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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뿌아까오
종전된 지 7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2차대전에 대한 영화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작년에 러시아에선 [스탈린그라드]를 제작했으며, 나치 시절 독일을 배경으로 한 미국과 독일의 합작 영화 [책도둑]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고, 조지 클루니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에서 유럽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연합군의 어느 부대를 보여준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화수분처럼 깃들어 있는, 거대한 비극 2차 세계대전. 아직도 그 전쟁에 대한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건,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자는 인류의 암묵적인 다짐일지도 모른다.
글 l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 영화
코미디부터 슈퍼히어로 액션까지 다양한 장르를 품고 있는, 2차대전에 대한 수많은 영화들 중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다. 전쟁영화와 휴머니즘의 완벽한 결합인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5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거두었는데,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현재 가치로 환산한다면 8억 5,000만 달러에 가까운 성적이다. 전형적인 전쟁영화에서 조금은 벗어난, 팩션 스타일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이나 슈퍼히어로 액션을 결합한 [퍼스트 어벤져](2011) 등도 좋은 흥행을 거두었으며, 스필버그의 [1941](1979)이나 잠수함 영화의 레전드인 [특전 유보트](1981) 등은 30여 년 전 영화지만 크게 꿀리지 않는 성적으로 20위 안에 들었다. (두 영화 모두 현재 기준으로 3억 달러 이상의 흥행작들이다.) [쉰들러 리스트](1993)나 [인생은 아름다워](1997) 같은 홀로코스트 영화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작전명 발키리](2008)나 브루노 간츠의 빙의된 듯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다운폴](2004)처럼, 히틀러에 관련된 영화들도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여한 2차 대전 영화는 마이클 베이 감독의 [진주만](2001)이다. 13년 전 영화지만 최근작들을 누르고 여전히 1위 자리에 올라 있는데, 베이 감독 특유의 거대한 스케일과 스펙터클, 그리고 상당 부분의 컴퓨터 그래픽이 결합된 결과로 당시 1억 5,000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였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2억 2,000만 달러 정도 된다. 바즈 루어만의 [오스트레일리아](2008)나 오우삼의 [윈드토커](2002) 등도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사용한 영화. 한편 흥행 1위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6,500만 달러 정도에 머물렀다. [하트의 전쟁](2002)은 적지 않은 제작비에 비해 흥행 성적은 처참한데, 월드 마켓에서 3,2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으니 제작비 7,000만 달러의 절반이 채 안 된다.
[진주만]의 물량 공세가 있긴 하지만,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최고의 장면은 [도라 도라 도라](1970)에 있다. 당시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이 영화의 공습 신은 스피디하고 맹렬하며, 음악 없이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긴장감을 더한다. 컴퓨터그래픽이 없던 시절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리얼한 스펙터클이 가능했던 듯.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자신감을 얻은 연합군은 라인강으로 진격했지만, 1944년 9월에 있었던 '마켓 가든' 작전에서 영국의 공수 부대는 독일군에 의해 궤멸된다. [머나먼 다리](1977)는 이 쓰라린 패전의 기억을 되새기는데,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100여 명의 스턴트맨들이 동원된 장관이었다.
[탑 건](1986) 못지않은, 오히려 더 긴장감 넘치는 전투기 액션. [공군 대전략](1969)은 잘 조직된 독일 공군에 맞선 영국 공군의 극적인 승리 과정을 그린다. 실제 전투기들을 사용해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었고, 기록 필름도 삽입되어 실감을 더 했다.
모든 전쟁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전쟁 신으로 꼽히는 작품. 25분 정도 되는 시퀀스로, 여기에만 1,1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여되었다. 블리치 바이패스로 인해 만들어진 색감에, 개각도 촬영을 통해 액션을 두드러지게 했으며, 현장을 함께 뛰는 카메라는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바닥에 쓰러지기도 한다. 호러 영화를 연상시키는 처참한 모습은 전쟁터의 공포를 그대로 전한다.
