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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을 찾으면 두만강(豆滿江)이 보인다.
1.두만강(頭滿江) 고찰
고전번역원(古典飜譯院) 데이터베이스에서 豆滿江(콩 豆)을 검색하면 654건이 검색된다. 반면 頭滿江(머리 頭)로 검색하면 총 10건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왜 豆滿江과 頭滿江으로 나누어 쓰였을까? 앞 글자의 콩 豆와 머리 頭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인데 말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두만강(頭滿江)검색결과는 단 1건만이 나온다. 나머지는 모두 두만강(豆滿江)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연구하는 우리로서는 이 두(豆)와 두(頭)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두만강을 찾아낼수가 있기 때문이다.
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두만강(頭滿江)을 보자
성종실록 18권, 성종 3년 5월 5일 신축 2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영안북도 절도사 선형에게 야인 골간 등이 소재한 곳을 조사하라고 명하다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선형(宣炯)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경이 아뢴 것을 보고, 〈야인(野人)〉 골간(骨看) 등이 이미 구처(舊處)로 돌아가 여러 섬에서 고기를 잡고 흩어져 살며 자생(資生)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여러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없으니, 두만강(頭滿江) 내의 조산진(造山鎭) 이남(以南)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소재(所在)한 곳을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 만약에 조산진 남쪽에 산재(散在)하여 변경(邊境)에 출몰(出沒)하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살피지 못한다면, 장차 엿보고 변(變)을 일으킬 것이니, 미리 이를 위하여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만약에 겨울철에 다시 와서 우리 강내(江內)에 기거(寄居)하게 되면 마침내는 반드시 노략질을 하게 되고, 만약에 굳게 막게 되면 또한 반드시 원망이 생길 것이다. 야인의 여러 종족 중에서 오직 골간(骨看)만이 가장 친하고 또 순종하는데, 저들이 노략질을 하고 원망이 생기면 매우 염려스러우니, 경은 모름지기 정성껏 살피고 헤아려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고 후회(後悔)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諭永安北道節度使宣炯曰: "今見卿啓, 具知骨看等已還舊處, 捕魚于諸島, 分散資生。 然未知諸島, 無乃在頭滿江內造山鎭以南乎? 其所在處, 詳考以啓。 若散在造山之南, 出沒邊境, 而邊將不之察, 則將或窺覘生變, 不可不預爲之防也。 若冬間更來, 寄我江內, 則終必引寇, 如固拒之, 亦必生怨。 諸種中, 惟骨看最親且順, 致寇生怨, 大可慮也。 卿須曲盡審思, 毋失事機, 毋貽後悔。"
명확히 두만강(頭滿江)이라 기록되어 머리 두(頭)자를 사용하고 있다.
아래는 기타 문집들의 두만강(頭滿江) 표기 기록들이다.
➁갈암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
18년 임신(1692) 선생 66세
○ 18일 무진에 청대(請對)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북사(北使 청(淸)나라 사신)를 맞이하기 위해서 별도로 길을 닦지 말기를 청하다. - 당시에 청나라에서 장차 관원을 파견하여 장백산(長白山) 남쪽 지역의 형세를 순시하여 《일통지(一統志)》를 편찬하겠다고 자문(咨文)을 보내왔다. 조정의 의론이 바야흐로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점에서 곧바로 두만강(頭滿江)에 이르기까지 길을 내어 그 행차를 통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➂속잡록 4(續雜錄四)
정축년 상 숭정 10년, 인조 15년(1637년) 4월 28일 산서옹(山西翁)이 또 중풍(中風)에 걸려 인사불성이 된 3일 만에야 겨우 살 길을 얻었다. 여름 석 달 동안에 죽을 듯하다가 겨울에서야 소생되었으니 박명한 인생이라 가련할 따름이었다.
○ 청 나라 한(汗)의 조서가 아래와 같이 내렸다.
귀국에 있는 올량합(兀良嗒 옛날 두만강(頭滿江) 일대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이라는 사람은 모두 찾아서 돌려보내야 하고, 일본과의 무역에 있어서는 그대의 구례대로 하도록 들어주겠으나 다만 그 사신을 인도하여 조정에 오게 하라. 짐도 앞으로 사신을 그곳에 보내겠다.
