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오 9,27-31
능력을 발휘하는 법: 주님께서 우리를 응원하시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경위는 이러합니다.
처음에 그가 원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그다음엔 자신이 청하는 대상, 곧 그리스도께서 그러할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눈먼 이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다음 눈을 뜰 능력이 자신 안에 있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눈을 띄워주시지 않고 눈먼 이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만약 눈먼 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주님의 역할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를 믿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논문 발표를 할 때였습니다.
10여 년에 이르는 노력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발표하는 날 잘못되어 학위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밤새 성당에서 잤습니다.
기도를 드린 시간은 30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세 시간은 성체조배하고 자려고 했으나 깨어보니 바로 준비해서 나가도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잠을 잤다는 뿌듯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전혀 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발표하는 자리에 앉아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 이것저것 공지 사항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엉망이었습니다.
질문하시는 교수들의 말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논문 발표를 논문 방어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질문들에 수긍하는 것은 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며칠 뒤 논문 점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점수가 조금은 낮을 줄 알았는데 세 분 교수님 다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 것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외국 수녀님들이 몇 점 나왔는지 보더니 “난 죽어도 저 점수는 못 받을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한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신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발표하는 중간에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그냥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못하게 대답해서 실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잤으니까.
주님은 그만큼 나에게 보상을 해 줄 것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믿어주는 분이 곁에 계신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려고 옹알이하는 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일까요?
“넌 능력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주어야만 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안에 이미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엄마 아빠는 그것을 믿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는 대로 아이는 그것을 해 냅니다.
만약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어떤 마을에서는 자녀들이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네 발로 걷기도 합니다.
터키 한 가족 중 5남매가 네 발로 걷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걷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근친상간으로 결혼한 부모의 탓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전자 결함 때문에 소뇌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근친상간으로 자녀를 낳은 사람이 많지만 자녀들이 네 발로 걷게 되었다는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뇌가 손상된 다른 형제들은 힘겹지만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습관’ 때문이라는 최종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네 발로 걷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네 발로 걸어도 교정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네 발로 걸었던 이들에게 교정을 시켜주니 어느 정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은 것이고 자녀들은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교정 평행봉을 만들어주고 간 몇 년 뒤 이들 중 몇 명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부모처럼 믿어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할 수 있음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믿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물 위를 걸어보지 못하고 우리보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마케팅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조서환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장군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장교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수류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아내를 만나 학생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임에도 한쪽 팔이 없다는 것만으로 아이 둘까지 있는 사람을 취직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났던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내입니다.
자신을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준 아내 때문에 그는 다시 면접장으로 찾아갔고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한 손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신을 뽑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의 기백에 결국 합격하게 되었고 장점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마케팅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능력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입니다.
씨앗입니다.
그것을 틔워줄 믿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처럼 되려면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고 내가 그분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오 9,27-31
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는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인류 구원을 일찌감치 선포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펼쳐진
황홀하고 충만한 광경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이사야서 29장 19~20절)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냉혹한 현실, 더 나아가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특히 이런 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혹독한 장애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희망의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딱 맞아떨어집니다. 시각 장애로 평생을 고생해왔던 눈먼 사람 둘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두 사람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 그분의 신원,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서 큰소리로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용기와 강한 믿음과 절박함은 곧바로 치유의 은총으로 연결됩니다.
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의 도래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3년이란 단기간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 예수님이 사랑을 실천하던 곳, 그곳이 곧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각자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성체성사를 비롯한 다양한 성사를 통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 안에 적극적으로 현존해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하루하루, 모든 순간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믿는 대로>
2022. 12. 02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오 9,27-31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믿는 대로>
우리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