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로 3자정도 높게 만들고, 초석은 덤벙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썼으나 부재가 조금은 빈약해 보인다. 사랑채 후면열 좌우에 중문을 두어 안채와 구분하고 있다. 안채는 후면 가운데 안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었다. 안대청 전면은 퇴칸을 만들고, 퇴칸과 대청 사이는 문을 달았던 문설주가 있으나 지금은 문이 없어지고 없다.. 좌우의 안방과 건너방 남측에 붙여 각각 부엌을 두었는데 동측 부엌은 1칸통으로 작고 서측의 부엌은 2칸통으로 크게 만들었다. 안방의 후면에는 2개의 작은 골방을 두고, 서편에 안방과 골방 사이에는 작은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안대청 동측의 건너방 외부에도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안채의 동측 익랑에는 2칸의 방을 두고 방의 외부에는 나중에 퇴칸을 덧달아 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이 익랑채는 나중에 웃사랑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원래의 사랑채는 아랫사랑이 되었다. 안채의 기단은 구릉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축대 겸 기단이 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지방의 다른 반가 안채 기단보다 훨씬 높은 2자정도가 되었다. 초석은 방형으로 다듬은 것과 덤벙주초를 혼용하고 있다. 기둥은 사랑채와 같이 방주를 썼으나 부재는 사랑채보다 견실하다. 사당은 안채의 동북편 높은 구릉을 정지하여 배치해 두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사당 후면은 넓게 확보하여 안채 후정과 연결되게 하였다. 대문간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근래에 복원하였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가옥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이 가옥을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편에서 집 앞을 지난 다음 동편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게 된다. 이는 마을의 입지조건과 가옥의 대지조건을 고려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치계획은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동편에 대문을 두어야 하는 요구 때문에 진입을 길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은 대지조건이 급한 구릉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랑채의 기단과 안채의 기단이 높아졌고, 안마당을 크기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충청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가옥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노로 영조임금이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은으로 건립된 가옥으로 보기에는 규모나 구조부재가 빈약하다. 특히 사랑채의 부재는 이삼장군의 명성이나, 다른 가옥의 사랑채에 비해 견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이삼장군은 사치를 즐기지 않은 검소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4. 1990. 개방된 사랑채와 폐쇄의 여유스러운 안채
장구리 마을 후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파평윤씨 윤황의 종가이다. 언제 어디에다 처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윤황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尹定鎭)이 영조 때인 1730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윤황의 생존시에는 이 가옥이 이곳에 없었다. 윤황은 1571년(선조4)년 윤창세의 아들로 태어나 알성시 을과에 장원급제하여 후일 대사간,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주장한 이귀, 최명길을 면박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아들 윤선거는 병자호란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금산에 퇴거하여 김집에게 사사하며 송시열과 함께 성리학에 힘을 썼다. 숙종대 소론의 거두였던 명재 윤증선생은 선거의 아들이자 황의 손자가 된다. 조선 중기 이후 17세기는 농업생산력을 배경으로 상품화폐 경제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대동법 실시를 비롯한 수취제 개편이 단행되며, 이와 관련하여 신분제의 변화, 향촌사회의 변동 등 사회구조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던 시기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더욱 가증시킨 요인이 되었다. 인근 교촌리에 있는 윤증고택이 18세기초에 건립되었고, 이 가옥도 이 무렵 이건된 것으로 본다면 이 당시 시대적 여건에 따라 종가와 파종가의 대대적인 이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가옥이 있는 마을은 노성면의 서측 공주시 탄천면과 부여 초촌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편에는 호암산 끝자락이 남으로 뻗어 2개의 봉을 형성하면서 막혀 있고, 남·서·북으로는 낮은 구릉과 넓은 들로 형성되어 있다. 가옥배치는 전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크게 담을 두르고 'ㄱ'자형 안채, 광채, 그리고 사당을 두고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담을 두지 않고, 넓게 터져 있어 개방된 공간구조인 반면 안채는 주변을 담으로 둘러 공간을 폐쇄하고 있다. 그러나 담으로 둘러싸인 안채공간은 안마당이 넓고, 안채는 'ㄱ'자로 트여 있어 폐쇄되어 있어도 트인 듯한 여유로운 공간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사괴석 세벌대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방형과 덤벙주초를 혼용하였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쓰고, 정면열 기둥에는 다른 부재를 끼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으로 미루어 다른 곳에서 이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가운데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동편의 건너방 정면에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괴석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썼다. 무고주 5량집 구조에 종보 위에는 사다리 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안채의 동편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광채가 있다. 자연석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쓰고, 방주를 세웠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우진각지붕이다. 안채와 광채를 포함하여 담으로 둘러치고, 사랑채 바로 뒤에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대지가 그리 급하지 않아 안채와 광채를 가깝게 붙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안마당은 매우 넓게 확보될 수 있었다. 넓은 안마당에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두었다. 안채의 동북편 높은 구릉에는 계단을 만들고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이 가옥은 18세기초에 이곳으로 이건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지는 약한 구릉을 크게 3단으로 조성하여 상단에 사당을 배치하고, 중단에 안채와 광채, 그리고 하단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당이 배치된 부분을 제외하고 안채와 사랑채는 약한 구릉이어서 중단과 하단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대지조건을 지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건물의 배치는 상당히 여유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와 안채는 중간에 단을 달리 하면서 담을 두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이며, 동편에 떨어져 광채를 두어 넓은 안마당을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여유스러운 배치는 충청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라 하겠다. 마을의 가장 후면에 배치되어 있고, 가옥 앞으로 후손 가옥과 타성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사랑채 동측에는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연못은 사계 김장생 고택인 은농재, 니산의 윤증고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어떤 공통적인 계획이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호학파의 직계 사계선생 고택
이 가옥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고택이다. 은농재는 고택의 사랑채 이름이다. 사계선생은 1548년(명종3) 대사헌 김계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계는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나중에 율곡 이이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의 학문은 당대의 누구보다 뛰어나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서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가 있다. 그의 학문은 이들에게 전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두마면 남쪽에 위치한 천호봉 자락이 북으로 길게 흐르다가 이 마을에 이르러 끝자락을 맺으면서 대전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다. 천호봉 끝자락이 마을 뒤에서 잠깐 솟아 이름 없는 봉을 형성한 것이 은농재의 배산이 된다. 좌우로 구릉이 감싸고 있으며 전면에는 넓지 않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배치하다보니 가옥은 곤좌간향(坤座艮向)으로 동북향을 하게 되었다. 마을의 북쪽편에는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두계천이 동으로 흐르며, 두계천을 따라 호남선이 지나가고 있다. 은농재는 사계선생의 8대손인 두계공의 장자로부터 16대손까지 세거해온 곳이다. 현재 은농재를 비롯하여 안사랑채, 안채, 문간채, 광채, 부속채 등이 하나의 커다란 건축군을 형성하면서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하고 되어 있다. 은농재의 서편 뒤쪽에는 나중에 지은 'ㄱ'자형 별채가 있고, 동편 측면에 연지와 육각정이 자리잡고 있다. 배치구성은 정면 12칸의 문간채를 전면에 두고 문간채 뒤에 커다란 사랑마당을 두었다. 사랑마당 가운데 은농재를 두고 사면에 건물을 배치해 두었다. 은농재 후면에는 'ㄷ'자 평면의 안사랑채와 'ㄱ'자 평면의 안채가 안마당을 두고 좌우로 배치되어 튼 '口'집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의 서측 후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가옥내에서 유일하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은농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걸이 3량집 구조에 홑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2칸의 큰 방을 두고, 양쪽에 방과 부엌을 하나씩 배치했다. 가운데 방 전면에는 퇴칸으로 하여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큰 방 후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다. 막돌로 2중 기단을 만들어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기단의 전체 높이는 4자정도이고 기단 정면 가운데부분에 계단을 두었다. 안사랑채는 은농재 후면에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은농재 동편으로 연결되어 있는 중문을 두고 중문 좌우에 방을 두었다. 동편 모서리 부분에 큰 방을 두고, 이어서 부엌과 반침, 방을 배치하였다. 안마당 쪽에서 보면 외벌대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생활에 편리하도록 평면과 내부구조를 일부 변경하였다. 안채는 안사랑채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 평면을 하고 있다. 평면을 보면 가운데 안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방을 두었다. 안방은 대청과 툇마루로 연결되는 북편에 두고 안방 끝에 2칸크기의 부엌을 두었다. 부엌의 크기가 다른 곳에 비해 특히 크고, 안사랑채와 같이 생활에 편리하도록 구조 일부를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세벌대로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썼다. 안채의 후면 서측에 사당을 두었다. 