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커스 칼 / 변종호
얼마나 맞고서야 명검이 되었을까. 합쳐질 수 없는 운명이 하나되어 새 생명이 탄생했다. 고통은 지옥을 넘나들 정도로 가혹했다. 완강한 거부는 불질에 누그러들었고 수많은 메질은 영혼의 결을 쇠에 새겼다.
칼에 문양이 있다. 그리거나 새겨 넣은 것은 아니다. 칼의 본질인 강하고 잘 드는 칼을 만들다 덤으로 얻은 문양이다. 어찌 보면 썰물이 자잘하게 그려놓은 갯벌의 결 같고, 달리 보면 노거수老巨樹의 고운 나뭇결 같다. 경이롭다. 문양 하나로 홀딱 빠져들게 하는 다마스커스 칼이다.
다큐 <공감>에서 잠깐 본 칼에 매료되어 대장간을 찾아 나섰다. 망치 소리가 가까워지자 가슴이 설렜다. 오래된 대장간이다. 화덕에서 솟구치는 불꽃은 강렬했으나 빛은 맑고도 깊었다. 농기구가 어수선한 낯선 풍경 안에서 한동안 구경꾼이 되어야 했다.
대장간 안은 망치 소리와 매캐한 불 냄새로 가득하다. 망치를 잡은 동생의 팔에도, 쇳덩이를 잡은 형의 팔뚝에도 터질 듯 핏줄이 섰다.
이 일을 하기까지 형제는 수없이 부딪쳤다. 아버지의 혼이 깃든 대장간을 버릴 수 없어 혼자라도 하고야 말겠다는 형의 강력한 주장에 아우가 동참했다.
“이 일은 흥미를 못 느끼고 끈기가 없으면 절대 힘들어 못 해요.” 라며 탄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낸 형이 웃는다.
하나의 재료로는 만들 수 없다는 다마스커스 칼, 반 뼘 길이의 납작한 3개의 연강 도막과 4개의 고탄소강 도막은 용접으로 하나가 된다. 그런 쇳덩이는 달궈지고 수백 번의 메질을 견디며 하나가 아니었다는 처음의 기억을 모두 지워야 한다.
달궈서 늘려진 쇳덩이 가운데를 끊어지지 않을 만큼 남기고 자른다. 내리치는 망치의 힘 조절을 잘못하면 쇠는 영락없이 두 동강이 난다. 겹쳐질 쇠에 붕사가 뿌려진다. 붕사가 녹으며 흘리는 것은 굴복하는 쇳덩이의 눈물이다. 접힐 때마다 쇠의 강도는 높아지고 문양은 안으로 품었다.
달아오른 쇠를 새끼줄처럼 비틀자 감쌌던 산화물을 모두 털어낸다. 붉은빛이 더 선명하다. 또다시 메질이다. 다시 늘리고 잘리며 접 쇠가 된다. 이렇게 여덟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진정한 합일合一에 이른다.
맞을수록 단단해지는 게 쇠다. 칼의 형체를 그라인더로 다듬으며 날을 세운다. 튕겨 나가는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는 폭죽 같다. 거무죽죽한 표피를 벗겨내고 화덕에서 달궈진 칼이 기름통으로 빠져든다.
숫돌에 문지르며 날을 세운다. 날이 선 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확인한다. 그때만 해도 칼은 기대치에 못 미쳤다. 대장장이는 옆에 있던 특수 세정제 통에 칼을 푹 담근다. 긴장한 채 몇 분이 지나고 통에서 꺼낸 칼을 흐르는 물로 씻어내자 선명하게 문양이 드러난다. 마술 같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번쩍이는 칼에 새겨진 결이 절묘하다.
중세 시대, 명검을 제조했던 곳이 중동의 다마스커스(Damascus)다. 모방은 쉽지만, 발명의 길은 험난하고도 요원하다. 철강 산업이 발전한 오늘날, 성분 분석은 마쳤으나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는 명검을 만들었던 선인先人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강했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휘었지만 금방 복원이 됐고 절삭력切削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십자군 전투에서 단칼에 상대의 갑옷을 베고 칼을 부러뜨렸던 다마스커스 칼이다.
명검이 되기 위해 장인의 망치질에 비워냄과 순종으로 쇠의 마음에 품듯, 인간도 각자의 환경과 살아온 내력만큼의 궤적을 남기는 것 같다. 잘 갈고 닦은 수련의 정도에 따라 찬란하게 빛이 날 수도, 즐거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다 평범한 생을 마칠 수도 있다.
이순의 고개를 넘어 돌아보니 관계의 틀 안에서 수천 번도 더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맞고 겹쳐지고 뒤틀리며 치열하게 살아야 했는데 견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아.’ 라고 적당히 타협을 하며 잘될 거라는 섣부른 예측도 했었다. 이제야 어찌 살아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구도자의 수행으로 오묘한 결까지 품은 명검을 넘보는 건 언감생심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무르고 무디지만, 그렇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빛나는 삶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주어진 삶을 순명順命으로 받아들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보탬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대자연의 섭리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