서부 전선에 오마하 비치 상륙 작전이 있었다면, 동부 전선에선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 러시아의 국운이 걸린 이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총마저 부족했고, 전우가 죽으면 그 총을 집어 돌격하는 처참한 육탄전을 벌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 전선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몇 번의 전투 신이 있지만,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마지막 전투 액션은 샘 페킨파 특유의 슬로 모션과 빠른 편집이 인상적이다. 영화 사상 가장 스타일리시한 전투 신 중 하나.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인 이오지마 전투. 미군은 폭격기와 탱크와 장갑차와 전함 등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 상륙 작전을 감행하지만, 사상자는 늘어만 간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에 버금가는, 어쩌면 더욱 사실적인 상륙 작전 신.
[도라 도라 도라]는 미국의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과 일본의 후카사쿠 긴지, 마스다 토시오 감독이 공동 연출했다. 하지만 원래 일본 쪽 연출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사진)이 맡을 예정이었다. 수락을 한 가장 큰 원인은, 미국 쪽 연출을 [콰이강의 다리](1957)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맡을 예정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은 애초부터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았고, 속았다는 걸 안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사로부터 해고당하기 위해 노력(?)했고, 드디어 성공(!)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사진)의 오마하 비치 상륙 작전은 스토리보드 없이 4주 동안 촬영되었다. 1,000명에 가까운 엑스트라가 등장했고, 그들 중 20~30명은 실제로 팔이나 다리가 없었던 장애인이었다. 그들은 컴퓨터그래픽 없이 특수분장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표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총 6,400리터의 특수효과용 피가 사용되었고, 아일랜드 남동부의 커라클로 비치에서 촬영되었다.
한국엔 '몰락'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다운폴](2004. 사진)의 히틀러 역을 위해 브루노 간츠는 특이하게도 파킨슨병의 증상들을 연구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말투를 위해선 핀란드 스파이들이 몰래 녹음한 목소리들을 구해 들었고, 전체적인 억양을 위해선 히틀러가 태어난 지역 출신의 배우를 섭외했다.
스필버그(사진)는 [쉰들러 리스트](1993)의 연출을 마틴 스코시즈에게 부탁했다. 스코시즈는 고심 끝에, 이탈리아계인 자신보다는 유태계 감독이 연출해야 할 프로젝트라며 거절했다. 부모를 홀로코스트로 잃었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너무 사적인 내용"이어서 객관적인 연출이 힘들 것 같다며 사양했다. 마지막으로 거장 빌리 와일더 감독을 찾아갔고, 와일더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원했다. 하지만 와일더는 스필버그에게 직접 메가폰을 잡으라고 독려했다.
[특전 유보트](1981. 사진)의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은 배우들에게 폐소공포증적인 느낌을 끌어내기 위해, 잠수함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했고, 배우들은 촬영이 시작되면 그날 촬영이 끝날 때까지 실제 잠수함의 군인들처럼 생활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담은 [지상 최대의 작전](1962. 사진)의 제작비는 1,000만 달러. 흑백 필름으로는 당시까지 최고로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였다. 1993년 [쉰들러 리스트]의 2,200만 달러까지, 30년 넘게 최고 기록이었다.
로드 스타이거, 리 마빈, 로버트 미첨, 버트 랭커스터 등 당대의 남성 스타들은 [패튼 대전차군단](1970. 사진)의 조지 S 패튼 장군 역할을 거절했다. 반면 존 웨인이 이 역할을 강하게 원했지만, 프로듀서는 그의 서부극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고 생각해서 거부했다. 결국, 조지 C. 스콧이 맡게 되었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스콧은 자신이 패튼 장군의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한다. 이후 이 역할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배우들 사이의 경쟁은 무의미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의 악역인 한스 란다 역에 가장 크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배우가 그 역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기회가 갔다. 이후 디카프리오는 타란티노와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에서 만나 악역에 대한 한을 풀었다.
수많은 2차대전 영화들이 유럽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그린다. 네덜란드 출신의 폴 버호벤 감독은 [서바이벌 런](1977)과 [블랙 북](2006)에서 두 차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담았다. [디파이언스](2009. 사진)는 유태인의, [막스 마누스](2008)는 노르웨이의, [플레임 & 시트런](2008)은 덴마크의 그리고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6)은 독일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보여준다.
