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과 명량대첩3
임진왜란, 정유재란 개전 초기에 조선수군을 스스로 몰살시킨 원균(원주원씨 원성백파)은 전쟁이 한창중인데도 왜적을 섬멸하기보단 전공에 눈이 멀어 민간인을 학살한 후 그 수급을 베어 왜인으로 속이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비대하고 육중한 신체때문에 도망도 잘 못가는 원균을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 추켜세우며 친척애를 과시한 두근브라더스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 윤덕영,윤택영,윤치호 등의 친일매국노가 나왔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해평윤씨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는 발언으로 인하여
이른바 '원균명장론'으로 원균에 대한 재조명이 고개를 든다는 것은
이순신, 류성룡 및 당대를 살았던 임진왜란의 영웅들의 명성에 어찌 누가 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당시 이순신은 파직을 당하고 도원수 권율의 원수부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다.
수도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에 가해진 후 겨우 목숨을 부지해 원수부에
백의종군을 한 것이다.
관품과 직책없이 종군하던 이순신은 수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칠천량의 비극이 발생한지 7일만에 이순신은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또 조정에서는 칠천량에서의 패배로 수군이 전몰되었다 하여 선조가 직접 수군의 폐지를 거론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이순신을 육군지휘관으로 임명하겠으니 육군에 합류해 적과 싸우라는 내용의 유지宥旨를 보냈다.
이는 1597년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에게서 받은 유지의 내용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유지에 답하는 장계를 올렸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자임진지우오육년간 적불감직돌어양호자 이주사지거기로야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 즉유가위야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以爲幸
금약전폐주사 즉시적지소이위행
而由湖忠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이유호충우달어한수 차신지소공야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 즉적불감모아의
"저 임진년으로부터 오륙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척이 남아 있습니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가합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이며,
충청도를 지나 한강까지 갈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 하옵니다.
전선의 수는 부족하오나 신이 죽지 않는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일본 수군 본영은 부산에 있었고 전함은 6백여척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기용된 이순신에겐 겨우 칠천량에서 배설이 이끌고 나온 전함 12척뿐이었다.
그것이 조선수군의 전부였다.
고문휴우증과 눈병으로 고생하던 이순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수군재건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
보름동안 전라좌도 일대의 주요 읍성을 차례로 돌며 해당 지방관들과 백성들을 만나 현황과 대책을 세웠다.
850여리의 적전 주파를 강행할때 하루이틀사이로 왜군이 전라지역에 들이닥쳤다.
이순신이 전라좌도를 순시하면서 흩어진 장수들과 수병들을 다시 규합하였으며 군량,화포,활화살등의 무기, 군수품들을 확보하여 해전을 위해
재무장하였다.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겨우 12척의 전함만을 건져 간신히 수군을 재건한 것이다.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하였지만 이순신은 병세가 심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상태였다.
온갖 절망 속에서도 이순신은 비장한 각오로 인내하였고 그 결실은 수군의 재건과 재정비로 이어졌다.
정유년 8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하였다.
그 사이 전라도 남원성은 진격해오는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전주이씨의 발상지 전주도 이어서 왜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편 여해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기 전 진도군수를 제수받아 임지로 가던 중 벽파진에 이르러 명량鳴梁을 건너다 천험의 요새 즉 울돌목를 발견하고
그 일대 지형과 조류의 변동을 세심히 살핀 적이 있었다.
정유년에 이르러 7년전에 보아둔 울돌목이 일본수군과의 건곤일척의 결판을 낼 만한 장소라 여겨 이순신은 이 곳으로 일본수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명량은 이른바 한 장부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장부들을 능히 두렵게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였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비록 아군의 수가 적더라도 바닷물이 흐르는 움직임과 지형을 이용해 싸운다면 아군의 숫자가 적은 단점을 보완하고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전략이었다.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좁은 폭으로 있는 울돌목은 암초밑에 급조류가 충돌하면 큰 굉음을 울리기에 그 이름이 명량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벽파진에서 15일간 적을 서서히 명량으로 끌어들였다.