정면, 측면이 각각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커다란 풍판을 달았다. 흔히 사당 전면에는 퇴칸을 두는데 여기서는 퇴칸을 두지 않았다. 사괴석 외벌대 기단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문간채는 정면 11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문간을 두고, 좌우로는 광을 두었다. 문간에는 흔히 만드는 솟을대문을 두지 않고 평대문으로 하였다. 이 가옥의 외부공간은 크게 3개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은농재의 앞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공간이다. 문간채와 광채가 주위를 둘러싸고 은농재가 안채와 후면벽을 접하여 가운데 배치되어 마당이 '凹'자 모양이 되었다. 이 공간은 흔히 사랑마당이라 하며 남자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은농재는 규모는 작지만 이 가옥의 사랑채가 된다. 두 번째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공간은 주로 여성들의 생활 공간이다. 남성들의 생활공간을 '밖(外)'이라 하면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안(내)'이라 부른다. 사랑채의 크기에 비해 안채의 크기가 훨씬 크다. 이것은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많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담아야 할 공간이 크게 필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세 번째는 자연과 접해있는 외부공간을 들 수 있다. 주로 담밖에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자연공간으로 이 가옥의 동편에 꾸며진 연못과 주위의 조원(造園)을 들 수 있다. 현재 연못과 주위 환경이 변하여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옛부터 이곳에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옥은 곤좌간향(坤座艮向)인 동북향을 하고 있다. 지형조건으로 볼 때 배치계획을 하려면 좌향은 동남에서 동북향까지 배치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향을 곤좌간향으로 한 것은 풍수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마당을 크게 만들어 마당 가운데 은농재를 앉혀놓고, 그 주위를 담이 아닌 건물로 에워싸는 배치구조는 특이하다. 안채공간에는 또하나의 안사랑을 만들어 안마당을 다른 반가에 비해 크게 만든 것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전통기술과 근대기술의 접목
이 가옥은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친이 1907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은 낮은 구릉과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동남에서 서남에 걸쳐 멀리 낮은 산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으로 작은 실개천인 관대천이 동북으로 흘러 관대리에서 합수되어 서쪽으로 빠진다. 이 마을에는 약 120여 가옥이 낮은 구릉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가옥은 사랑채·안채·문간채·행랑채를 비롯하여 부속채가 '巴 '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가 문간채와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행랑마당 동측에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주위로는 담을 둘러두었다. 행랑채 중간에 달린 중문을 들어서면 'ㄱ'자 평면의 안채가 안마당을 감싸듯 자리잡고 있다. 안채 후면의 낮은 구릉은 화계로 처리하였다. 문간채와 행랑채는 측면으로 익랑이 길게 이어져 'ㅋ'자 모양이 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이 사랑채는 가옥내 다른 건물에 비해 늦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정면열의 반칸은 마루를 길게 두어 대청과 이어지게 하였다. 서측 1칸통에는 마루방을 두고 그 후면에 방을 내달아 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대청과 마루방의 바닥은 모두 쪽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의 정면 창호를 모두 유리문으로 달아 두었다. 기단은 잘 가공한 장대석 두벌대로 만들고, 방추형 초석에 기둥은 방주를 썼다. 기둥 모서리에는 쇠시리로 모양을 냈다.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놓고 운공형 무익공을 끼웠다. 보머리와 운공에는 당초문양을 조각해 두어 매우 장식적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크기는 다른 건물에 비해 클 뿐만 아니라 내부의 대청마루 문은 폭이 큰 미서기문을 달아 내부공간을 크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가운데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했다. 양 측면에는 각각 부엌을 두었다. 전면열에는 퇴칸에 마루를 두었다. 안대청 마루는 사랑채와는 달리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장대석 두벌대로 만들고, 방형초석에 방주를 썼다. 이 가옥에서는 문간채와 행랑채가 특히 크다. 이 두 건물은 서측 익랑이 연결되어 있으나 이어지는 부분이 서로 어긋나고 축선도 맞지 않아 건립시기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문간채는 정면열 8칸, 측면열 7칸의 'ㄱ'자 평면이다. 정면열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창고·문간방·부엌 등을 배치해 두었다. 맞걸이 3량집구조로 외부의 하방벽에는 벽돌을 사용하였다. 행랑채는 정면열 6칸, 서측열 6칸으로 가운데 중문을 두고, 나머지는 행랑방, 마루방, 곳간이다. 이 가옥은 부속건물인 문간채와 행랑채가 각각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대부분 반가에서는 행랑채에 문간을 설치하거나 문간채에 행랑기능을 결합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드는데 여기서는 행랑채 기능과 문간채 기능을 분리하여 따로 만들어 두었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안채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하여 마치 별당과 같은 형식이 되었다. 이는 사랑채를 지역문화의 중심공간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의도 였던 것 같다. 내부공간을 사용목적에 따라 큰 공간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 또한 그러한 의도로 생각된다. 안마당의 구조는 'ㄱ'자 안채와 'ㄴ'자 행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놓여 튼 '口'자 집을 만들었다. 안채의 뒤뜰은 구릉을 화계(花階)로 처리하였고, 안채의 동편은 담을 넓게 확보하여 안채공간을 여유있게 처리하였다. 이 가옥에서는 또한 살림집이면서 붉은 벽돌은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문간채, 행랑채, 담장에 붉은 벽돌을 특히 많이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건축물에는 그리 흔히 사용하지 않았다. 벽돌을 사용해 만든 백제의 분묘가 있고, 건축에서는 바닥벽돌로 사용할 정도였다. 벽돌이 건축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이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때 화성(華城)을 축성하면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대대적으로 사용한 이후 궁궐과 사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가옥에 벽돌을 많이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근대적인 건축기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끼친 영향이기도 하다. 사랑채의 주요구조부는 전통적인 조선양식을 하고 있지만 마루바닥은 쪽마루로 깔고, 전후면에 유리문을 달아 한양절충식을 하고 있다. 근대적인 건축기술이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일제때 지은 반가지만 조선후기의 장식적 특징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배치구조와 외부공간 구성에서는 기호지방 반가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풍수를 이용한 '巳'자집
남으로 도고산이 솟아 그 자락이 북으로 흘러 이 가옥을 감싸듯 끝자락을 내리고 있다. 동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지고 그 한쪽에 도고저수지가 있으며 북으로도 낮은 구릉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서편으로는 도고산 자락이 뻗어 약간 감싸듯 솟았다가 끝자락을 내린다. 이러한 주변의 지리환경에 이 가옥은 도고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가옥은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 12동의 부속채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비롯하여 행랑, 바깥채, 창고 등이 남아 있다. 배치는 전면에 'ㄴ'자형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ㄷ'자 모양의 안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문간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가옥은 '巳'자모양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의 동편에 곳간과 서편에 바깥채(방앗간, 쟁기고)를 두고 있다. 사랑채 동편에는 작은 행랑을 두고, 서북쪽으로 작은 창고, 측간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열은 퇴칸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대청마루와 방을 두고 그 좌우에 하나씩 온돌방을 두었다. 동측 온돌방은 후면으로 길게 만들어 이 때문에 사랑채의 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정면열의 퇴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서측면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다. 정면 퇴칸에는 덧문을 달아 추운 날씨에 대비하도록 했다. 사랑채 앞에 막돌로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초석은 정면열에는 원형, 나머지는 모두 덤벙주초를 썼다.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주요 구조재료는 다른 건물에 비해 약해 보인다. 특히 기둥은 6.5치각을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 후면에 문간채를 붙여 안채와 사랑채를 막아주고 있다. 이러한 배치 때문에 사랑채 바로 뒤에 작은 샛마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샛마당을 지나면 안채로 진입하게 된다. 안채는 'ㄷ'자 평면이다. 안대청과 안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을 붙여 두었다. 정면 5칸중 3칸통은 안대청으로 하고 2칸은 안방이다. 안방 정면의 1칸은 대청마루를 연결하여 대청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안대청 정면에는 유리문을 달아 두었다. 양측 익랑에는 각각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안채의 기단은 막돌 두벌대로 약 1자반 높이로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를 썼다. 기둥의 크기는 사랑채의 그것보다 큰 7치각이다. 무고주 5량집 구조이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 가옥은 도고산 북편 구릉에 자리잡고 있어 좌향구조가 오좌자향(午座子向)의 북향을 하고 있다. 북향이지만 풍수적으로는 도고산을 주산으로 좌우에 도고산 자락이 감싸고 있다. 전면에 농경지가 펼쳐지고, 내외수구가 있는 풍수국면을 하고 있다. 이른바 역풍수(逆風水)라 하겠다. 넓은 대지를 지니고 있으면서 건물을 배후의 구릉에 붙여 배치하였다. 이 때문에 사랑채의 기단이 3단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의 간격이 넓지 않아 안마당 크기가 작아졌다. 배치 특징은 본채의 간격을 좁혀 조밀하게 배치하고, 대신 부속채를 본채와 떨어뜨려 배치하였다. 고려시대 반가의 잔향이 남아있는 맹사성고택
