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배우고 승리하는 여성 퀴리부인을 말한다 5
1995년 4월 20일, 프랑스 파리의 팡테옹(위인을 모신 사원)은 평소보다 더 엄숙한 분위기에 감싸였습니다.
그때까지 파리 교외에 매장되어 있던 퀴리 부부의 관을 팡테옹으로 옮기는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많은 참석자 앞에서 엄숙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유해를 우리 나라 공통의 기억을 모시는 신전에 이장하여,
프랑스는 그저 단순히 감사만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연구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고,
피에르와 마리 퀴리처럼 과학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힘과 인생에
존경심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부부가 잠들게 된 팡테옹은 불가사의하게도 마리가 창설한 라듐연구소와,
두 사람이 노력 끝에 라듐 추출에 성공한 초라한 건물이 있었던 장소 사이에 위치합니다.
마리는 처음으로 팡테옹에 안장된 여성입니다.
퀴리 부부는 지금 위고, 뒤마, 볼테르, 루소, 졸라, 그리고 나와(이케다 선생님)
대담집을 발간한 앙드레 말로 등, 역사적인 위인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EU(유럽연합)는 2003년에 뛰어난 과학자를 현창하는 '마리 퀴리상'을 창설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프랑스, 폴란드뿐만 아니라 유럽이 최대로 자랑하는 인물로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강하게 꿋꿋이 살아 수 많은 업적을 남긴 마리의 인생을 생각하면,
마리를 강직한 성격과 냉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상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보다 갑절 감수성이 섬세하여 타인의 괴로움을 염려하는 마음 착한 여성이었습니다.
단지 마리는 부정과 타협하는 일, 횡포한 권위에 굴복하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지지난해 6월, 미국의 저명한 여류 시인이며 미국 에머슨협회 회장인 와이더 박사가
소카 여자단기대학을 방문해 강연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성은 두려움에 쉽게 지지않습니다. 여성은 심신(心身)도 정신도 강합니다.
또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을 여유로운 시간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평온을 주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한 여성들을 생각한다면 두려움에 져서 굴복하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알것입니다.
많은 여성은 평화와 정의의 목소리를 높여 세계에 외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마리 퀴리는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꿋꿋이 산 여성이었습니다.
1995년 춘3월에 단대를 방문한 수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부인은
"지성과 복덕이 풍부한 여성" "신조를 가지고 인간 공화를 지향하는 여성"
"사회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여성"이라는 단대의 '건학 지침'을 언급하며
"미래 세대가 여자단대의 숭고한 건학 정신에 담긴 자질을 몸에 익힌다면, 이 세계는
인류에게 더 나은, 남을 생각할 줄 아는 곳이 될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을 방해하는 이유가 수없이 많더라도."
이것이 마리의 신조였습니다.
마리가 산 시대는 여성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에는 장애가 너무나도 많은 시대였습니다.
소녀 시절에는 매우 내성적이어서 낯을 가리던 마리.
그러나 이 마리가 뒤에 이어질 여성들을 위해 길을 크게 만들고 열었습니다.
마리가 파리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남학생은 9000명인데 비해
여학생은 21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동생 브로냐가 파리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을 때, 졸업생 수천 명 중에 여성은 겨우 3명이었습니다.
더구나 프랑스인 여학생은 전혀 없을 정도였습니다.
19세기 말 파리에서는 여성이 동행 없이 혼자서 외출하는 것조차 상식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리는 그런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기에 이릅니다.
마리의 노력과 영지, 인격과 업적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하나하나 없앴습니다.
마리 퀴리의 생애를 보면 '여성 최초'라는 형용사가 여기저기서 눈에 띕니다.
여성 최초 고등사범학교 교사,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 여성 최초 파리대학교 교수,
여성 최초 의학학사원 회원 … ….
그리고 그러한 업적은 '최초'이기에 질투로 인한 비난이나 반동 세력의 박해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1910년, 마리 퀴리를 과학학사원 회원으로 뽑는 선거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과학적인 업적에서 보면 마리가 회원이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단지 마리가 '여성'이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 등 저명한 과학자가 마리를 지지했지만
마리의 취임을 집요할 정도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리를 중상하는 비열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광신적인 우파의 신문은 마리와 마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비난했습니다.
첫 번째 투표에서 과반수에 못 미쳐 두 번째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결국 마리는 두 표 차로 낙선했습니다.
마리는 낙선해도 유연했습니다.
원래 학사원에 입후보하겠다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고 관례로 되어 있던,
회원을 방문하는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명성에는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여성을 회원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만 화제가 된 것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여성이라는 것.
그것은 사회를 평화로 리드해야 할 큰 사명을 지닌 '선택된 교육자'라는 말입니다.
"모성은 본래 교육자이고 미래에 이상 사회를 세우는 건설자."
이는 창가의 스승 마키구치 선생님이 외친 말입니다.
마리에 대한 풍압은 학사원 선거 낙선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리 퀴리가 남편을 잃고 딱한 처지에 놓였을 때는 세상은 동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 우뚝 서서 당당하게 실력을 발휘하자 가차 없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근저에는 음습한 '질투'가 있었습니다.
