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8-10 베드로의 말을 들은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하고는 베드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전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집을 나섰고 다른 제자도 뒤 따라 나서 둘은 함께 달렸는데 뒤 따르던 다른 제자가 앞서 무덤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무덤 입구에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았다.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머리 수건과 수의가 각각 따로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어지는 말씀은 요한도 베드로의 말을 듣고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하고는 베드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는 집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7절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는 그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6-7절의 내용을 다른 제자에게 소리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야, 다른 제자야! 이것 좀 봐 머릿 수건은은 머리 쪽에 원래 모양 그대로 있고 몸을 쌌던 수의도 아래에 그대로 있어! 너무 이상해!” 이 소리를 듣고 요한은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8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그러한 내용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므로 다른 제자가 그제서야 들어갔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소심한 요한이 그냥 들어 갔을 리가 없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이상한 장면을 확인하려고 요한은 용기를 내서 들어갔을 것이다.
요한은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요한은 이 장면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하셔서 예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은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말씀을 깨닫고 믿는 것보다는 수준이 낮은 믿음이기에 9-10절처럼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일부 주석가들은 이러한 요한의 믿음이 나중에 보지 않고 믿던 다음 세대의 믿는 자들에게 본보기가 된 것으로 해석한다. 요한은 빈 무덤만 보고도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믿은 것이고 이어지는 믿지 않았다는 내용은 그러한 믿음이 말씀에 근거한 차원 높은 믿음은 아니었다고 설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면 요한이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는 것은 6-7절에 나온 베드로 본 내용 눈으로 확인하고 믿었다는 뜻이다. 만약 요한이 빈 무덤만 보고 ‘아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구나!’ 라고 하면 9절과 연결이 안된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란 베드로와 사랑 받는 제자 요한이다. 이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알고 배웠는데도 베드로와 요한 둘 다 빈 무덤과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9절 맨 앞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 나온다. 요한이 왜 보고 믿었는가 하면 이란 뜻이다. 요한이 왜 믿었는가 하면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 왜 베드로의 말만 믿고 부활은 믿지 못했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요한이 믿은 것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믿은 것이다. 머리 수건과 수의가 따로 놓여진 것을 믿은 것이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시체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러 온 것이지 부활을 확인하러 온 것은 아니다. 문맥상은 분명히 요한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들어가 보고 예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믿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논란은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5세기 사본인 Bezae Cantabrigiensis에 보면 영어의 “not”에 해당하는 단어가 여백 위에 기록되어 있다. 후대의 성경 해석자가 9-10절의 내용을 보고 믿지 않았는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고 고친 것이다. 고대의 성경 해석자들은 사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경우도 지우고 고치는 법이 없다. 그 부분 위의 여백에 작은 글씨로 적어 놓는다. 후대의 사본들은 베드로도 믿었다고 보고 “그들이 믿었다”로 고친 사본들도 세개가 발견된다(69, 124, 788). 그러나 모든 초기 사본들과 절대다수의 후기 사본들은 “그가 믿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들어가 보고는 베드로의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더구나 믿었다는 말이 3인칭 단수 부정과거로 쓰인 경우는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에만 5번이 나온다. 이는 요한만이 사용한 표현인 것이다. 요한은 그가 믿었다는 말을 모두 다 말씀을 듣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다는 경우에만 쓰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은 것이지 믿음이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만 쓰인 것이 아니다.
10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9절에 나온 대로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이에 두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한 것이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아니면 최소한 요한이라도 믿었다면 두 사람이 집으로 그냥 돌아갈 리가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궁금증만 가지고 3절에서 걸어 나왔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예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며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는데도 수제자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하여 망신을 주고 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야기가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면 자신들의 스승들을 이렇게 망신을 줄 수 없다. 복음서들이 60-70년대에 기록되었다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다 세상을 떠난 뒤이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만 오랫동안 살아 남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존경 받던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내면서 자기를 그렇게 바보로 만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이기에 요한 자신이 망신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사실대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셔서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후대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이 되라는 뜻으로 요한은 자신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