➃여유당전서 > 大東水經 其一
大東水經 其一
淥水 一 【長白山,發源,北靑,三水,厚洲】
同文彙考》:“康熙三十年,禮部移咨於我國曰,‘今纂修《一統志》,所載城池山河,盛京將軍來文與寧古塔將軍來冊,互相舛錯者甚多。發祥之地,關係甚大。今差散秩大臣査山等五人將文冊帶去,前往寧古塔烏喇等地方,詳閱定奪。而義州江至土門江地方,南岸一帶,俱係朝鮮國接壤。朝鮮國必有熟諳道路之人,應將驛站,俱行預備,俟大臣往着時,令伊國人指引可也。’ 【節】 我國回咨曰,‘自義州江從南岸至滿浦,其間道路猶可艱難得通,自滿浦至義州江發源惠山地境,計十數日程。岡山相續,荒絶無人,牛馬不通,曾無驛站。況惠山地界,與大國接壤處,則山勢叢積,蜂壑阻絶,自古以來,原無從南岸通土門江之路。【謂自惠山無直通頭滿江之路】 玆將形勢馳報。
➄약천집(藥泉集)-남구만
성백효(成百曉)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 교수의 해제중에서..
당시 조정이 무관심 속에 방치해 오던 북변지역을 중시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頭滿江)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국경을 사수해야 한다는 의식하에 수만언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북변의 각 읍을 끊임없이 순행하여 민정(民情)을 살피고 군역(軍役)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후에 이곳 주민들은 저자의 생사당을 세웠다.
➅수산집(修山集) 해제
세종 때 六鎭을 개척한 金宗瑞가 頭滿江이 아니라 先春嶺까지를 국경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해 하며 쓴 〈擬與金公宗瑞書〉 등과 권2에 序文이 실린 〈水經〉이다.
➆이계집(耳溪集) 해제
권12는 北塞記略 7편으로, 역시 慶興 시절 지은 것이다. 慶興의 方言까지 언급된 〈孔州風土記〉, 함경북도 일대 北關의 古蹟記, 會寧과 慶興에서 열리는 淸과의 交市 雜錄, 頭滿江 밖 寧古塔 등에 대한 記聞, 지도를 곁들인 〈白頭山考〉, 慶興 일대의 〈海路考〉와 〈嶺路考〉이다.
➇虛白先生續集卷之一 / 詩
對月
頭滿江頭頭白翁。中宵露坐月明中。月雖不語應知我。家本天南嶺樹東。
우리 선조(先祖)는 글자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또 지형(地形)지물(地物)을 표기할 때 명확히 그 모양과 의미를 글자에 가미시켜 그 명칭을 보고서도 대상을 알아낼수 있도록 작명(作名)을 했다.
백두산(白頭山)은 하얀 머리의 산으로 즉 만년설(萬年雪)이 덮여 있는 산(山)이라는 의미로 쉽게 다가오듯이 말이다.
따라서 두만강(豆滿江)으로 보면 콩이 가득한 강이 되는 것이고, 두만강(頭滿江)으로 보면 머리가 가득히 찬 강(江) 즉 발원지(發源地)가 가득차서 흘러내리는 강(江)이 되는 것이다.
어디일까?
지난 2019.07.14. 강의영상에서 두만강에 대해서 백두산(白頭山) 즉 현 알타이산의 우측에서 흘러내려서 현 예니세이강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을 미하일로프스키의 조선탐사단의 여정(旅程)을 따라 고증(考證)했다.
틀린 논점은 아니다. 단지 오늘은 이 부분을 좀더 세밀하고 넓게 분석(分析)하려 하는 것이다.
구한말(舊韓末)의 역사(歷史)에서 블라디보스톡은 조선(朝鮮)의 북방(北方)경계를 찾는데 매우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지명이며, 이를 통해서 두만강을 명확히 확정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두만강위 위치가 확정되면 두만강(豆滿江)인지 두만강(頭滿江)인지가 명확히 구분되며, 이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두만강(豆滿江)표기가 누군가에 의해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블라디보스톡이 해삼위(海蔘威)로 번역된 것도 구한말(舊韓末)이후 어떤 세력에 위해 의도적(意圖的)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위 지도는 현 반도 동북쪽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鹿屯島) 추정그림이다.)
또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젊은 시절 근무하여 자칫 군사작전(軍事作戰)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뻔도 했던, 두만강가의 육진(六鎭)지역이었던 조산보(造山堡)와 녹둔도(鹿屯島)의 위치 또한 이 좁디좁은 한반도(韓半島)의 구석진 가짜지명이 아니라, 광대(廣大)한 조선(朝鮮)의 북쪽 현 바이칼호의 서남쪽 하단부에 있었음을 여지없이 증명(證明)해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알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블라디보스톡의 역사(歷史)를 명확히 알아내는 것이다.