외국인이고 여성이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을 이뤄 외국에서 수많은 상찬을 받은
그 확고한 위업에 뿌리 깊은 질투심이 소용돌이쳤습니다.
마리의 사생활을 무도하게 침해하고 근거 없는 거짓말을 섞어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악랄한 기사를 계속해서 써 댔습니다. 그 중에는, 피에르는 사고사가 아니라
마리 때문에 자살했다고 비열하게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자유라는 미명 아래 방종이 허용되는' 그러한 언론의 폭력이 거리낌 없이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죽은 남편 피에르의 형인 자크는 거짓으로 똘똘 뭉친 날조 보도에 대해
"이 얼마나 하천하고 불쾌하며 비열한 일인가!"라고 격노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펜을 들어 마리를 상찬하고 그녀의 정의를 당당하게 증명하는 글을 신문사로 보냈습니다.
"마리에 대한 야비한 기사가 얼마나 나를 격분시켰는지 말할 것도 없다."
"제수(마리)가 과학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탁월하며 그 사생활도 언제나 완벽해 나무랄 데 없는 것이
퀴리 가문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때일수록 진정한 벗이 분명해집니다.
많은 친구들은 변함 없는 우정으로 마리를 격려하며 진실을 알렸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박사도 그 한 사람입니다.
박사는 마리의 '정신과 에너지와 정직함'을 진심으로 상찬하며 이렇게 적어 보냈습니다.
"덩달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대담하게도 당신에게 반항하는 그 수법에 화가 나서
이 감정을 토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에 대해 떠들어 댄다면 허튼소리를 하는 기사는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폴링 박사가 평화를 위한 신념의 행동 때문에 사실무근의 비방을 받을 때도
아인슈타인 박사는 엄연히 옹호했습니다.
위대하고 정의롭기에 질투를 당하고 악구(惡口)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고 승리해 낸 사람이 영원불멸의 승리와 영광에 감싸입니다.
불법에서는 "현성(賢聖)은 매리함으로써 시험되느니라."라고 설합니다.
악구매리에 져서는 안 됩니다.
마리는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내 행동에서 비하할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신문과 대중이 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혐오합니다.
이 침해가 고결한 사명과 공중의 이익이라는 중요한 일에 명백히 그 생애를 바치고 있는 사람을
말려들게 했을 때 이는 특히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인이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고결한 어머니의 사자후입니다.
1911년 11월, 마리에게 스웨덴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두 번째 노벨상(화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단독 수상이었습니다.
어느 전기 작가는 마리가 "국내에서 책략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외국 여러 기관의 평가로
충분히 보상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는 비열한 매스컴이 마리를 한창 공격할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벨상을 사퇴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리는 "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장하고
수상식에 참석해 당당하게 강연을 했습니다.
그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마리가 정의롭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악에 겁먹어서는 안 됩니다. 비열한 인간들에게는 철저히 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 후 마리는 거듭되는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언론의 폭력이 얼마나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생명도 앗아가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잔인함, 악역무도함은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모를 것입니다. 이보다 무서운 '흉기'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사회악과는 철저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물론 언론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거짓말은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을 방치하면 언론 그 자체가 부패합니다.
해로운 독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말기 때문입니다.
마리의 작은딸인 이브가 집필한 '퀴리 부인'은 1938년에 출판되자마자 각국에서 번역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는 세계적인 명저입니다. 나도(이케다 선생님) 젊은 시절에 숙독했습니다.(중략)
이브는 이 장편 전기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 만에 써냈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썼는가.
사랑하는 딸은 누군가가 부정확한 전기를 쓰기 전에 진실한 어머니의 모습을
널리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악한 언론에 대한 딸의 정의에 찬 반격이었습니다.
이브는 머리말에 "나는 단순한 일화 하나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절대 적지 않았다.
나는 소중한 말을 단 한 마디도 변형하지 않았으며 옷 색깔 하나도 마음대로 만들어 내지 않았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조용한 말의 배후에는 '소중한 어머니를 더럽히는 거짓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허위에는 진실로 대항하겠다!'는 뜨거운 정열이 넘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브가 뉴욕에서 102세의 천수를 다하고 서거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브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진실한 모습을 묘사해 내어, 어머니의 위대한 '승리의 인생'을
역사에 엄연히 남겼습니다.
퀴리 부인을 박해한 사람들의 이름은,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퀴리 부인의 이름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 "나는 이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왜 인가.
"어떤 중상, 비판을 받아도 좋으니 인간으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그런 자식이 있었으면 했단다.
그리고 내 자식 중에 그런 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기쁘구나.
사회를 위해 얼마나 활약했는지, 도전했는지, 그것을 보고 싶었단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단대에 보내 주신 아버지, 어머니의 깊은 진심에 보답하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는 이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딸로 성장하기 바랍니다.
창립자인 나와(이케다 선생님) 아내는 소중한 여러분의 앞날을, 평생 여러분의 편이 되어
늘 기원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