이 집은 원래 최영 장군의 집이었으나 손자사위인 맹사성에게 넘겨주었다 한다.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고려말 경으로 추정된다. 1482년(조선 성종13)에 안채를 중수한 기록과 1642년(인조20)에 또 한차례 중수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 원형이 부분적으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안채와 사당, 문간채, 살림채가 남아 있으며 그 중 안채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살림채는 근래에 새로지은 것이다. 원래 정면쪽으로 부엌 2칸이 달려 있었던 것을 1970년 수리하면서 헐어내자 안채는 그때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되었다. 이 마을의 풍수적 국면은 설화산(雪華山)을 주산으로 하고, 배방산(排芳山)을 조산으로 하는 주작과 현무가 축선을 형성하는 일직선 위에 마을이 배치되어 있다. 주산인 설화산은 봉우리가 다섯이 있다하여 오봉산(五峯山)이라고도 한다. 조산인 배방산은 마을앞 내수 건너편에 단정한 산세로 앉아있다. 설화산의 지맥 중 하나는 북으로 흘러 좌부동에서 끝을 맺으면서 좌청룡을 이루고, 다른 하나는 동편의 마리골 쪽으로 흐르면서 우백호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마을의 좌향은 동북향이 되며 마을 정면으로 조산인 배방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마을의 어귀는 동북방이 되어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상이며, 좌우는 특별히 감싸주는 구릉이 없고 거의 마을과 비슷한 형세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남측의 망경산과 태화산 사이에서 발원한 금곡천은 중간에서 또하나의 지류와 합쳐서 마을 앞을 곧바로 지나간다. 금곡천은 북으로 흘러가다가 근대골내와 만나 온양천을 이루고 이 온양천이 다시 곡교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금곡천이 온양천과 만나는 지둥내가 풍수적 형국으로 내수구가 되고 온양천과 만나 곡교천으로 합류하는 윗배턱거리가 외수구가 된다. 따라서 마을은 주산과 조산이 있고 내외수구가 형성되어 그 사이에 점지함으로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풍수국면을 갖추게 되는 형국이다. 맹씨행단은 마을 중간지점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이 배치된 부지도 전면이 낮은 전저후고의 형상이다. 배산은 역시 설화산이며 그 줄기가 주변을 감돌아 내려오고 있다. 마을 안길은 조그만 개울을 끼고 나있는데 마을 중턱에서 개울 건너편에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근래에 지은 종손의 살림집이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살림집을 보면서 우측에 석축이 있는데 석축위에 고택의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 안채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때의 주택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안채의 우측 뒤쪽에 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 주위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다시 행랑채와 살림집, 사당을 전부 둘러싸는 담이 바깥으로 한겹 더 둘러져 있는 2중 울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배치는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거의 북향에 가까운 배치이다. 원래는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서북향이었으나 개수한 뒤로는 정좌계향이 되었다. 이것은 1964년 보수공사때 대청 종도리 받침장혀에 쓰여진 묵서명의 기록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마을에서 볼 때 설화산을 주산으로, 배방산을 조산으로 하는 풍수국면을 그대로 준용하는데서 오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맹씨행단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모든 가옥이 이러한 배치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정면4칸, 측면3칸의 '工'자형 맹씨행단은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방을 배치하였다. 평면상으로 보면 대칭을 이루고 있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맞배지붕이다. 대청 전면에 퇴칸을 두고 퇴칸을 제외한 전 후면은 문을 달아 두었다. 대청 정면은 2칸인데 각칸에 3폭씩의 문을 두었지만 좌우의 문이 서로 다른 모습이다. 정면을 바라보아 좌측칸은 3폭의 문이 달려있고 그 중 가운데 문은 출입할 수 있도록 여닫이로 하였다. 그 좌우의 문은 들어열개로 만들었다. 좌우 창호의 하단은 통머름으로 만들었다. 3폭의 문 전부에 머름을 달 수 없어 그 중 하나는 출입하도록 만든 것이다. 우측칸의 3폭문 역시 하나씩 별도로 달도록 중간에 2개의 문설주를 세웠다. 이 3개의 문 모두 별도로 들어열개로 하고 하단은 머름을 설치하였다. 이 머름은 한국건축에 구성되는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가옥의 머름이 아주 오래된 것이다. 창호위 상인방 아래는 하단의 머름과같은 모양을 만들어 끼워 창호의 높이를 낮추어 조절하였다. 대청 정면의 문은 모두 '井'자살 문으로 처리하였다. 대청 후면의 좌우 각칸에는 2폭씩 판장문을 달았는데 문의 위치를 각칸의 가운데 두지 않고 중간기둥에 붙여 달았다. 대청의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처리하였다. 대청의 양 측면에 각각 2개씩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것은 2칸으로 크고 후면의 것은 1칸으로 꾸민 작은 방이다. 큰방의 경우 정면으로는 창호를 두지 않고 대청과 전퇴방향, 양측면으로 출입문과 봉창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대충 다듬은 돌과 막돌을 섞어 허튼층쌓기로 1자∼2자 높이가 되게 만들었다. 초석은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크기가 서로 다른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원주와 방주를 혼용하였다. 원주는 대청의 5곳에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를 사용하였다. 기둥 상부에서는 창방이 생략되었다. 대신 첨차를 끼우고 양끝에 소로를 올린 다음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도록 하였다. 첨차의 양단은 경사지게 절단하고 하단은 연화두(蓮花頭) 모양으로 초각해 두었다. 기둥 외부로는 출목없이 쇠서로 뽑고 기둥 직상부에 주두를 올려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다. 대량위에 주심도리가 가로놓이는데 주심도리의 하단과 대들보의 상단을 끼우면서 이 두 부재를 주두가 동시에 받도록 처리하였다. 외부로 뻗은 쇠서는 내부로 연장되어 대량을 보강하는 보아지역할을 하는데 보아지의 하단 역시 첨차와 마찬가지로 연화두형(蓮花頭形)으로 초각하였다. 가구의 구조를 보면 전후의 평주사이에 내고주를 세우고 고주를 중심으로 대량과 퇴량을 걸었다. 종보의 중앙에는 화반모양의 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소로를 하나 올린 다음 종도리의 장혀를 받치도록 하였다. 다른 가옥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종보위에 곡선형 솟을합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솟을합장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건축에 흔히 쓰여진 기법으로 당시의 건물에는 거의 모두 이러한 솟을합장이 있다. 맹씨행단 안채에서 보이는 이 공포구조는 익공의 초기형식으로서 출목형 익공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형식이며 우리나라 주택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 주택의 현 배치형태로 보아 사랑채를 비롯한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아산군, 맹씨행단 성역화사업 종합정비 기본계획. 1994.5 풍수의 수기(水氣)를 교묘히 이용한 마을배치
송악면은 아산의 남쪽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차령의 기운 때문에 군내에서 가장 깊숙한 산간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행정구역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1구이고 속칭 '외암골'이라 한다. 온양에서 유구를 거쳐 공주로 가는 길을 따라 8길로미터정도 가면 송악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이곳 송남초등학교의 남측 담을 끼고 동측으로 약 1길로미터를 들어가면 설화산 동남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외암리마을이 형성된 최초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옛날부터 취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미 500여년전에는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다. 이 마을은 온양군 남하면의 관하로 현 역말(驛村)에 시흥역이 있을 당시에는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라 하여 '오양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외암리 마을이 예안이씨들의 동족마을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명종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李挻)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후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함으로서 반가의 면모를 갖추고 반촌으로서의 동족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동족집성 마을은 종가를 중심으로 공동제사, 길흉행사, 농업생산 등의 공동행사를 통한 동족성을 강화하게 된다. 외암리 예안이씨 입향조인 연(挻)은 태사공 도(棹)를 시조로 삼는 전의이씨의 분적된 계통으로서 말하자면 시조로 부터 9대손인 예안백 혼(混)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로부터 9세손(시조로부터는 16세손)이 바로 외암리의 예안이씨 입향조 연이다. 이 마을이 '외암'이라 불리게 된 것은 입향조 연의 6세손인 이간(李柬) 선생에 의해서다. 이간 선생의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외암(巍巖)이다. 1677년(숙종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 되었다. 그가 31세되던 1707년(숙종33)에는 관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710(숙종36) 장릉참봉으로 천거되었으나 임하지 않고 6년뒤인 1716년(숙종42) 자의가 되었다. 그 뒤 회덕현감, 경연관을 거쳐 충청도도사겸해운관. 세자익위사 익위 등을 지냈다. 선생은 설화산의 우뚝 솟은 영봉정기를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로부터 후손들은 마을 이름을 '외암(外岩)'이라 칭하였다. 약한 구릉지에 배치된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을 건너면서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동서로 긴 장축이어서 평면적으로는 타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배산이 되는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형성되어서 서쪽의 마을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주택의 좌향은 거의가 서남향으로 되어 있으며 간혹 남향인 것도 있다. 외암리 마을과 관련된 개천과 인공 수로는 크게 두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자연적인 형태로서의 '물'과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형태로서의 '물'이다. 자연적 형태로서의 물은 설화산 계곡에서 마을의 남측으로 흘러 근대골내로 합수되는 개천으로 풍수적 국면에서 보면 내수구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로 인공적인 물은 마을의 상부에서 지수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마을 안을 통과하게 만든 인공수로이다.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집을 통과하면서 생활용수가 되기도 하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곡수(曲水)와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정작 화재시에는 소화수의 역할을 하였다. 이 인공수로는 풍수에서 말하는 '압승(壓勝)'이라는 방법이 사용된 예가 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은 '화산(火山)'으로서 마을에까지 그 불(火)의 기운이 미치게 된다. 불(火)과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기(氣)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그 근본 개념은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촌의 배치구성에 있어서 공동체적 시설물에는 교육적인 시설, 의례.신앙적인 시설, 휴식시설, 생활부대시설이 있다. 이와같은 공동체 시설은 조선시대 반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구성요소이며, 마을은 이러한 구성요건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이 마을은 이러한 반촌의 구성요소와 민가가 한데 어울려 조선시대 동족마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가옥의 배치형태는 충청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아산군, 아산외암마을 보존방안 학술조사연구보고서. 1990. 큰댁과 작은댁으로 이루어진 외암리 참판댁
