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2-30)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말씀의 초대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은 여러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안티오키아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다. 바르나바가 바오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오는데, 안티오키아 교회는 장차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 기지가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성전 봉헌 축제 때 성전에서
유다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미 분명히 밝히셨고 또한 그분께서 하시는 일도 그분을 증언하지만,
유다인들은 믿기를 거부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
5―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지내 오던 축제들과 관련하여 가르침과 표징을 보여 주시기 때문에, 어떤 축제가 배경으로 제시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던 성전 봉헌 축제입니다. 이는 기원전 164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
통치 시절에 막강한 외국의 압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이교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성전을 모독했을 때, 유다 마카베오가 그
성전을 되찾아 정화한 다음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 때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당신이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요한 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비밀 사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그러한 주장은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요한 10,36)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응답하십니다. 여기서는 성전 모독과 성전 봉헌의 문제가 되풀이됩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을 하느님께 다시
바쳤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시며 새롭게 그 축제의 주인이 되십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요한 2,21 참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성 문제,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저 당연한 교리의 한 부분이 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그 주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는 이유가 되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믿음이 순교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다시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사랑해요’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선생님께서는
“‘미워해요.’인가? 아니면 ‘싫어해요.’인가?”
학생은 “아니에요.
답은 ‘사랑했어요.’예요. ‘미워해요, 싫어해요.’는 그래도 관심을 나타내지만 떠난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요.”라고 웃으며 말하더랍니다.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 알겠지만, 이 무관심이 역사를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군중들을 격분시켜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16세 프랑스 왕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이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으로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가난에 대한 무지,
그리고 무관심이 결국 그녀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무관심이
역사를 바꾸었으며, 한 여성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지금 현재의 삶 안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사랑과 반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조차 힘들다며 아예 관심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대상은 멀리 있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닌, 피를 나눈 가족관계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줄까요?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요? 내 무관심의
대상을 볼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뿐입니다.
사랑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상의 사랑에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무관심으로 일관된 삶이 아닌, 사랑의 여지를 항상 두면서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유대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하지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행하셨던 표징만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참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스스로 깨달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에 자기 자리가 불안했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보존할 수 없도록 하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우리를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구원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나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 이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믿는다(토마스 머튼).
나는
누구인가(본 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왕이 자기의
성에서 걸어나오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게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는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평화롭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들고 손들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들과
새소리를 갈구하며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저 말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힘없이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치고 텅 빈,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아니면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신은 안다. 내가 그의
것임을..
나치에 항거했던
행동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베를린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쓴 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지요.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 모든 나를
하느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면 아예
무시하는 유다인들(이스라엘)
-이기정신부-
누가 ‘대통령과
나는 하나다.’라고 공개적으로 떠들어대면 믿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말한다면 미쳤다 하겠지요. 이런 말로 사람들을
계속 선동하면 정신병원 내지 그냥 죽여 없앴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우리 속을 태우지 말라.’며 예수님을 죽인 거지요. 그것도 십자가에 공개처형 확실히 했는데 또 살아났다니 더 속 터졌지요. 그 후로 그들은
믿기는커녕 기독교라면 귀찮아서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 세상에서
파견되는 이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들 >
-전삼용신부-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70세쯤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채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블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장 병원으로 실려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스러운 가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었지만 왠지 모를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와는 상관없이 아주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히
고민하던 경찰관이 책상을 뒤지다가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던 경찰관의 얼굴은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그러나
왜 자신이 먼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사람을 많이 만난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도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라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가슴엔 사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이 채워지면 끝나는 것 같지만 더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힘이 생깁니다.
타볼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셨던 것처럼,
하느님과의
만남은 우리를 이웃에게 가라고 떠밉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티오키아로 바르나바를 파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는 사울을 찾아 함께 1년간
안티오키아 전교에 힘씁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움 없이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혼자 하시지 않고 협조자인 ‘지혜’를
먼저 만드시고 ‘함께’
창조사업을
수행하십니다.(잠언
8장
참조)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일을 할 때도 ‘협조자’를
붙여주시어 혼자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열두 명의 사도들을 뽑으시어 항상 함께 다니셨고 함께 음식을 드셨고 함께 주무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도 혼자 지려하지 않으시고 얼굴도 모르는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당신 몫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독불장군처럼 혼자 어떤 일을 성취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당신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홀로 계셨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더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충분한 만남은 세상을 만나러 가는 힘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도 혼자가 아니고 그런 분이 혼자가 아닌 것이 좋기 때문에 그런 본성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혼자서는 하느님이 아니신 것처럼 사람도 혼자서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만난 이들은 이웃을 향해 ‘파견’
받습니다.