2.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디보스톡 고찰.
➀시베리아 횡단철도
이 철도(鐵道)는 1891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903년에 대체적으로 완공되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된 것이다.
물론 횡단철도(橫斷鐵道)의 건설은,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건너 남쪽으로 진출을 모색함에 따라 이를 차단하려는 영국(英國)의 힘과 맞붙으면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에서 밀려 남쪽진출을 차단당하고 이를 타개하고 세력(勢力)을 확장하기 위해 광대한 동양(東洋)으로의 진출을 도모(圖謀)함에 따라 철도(鐵道)의 건설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윌리엄 앵달은 그의 역작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 시작된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는 서부 러시아와 극동(極東)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철도건설(鐵道建設) 프로젝트였는데, 총 연장 5,400km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프로젝트는 러시아 경제(經濟)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터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구간별 거리를 현재의 모습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니즈니노브고로드(441km)
나즈니노브고로드~예카테린부르크(1,814km)
예카테린부르크~노보시비르스크(3,343km)
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5,185km)
이르쿠츠크~치타(6,198km)
치타~블라디보스토크(9,288km)
여기서 윌리엄 앵달이 말한 러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까지의 거리가 총연장 5,400km였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분석(分析)하면, 당시의 블라디보스토크는 현 이르쿠츠크가 되는 것이다.
1903년 시베리아 횡단철도(橫斷鐵道)가 최초 완성되었을 때 블라디보스톡이 바이칼호수의 서남쪽 현 이르쿠츠크 였다는 것이다.
즉 연해주(沿海州)가 바로 바이칼호에서 북극(北極)으로 빠져 나가는 현 예니세이강 가의 넓은 지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군사(軍士)와 물자를 공급해 왔던 최종 기착지가 현 바이칼호수 서남쪽이 그 한계였던 것이고
일본(日本)이 러시아를 공격했던 육상전투지역은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의 서남쪽에 존재했던 요동(遼東)이었던 것이다.
일본군(日本軍)은 평양(平壤)이 위치했던 현 신강(新疆)위구르지역의 우측 백두산(白頭山)의 동남쪽 줄기인 묘향산(妙香山)을 따라 러시아군이 위치했던 조선(朝鮮)의 발해(渤海) 현 자이산호 부근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이 블라디보스톡은 1938년 이전까지 바이칼호 서남단에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司令官) 안중근(安重根)장군에 의해 1909년10월26일 사살(射殺)된 하얼빈은 당연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좌측인 만주(滿洲)에 위치했던 것이므로, 현 알타이산의 북쪽 시베리아횡단철도 노선의 근방이었음을 무난히 추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➁블라디보스톡
한자명 해삼위(海蔘威)로 번역되며, 러시아로는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58년 아이훈 조약(愛渾條約)을 체결하여 청(淸)으로부터 아무르지역을 양도받은후, 1860년 러시아 총리 이그나티에프가 북경에 가서 추가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沿海州)와 블라디보스토크라는 항구(港口)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이때 알타이산 북쪽의 광대한 만주(滿洲)는 러시아와 청(淸)사이의 완충지대로 남겨졌고, 이후 러시아와 영국(英國)의 지원을 받은 일본(日本)과의 세력싸움 격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사벨라 버드비숍은 그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1897)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천-1만명에 이르는 중국인(中國人)들이 山東지방에서 매년봄 勞動契約을 맺으러 도착해서는 12월에 中國으로 돌아간다. 이때 이들은 25달러에서 50달러를 가지고 이 곳(블라디보스토크)을 떠나게 되는데, 사할린의 형장에서의 노동은 할일이 못되기에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숍여사가 말한 여정을 지도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은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2세로부터 이듬해 7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萬國平和會義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에 高宗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特使로 임명하여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1907년4월26일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은 北間島에서 온 이상설을 만났다. 이상설은 이준이 서울을 빠져나가기 1년전인 1906년4얼에 중국 上海를 거쳐 북간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7년5월 중순 이상설과 이준은 무사히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헤이그로 향했고, 헐버트는 이상설,이준과 거의 같은 시점이 5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다.
당시 헤이그밀사가 헐버트의 도움으로 만국평화회의에 간 여정중 최초 블라디보스트크에 도착한 것은 당시 대륙 남양위쪽의 한양(漢陽)에서 녹둔도(鹿屯島)와 조산보(造山堡)가 있었던 현 바이칼호수의 서남쪽으로 이동한것이고 당시 그곳에 위치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톡에서 열차에 올랐던 것이다.