참판댁은 마을 중심에서 동쪽편에 배치하고 있는데 담을 사이에 두고 뒤쪽의 큰댁과 앞쪽의 작은댁으로 나누어져 있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나있다. 참판댁은 마을 동편의 개천 옆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서편으로 꺾어 들어가는 골목이 있고 이 골목을 조금 들어가 자리잡고 있다. 참판댁의 큰댁은 조선말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의 담을 접하면서 이어진 전면의 작은댁과 후면의 큰댁을 합해서 참판댁이라 하며 흔히 큰댁과 작은댁으로 구분한다. 이 두 집은 각각 행랑과 사랑채, 안채, 곳간 및 가묘를 갖추고 있는 배치구성에서 각자가 독립된 집이다. 큰댁은 안채와 사랑, 중간문 및 곳간채로 연결된 2동의 'ㄱ'자 평면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튼'口'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남쪽에 떨어져 문간 및 행랑채가 약간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후정과 가깝게 담장이 돌려져 있고, 가묘는 안채의 서편에 약간 물러서 있다. 안채의 뒤뜰에는 담을 둘러친 장독대를 두었고, 동편에 우물을 만들어 두었다. 사랑채의 동편과 서편에 있는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랑채 좌우로 담을 둘러 안채와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외곽의 돌각담은 문간채 전면으로 둘려지고 대문앞은 좁은 골목길이 마을길과 이어진다. 행랑채를 겸한 솟을대문 좌우로는 방과 토방 부엌 광이 있고 안쪽엔 반칸퇴가 개방되어 연결되어 있다. 솟을대문은 그 높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매우 높아 집주인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1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해 두었다. 정면열은 퇴칸으로 만들어 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후면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두었다. 동측의 익랑채에는 곳간과 헛간, 중문간을 두었다. 'ㄱ'자로 구성된 안채의 서측은 남단으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 고방이 이어지고, 2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건너방을 두었다. 안대청과 건너반 앞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다. 건너방 옆에 반칸폭의 작은 부엌을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방이 이어졌다. 큰댁에서의 몇 가지 특징은 중문에서 안채 대청이 곧바로 보이지 않게 가림벽을 둔 것, 뒷마당 장독에 낮은 돌담을 둘러서 들짐승의 출입을 막게 한 것, 세살로 짠 분합문 내의 대청이 집 몸 채에 비해 좁은 반면 대청후면 장판문위로 벽장을 내달아 대청에서 사용하게 한 것 등이다. 외부공간은 크게 2개로 나누어 이 두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행랑채를 담으로 감싸는 '밖(남성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배치되는 '안(여성공간)'이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중심사상인 유학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배치구조임을 읽을 수 있다. 작은댁은 큰댁 서남쪽에 담을 두고 연접해 있다. 배치의 기본적인 구조는 큰댁과 같이 대문이 있는 행랑채를 정면에 두고 'ㄱ'자형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큰댁과 같이 튼 '口'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채의 동편에 곳간채와 가묘를 배치하고 안채의 서측 모서리 후면에 작은 장독대를 담으로 둘렀다. 큰댁과 구조적으로 다른 것은 문간채와 사랑채가 초가로 되어 있는 점이다. 사잇장지로 구획한 큰사랑과 대청의 전면으로 퇴마루가 이어지고 사분합을 들어열개로 개방하여 넓은 공간을 시원하게 활용케 한 평면구성이다. 뿐만 아니라 초가이면서도 목구조 기법이 다른 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손색이 없다. 정면 5칸의 사랑채는 정면열을 퇴칸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2칸을 큰사랑방으로 하고, 사랑방 동측 1칸을 대청마루로 만들었다. 큰사랑방 서측 1칸은 부엌칸이고, 부엌칸 서측은 작은 사랑방이다. 사랑대청에서 꺾어져 후면 1칸은 부엌칸, 그리고 작은 방하나를 더 두었다. 안채는 4칸통의 대청을 두고, 왼쪽의 안방은 아래 위 3칸으로 구성되고, 웃방 뒤편에는 반칸통의 툇마루가 있다. 대청에 면한 웃방벽 전체를 사분합으로 내어 불발기창을 달았다. 부엌에 설치된 판장문과 사롱창 광창 등이 농가의 풍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건넌방 앞의 높은 마루와 난간은 그 중에서도 격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규모로 보면 큰댁보다 작지만 배치형태와 건물의 구성은 큰댁과 유사하다. 그러나 큰댁과 근본적인 차이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라는 것이다. 외부공간의 구성에 있어서도 전면에 사랑채와 문간채를 두고, 후면에 안채와 곳간채를 두었다. 이 두 공간 사이는 담으로 구분하여 유학적 덕목인 남녀유별을 공간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 아산군, 아산외암마을 보존방안 학술조사연구보고서. 1990. 조선후기의 정원이 잘 표현된 외암리 영암댁
이 가옥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사랑채, 안채, 그리고 부속채를 배치했다. 이 가옥 주인이 조선 후기에 영암군수를 지낸바 있어 흔히 '영암댁'이라 부른다. 마을 전면부 중심에 서남향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1800년대 후기에 건립되었다. 넓은 대지를 확보하고 외부공간은 크게 3개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의 정원이고, 두 번째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만들어진 안마당이다. 세 번째는 안채 후면의 뒤뜰이다. 사랑마당은 정원으로 꾸미고, 사랑채는 정원 뒤에 배치해 두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1칸폭의 대청을 건너 동측에 또하나의 사랑방(작은사랑)이 배치된다. 서측끝에는 루마루를 두었는데 결국은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이다. 사랑채 측면의 기둥 간살잡이를 보면 가운데 1칸을 정하고, 전후열은 반칸씩 퇴칸으로 만들어 결국 측면이 2칸넓이가 되었다, 정면 퇴칸과 동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놓았다. 막돌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랑채 동측 중문을 거쳐 안마당에 들어간다. 안채 앞에는 중문간에서 곧바로 보이지 않도록 내외 사잇담이 있고, 그 북측에 'ㄱ'자 평면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2칸통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쪽부분에 안방과 웃방 부엌이 남북으로 길게 뻗었고 동쪽엔 건넌방이 있다. 안방 남측의 아래, 윗방과 마루방 한칸이 모두 사잇장지로 구분되어 필요할 때는 전체를 개방해 넓은 안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건너방 앞의 루마루 밑에 아궁이를 두고, 부엌과 가까운 옆마당가에 넓은 곳간채와 장독대를 두었다. 부엌 위의 다락과 부엌 채광, 환기를 위한 사롱살창이나 광창이 실용적이고도 운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ㄱ'자로 꺾여서 안마당을 감싼 튼 '口'자형 배치를 하고 안마당이 트인 곳을 가로막듯이 좀 떨어져 곳간채와 나무간, 측소 등을 두고, 뒷편에 가묘가 있다. 대문 밖의 넓은 작업 및 행랑마당이나 사랑채 전면과 오른쪽에 길게 뻗은 사랑마당과 정원, 그리고 안채 후원과 동편 옆마당 등이 다른 곳 보다 여유있는 공간으로 충청지방 반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하고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은 넓은 외부공간을 그냥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群植)하여 자연스런 수목을 구성하였다. 상록수를 주기적으로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꾸밈 일본식 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水口)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막돌을 자연스럽게 배열하였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자연을 보는것 같다. 정원의 동측과 서측에 각각 하나씩 작은 정자를 배치해 두었다. 정원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석물을 배치해 두었다. 이러한 정원의 이러한 꾸밈새를 통해 집주인의 자연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아산군, 아산외암마을 보존방안 학술조사연구보고서. 1990. 음양을 주제로 한 조선후기의 반가정원
이 가옥은 마을 뒤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사랑채·안채·곳간채·아랫채·문간채가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넓은 대지에 낮은 둔덕을 이용해 정원을 꾸미고 그 후면에 살림채를 배치하였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넓은 정원이 있고, 정원을 지나면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튼 '口'자 집을 하고있다. 배치좌향은 서남향이다. 안마당 동측에는 아랫채, 서측에는 곳간채가 배치되어 안마당을 감싸주고, 안채 뒤뜰에는 장독대와 화계가 만들어 졌다. 정면 4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그 좌우에 1칸 크기의 작은 마루방을 하나씩 두었다. 양 측면의 마루방에 붙여 하나는(서측방) 정면, 다른 하나는(동측방) 후면에 작은방을 하나씩 붙여 결국 '乙'자형 평면이 되었다. 막돌 허튼층으로 기단을 만들었는데 정면은 8자정도로 넓게 확보하고, 측면과 후면은 3자 폭으로 만들었다. 초석은 덤벙주초로 하고 기둥은 방주를 썼다. 사랑채 동측 후면에 아랫채가 있고, 아랫채에 중문을 달아 두었다. 대개 이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진입한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측에 안방, 동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에 붙여 부엌이 있고, 건너방 정면은 좁은 루마루를 만들어 두었다. 루마루에는 '卍'자문양 난간을 만들고, 마루 하부는 아궁이 함실을 설치해 두었다. 사괴석 두벌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안대청은 2중보를 쓴 5량집 구조이며, 부엌부분은 맞걸이 3량집 구조이다. 문간채는 3칸으로 1칸은 중문이고, 2칸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 서측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곳간채는 3칸으로 초가를 올렸다. 이 가옥의 정원은 마을내 정원 중에서 가장 자연스런 멋을 지니고 있다. 앞뒤로 노송이 우거진 낮은 둔덕이 있고, 숲과 둔덕을 이용한 정원이다. 정원에는 마을 상부에서부터 마을을 통과해 지나온 수로가 자연스런 곡선으로 곡류를 이루는데 양쪽에 낮은 동산과 자연석을 배치하고, 수로의 낙차를 조절하여 물소리를 내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둔 작은 방과 마루가 정원과 인접해 있다. 사랑채에 앉아 문을 열면 곧바로 정원의 계류와 수석들이 눈앞에 전개되어 건축과 자연이 하나의 공간에 어우러지는 듯한 모습이 된다. 안마당으로의 진입은 사랑채와 오른쪽에 돌아서 들어가는 중문간과 사랑채 왼쪽 처마밑에 내어진 월문(月門)을 통해 들어가는 3가지 방법을 쓰고 있다. 안마당에는 주요 통행로에 디딤돌을 엇비스듬히 깔아 놓았는데 안채부엌과 사랑방을 연결하는 길이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보아 많은 풍류객들의 접대가 빈번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간소한 규모의 안채 뒤편 넓은 정원에는 유실수와 노송이 어울려 있고 멀찌감치 돌담이 돌려져 여유스러운 생활모습과 전통적인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측담 밑으로 들어온 수로는 똑바로 흐르다가 사랑채 앞 가까이에서 곡류(曲流)로 변하면서 마치 심산유곡 형상을 하게 된다. 이 곡류는 사랑채의 서쪽으로 흐르다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으면서 서측담으로 빠져나간다. 수로에는 간혹 돌을 이용한 폭포로 낙차를 만들어 물소리를 내게하고, 수로 주변에는 자연석으로 계곡을 만들어 두었다. 돌과 흙을 이용한 가산(假山)은 그야말로 축소된 자연의 모습이며, 의도적으로 배치한 수석은 음(陰)과 양(陽)을 상징하고 있다.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수석 중에는 남근과 여근을 상징하는 것도 있다. 음·양석은 만물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안녕과 질서, 나아가 자손의 번영을 바라는 집주인의 염원이 담겨있기도 하다. 자연현상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근본 개념은 우주의 섭리를 자연경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섭리는 질서이며, 질서는 인간생활의 기본이다. 음양의 조화도 하나의 질서로 생각했으며 나아가 생산과 풍요를 염원하는 상징성이다. 주변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단풍나무 등 우리의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수목이 식재되어 있다. 이와같은 정원의 배석(配石)기법과 계류(溪流)계획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그 이치를 파악한 사람의 식견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조경예술이라 하겠다. 도가사상에 심취한 선비의 인품을 읽는 것 같다. 참고문헌 : 아산군, 아산외암마을 보존방안 학술조사연구보고서. 1990. 조선 최고 명필 김추사의 생가
