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넷째 날 : 예술로 승화된 버려진 섬(2)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베넷세 하우스(Benese House) 옥외 아틀리에로 갔다. 바닷가 끝자리에 자리 잡은 ‘노란 호박’ 조형물이 둔중하지만, 안정된 몸짓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이 줄지어 서있다.
지난 8월에 유명을 달리한 여 조각가, 설치미술가인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1929~2026)의 대표적인 독창적 작품이다. 많은 소재 중에서 왜 호박을 택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대상이나 소재를 찾을 때는 자기 주위에서 얻은 경험치를 선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호박을 유머와 따뜻함을 지닌 존재라고 표현했다. 거칠지만 둥글고, 투박하지만 생명력을 지난 호박에서 위로와 치유를 얻은 듯하다.
그녀의 예술세계는 ‘점(dot)’이라고 한다. 점은 곧 가장 순수한 언어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도구였다. 자료에 의하면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심한 불안과 정신적 압박을 받던 그녀는 방 안에 가득한 붉은 꽃과 점들이 뒤덮인 환시를 겪었다고 한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 점들을 종이에 옮겨 그리며 불안을 ‘형태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점은 그렇게 고통을 시작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인 생존 도구이자 치유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겪은 환각과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호박 저장고에 숨어 있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점과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자기 소멸’의 세계관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따스함을 주던 호박 위에 점을 새겨 넣으며 불안을 직면하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는 예술 행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나오시마 미야노우라항(宮浦港)에 있는 그녀의 다른 작품인 ‘빨간 호박’은 ‘노란 호박’과는 달리 작품 내부로 들어갈 공간이 있는 피난처다.
그녀의 또 다른 걸작품인 ‘나르시스 정원’(Narcissus Garden)은 그곳에서 떨어진 곳인 ‘밸리 갤러리’(Valley Gallery)에 있다.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비추는 수많은 스테인리스 스틸 구(球)의 집합으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콘크리트 전시관 내부 및 연못, 바람, 산책로에 무리 지어 어우러져 빛과 바람과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른 빛의 반사가 역동적으로 변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매혹된 ‘나르시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자아와 반복,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한다.
밸리 갤러리 들어가는 입구, ‘나르시스 정원’ 가까이에는 산업폐기물 슬래그를 재료로 만든 오자와 츠요시(小沢剛)의 ‘88개의 불상(佛像)’이 있다. 이 불상을 보는 순간 일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났다.
가가와현 출신 고보대사 쿠우카이(弘法大師 空海, 774~835)가 불교 전파를 위해, 도쿠시마현 나루토 시의 제1번 사찰인 료젠지(靈山寺)를 첫 출발지로 하여 시코쿠 88개 사찰을 처음 으로 순례한 오헨로(お遍路)가 바로 그 순례길이다.
일본인에게 88이란 번뇌를 씻을 수 있는 숫자로, 깨달음이나 구원에 이르는 종교적 의미를 뜻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그 순례길 여정에 오른다고 한다.
‘밸리 갤러리’ 아래 바다 쪽으로 가면 안도 다다오와 협업으로 만든 ‘이우환 미술관’이 나온다. 야외에는 그의 설치 미술품이 몇 점 있다. 오벨리스크보다 높은 ‘콘크리트 폴(pole)’은 하늘을 찌르는 느낌이다. 바닷가 가까이 아치가 세워져 있다. 이우환 작가의 ‘무한문’無限門, The Gate to Infinity)이다. 높이 10m, 길이 25m, 폭 3m의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인 아치와 이를 지지하는 자연석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아치는 곧 바다와 하늘을 향하는 무한의 문일 것이다. 그 문을 통과 하며 무한으로 향하는 자유인의 모습을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명상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점, 선, 면으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의 대가라고 한다.
공원 쪽에는 프랑스 여류 조각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1930~2002)의 형상 조각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고양이’, ‘낙타’, ‘코끼리’와 자연스레 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읽는 남자를 조각한 ‘벤치'(Le Banc)는 화사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작품들이다.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실내에는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까지 세계적인 거장들의 현대미술,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영구 및 기획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기억에 남은 소장품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A Walk Around the Hotel Court Yard Acatlan(1985)’이다. 그가 맥시코 시티로 가는 길에 자동차 고장으로, 한 호텔을 발견한 후 ‘호텔 안의 산책’을 그린 그림이다. 호크니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역원근법으로 그려져 모든 것을 보는 경험을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다음은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100가지 삶과 죽음’(100 Live and Die, 1984)으로 네온 조명과 색채를 활용해 100가지 삶과 죽음에 대한 명제를 표현한 대표적인 미디어 아트 작품이다.
제시된 100가지 삶과 죽음 중 한 번에 한 개씩 네온사인이 점멸하다가 마침내 100개의 네온사인이 한꺼번에 켜졌다 꺼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 땅에서의 희비애락을 모두 겪은 후 삶과 죽음을 초월한 깨달음인, 득도 순간의 경지를 포착하는 순례길 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미국 설치미술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수다 떠는 세 사람’(Three Chattering Men, 1986)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은빛 실루엣 형태의 조각작품이다. 세 명의 인물이 각자 턱을 움직이며 자기 할 말만 반복하는 모습은, 타인과 진정한 교감을 이루지 못한 채 무의미한 정보와 소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립과 공허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의 작품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광화문에서 볼 수 있고, ‘노래하는 사람’(Singing Man)은 과천 국립미술관 뜰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작가이다. 그는 항상 ‘인간의 행위와 소리’에 관심을 보인다. 어느 때는 ‘예술과 사유’로 때로는 ‘현대 사회의 소음’을 생각나게 한다.
한나절 짧은 시간에 모든 갤러리 안과 밖을 볼 수 없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 하루였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나오시마 베네세 아트 사이트’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완성한 베네스 홀딩스(Benesse Holdings, Inc)의 기업 철학에 경외감을 느꼈다.
그 기업은 오카야마현(岡山縣)에 본사를 둔 일본 최대 규모의 교육, 출판 기업으로, 회사명은 라틴어 ‘Bene’(좋은)와 ‘Esse’(살다, 存在하다)의 합성어로 ‘잘 사는 것’(well-being)을 돕겠다는 기업 철학을 담고 있다.
후쿠다메 소이치로(福武總一郞) 명예회장은 ”경제는 문화의 종복이어야 한다“라는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수천억을 투입해, 버려진 구리 제련소 섬이었던 나오시마를 현대미술의 성지로 출발시켰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먼저 섬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지혜도 놀라울 뿐이다.
다카마쓰로 돌아오는 카페리 갑판에서 바다 저편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풍경도 자연이 산출하는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