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風葬)
이한직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뜯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 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워했다.
깨어진 오르간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문장』 4호, 1939. 5)
[어휘풀이]
-풍장 : 시체를 한데에 버려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없어지게 하는 장례법
-호궁 : 동양 현악기의 하나.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로, 네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총으로 맨 활로 탄다.
-님프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모습의 요정. nymph.
-계절풍 :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 여름에는 바다에서 대륙
으로, 겨울에는 대륙에서 바다로 분다.
-카바란 : 대상(隊商), 무리를 지어 다니는 상인. caravane.
-장송보 : 죽은 자를 장사지내 떠나보내는 기록
-실루엣 : 미술 용어로 윤곽의 안을 검게 칠한 사람의 얼굴 그림을 말함. 18세기 말에,
프랑스의 재무상 실루엤이 극단적인 절약을 부지짖어 초상화도 검은색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다. silhouette.
-묘연한 : 거리가 멀고 가물가물한
-요람 : 젖먹이를 태우고 흔들어 놀게 하다가 잠재우는 물건. 사물의 발생지나 근원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작품해설]
이 시는 이한직의 첫 추천작으로, 정지용은 심사평에서 “선이 활달하기는 하나 치밀하지 모산 것이 흠이다.” 라는 불만과 함께 ‘외래어의 잦은 사용’을 꼬집으며 시적 기교만 부린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처럼 이 시는 의도적으로 서구적 채취를 풍기고자 많은 외래어를 등장시키고 있으며, 3연과 6연에서는 같은 시행의 반복을 통하여 시적 안정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풍장’이란 원래 시신(屍身)을 한데 내버려 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소멸되게 하는 원시적(原始的) 장례법(葬禮法)을 뜻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만 18세의 시인이 처해 있던 일제 말기의 절망적인 사회상을 상징한다. 이 속에서 ‘괴로워하’며 자유와 인식을 갈망했던 시인의 애끓는 마음은 ‘그립은 사람’을 부르는 화자의 처절함으로 드러난다.
[작가소개]
이한직(李漢稷)
목남(木南), 율아당(栗雅堂)
1921년 전라북도 전주 출생
경성중학교 졸업, 일본 게이오(慶廳)대학 법학과에서 수학
1939년 『문장』에 시 「온실」, 「낙타」, 「북극권」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55년 종합지 『전망』 주재
1956년 조지훈과 함께 『문학예술』 추천 담당
1960년 문화공보부의 문정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197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