고택 전면으로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지고 좌우로는 용산 자락이 등을 받쳐주듯 형성되어 있다. 이 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 의해 1750년경 건립되었다.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영조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지방의 토호로서 중앙에서 오랫동안 벼슬을 한 사대부들의 세거로 내려왔던 까닭에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선 흔치않은 '口'자형 평면으로 안채와 'ㄱ'자 평면의 고패집 사랑채를 갖춘 품격있는 조선조 후기의 반가이다.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중문이 곁들인 행랑과 바깥문채, 곳간채가 대지의 전면과 남측마당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후대가 이어지지 않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심하게 퇴락 되었던 것을 수년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집의 뒷산에서 흘러내린 지세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가 서에서 동으로 된 긴 축선을 따라 배치되고, 지금은 훤하게 터진 넓은 마당이지만 마당 사이에는 사잇담장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평면의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후면에 '口'자 모양의 안채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남측 담에는 작은 협문을 설치해 두었다. 사당은 안채 후면에는 축대를 높이 배치해 두었는데 사랑채와 안채의 축선을 벗어난 북편에 치우쳐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대문쪽에서부터 대청과 사랑방 2칸이 이어지고 안채쪽으로 꺾인 부분에 두칸 마루방과 온돌 1칸이 연접되어 있다. 방과 대청의 전면으로 반칸의 퇴마루가 연결되고 사랑방 끝에 반칸을 내어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랑방옆의 작은방은 시중드는 수직방이나 객실로 사용된 듯 하다. 단간인 대청과 연접된 두칸 마루방 사이엔 불발기 창호를 달아 필요시 분합문을 들어열면 넓은 공간이 된다. 사랑채 전면에는 낮은 석단을 두른 화계를 만들어 두고, 기둥마다 걸린 주련이 한데 어울려 당시의 고풍스런 양반의 자태를 보는 듯 하다. 1고주 5량집에 납도리를 쓰고 홑처마에 알추녀, 엇선자 등 간결한 구조이면서도 동편 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 풍우를 막도록 하였다. 눈썹지붕은 흔히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독특하다. 사랑채 후면에 있는 안채는 낮은 단차로 분리되어 있는데 사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에는 담을 두지않아 매우 넓은 마당으로 보여진다. 처음에는 이 두마당 사이에 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는 서편 중앙에 동향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6칸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을 연결하였다. 안방쪽은 1칸반, 건너방쪽은 1칸통으로 방과 부엌, 헛간 등을 배열하고 전면 옆에는 중문간과 광을 배치했다. 트인곳이 없이 완벽한 '口'자 집이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은 장대석 두벌대로 기단을 높이고, 양 익랑채와 광채는 단을 낮추어 높낮이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다. 이렇게 안대청이 높은 것은 영남지방 반가에서 흔히볼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만들면 안마당의 크기가 작아지고 폐쇄감이 강하다. 안채의 구조는 중심몸채가 1고주 5량집인데 비해 다른 부분은 3량 맞거리집이다. 넓은 대청의 전퇴부 고주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대청공간을 구획 활용하게 했다. 안방의 위와 옆 둘레에 고방과 골방을 배치, 안주인 생활영역을 넓혀주었으며, 건너방 밖으로도 반칸퇴에 판문을 설치한 마루방으로 꾸며 안사랑과 같은 기능과 사랑마당의 출입을 편리케 하였다. 또한 안방, 건너방에 달린 부엌칸은 외면벽에만 판문을 두어 전후의 뜰과 통하도록 하고 안마당쪽 벽면은 모두 개방해 두었다. 이러한 구조는 외부에서 보면 폐쇄적이지만 안마당쪽은 개방적이다. 추사고택의 안채공간은 호서지방 반가에서 흔치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마당을 트인부분 없이 '口'자로 만드는데 크기를 작게하고, 안대청을 높게 만든 것이다. 안채의 이러한 공간구조는 영남지방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호서지방 반가에서는 대개 안마당을 조금 크게하고, 안대청 부분을 그리 높지않게 만든다. 특히 안마당은 건물로 완벽하게 감싸안고 어딘가 틔여두는 튼'口'자형 구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이와는 대조적인 배치가 되었다. 안채의 안마당에 들어서면 에워싸고 있는 안벽과 문들을 많이 생략하여 밖에서 보는 것보다 개방적이다. 안마당의 폐쇄감을 완화해 보려는 생각인 것 같다. 반면 전체적인 배치계획은 사랑채와 안채를 완전히 분리하고, 넓은 마당을 만들어 여유스러운 모습이다. 사랑채 기둥에는 많은 주련을 달아두어 당대 명필 추사선생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참고문헌 : 이응묵, 추사고택 『건축사』1986년 2월 별당과 같은 사랑채의 호서지방 반가
수당(修堂) 이남규선생은 1855년(철종5)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이호식(李浩植)의 아들로 태어나 참판을 지냈으며, 일인들에 의해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나자 격분하여 낙향하였다. 을사조약 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07년 의병과 관련이 있다하여 투옥되었으나 계속 항거함으로 왜군들에 의해 온양의 평창에서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가옥은 이남규 선생의 십대조 한림공 이구(李久)가 1637년(인조15) 건립한 것으로 한림공의 부인 완산이씨 행장(行狀)에서 밝혀졌다. 1985년 이 가옥을 보수하면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1846년(헌종12)에 중수 하였다고 한다. 마을 동편의 봉수산(鳳首山)마루가 남으로 흐르다가 그 한자락이 서편으로 빠지면서 작은 능선을 만들어 마을의 배산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작은 들이 횡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동편의 계곡에서 발원된 개천은 방산저수지에 머물러 있다가 마을 앞을 서쪽으로 흘러 달천과 합수되어 남으로 흘러간다. 마을길에서 이 집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사랑채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안채가 있다.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정면과 동측은 퇴칸이다. 동측 퇴칸은 부엌이며, 부엌상부에는 누다락을 두었다. 부엌에 이어서 큰 사랑방이 남측으로 2칸 통칸이 되고 그 북측으로는 4분합 미닫이로 두칸이 나누어져 문을 열면 전체가 통칸이 된다. 두 방의 북측벽은 판자벽에 쌍여닫이로 되어 있고, 큰사랑방에서 대청으로는 3분합 들어열개가 달려 있고, 전면 2칸 대청의 각칸은 4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대청 남측 전칸에 비해 북측에는 반칸의 마루가 머름중방이 설치된 위에 조금 높게 있고, 북측벽은 각간 쌍여닫이로 되어 있다. 대청마루와 1칸 반의 작은 사랑방 사이는 큰사랑방과 마찬가지로 3분합 들어열개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통칸이 될 수 있다. 작은 사랑방 뒷쪽 반칸은 함실과 상부는 반침으로 사용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각칸의 전면에는 퇴마루로 이어지며 특히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 앞에는 따로 막아서 전면은 4분합 큰 정자살창으로 측면은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현재는 없어졌으나 그 퇴마루를 연결하여 안채마루로 바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붕이 설치된 통로가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작은 협문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격리시킨 담이 안채를 둘러싸고 있다. 안채 정면에 행랑채가 있고, 행랑채에 달려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두칸의 마루방과 이 방에서 꺾여 여섯칸 통칸의 넓은 안대청이 있으며 대청을 지나서 안방이 두칸, 북측으로 웃방이 한칸 이어져 있다. 그리고 안방과 웃방에는 동측면에 수장공간이 반칸씩 이어져 설치되어 있고 안방에 따로 3칸의 넓은 부엌이 있다. 부엌 상부는 다락을 두어 안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쪽 익랑의 남측 2칸은 부엌이고, 이 부엌 상부에도 건너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다락방을 두었다. 부엌의 북측은 건너방, 마루방, 퇴마루가 있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같은 수법으로 안채는 대청쪽에서 중문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져 약 2자높이의 기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사랑채의 큰 사랑방 전면에만 방추형 주초석이고, 나머지는 모두 커다란 덤벙초석를 썼다. 기둥은 7치각 크기의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 부분에서는 철띠를 둘러 기둥의 균열을 방지하도록 했고 그 위에 초익공으로 공포를 짠 다음 보 밑은 양봉으로 보강하였다. 장혀위에 올린 도리는 모두 굴도리를 쓰고, 대들보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높은 사다리 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소로와 장혀를 올린 다음 다시 뜬 창방이 결구되어 있다. 천정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안채의 우측 끝은 맞배지붕이고 대청 정면만은 부연이 있는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의 배치구조는 사랑채를 별도로 서측에 두고, 안채와 행랑채를 동측에 튼'口'자 형태로 배치시켰다. 일반적으로 반가에서 사랑채는 안채의 전면에 배치하여 인접시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측에 횡으로 독립된 별채와 같이 배치해 두었다. 이러한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이 가옥에서는 사랑채가 별당의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랑채의 크기가 다른 곳에서보다 규모가 크다. 일반적인 반가로 보면 사랑채가 들어설 위치에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과 같이 이러한 배치구조는 안동 천전의 의성김씨 대종가의 배치구조와 흡사하다. 사랑채에는 편액이 특히 많다. 평원정 외에 정심당(正心堂), 청좌산거(靑左山居), 담화당(湛和堂) 등의 당호가 걸려 있다. 이남규선생이 당시의 명필이었던 것을 이러한 편액에서 엿볼 수 있다. 내외구분에 실용성을 적용한 조선후기의 배치계획
이 가옥은 선조때의 대신 이산해의 9대손인 이광임이 1870년(순조25)에 건립하였다. 사랑채는 조선 말 그의 아들 이승우가 증축한 것이라 한다. 고택이 있는 마을 주변 지리환경을 보자. 동편의 천방산(千方山)이 험준한 자락을 남북으로 이으면서 극정봉과 봉수산으로 연결된다. 천방산의 한자락이 서편으로 내리 뻗으면서 방산리의 남쪽을 막아 큰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계곡에서 흐른 물은 마을 서편 아래에서 저수지에 모였다가 상항리 들로 흘러 나간다. 고택은 북편에 방산 저수지를 두고, 천방산을 안산으로 동향배치하고 있다. 동향으로 경사진 대지를 따라 전면에 긴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ㄱ'자형 안채와 종방향으로 길게 행랑채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튼 '口'자 집이다. 안마당은 사랑채의 정면 칸수만큼 긴 장방형이다. 안마당으로의 진입은 남측에 위치한 행랑채의 모서리를 통해 들어간다. 안채의 후면인 서측에는 경사가 급한 뒤뜰을 만들고, 측면인 북편에는 장독대와 우물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열과 서측에 퇴칸을 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2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을 두고, 동편에 루마루 1칸과 부엌 1칸을 전후로 배치해 두었다. 대청 서측에 1칸반 크기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이 온돌방 측면으로 퇴칸을 만들어 정면열 퇴칸과 연결시키고 있다. 대청과 안방의 후면 4칸에도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다. 이 4칸의 퇴에는 외벽을 막아 골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측 부엌 상부는 루다락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부엌 정면의 루마루 1칸은 바닥을 높여 정면퇴마루와 연결하고, 정면과 측면 2면에는 머름을 달아 마치 정자와 같은 모양이 되게 하였다. 가옥의 동북편이 넓게 터져 조망이 좋은 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높아진 루마루 하부는 판벽으로 막아 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 2단으로 하단은 두벌대, 상단은 세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를 썼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쓰고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동측에 정면으로 3칸을 꺾어 달아낸 'ㄱ'자집이다. 