결전을 앞둔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를 다지고 "한 장부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장부들을 능히 두렵게 한다는 말은 바로 우리들을 두고 한말이다"라며
격려하였다.
때는 정유년 9월 15일 (계묘일)이었다.
다음날인 16일 척후가 급히 달려와 왜선 200여척이 우리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전했다.
이순신은 8월 26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김억추金億秋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척을 더하여 총 13척의 전함으로 대형을 일렬로 갖추었다.
전함들 뒤로는 함대로 위장한 백성들의 배 100여척이 모여 있었다.
일렬의 대형으로 펼쳐진 이순신의 함대는 바다의 좁은 입구에서 닻을 내려 조류에 전함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한 뒤 온 바다를 뒤덮고 있는 왜군의 330여척 전함들을 맞이하였다.
이순신이 탑승한 전함은 돌진하며 선두에 섰고 지자포, 현자포 등의 총통을 어지럽게 발포하였다.
겹겹히 둘러싼 왜군의 전함들에 조선수군들은 기겁하였고 이순신은 부드러운 말로 "적이 비록 천척이라 할지라도 우리 배를 함부로 범하지 못한다. 조금도 두려워 말고 더욱 힘을 다하라"고
독려하였다.
당시 다른 장수들은 이순신의 기함 뒤에 물러나 관망만 하였다.
거제도 현령 안위安衛,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金應緘에게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부른 후 일갈하였다.
"네 이놈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어디로 도망가서 살것인가?
네 이놈 응함아 중군장이 되어 대장을 버리니 어찌 그 죄를 감당할수 있겠느냐!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
이순신의 호통에 두 장수가 지휘하는 배가 적선으로 들이치자 적선 3척이 안위의 배를 포위하였다.
왜군들이 안위의 전함에 올라타자 이에 맞서 싸우던 안위의 군사들은 기진맥진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전함이 달려가 위급상황에 놓인 안위의 전함을 구하고 적선 3척을 몽땅 침몰시켰다.
이어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평산포 대장 정응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전함이 달려와 13척의 전함이 모두 전투에 참전하여 전투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격전이 한창일때 조류가 조선군 쪽에서 일본군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좁은 해협을 일렬로 가로막은 조선군에게
전운이 유리해졌다.
조선의 함포는 대장군전, 장군전, 피령전을 거침없이 토하였고 적선들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깨어지며 불에 태워졌다.
특히 조선군의 비격진천뢰는 그 어마어마한 위력을 뿜어내었다.
화염 속에서 산산이 박살난 적선의 조각들은 정처없이 바다위에 떠 다니며 왜군들의 시체도 어느덧 해협을 뒤덮었다.
그 중 항왜(降倭)출신 준사가 바다위에 떠다니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일본장수의 시체를 발견하고 "적장 마다시(馬多時)다" 라며 소리쳤다.
김돌손이라는 조선병사가 갈고리로 마다시를 건져올려 그 머리를 베어 돛대 꼭대기에 매달게 하였다.
마다시의 본명은 내도통총(来島通総:구루시마 미치후사)으로 임진년 6월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장수 권준에게 죽은 내도통지(来島通之: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이었다.
정오때부터 시작된 이 싸움은 오후 4시가 되자 절정을 이루었고 조선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조선군의 함포소리가 산과 바다를 뒤흔들면서 이 해전을 조선의 승리로 장식하였다.
완파된 적선은 31척, 반파된 적선은 50여척이었으며 적군 사상자는 적어도 1만여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우리 조선군 사상자는 이순신의 전함 사상자가 5명인 것으로 볼때 100명은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명량해전에서 적 수군총사령관 등당고호(도도 다카도라) 역시 부상 당할 정도로 왜 수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야말로 조선군이 이룩한 대첩이었다.
명량대첩이 끝난 후 이순신은 자신의 심경을 난중일기에 적었으니 다음과 같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전남 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 전투는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