-조재형신부-
저는
한국인입니다.
한국에서는 실감을
많이 못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를 인정해주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여권’입니다.
여권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 주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한국말을 하고,
외모도
비슷하고,
먹는 음식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역사,
문화,
전통을
배웠고,
같은
사건,
경험,
시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감동하고,
감께
울고,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생활하면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문화도
다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2년 동안 캐나다에서
지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맵고,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는 저는 심심하고,
담백한 음식들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2006년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가 있었고,
당시에 캐나다
토론토에 있던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함께 응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난민촌’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거치면서 산업화를 이루었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거의 병영 수준의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보건체조를 하였고,
조회를
하였습니다.
교련을 배워야
했고,
정부는 산아제한을
하였고,
기생충 박멸운동을
하였습니다.
머리가 길면
잘랐고,
치마가 짧으면
단속을 받았습니다.
노래와 시도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
주장은 강력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국가의 통제는 거의
군대의 수준과 비슷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광장’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권리를 광장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이
거쳐 온 시대 상황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그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혈연의 틀을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여권’으로 자신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것들에 복종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그리고 그분의 표징을 본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께서 거룩한 분이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분은 권위가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때,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누고
연대한다면 분명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병자를 고쳐
주었으며,
마귀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받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속을 태울
작정이냐?
-반영억신부-
중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이 위경련과 인두염 증세를 보여 1~2일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청와대가 밝힌 것을 놓고 야당 대변인은 "국가 원수인
박 대통령의 신변 정보가 이번처럼 낱낱이 공개된 사례가 있었는지에 대해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의 건강 상태 등
신변에 관한 사항은 대통령 경호뿐 아니라 국가의 안위, 외국인 투자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이라며 "대통령의 신변 정보를 함부로 공개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청와대의 신중한 처신을 당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당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청와대는) 병명은 물론 구체적인 신변 정보를 언급한 적이 없다"며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고 걱정이 큰 탓에
증상만 간략히 설명 드린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혹 '링거 남미순방'이라는 것을 먼저 얘기하여 동정을 받으려 한 것은 아닐까요? 또한 그것이
못마땅해서 흔드는 것은 아닐까요? 같은 내용을 보는 시각은 자기 입장에 따라 너무 다릅니다.
지난 25일 발생한
네팔 대지진으로 사망자가 네팔에서만 4000명을 넘어섰다고 네팔 경찰은 밝혔습니다. 또 지진으로 인한 눈사태로 에베레스트산 베이스캠프에서
18명이 사망했으며 주변국 인도에서 61명, 중국 티베트 자치구에서 25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피해가 더 커지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와 도움의 손길이 우선 필요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하고
유다인을 향해 하셔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먼저
믿어라.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과의
우정
-사랑,
앎, 봄, 삶-
-이수철신부-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
제
책 제목이지만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보이고, 보일 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살게 됩니다.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모르면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 체험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앎-봄-삶이
일련의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영적지도자의
역할은 '하느님을 잘 사랑하도록 안내해 주는 것과
자기를
잘 알도록 안내해 주는 것' 둘이라 합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탐구와 자아 탐구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더불어 자기도 저절로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저녁성무일도 마니피캇 후렴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 듣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우리는
저절로 사랑하는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바로
이게 성소의 비밀입니다.
주님과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간의 우정과 앎도 깊어집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도 여기에 적용됩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 때 바로 그 앎이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하여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 따라 살아 갈 때
주님과
우정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 최상의 선물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 내적 힘이 샘솟는 마르지 않는 원천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과
더불어 나를 알게 되고 이어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됩니다.
하여
저절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기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다.
아쉬울
것 없다. 두려울 것 없다.'
바로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체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경지의 영원한 행복의 사랑을 사셨던 윤을수 창립자 신부님이셨습니다.
강의실
현관 문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
라는
새감 윤을수 신부님의 말씀이 바로 생생한 증거입니다.
어제
여기 새감 윤을수 신부님의 영성의 보급 및 생활화에 온 힘을 다 쏟고 있는
김인숙
데레사 수녀님의 체험담도 감동이었습니다.
신부님이
타계하신 1971년 다음 해인 1972년 수녀원에 입회했다는 자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깨닫습니다.