한쪽 지붕은 팔작이고 부엌쪽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다. 평면은 가운데 회첨부분에 2칸통의 안대청을 두고 동측에 안방과 고방(웃방)을 배치하였다. 안방 앞쪽으로 2칸의 부엌을 달고 부엌 상부는 다락을 설치해 두었다. 안대청 서측으로는 대청에서부터 건너방, 광, 제실(祭室), 객방(客房)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건너방은 안쪽에 벽장을 두고 앞쪽에는 안대청 마루와 높이기 다른 툇마루를 설치한 다음 마루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다. 광은 1칸통을 모두 하나의 실로 만들고, 그 상부는 다락을 두었다. 제실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전면 1칸은 마루를 설치하고, 후면 1칸을 제실로 사용하고 있다. 객방은 제사에 참여하는 집안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방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측면에 2자폭의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다. 객방 정면 툇마루 하부에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안채의 기단은 막돌로 2자정도 높여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급한 구릉에 위치하면서 자연히 기단이 높아졌다. 특히 'ㄱ'자로 꺾어진 부엌은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려한 때문인지 안대청보다 훨씬 높아졌다. 이 때문에 부엌 상부의 다락도 천정이 높아지게 되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의 서측에 종방향으로 안마당을 막으면서 배치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이다. 사랑채쪽 1칸은 중문간으로 사용하고, 이어서 광, 부엌, 행랑방을 두었다. 안채와 연접해 있으면서 안채와 별도의 두벌대 기단을 만들어 행랑채를 앉혔다. 초석은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이 가옥은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남향으로 약간 틀어 배치할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골안을 바라보는 형국이 되고, 또한 가옥의 배후가 터지게 되는 조망상의 약점을 지니게 된다. 이 가옥이 동향인 까닭을 알 수 있다. 입지조건에 있어서 전면의 평지를 두고 후면의 구릉지에 붙여 배치한 것은 전면의 사랑마당을 넓게 확보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안채의 기단 역시 높지만 안마당이 답답하지 않은 이유는 마당의 전후좌우 폭을 넓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튼 'ㅁ'자집의 여유있는 호서지방 가옥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행랑채를 안채에 인접하여 종방향으로 배치한 것은 그리 흔치 않은 방법이다. 안채를 'ㄷ'자 평면으로 하여 익랑으로 만드는 경우 자연스럽게 아늑한 안마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가옥에서는 안채의 공간을 'ㄱ'자 평면으로 처리함으로서 긴 안채가 되었고, 자연히 안마당이 커지게 된 것이다. 결국 넓고 허전한 안마당을 감싸기 위하여 행랑채를 터진 서측에 종방향으로 배치함으로서 반가의 면모를 지니게 만든 것이다. 반면 형식적으로는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지만 안채에 객방이 만들어지고 안마당을 행랑마당과 공유하는 등 엄격하던 내외구분이 모호해 지는 배치구조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엄격하던 유학사상이 건축공간에 적용될 때 조금 완화되는 듯한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이 가옥에서 그러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지형조건과 시대사상을 적절히 이용한 건축계획이다. 참고문헌 :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충남지방의 문화유적(9). 1995. 풍수국면을 완벽하게 응용한 입지계획
이 주택은 넓은 경작지와 야산구릉으로 둘러싸인 농촌마을의 전통적인 초가집으로 건립 년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건축적 특징으로 보아 19세기초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않고 비어있다. 이 주택이 점지하고 있는 곳은 후면의 산자락이 이 가옥의 좌우를 감싸면서 청룡과 백호를 형성하고, 동측으로 비켜 수구(水口)가 열리면서 넓은 들과 이어진다. 풍수의 기본적인 형국을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주택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안채, 곳간채가 튼 '口'자집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채의 동편에는 별도로 1동의 창고 및 화장실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전면열을 퇴칸으로 만들었다. 동편에 마루방을 두고, 서측의 대문간을 겸하는 부엌 건너로는 2개의 사랑방을 설치하였다. 동측의 마루방은 외부로 창을 두지 않고, 폐쇄시켰다. 대신 내부의 대문간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동측면 옆은 3.5자 폭의 퇴칸을 만들고, 이 퇴칸에는 벽이나 마루를 만들지 않았다. 기단은 막돌로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다만 동측면 퇴칸에는 원주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부재는 근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였다. 마루칸 뒤편으로 한칸 규모의 외양간을 덧붙어 'ㄴ'자 평면으로 만들고, 서측 사랑방 2칸 앞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부엌칸은 아궁이 함실과 창고를 설치하여 칸넓이가 3자정도 넓어졌다. 안채는 정면 5칸의 '一'자집 평면으로 전면에 퇴칸을 두었다. 동쪽끝칸 부엌 부분에 뒤로는 처마 밑을 이용한 반칸퇴를 내어 '나뭇간'으로 쓰고, 앞쪽엔 반칸퇴를 더 달아서 사방1칸의 부엌광을 설치했다. 부엌에 이어진 3칸 온돌방은 내부에 사잇장지문(미서기)을 설치, 안방과 웃방, 끝방으로 구획하고 필요에 따라 실을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안채의 구조는 중간에 내진고주를 세우고 반오량집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전면쪽은 장연과 단연을 이어댄 서까래 구성이지만 후면은 하나의 서까래만 얹은 까닭에 지붕의 길이는 전면쪽이 후면보다 훨씬길다. 이런 모습을 보완하기 위해 지붕마루가 몸채의 중심에 오도록 초가 지붕속에 짚을 더 채워 조절했다. 굴도리를 쓰고 기둥은 원주에 전면쪽은 방주를 썼다. 막돌 허튼층으로 비교적 높게 네벌대로 만들고 그 위에 안채를 세웠다. 부엌광 지붕틀은 중도리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도리를 직각으로 걸쳐 'ㄱ'자로 구성했는데 지붕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둥글게 마무리했다. 안마당 서편으로는 광채를 두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전형적인 농가이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로 폐쇄적인 안마당을 만들어 놓았다. 구조적으로는 민가에서 흔히 사용하는 반오량구조나 맞걸이 3량집의 초가로 소박한 농가주택이지만 배치형태는 튼'口'자집 형식을 지니고 있다. 평면에 있어서 사랑채와 안채에 퇴간을 두어 방을 넓게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 통나무 속은 파내 만든 굴뚝이나 토담 등은 일반 민가의 전형적인 구성요소이다. 집앞에 파놓은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속채들로 교묘하게 공간을 구획한 농촌 반가
마을 북편에 있는 산 정상에는 산성유적이 남아 있다. 이 가옥은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주변에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고, 대지도 비교적 여유있으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사랑채, 안채를 비롯하여 별당(안사랑채라고도 함), 문간채 그리고 여러동의 광채를 포함하여 모두 크고 작은 10여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여러 건물 중 'ㄱ'자형 안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一'자형 평면이다. 가옥은 문간채·사랑채·안채를 중심축선에 배치하고 동측에 별당, 창고가 있고, 서측에 외양간과 헛간이 배치되어 있다. 정면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횡으로 긴 사랑마당이 있고, 사랑마당 동측에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서측에도 안채로 통하는 작은 쪽문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북편에 'ㄱ'자로 배치하고, 동편에 창고가 배치되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배치형태로 보면 튼'口'자 집 구조이다. 정침의 동편에 있는 별당은 또하나의 마당을 중심으로 정면과 양 측면에 창고를 두었고, 주위는 담을 둘러 폐쇄된 외부공간을 만들었다. 집 앞에는 연못을 두고 주변에 소나무, 버드나무 등 각종 나무를 심어두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으로 전면과 좌측에 퇴칸을 둔 1고주 5량집 구조이다. 평면은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사랑 2칸, 대청, 작은사랑이 있고, 부엌 상부는 중앙칸을 막아 앞쪽은 루마루, 뒷쪽은 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외벌대를 만든 기단 위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만든 2중 기단이다. 초석은 방형초석을 놓고 방주를 썼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정면 5칸에 좌우에는 퇴간을 만들었다. 측면은 4칸으로 후면열에는 퇴칸을 만들었다. 가운데 3칸통을 대청마루로 하고 대청 동서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 남측에 2칸의 부엌을 두고 안방 북측에는 1칸 크기의 작은 방을 두었다. 작은방 뒷편에 만들어 둔 골방은 처마밑에 헛기둥을 내어 확장했고, 퇴마루끝 모퇴부에는 토광을 두었다. 대청 동측 후면칸은 벽과 문을 달아 사당방(廟室)으로 꾸몄다. 건너방 동측 퇴칸은 정면쪽 모서리에 작은 광을 두고 그 후면은 긴 광을 두었다. 광의 가운데 칸 툇마루 하부는 아궁이 함실을 설치해 두었다. 기단은 사괴석 네벌대로 만들고, 방형초석에 방주를 세웠다. 대청마루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부엌쪽은 맞배지붕이다.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대청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판대공 세워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안사랑채라고도 부르는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2칸에 방을 두고 동편에 부엌, 서편에 마루방을 두었다. 이 건물에서는 평면의 측면 간살잡이가 다르다. 즉, 동편은 1칸통은 명확하게 2칸으로 간살을 잡고있으나,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서측의 3칸통은 가운데 열을 1칸으로 하고, 전후로 반칸씩 퇴칸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후에 퇴칸마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운데 방 후면에는 좌우 1칸크기의 방을 달아 반칸 정도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사괴석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방형초석을 놓은 다음 방주를 세웠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대문 좌우에는 방과 광, 헛간을 두었다. 문간을 중심으로 동측에 2칸의 곳간, 서측으로 마루곳간과 2개의 방을 각각 배치하였다. 서측 끝에는 반칸을 내달아 하부는 부엌을, 상부는 다락으로 사용한다. 이 가옥은 공간적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부공간의 구성을 보면 크게 3개의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안채공간이고, 마지막으로 안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안사랑채 공간이다. 배치의 기본적인 구성은 충청지방의 여유있는 튼'ㅁ'자집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나 부속건물이 다른 가옥에 비해 특히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가옥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공간의 여유를 더욱 잘 느끼도록 하였다. 가옥 근처에 이렇게 연못을 만드는 것은 충청도지방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외부공간 사이는 창고와 외양간, 담 등으로 구획하여 엄격하게 공간을 격리하고 있다. 외부공간을 구분하기 위하여 창고를 많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저장공간을 이러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상식 창고인 부경(?京)과 커다란 외양간을 별도로 만들어 두고 행랑채에도 창고를 만든 것으로 볼 때 이 가옥은 많은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대지주 농촌 반가였음을 알 수 있다. 영남 반가를 닮은 폐쇄감이 강한 안마당
