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10편을 뽑아 보았습니다
너
김세영 金歲影
누대의 생에 걸쳐서 보낸 송신을
수천 광년 거리에서 이제야 수신했다고
깜박거리며, 아포피스*처럼 다가오지만
그냥 지나치고 말 것이라는 둥,
내 그림자 끄트머리에 잠시 머물다가
개기월식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갈 것이라는 둥,
허블망원경으로 파파라치처럼 추적하는
나의 간구한 기도의 중력으로 끌려와
손아귀 속에 갇혀도, 타다 남은 운석가루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둥,
유니버설 조인트로 두 손을 깍지 끼어 잡고
거부의 혀를 입 속에 가두고
너트 속에 볼트를 끼우듯 한 몸이 되어도
어느새 몸체 밖, 어둠으로 빠져나가는 너,
너를 호명하며 잡은 대나무가 접신으로 진동할 때
죽통 속의 마디진 파동들이 일제히 공명하여
폭죽으로 터져 나가는 찰라,
순간 진공이 된 통발 속으로 쏙 빨려 들어온 너,
한 덩이 몸빛으로
수천 광년을 달려오다
마지막 기층의 틈 속에서
무거운 몸은 태워버리고
날카로운 빛도 마모되어, 이제
대나무 속청의 떨림 같은
기파氣波로, 어둠 속 하늘거미집 같은
둥지를, 내 울림통 속에 짓지 않을래?
*소행성 Apop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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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김세영
1
사랑을 할 때는 죽림에 들어간다
미이라가 된, 첫사랑의 심장을 뚫고
죽순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 파릇한 불꽃의 정점에서 뿜어 나오는
숨비소리, 그 가파른
수직의 소리에 흔들리는
댓잎의 끝에 서서
맹인 검객처럼 죽순을 자른다
매 순간의 절편들을 죽통에 채워서
폭죽을 쏘아 올려, 클레이 사격하듯
영원을 사냥한다.
2
이별을 할 때는 바닷가에 나간다
절단의 아픔을 숙명으로 사는
바다민달팽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잠시나마 함께 소유했던
살돌기 한 조각을 증표로 남긴다
부식되고 마모되어, 부표처럼 떠다니는
매 순간의 흔적들을 수평선에 꿰어
저 꼬치가 귀신고래의 흰 등뼈로 남을 때까지
내 심장의 새장이 수중 산호초가 될 때까지
썰물의 모래섬 위에 누워
독배毒杯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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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골에서 견디다
김세영
적도의 심장이 화차처럼 이글거려도
내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은
북해의 냉류가 등줄기를 냉각코일처럼 감고 내려와
골짜기에 얼음골을 이루고 있음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뜨지 않는 것은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이다
열기의 박동소리가 능선의 나뭇잎을 흔들어도
뜨거운 핏물이 윗계곡의 바위를 달구어도
암반의 고드름은 흰 건반처럼 가지런하다
저물녘 암벽의 견고한 그림자로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 위로
별빛의 징소리를 내며 건너오고 있다
열대야의 밤에도 남극의 펭귄처럼
불면의 맨발로 빙판 위에 서서
몽당날개지만 파닥이며 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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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빛
김세영
여름산의 중심에 서있는
상수리나무 그늘의 기공氣孔 속에
뿌리혹처럼 빛들이 숨어있다
열기의 정점, 정오
수천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울 때, 상수리는
커다란 솜사탕으로 부푼 울음덩어리가 된다
그 울음소리에 잎사귀 뒷면에 붙어있는
푸른 빛 알갱이들이 아우라로 피어올라
집광판이 된 이마를 식혀준다
그늘의 심저, 자정
검은 태풍의 몰이에
바다 속 수 만의 청어 떼가 질주할 때
불안에 떠는 눈알들이 서로 부딪혀
번뜩이는 빛 회오리가 되어
고양이 눈 성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깨선 높은 산 그리매 같은
등 그림자 외로운 사람의 긴 갈비뼈,
묵언의 새장, 촘촘한 행간 사이로, 설핏
전류처럼 박동하는 새벽별 빛이 보인다
발꿈치 뼈 골수 속에서 싹튼 빛의 싹들이,
뇌량腦梁 위 시냅시스*로 올라간 기파들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북극성 별자리 중력의 당김으로
궁륭을 가르는 오로라처럼 솟구쳐 오른다.