이 지역이 바로 조선(朝鮮)의 육진(六鎭)지역인 것이고, 스탈린이 1937년 조선인 강제이주를 통해 현 중앙아시아로 이주정착시켰다고 하는 조선인(朝鮮人)이 후세연구를 통해 이들이 육진방언(六鎭方言)을 사용했음을 고증함으로써, 스탈린이 강제이주시켰던 조선인(朝鮮人)의 원 정착지가 바로 바이칼호수 주변의 육진(六鎭)지역이었음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스탈린의 조선인(朝鮮人) 강제이주(1937)가 끝난후 어느시점에 현 한반도(韓半島)의 동북(東北)쪽으로 이동한 것임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이주(移住)를 시켰다는 근거를 통해서이다.
3. 두만강을 찾아라!!
中宗實錄 49권, 중종18년12월11일 丁未 2번째기사 1523년 明가정(嘉靖)2년
만포 첨사 이성언의 야인을 쫓는 일과 사군을 운명하는데 대한 상소
신이 듣건대, 전조(前朝)591) 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으나 철령(鐵嶺) 이북과 적유령(狄踰嶺) 이서는 들쭉날쭉하여 곧 얻었다가 곧 잃곤 하였으므로 나라의 떳떳한 경계가 없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품이 성무(聖武)하시므로 대동(大東)을 모두 차지하시어 남으로는 바다까지 닿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에 닿고 북으로는 두만강까지 닿았으나, 그래도 이적(夷狄)이 경계에 근접하여 있는 것을 염려하여 강을 건너 고난을 무릅쓰고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친히 서방의 되를 정벌하시매,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에서 위풍을 바라보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북으로 동녕(東寧)까지, 동으로 황성(皇城)까지, 남으로 바다까지의 되의 땅이 모두 비었습니다. 태종(太宗)께서 계승하여 점점 더 힘쓰신 지 이미 오래서는 아무도 감히 대들지 못하였으나, 태평한 세월이 오래 이어져 수신(守臣)이 방어를 잘못해서 경성(鏡城) 이북이 함몰하여 적(賊)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으므로, 태종께서 회복하려고 생각하셨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강계(江界) 이서도 침략당하므로 군신(群臣)이 땅을 줄일 것을 헌의(獻議)하였으나, 조종(祖宗)께 받은 것은 작은 땅이라도 버릴 수 없으므로 뭇 의논을 따르지 않고 성려(聖慮)에서 결단하시어 잇달아 큰 군사를 일으켜 서쪽·북쪽으로 정벌하여 옛땅을 회복하고 진(鎭)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臣聞, 前朝統合三韓, 而鐵嶺以北狄踰以西, 或入或出, 旋得旋失, 國無常界。 恭惟我太祖, 天縱聖武, 奄有大東, 南盡于海, 西北抵于鴨綠, 東北抵于豆滿, 猶慮夷狄之近境, 越江艱險, 櫛風沐雨, 親征西胡, 遠近望風, 莫不奔潰, 北至東寧、東至皇城、南至于海, 胡地一空。 太宗繼世, 漸磨旣久, 莫敢誰何。 第緣昇平日久, 守臣失禦, 鏡城以北陷爲賊藪, 太宗軫念恢復, 力不能及。 至於世宗朝, 江界以西亦被侵掠, 群臣獻議縮地, 而祖宗所受,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不從群議, 斷自聖慮, 連擧大兵, 西征北伐, 以復舊彊, 置鎭守之
위 기록을 보면 명확히 서북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고, 북쪽에 두만강(頭滿江)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굳이 현 한반도에서 따진다면 압록강을 서북이라 규정한다면 두만강도 동북이 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조선(朝鮮)이 대륙에 있었다는 우리의 사관(史觀)에서 바라본다면 대륙 한양(漢陽)을 기준으로 두만강(頭滿江)에 해당될 북쪽의 큰 강은 현 바이칼호수에서 발원해 북극(北極)으로 흘러가는 예니세이강 인 것이다.
또한 두만강을 예니세이로 바라볼 때 그 발원지인 바이칼 호수(湖水)는 두만(頭滿) 즉 머리(발원지)가 가득차 있음을 문자로 알려주고 있어 지명이 알려주는 형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1898년 조선(朝鮮)을 탐사했던 러시아의 미하일롭스키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승전대가 있는 조산보(造山堡)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으로 가면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호수위에는 오리며 바다오리, 거위, 도요새 등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많은 새가 있었다. 그야말로 수면위를 온통 덮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은 누구도 이 새들을 괴롭히지 않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중의 하나이다.