이 가옥은 사육신 성삼문의 외손 엄찬이 살았던 집으로 전해 온다. 성삼문은 그의 외가가 있는 이 마을 노은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이 가옥이 그의 탄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마을의 북편에 수리봉과 닭제산이 솟아 있고, 두 산자락이 남으로 흐르면서 가옥의 배경을 형성한다. 마을 앞으로 낮은 구릉이 동편의 임정재로 이어지면서 좌청룡을 만들고, 수리봉의 한 자락이 서편을 감싸면서 우백호를 이룬다. 서편의 마을 어귀는 새갓이들과 이어지면서 시야가 터져 있다. 새갓이들 가운데로 금마천이 북으로 흘러 무점말에서 삽교천과 합수된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는 풍수적으로 내수구가 되고, 금마천은 외수구가 되는 풍수형국을 만들고 있다. 이 가옥에는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 중문간채만 남아 있다. 평면은 'ㅂ'자 모양으로 정면쪽으로 날개부분이 빠져 나왔다. 이러한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실의 한쪽이 밖으로 길게 빠진 평면구조는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구조이다. 이러한 평면의 가옥을 '날개집'이라고 하는데 대개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길게 뻗어 앞을 가로막는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이 가옥에서는 'ㅂ'자가 거꾸로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어서 영남지방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안마당이 트이지 않은 평면구조는 영남지방의 그것과 닮았다. 안채의 중심부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었다. 대청 서측의 안방 앞쪽으로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안대청의 서측 익랑은 길게 누다락을 설치하여, 하부는 광으로 쓰고, 상부는 다락방으로 쓰고 있다. 안대청의 동편에는 판벽으로 막아 곳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익랑의 남측 끝에는 마루칸을 두었다. 안마당은 트이지 않은 '口'자집으로 규모도 작아 폐쇄감이 강하다. 안채의 기단은 4자 이상으로 높여 남측 중문간채와는 단차가 심하다. 안채의 구조는 1고주 5량집으로 하고, 종보 위에는 표주박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현재 안채를 제외한 사랑채나 부속 건물이 없어 전체적인 배치구성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옥의 안채만으로 보면 충청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폐쇄된 배치구조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급하지 않은 입지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의 대지는 급한 구릉에 배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배치에 따라 안마당의 폐쇄감이 강하게 되고 안대청이 높아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대청과 지붕선을 맞추기 위하여 양 익랑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양 익랑이 높아지므로서 마치 중층과 같은 형태가 되어 루다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와 건물구조는 충청지방에서 보다는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치와 구조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없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적인 배치구조를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의 평면구조에서는 사랑채의 기능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어디엔가 사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정하기로는 정면부에 작은 마당을 두고 횡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훼손이 심하여 보수가 시급하다. 평지에 건립된 영남지방식 '口'자집
홍성군 갈산면 소재지에서 서측으로 2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갈산중학교와는 가깝게 인접해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결봉산 자락과 서쪽에 위치한 삼불산 자락이 만나 마을 북편을 막아주는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두자락 사이로 운곡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마을 앞들에서 와룡청과 합수된다. 주산격인 결봉산 자락이 마을의 동편에서 좌청룡을, 삼불산 자락이 서편에서 우백호를 만들고,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동에서 서로 와룡천이 흘러 지나가는 풍수적 국면을 가지고 있다. 이 들을 건너 행산리에 김좌진장군 생가터가 있으며, 최근 생가를 복원해 두었다. 전용일 가옥은 문간채나 부속채 없이 '口'자집 평면에 안채, 사랑채, 곳간 등이 연결되어 있다. 주변에 부속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정면의 중문을 지나면 곧바로 안마당으로 진입한다. 안마당의 크기는 좌우폭에 비해 전후의 깊이가 깊은 장방형이다. 마당 가운데 둥근 화단을 두었다. 안채는 2칸통의 안대청을 가운데 두고 대청 서측에 안방을, 동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건너방 북쪽 끝에 작은 마루방을 덧붙여 마치 날개집처럼 밖으로 1칸이 빠져나갔다. 안방의 서측 모서리에는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다락을 꾸몄다. 건너방 남측 익랑에도 2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다. 이 부엌 상부도 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방 전면은 반칸으로 퇴칸을 만들어 툇마루를 설치하여 안대청과 연결시켰다. 서측 익랑에는 방과 창고를 두었다. 이 중 큰방은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간채에는 마루를 깐 곳간 2칸과 동편 모서리에 큰 창고를 두고 있다. 문간채와 서측 익랑 사이에는 뒤뜰로 나가는 작은 협문을 두었다. 이 가옥은 안마당이 트이지 않은 완벽한 '口'자집이다.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충청도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평면구조이다. 충남지방의 경우 대개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트여두는 튼'口'자집이 많다. 가옥이 자리잡고 있는 대지는 평지여서 안채와 사랑채의 단차가 없다. 이러한 대지조건 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와 사랑채를 완벽하게 붙여만든 '口'자 집이다. 다만 안마당은 경상도의 그것에 비해 크게 만들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부여 민칠식 가옥, 예산 김정희 가옥, 아산 성준경 가옥, 홍성 엄찬 가옥 등 불과 몇 개의 사례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배치형태는 영남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크게 만든 안마당을 보면 호서지방의 특징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건립당시 소유주가 안동 김씨였던 것이 이런 배치형태를 만들게 된 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규모가 큰 튼 '口'자집 농가주택
평지에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그리고 광채가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의 서측에 있는 대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대문의 출입은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문과 마주치는 벽쪽에 작은 광을 가로막아 한 번 꺾여져 들어가게 하였다. 넓은 안마당엔 작은 정원이 있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남측)에 사랑채, 북측에 안채, 동측에 아랫채를 배치하여 튼 '口'자집이 된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서측 2칸은 대문간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4칸통은 4개의 방을 두었다. 각 방의 전면은 퇴칸으로 하여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낮은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가운데 2칸은 안대청이고 대청 좌우로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했다. 대문간 쪽으로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반대편으로 꺾어진 끝부분에 2칸 크기의 건너방을 두고 건너방 외벽에 아궁이 함실을 만들어 두었다. 방과 안대청 앞쪽으로는 퇴칸으로 만들어 툇마루를 길게 연결해 두었다. 사랑채와 같이 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썼다. 안마당 동편을 가로막고 있는 아랫채는 'ㄱ'자 평면이다. 이 아랫채는 원래 광채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방을 들여 살림공간으로 사용하게 했다. 후면으로 급한 구릉이 배경을 형성하고 있지만 가옥의 대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 건물의 배치는 서로 연결시키지 않고 떨어지게 배치하여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口'자집이 된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충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잇는 배치구조이다. 이 가옥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용일 가옥은 한 마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안마당이 터지지 않은 '口'자집인 것과 비교된다. 정침과 좌향이 다른 차양 있는 사랑채
이 가옥은 인접해 있는 정순왕후 생가의 작은댁이다. 배치형태는 '巳'자형 평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붙인 '口'자집이다. 전체적인 좌향은 유좌묘향(酉座卯向)인 동향이지만 사랑채는 정침에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남향을 하고 있다. 마을의 주변 지리환경을 보면 서편으로 소심산(蘇深山)이 솟아 그 자락이 남북으로 뻗으면서 서산과 음암의 경계를 이룬다. 동편으로는 농경지와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다. 동편의 낮은 구릉 너머로 넓은 들이 형성되고, 들 가운데로 대교천이 북으로 흘러 성안저수지로 합수된다. 마을은 약한 구릉에 동남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가옥은 대문을 동북쪽 모서리에 1칸크기의 일각대문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으로 진입된다. 사랑마당 동편에 행랑채, 서편에 'ㄱ'자 평면의 사랑채를 배치했다. 사랑채 후면에 '口'자형 안채를 연결하여 정침이 된다. 사랑채 북편에 중문간채, 안채 북편에 초당이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중문간채와 안채 사이에는 협문을 두어 내외를 구분한다. 주변 담은 이러한 부속채 외벽에 맞추어 둘렀기 때문에 건물 크기에 비해 대지는 그리 크지 않다. 이로 인해 가옥은 짜임새 있는 배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의 뒤뜰에는 장독대를 두었다. 외부공간은 크게 2개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행랑채·중문간을 포함하는 바깥공간(남성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건축공간으로 안공간(여성공간)이 된다. 이 두 공간은 협문과 부속채, 담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조선시대 유학사상이 건축공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대청마루를 생략하고 대신 가운데 크고 작은 2개의 방을 두었다. 마루는 정면열의 ⅔를 이용하고 측면에 연결된 익랑에는 부엌과 창고를 두었다. 특히 사랑채 정면에는 차양을 만들어 두었는데, 살림집에 차양은 그리 흔한 시설은 아니다. 차양이 남아있는 반가 중에는 창덕궁의 연경당과 강릉 선교장,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사례를 볼 수 있다. 사랑채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로 만들고 방추형 초석에 방주를 썼다. 다만 차양에는 8각 장초석에 8각주를 썼다. 사랑채의 구조기법은 안채보다 간결하게 처리되었는데 차양은 반대로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차양 전면은 부연을 단 겹처마인데 후면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사랑채는 모를 굴린 납도리를 썼으나 종도리에만 장혀를 받쳤다. 사랑마당에 면하여 정면에 배치된 행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一'자집 평면이며 우진각 지붕이다. 가운데 곳간과 부엌을 두고 그 좌우에 방과 커다란 곳간을 만들어 두었다. 장대석 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중문간 북쪽 바깥마당에도 3칸집이 있다. 옛날엔 침모가 살았으며 그 옆에 마구간이 붙어 있다. 