그후
수녀님이 언젠가 몹시 힘들고 걱정이 많을 때
너무
생생하게 신부님이 꿈 중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가. 다만 감사하게“
신부님은
단 두 말씀만 하시며 가슴 위에 손을 꼭 얹어 주셨다는 일화입니다.
후에
평소 신부님의 모습과 말투 그대로 였다는 것을
선배
수녀님에게 들었으며 내적 확신도 깊어졌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너무
생생한 체험이라
힘들
때 마다 상기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된 체험이라 합니다.
아,
바로 이게 수녀님의 하느님이 선사하신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신부님
역시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생생한 일화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간절한
사랑이 하늘에 닿을 때 사랑의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로 응답하십니다.
바로
1독서의 바르나바가 또 영원한 생명 체험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선사 받았기에
이처럼
성령과 믿음의 충만한 바르나바의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바르나바처럼
이런 영원한 생명의 향기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함으로
많은
이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자가 진정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며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오상선신부-
내가 누군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온전히 흡수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관계일 때만 하나가 될 수
있겠지요.
부부가 하나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상대에게 내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고 하시네요. 아버지와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완전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이지요.
여러분은 누구와
하나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군가와 하나됨을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됨이 무엇을
말하는지 더 명료하게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분들이길 소망합니다. 그 완전한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내어주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알아들어야 할 말씀과 듣고 싶은 소리
-기경호신부-
매순간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소리 중에는 듣고 싶고 듣기에 좋은 소리가 있는가 하면 듣기 싫고 삶에 스트레스를 주는 소리들도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삶의 주체 쪽에서 보면 이는 내면의 마음 작용, 삶의 방향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는가!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말씀’과 ‘소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 무질서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
유다인들은 벌써 세
번째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며 돌로 쳐죽이려 한다. 때는 겨울, 유대인들의 실존적 뿌리를 회상케 해주는 중요한 하누카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을 위험을 맞았음에도 매서운 겨울 동풍을 막아주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있다. 이렇게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고 분위기 또한 겨울의 싸늘함이 감돌고 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10,24) 하고
물으며 도발한다. 유다 지도자들은 기네들이 결코 확신하려고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 말씀을 더욱 더 듣고자 하고 또 다른 표징들도 보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25-27) 하고 답하신다. 착한
목자요 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 목소리 곧,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여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를 통한
변형과 동일화의 길이요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길이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었고 또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에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의적인 무시와 보고도 보지 못하는 무능력을 일깨워주시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더욱 분명히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기에’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자. 나의 기대와 희망은? 나의 기대가 좌절될 때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우리는 늘 희망과 배려의 태도를 보이셨던 예수의 태도와 불신과
불안을 떨치지 못했던 유대인들의 태도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참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알아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바램을 채워주는 듣고 싶은 말’만을 듣고 싶어 하였던가?
내가 바라는 바,
내가 만든 이상의 틀을 추구하면서 나는 ‘그림자 속의 연인’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나의 삶 등을 추구하면서, 만족스럽지 못할 때 불안해하고 불만을 터뜨리며 살아간다면 나는 또 다른 유다인과 다를 게 무엇인가!
내가 찾는 현실적인 메시아, 나의 이익과 욕망을 채워주는 하느님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 친히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겉치레 신앙에서 벗어나 '알아들어야 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온전히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그분을
따라 생명 넘치는 풀밭으로 나아가자.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이영근수사-
주님!
제 안에는
혼탁한 소리들이
요란하게 흘러
다닙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양이오니,
당신의 목소리를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듣고서 숨지 않고
당신 면전에 나서게
하소서!
당신을 만나
주님임을 알고,
그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주님!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소서!
알아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소서.
새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게 하소서.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게
하소서!
오,
저의
주님!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한상우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맑은
행복과 맑은
사랑은 서로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생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생명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돌아서는
기쁨이 가장
큰기쁨입니다.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진정
살아있는 삶이란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되는 새로운
길이란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랑마저도 소유하지
않으셨기에 사랑을 위한
본질이며 복음으로
오늘도 우리들
가슴에서 뜨겁게 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누기에 생명은
하나입니다.
서로를
받아주고 서로를 껴안아
주는 사랑의
마음이 생명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찾듯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중심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하느님을 다시
기억하며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랑의
순간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하기에 생명은
더욱 행복하고
풍요롭습니다.
생명을 키워내는
힘 그것은
하나되는 사랑의
힘뿐입니다.
사랑안에서 나무와
풀들은 더없이
푸르고 풍요롭기만
합니다.
일치로
이끄시는 예수님 사랑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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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