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15일 수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수도회] 열린 마음과 감사로 여는 구원의 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6,1-11
† 복음 루카 17,11-19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십니다. 하지만 병이 낫자,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겨우 한 명뿐이었지요.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 부르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곤 하지
않습니까?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많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서운했던 경우나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난 나날들을 되돌아본다면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실로 많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이를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 오늘 차근히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6,1-11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할리우드 원조 섹시 스타라고 불리던 샤론 스톤(Sharon Stone)을 아마도
웬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지요. 다행히 응급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말을 더듬게 되었고 다리를 절며 시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연기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갔습니다. 물론 일상 삶 역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도 샤론 스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의 제 모습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저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쓰고 싶습니다.”
처음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 절망하고 아파합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선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런데 샤론 스톤은
그러한 고통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것을, 그래서 처음 겪게 되는 이
새로운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이제 더 이상 배우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극복해서 다시 TV 드라마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그 순간에 절망하고 아파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분명히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딱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왜 깨끗해진 나머지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를 고민해 봅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다시 나병의 상태로 돌아갈 것 같아서 계속
괜찮은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치유되었다는 기쁨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또 치유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 않아서 자신 역시 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병 걸렸을 때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나병 걸렸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기 싫어서
심지어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주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병
걸렸을 때와 치유되었을 때의 모습 모두를 인정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한 긍정적이고
희망을 간직한 사람만이 믿음을 갖게 되고 이 믿음이 자신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에리히 캐스트너).
하루 묵은 전주의 한옥집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좋은 글’ 중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세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잃은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재물이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든...
모든 사고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잃은 것만 세는 어리석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얻은 것을 셀 수 있는
지혜로운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성리 갈대밭.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열린 마음과 감사로 여는 구원의 문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8)
열린 마음과 감사로 여는 구원의 문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원의
순례길’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경계
지역을 지나가십니다(17,11). 이런 길 선택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취급받아 적대감을 가졌던 사마리아인들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해방하시려는 몸짓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뻗어가는 교두보였지요. 이렇게 그분이 향하는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음을 통해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말씀’을 목숨을 다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심오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길목에서 예수께 다가온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음은
의미심장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17,12-13).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는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를 없애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을
향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갈증’을 드러냈고, 그 목마름은 결국 치유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17,14)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17,14)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 받으려는
이의 지향과 순수한 사랑의 갈망과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유대인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의 선물을 자기것으로 소유하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선물을 주신 주님을 곧바로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명은 병이 낫자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17,15-16) 치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선이신 그분 안에 끝까지 머문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로 민족적, 종교적인 적대감과 증오심까지
치유받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시며 사마리아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문화와 이념, 민족과 종교가 다르고 신분과 빈부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을 줄 아는 너그러움이 치유와 해방을
불러옴을 기억해야겠지요.
나의 일상의 발걸음과 몸짓은 어떤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과 배척 의식, 폐쇄적인 태도, 선입견과
편견의 틀을 벗어버려야겠습니다. 더는 우리 모두 자신만의 기준이나
좋고 싫음의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보다 근원적이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해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세상에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지녔던 갈망과 감사의 샘물을
마셔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리더의 자세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리더의 자세
갖은 수모와 상처 속에 수많은 우여곡절과 부침을 거듭하며, 오랜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민족사를 돌아보며, 백성의 리더들, 학자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비전이나 철학이 결여된 인사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마저 찾아볼 수 없던 지도자들, 백성들을 향한 애정이나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던 리더들, 그래서 결국 자기 호주머니나 곳간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정치인들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겪었던 고초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식별력입니다. 누가 양떼를 생명의
땅과 기름진 푸른 초원으로 이끌 착한 목자인지, 누가 양떼를 이리 저리
팔아먹고 잡아먹을 삯꾼인지 식별하는 힘이 요구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독일 출신
도미니코회 수도자 알베르토 주교 학자(1206~1280)입니다. 아름다운
도나우 강변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로 치면 ‘엄친아’ ‘만물박사’
‘팔방미인’이었습니다.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엄청난 학문적 성취와 뛰어난 인품, 거기다 그리스도와
진리를 향한 강렬한 목마름, 교회와 수도회를 향한 애정, 그리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 그리고 겸손의 덕까지 갖춘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그냥 성 알베르토라고 하지 않고 성 대(大)
알베르토라고 부릅니다.
알베르토는 신학의 기초로서 철학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후에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합니다. 그는 당시 유럽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했는데, 그의 가르침에 매료된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노선을 따랐습니다.
알베르토는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식물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기상학, 윤리학, 수학, 논리학, 수사학, 경제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에 대한 수많은 집필을 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이었는지는 비오 2세 교황님은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알베르토는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바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역에서 발생한 극한 분쟁의 해결사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대학자로서 자신의 학문 안에만 머물지
않고, 그가 터득한 진리를 자신이 살아가던 사회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알베르토 생애 안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평생토록 일관되게 추구했던 극단의 겸손입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로서의 그는 1254년 독일 북부의 테우토니아 관구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과 3년 후인 1257년 자진해서 관구장직을
사임합니다.
이런 겸손한 알베르토를 사람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눈여겨본
알렉산데르 4세 교황님께서는 1256년, 그를 아나니아에 초청해 교황청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차례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1260년, 그를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불과 2년 후, 수도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어, 또 다시
주교직에서 자진 사임합니다.
성(聖) 대(大) 알베르토 주교 학자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와 진리를
끊임없이 갈구했으며,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와 신앙으로 조화시켰습니다.
대학자이면서도 한없이 겸손했던 그는, 그 누구도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부족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감사드리는 이방인 한센인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 17,11-19
신학교의 사목연구소 주체로 “교구 사제 성소의 계발과 양성”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소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발표를 하였습니다. 본당에 12명의 신학생이 있는 신부님께서도 발표를
하였습니다. 동성고 예비 신학생을 담당하는 신부님께서도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현장에서 경험한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학교의 신부님께서는 양성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있었던 경험보다는 양성의 의미와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존의 양성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처럼 일정한 틀에 맞추어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념, 가치, 지식, 교리, 직무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양성의 방법은 신속한 면이 있고, 양성을 받는
이들을 선별하는데도 이점이 있습니다. 기준에 맞지 않으면 탈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영혼이 없듯이, 이런 양성의
방법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기는 어렵습니다. 규율과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자리에 있을 때만 따르기도 합니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양성은 ‘식물’을 키우듯이 하는 것입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식물은 스스로 햇빛을 받으며, 땅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식물은 스스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두운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변화를 가지도록 이끌어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게하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정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정표를 조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동기를 부여해
주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성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내가 당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고 나를 믿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답은 정답을 배워서 아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길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붕어빵을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짓과 불의
앞에서 당당하셨습니다. 위선과 허위를 냉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말씀하셨으며,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양성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학생들과 면접을 하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동기를 물어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신부님들이 충실하게
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자라납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내적인 동기부여를 할 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받기만 하는 것을 멈춰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루카17-11-19)
받기만 하는 것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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