현 반도 북한(北韓)의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에 있는 1762년의 유적인 승전대비로부터 백두산(白頭山) 가는 여정(旅程)의 두만강(頭滿江)가에 그것도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으로 분류될 호수(湖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하일롭스키가 묘사한 호수(湖水)는 바이칼 호수로 산정됨이 타당해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바이칼 호수(湖水)변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두만강(頭滿江)인 현 예니세이강을 따라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으로 이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조선(朝鮮) 오천년역사의 두만강(頭滿江)이 현 바이칼호수에서 시원하여 북극(北極)으로 흘러가는 예니세이 강(江)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 이름이 보여주는 형상이 그러하고, 또한 실록과 기타문집에 나온 두만강(頭滿江)의 위치가 그러하며, 구한말 조선(朝鮮)을 탐사했던 러시아 탐사단에서 알려주는 기록이 또한 그러하다.
더욱이 결정적인 것은 1903년에 완료된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점에 블라디보스톡이 있었다는 역사(歷史)의 불편한 진실을, 러시아측 기록과 이를 분석한 영국학자 윌리엄 앵달의 용기있는 필설에 의해 밝혀짐에 따라 두만강(頭滿江)은 블라디보스톡과 인접하여 흘러 북극으로 향하는 현 예니세이 강임이 증명된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오로라 관측기록은 바로 이 두만강(頭滿江) 물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북위(北緯) 60-65도 사이에서 관측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1940년을 기점으로 일본(日本)과 러시아의 극동패권 전쟁의 역사(歷史)를 고찰하면, 우리는 러시아가 언제 블라디보스톡을 현재의 한반도(韓半島) 동북쪽 경계 넘어로 이동(移動)시킨 것인지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2019.10.13. 松溪
첫댓글 <두만강(頭滿江) : 예니세이강>이다라는 말씀이군요.
우리 카페에서는 예전부터 "본래의 만주(滿洲)는 예니세이강 서쪽의 서시베리아 분지로부터 우랄산맥까지의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불어 '골간(骨看)'은 올량합 족의 일족으로 '골리간'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근세기 조선 또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많은 이들의 기록을 찾아 본래의 조선 영토를 찾아 나선 "송계"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들 드립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옛 원전속에 나타나는 나라와 종족,부족들로 보는 조선영토와 똑같은 곳의 땅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학이 밝혀놓은 것을 후학이 다시 밝혀 더 세밀히 들어감에 따라 친일식민강단사학의 입지는 자꾸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그 선봉에서 노력해오신 문무님의 노고에 비하면 한참 후학인 저로서는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스탈린이 강제 이주한 고려인은 여기서 빼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류가 됩니다. 다큐에서 보면 중앙아시아에 살던 1세대 들이 자기가 이주해왔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큐를 봤습니다. 시댁식구들이 연해주로 이주를 하여 친정과 떨어져 살게 되는 내용인데요. 연해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호랑이 연구하시는 분들의 다큐를 보면 연해주에 캐드로바찌 바야라는 곳이 있는데 조선곡입니다. 영감님들이 소싯적 한국인 친구들과 놀던 곳을 회상하더군요. 철구, 바우 등등 이름도 기억하죠. 연해주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스탈린이 지금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현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역사적 사실에서 답을 찾아야 할듯 합니다. 즉 1937년 시베리아힝단철도의 종착점은 현 이르크추크였고, 1938년 장고봉전투와 노몬한 전투가 일어납니다. 특히 장고봉전투에서 러시아측은 조선독립군이 주력군이 되어 일본을 궤멸시킵니다. 이후 일본은 방대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했다고 합니다. 장고봉은 두만강하구가의 조그만 산으로 블라디보스톡과 매우 가깝습니다. 즉 이 장고봉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지금의 연해주지역을 얻은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블라디보스톡이 현 지역으로 이동이 된 것이지요. 또한 사람들도 모두 이주시키게 되고요.1938년이면 1933년생이라야 기억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연계시켜 분석하면 좀더 확실한 사실들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두만강을 몽골 서부 호브드 강 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옛 함경도의 회령. 종성. 부령 지역이며 영고탑과 경박호는 현 알타이 공화국에 있습니다. 알타이는 읍루. 부여· 고구려 (말갈)' 여진의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등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