1943년 5월 루르 댐 폭격을 다룬 [댐 버스터](1954. 사진)는 독일의 군수 시설 상당 부분을 파괴했던 고난도의 폭격 작전을 꼼꼼히 담은 영화. 이 영화의 폭격 신은 이후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1977)의 전투기 액션 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 워즈]의 촬영감독인 길버트 테일러가 24년 전 [댐 버스터]의 특수촬영을 했다는 사실.
[특공대작전](1967)에 출연했던 배우들 중 상당수는 2차대전 참전 군인이었다. 리 마빈(사진)은 해병대, 텔리 사발라스는 육군, 찰슨 브론슨은 육군, 어네스트 보그나인은 해군, 클린트 워커는 헤병대, 로버트 라이언은 해병대, 조지 케네디는 육군이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은 레온 트로츠키의 에피소드에서 [인생은 아름다워](1997. 사진)의 제목을 가져왔다. 멕시코 망명 시절, 그는 스탈린이 보낸 킬러에 의해 자신이 머지않아 암살당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정원에 앉아 있는 아내를 보며 일기장에 글을 남겼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컴 앤 씨](1985)는 평론가들이 뽑는 최고의 2차대전 영화 중 하나.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들의 잔학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특수효과를 제대로 쓰지 못했고, 총격 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다. 주연을 맡았던 알렉세이 크라프첸코는 머리에서 10cm 위로 총알이 날아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콰이강의 다리](1957. 사진)에서 니콜스 대령의 실제 모델은 필립 투지 중령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니콜스 대령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영국군의 자긍심을 위해 다리 건설을 독려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대신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불개미를 풀어 나무를 갉아 먹게 하고, 콘크리트를 엉망으로 배합했다. 수용소장 사이토 대령은 부소장이었던 사이토 소령이 모델이다. 실제로는 공명정대한 행동으로 포로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씬 레드 라인](1998. 사진)엔 원래 빌리 밥 숀튼의 내레이션이 흐를 예정이었고, 숀튼은 세 시간 이상을 녹음했다. 하지만 영화엔 단 한 구절도 그의 내레이션이 삽입되지 않았고, 대신 캐릭터 여덟 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흐른다. 출연했지만 영화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편집실에서 사라진 배우들도 있다. 빌 풀먼, 게리 올드먼, 루카스 하스, 비고 모텐슨, 마틴 신, 미키 루크 등이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아버지의 깃발](2006)은 조 로젠탈이 찍은 사진 '이오지마 섬에 성조기를 꽂다'(사진)가 모티브가 된 영화로, 이 사진은 [이오지마의 모래](1949)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45년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로젠탈은 시력이 안 좋아 면제되었지만, 사진기자로서 끈질기게 현장을 따라다녔고, 이오지마 섬에 상륙한 지 나흘 만에 수리바치산 정상에 해병들이 성조기를 세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극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 속 병사 중 세 명에겐 이 사진이 생애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조지 클루니는 80% 이상 역사적 사실을 담았다고 했지만,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2014. 사진)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시선은 매섭다. 특히 영국의 [가디언]엔 아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지적이 실려 있는데, 큐레이터인 프랭크(조지 클루니)가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대목을 언급하며,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당시 그 어떤 큐레이터도 레오나르도라고 부르지 '다빈치'라고 하진 않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빈치'는 이름이 아니라 지명이기 때문. 그리고 이것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저지르고 있는 실수이기도 하다.
21년 전,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서른 즈음에 영화 기자를 시작해 [스크린], [무비위크] 등의 매체를 거쳤고, [스크린]에선 어찌어찌 하여 편집장까지 하게 되었다. 2009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유치원 다니는 딸과 좀 더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 올해 목표다.
첫댓글 진주만 증말 재미없게 봤는데...
영화는 아니지만 bob가 빠지면 섭섭하지..
전부 본 영화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