안채 뒤뜰 마당가에 있는 초당은 3칸의 초가로 방과 광으로 이루어져 내별당으로 사용된 듯 하다. 사랑채 후면에 연결된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안채는 가운데 안대청과 안방을 두고, 대청 북쪽에 건너방, 남쪽에 커다란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 쪽으로 뻗은 북측 익랑에는 작은 부엌과 방을 배치하고, 남측 익랑에는 2칸의 광을 두었다. 사랑채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익랑에는 헛간, 마루방, 광을 두었다. 안대청의 구조는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익랑부분은 모두 3량집 구조이다. 대청에는 분합문 위에 커다란 교창을 만들어 끼웠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지만 배치구조는 서로 다르다. 즉 안채는 남향인데 비해 사랑채는 정침에 직각방향으로 놓아 서향을 하고 있다. 정침 주위에 담처럼 둘러싸는 부속채를 배치해 두고, 부속채 외벽에 맞춰 담을 둘렀기 때문에 대지가 넓게 확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옥의 배치는 매우 짜임새 있게 보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충남지방의 반가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약한 구릉이나 평지가 많은 충남지방의 반가는 부속채를 울담안에 두고 대지를 넓게 확보한 다음 부속채 밖으로 담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채의 구성은 안마당에 틈을 두지 않은 완벽한 '口'자 집을 하고 있다. 충남지방의 반가는 튼 '口'자 집인데 비해 이 가옥은 영남지방 반가에서 많이 보이는 '口'자 집을 닮았다. 또한 대문을 행랑채에 두지 않고 모서리 부분에 별도로 만들어 세운 것도 특이하다. 대문을 비롯한 모든 부속채는 우진각지붕으로 처리하여 정침의 팔작지붕과 격식을 달리하고 있다. 건물의 형식적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가옥에서는 사랑채에 차양을 달아 두었다. 이 차양은 우리나라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드문 사례이다. 사랑채 공간이 안채에 비해 작은 '口'자집
왕비가 태어나던 날 '집 주변에 영롱한 서기(瑞氣)가 맴돌고, 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새들이 이 집으로 날아 들어와 마을 주민들이 장차 인물이 될 징조라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가옥은 정순왕후의 5대조이며 승지, 충청감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김홍욱(金弘郁)이 효종임금의 하사금으로 1650년경 지은 것이라 한다. 경주 김씨 학주공파 시조인 김홍욱은 효종임금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으며 김홍욱이 늙은 부친에 대한 효심이 극진한 것을 알고 하사하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15세에 왕후로 간택되었다. 56세때는 어린 순조를 대신 섭정을 하기도 했다. 이 가옥과 담을 사이에 두고 동편에 작은댁 김기현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의 주변환경에 대해서는 김기현 가옥을 참고하기 바란다. 가옥의 배치는 정면에 대문을 두고 그 후면에 사랑채와 안채를 '口'자 집으로 배치해 두었다. 정침 서측에 정면 2칸의 작은 고방과 문간을 두어 안채공간과 구분하고 있다. 사랑채는 가운데 2칸의 사랑방을 두고, 동측 모서리에 1칸의 마루방을 두었다. 사랑방과 마루방 앞에는 3자폭의 쪽마루를 길게 놓았다. 사랑방 서측에 붙여 부엌과 고방을 두었는데 부엌 상부는 다락으로 꾸몄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에 방주를 썼다. 사랑채 서측 익랑에 붙여 중문간을 두고 이 문을 통하여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안채는 가운데 3칸통의 큰 안대청을 두고 그 동측에 안방, 서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건너방 북편에는 작은 벽장을 덧달았다. 안방이 있는 동측 익랑에는 커다란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다락을 만들었다. 서측 익랑에는 마루방, 건너방, 고방을 두었다. 안대청 정면 반칸에 퇴칸 마루를 깔고 이 퇴칸 마루와 안대청 사이의 3칸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다. 안방과 건너방 앞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는데, 이러한 세부형태로 보면 안채는 좌우 대칭적 구성인 것을 알 수 있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썼다. 거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의 고저차가 없다. 안마당은 완벽한 '口'자집 평면이다. 평지에 입지 하면서도 이러한 평면구조는 충남지방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평지가 적은 산간지역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치구성이다. 충남지방에서는 안마당이 트여 있는 튼 '口'자집이 많으며, 건물 간에도 여유를 두고 배치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가옥의 사랑채 공간이 다른 반가에 비해 작은 편이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던 공간으로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도 하는 곳이다. 조선후기 왕후를 배출한 집안이라면 남자들의 활동이 활발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가옥에서는 이러한 활동공간으로 사용했던 사랑채가 다른 곳에 비해 작다는 것이 특이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댁인 김기현 가옥은 '口'자 집이면서 사랑채를 별도로 덧달아 붙인 것과는 다르다. 사랑채 앞마당과 대문밖에는 정원이 꾸며져 있으나 단순히 나무를 심고 돌을 놓아둔 것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맛을 느낄 수 없으며, 고택과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기능에 따라 증축된 튼 '口'자집 농가
구릉을 배경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가옥 앞으로는 넓지는 않지만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주변에 민가는 많지 않으며 서남쪽에 떨어져 1가구가 이웃하고 있다. 배치를 보면 전면에 'ㄱ'자 평면의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 평면의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서측에는 부속채를 두어 안마당을 감싸도록 만들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 초가집이다. 동측에는 조금 떨어져 외양간, 창고가 있다. 벽을 두지 않고, 기둥과 지붕만 있다. 근래 지어진 것이다. 사랑채는 'ㄱ'자 평면이지만 동측의 광이 반칸 정도 커지면서 'ㄱ'자가 되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一'자형에 가깝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양 측면에 반칸씩 퇴칸을 달아 길이로 보면 정면이 5칸이 된다. 가운데 중문간을 두고, 동측에 사랑방 2개, 서측에 온돌방과 외양간을 두었다. 문간에는 동벽에 붙여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동편 온돌방 주위로는 툇마루를 돌렸다. 툇마루는 높이를 달리 만들었다. 모서리 부분 마루를 가장 높게 만들어 마치 작은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남측의 2칸 툇마루도 서로 높이를 달리하여 작은 공간에서 독특한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에는 '亞'자문 난간을 설치하여 작은 초가집에서 여유있는 장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약한 구릉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사랑채 정면에 4자 높이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괴석으로 사랑채 기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썼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동측에 2칸통의 큰 부엌과 곳간, 문간을 두었다. 안방 서측에 대청마루와 건너방, 마루방을 두었다. 안방 앞열은 퇴칸으로 하여 툇마루를 깔았다. 이 때문에 안대청과 툇마루가 연결되었다. 사랑채와 같이 막돌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썼다. 안마당은 횡으로 긴 장방형이며, 서측의 부속채와 사랑채 사이에 작은 통로를 두어 앞마당과 안마당을 연결시키고 있다. 안채 뒤뜰은 막돌로 담을 쌓고 장독대를 두었다. 마을과 떨어져 자라잡고 있는 이 가옥은 전형적인 뜰을 가지고 있는 초가이다. 3채의 건물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이와같은 뜰집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사랑채 평면은 완벽한 'ㄱ'자 집이 아니며, 후일 증축과정에서 덧달아낸 것으로 보인다. 서편의 부속채도 본채와 비교해 볼 때 시대적으로 떨어진 것이어서 전체가 한꺼번에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안채를 지어 지내다가 나중에 사랑채를 증축하였다. 이 때문에 사랑채에 중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랑채로 인하여 안마당이 생겼으나 서측은 건물이 없어 마당이 터지게 된다. 말하자면 안마당이 막히지 않아 개방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서측의 부속채는 이러한 터진 안마당을 감싸기 위해 나중에 증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부속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방과 부엌을 꾸며 별채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채를 증축함으로서 안마당이 좁고 긴 장방형이 되었던 것이다. 풍수국면이 좋은 조선말 서해지방의 '口'자집 초가
이 가옥은 전형적인 농가로 목은 이색의 18세손이며 중추원의관을 지낸 이병식이 조선말에 안채 3칸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아들인 형규씨가 사랑채와 아래채, 웃채를 증축하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 호주인 이하복은 1910년 이응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주학생사건때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반일운동을 하였으며,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창씨개명과 징용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개몽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가옥이 배치되어 있는 이 마을은 북편으로 높은 산이 막아주고, 전면으로는 크지는 않지만 작은 들이 형성되어 앞이 터진 형국이다. 풍수적인 형국을 보면 멀리 장군봉에서 이어진 진산이 동편으로 감돌아 우백호를 만들고, 옥녀봉 줄기가 서편으로 감돌아 좌청룡을 만들어 준다. 마을 어귀의 들을 건너서 화양산이 이 마을의 안산이 되어 풍수적으로 잘 형성된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풍수적으로 좋은 양택에 자리잡은 이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부농가이다. 가옥은 안채와 아랫채, 사랑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전퇴를 둔 6간 '一'자집에 부엌, 안방, 웃방, 대청, 아랫방을 배열하고 아랫방 앞으로 중문간이 있는 헛간을 덧붙여 'ㄱ'자집이 되었다. 아랫방 끝에도 머리퇴 부분에 마루를 설치했다. 본래 안채는 부엌 1칸과 아래, 웃방 각 1간씩인 전퇴 3칸집이었으나 나중에 부엌을 1칸 더 늘이고, 웃방에 붙여 대청과 아랫방을 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안채의 기단은 사괴석 외벌대로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썼다. 2고주 4량의 민도리집 구조이다. 이런 4량집 구조는 종도리가 얹어지지 않으므로 초가집에서는 용마루를 둥글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랫채는 서측에 대문간을 두고, 안채와 나란히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같아 보이나 아랫채라 부른다. 이 아랫채는 4칸 전퇴집으로 문간, 부엌, 사랑방 2칸이 배열된 끝에 머릿퇴를 두었다. 안채와 같은 1고주 5량집이다. 안마당 서쪽은 두칸 광채를 만들고 안채와의 사이에 뒷길로 나가는 협문을 시설했고 아랫채와의 사이는 'ㄱ'자로 담장을 둘러 장독대를 두었다. 사랑채는 '一'자 6간 전퇴집으로 부엌, 안방, 웃방에 2개의 광을 덧붙였다. 신혼부부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마치 별채와 같다. 북향한 안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사랑채, 안채, 아랫채의 모서리는 담장으로 연결하고 여기에는 출입문을 두었다. 뒷마당에는 광채, 헛간채 2동을 배치해 두었다. 배치형태로 보아 아랫채가 사랑채 같고, 사랑채는 별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가옥은 초가집이면서 건물을 '口'자로 배치하여 반가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마을은 배산을 두고 좌청룡우백호의 전형적인 풍수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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