*synapsis : 하나의 신경 세포와 신경 섬유를 신경 단위로 하는데,
이 신경 단위 상호 간의 접착부를 시냅시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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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첼로
김세영
안개의 주정酒精을 밤새 마셔
만취된 깃털의 날개로
심해어처럼 유영한다
심저의 음자리 C2 현 위로
안단테의 보폭으로
흉통을 움켜쥔 손으로
아프게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던
심장의 방문들을 이제사
모두 열어 보인다
손금처럼 잔잔히 갈라지는
거울 검색대 위에
검은 피톨들, 엉킨 피딱지들을
모두 내어 놓는다
텅 비어버린 울림통의 결을
바람의 손끝이 짚어가며 소리를 낸다
어릴 때, 귓불을 만져주던 우물 속 울림 같은
태아 때, 알몸을 휘감아주던 양수 속 해조 같은
혼령 때, 춤사위로 흐르던 파동 속 율려律呂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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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새
김세영
나무의 머리채 속에 새가 둥지를 틀고
밑둥치 속에 내가 움막을 짓고 산다
해가 뜨면,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목소리로 하늘을 읽고
해가 지면, 새와 나는
꿈의 파편들이 뿌려진
진공眞空 속에서 만난다
꿈꾸는 나무의
수관水管 속에서 피가 섞여
새는 나의 혼이 되고
나무는 육신이 된다
죽어서 나무새木鳥 되면
어린 새들, 살을 쪼아 먹게
조장鳥葬을 해주세요
나를 기억하는 바람이
뼛가지를 흔들어 혼을 부르면
나무새 풍경木鳥 風磬으로 대답하리라
뼛가루로 문지르고 닦은 언어들은
하늘에 뿌려져 별이 되었다고
새를 부르던 목소리는 바람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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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鹽葬
-소금 호숫가에서
김세영
강물과 치어의 기억을 잊어버린
건기의 소금 호숫가
폐경기의 자궁내막 위
접이식 몸체 하나가, 풀려 진
시계태엽처럼 웅크리고 있다
오랜 보행으로 짓무른
발목과 발바닥을 호수에 담그고 절인다
고해하다 지친 혓바닥을 담그고
혀의 빨대로 썩기 쉬운 내장부터 소금물을 채운다
정오의 집광판이 된
빛과 소금의 몸통이
벽조목처럼 단단해진다
물결의 움직임도 없는 내막,
마른 뻘 조각으로 귀를 봉한다
물고기와 물새의 움직임도 아득하여
퇴화된 눈을 염포로 감싼다
내장된 빛과 소금 알갱이가 분리되는
소금 호수의 자정,
염장된 골수의 구멍에서 방사된
인광燐光에 싸인 기파氣波들이 일렁이며
빛의 레퀴엠을 펼친다
호수의 물은
주검의 염장, 응결로 더욱 검어지고
호수의 별은
혼령의 빛, 붕괴로 더욱 창백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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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김세영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무게가 많아
아파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직립으로 걸을 때부터
발가락 마디마디들
발목, 무릎, 고관절들이
크랭크축처럼 움직여 왔다
앞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들
손목, 팔꿈치, 어깨 관절들이
삼단노선의 노잡이처럼 움직여 왔다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캐스터네츠 소리를 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팔을 들면 어깨마디에서
일어서면 무릎마디에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꼬리뼈마디를 텔로미어*처럼 깎아내는
손목시계의 초침의 칼날이
매장된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서
소리 뼈마디 하나를 보여준다
내 손목을 놓지 않으려던 굳은 마디의 손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노송의 가지처럼
뚝, 꺾어지며 들렸던
그 마지막 소리를
직립원인이 된지도 백만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툰 직립보행으로 발목이 잘 접질리고
등뼈마디마저 가끔 삐끗하여
유인원의 보행법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짧고 마디 진 다리로 긴 몸통을 받쳐 들고
산악열차처럼 올라가는 절지동물의 보행법을
깔딱고개에서 흉내 내어 볼 때가 있다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
굳어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양쪽 끝단에 있는 부분을 말하며, 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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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김세영
당신의 탯줄 속으로
스며드는 안개의 젖빛,
저 몽유의 숨소리
하상河床의 수초를 헤치고
뻗어가는 붉은 연어,
저 팽팽한 원형질
이제야 허물을 벗는
부드럽고 촉촉한 단전의 속살
저 농밀한 살풀이
저 끈적한 점액
몸짓에 감겨
꿈틀거리는, 파닥거리는
흰 세포들의 군무
팔랑이는 나비들
날갯짓에 출렁이는,
저 원류의 물소리
끝없이 흘러도, 다 호명할 수 없는
저 물결의 이름들
꿈속에서 보았던, 아득히 젖은
저 모성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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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 칸타빌레*
김세영
초승달로 돋아나서
잠자는 호수의 등을 밟고 가듯이
한 달을, 백 년을 걸려서 건너가듯
달맞이꽃 봉오리, 차오르고 이울어질 거야
동백이나 목련처럼
부푼 가슴살, 단칼에 도려내지 않고
밤마다 별리의 가슴앓이로
촛불처럼 조금씩 야위어져 갈 거야
달빛에 삭은 벼랑의 소나무,
천궁처럼 등뼈 휘어지게 하듯
정선아리랑 실은 동강의 거룻배,
첼로 활의. 안단테 보폭으로
달빛 잠방이며, 강을 건너갈 거야
그믐달 실눈, 한 올만 남을 때까지
한 잎 한 잎. 천천히 야위어 가듯이
민들레 홀씨, 한 톨 한 톨 날려 보내 듯이
깨금발로 소리 없이 퇴장할 거야
극락강 건너가는 솜털구름처럼
노을의 바람에 실려, 안단테
아니. 아다지오의 보폭으로 사라질 거야.
* “천천히 노래하듯이” 라는 음악용어이며,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현악4중주곡 제1번 D 장조』 (작품번호 11)의 제2악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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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2006년 시집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작품 활동 시작
2007년 「미네르바」 시 등단. 시전문지 『포에트리 슬램』 편집인
시집: 『하늘거미집』 『물구나무서다』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서정시선집: 『버드나무의 눈빛』, 디카시집: 『눈과 심장』,
시산맥시회 고문, 한국의사시인회 고문, 서울의과대학원
제 9회 미네르바 문학상, 제 14회 한국문협 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