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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 정필도 목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며 성찬예식을 행하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지막으로 고별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특별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요한복음 13장에서 21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하라’는 말씀이 쉰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 마흔 네 번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쓰여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어하셨던 말씀이 좬서로 사랑하라좭는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좬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좭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언으로 남기신 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을 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1.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7-8,16을 보면 좬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좭, 좬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좭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늘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해주셨습니다.
®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마치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누명을 쓰시고 죽어마땅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입니다.
?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알고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이를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소원과 계획을 가지고 삽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아낌없이 바치려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독자였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세상에서 누릴 영광을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자기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20-21을 보면 좬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5.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반드시 그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녀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지 애비를 꼭 닮았는지.”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자녀는 부모의 외모뿐만 아니라 특이한 버릇까지도 닮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찌 하나님을 닮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하나님의 인격을 닮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요한일서 4:11에서 좬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좭라고 했고, 요한복음 13:35에서도 좬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좭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본받고 스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가운데서 살리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6,8,10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좬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좭, 좬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좭, 좬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이 세운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본래 사랑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좬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좭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계 2:4,5).
불행하게도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라지고 대신 교회가 회교로 점령당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사랑이 없는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랑이 없는 성도도 더 이상 성도가 아닙니다. 다만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목사도 더 이상 목사가 아닙니다. 삯군일뿐입니다.
제가 목회하는 가운데서도 유독 미운 짓만 골라하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을 위해 특별기도를 합니다. 만일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사랑 없는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사람을 가려서 사랑한다면 삯군목사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세요!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반드시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1-2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좬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좭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행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타락의 속성이 남아있어서 악독함과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못된 성품이 남아 있어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잘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성도들이 항상 말씀가운데 살도록 훈련시키고 기도생활에 열심을 낼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의 은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돌로 치는 수많은 원수들을 향하여 탓하기는 커녕 도리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넘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과연 스데반이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스데반도 저와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보통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은만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부족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 힘들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100%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부족해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며, 점점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많고, 사회에도, 직장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심지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교회에 나왔다가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도 문제없는 곳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것없이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증오심과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든 문제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가운데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이 있으시다면 무조건 잘못됐다고 야단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투정이나 반항은 날 사랑해달라는 표시입니다.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는 싸인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에 대한 내 사랑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사랑의 고백을 자주하며 더 뜨겁게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 어려움을 당한 사람, 골치 아픈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을 우리 주변에 두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문제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왜 러브스토리가 인기있습니까?
사랑의 진가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나타납니다. 모든 러브스토리의 공통점은 극한 상황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사랑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아 8:6). 사랑은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죽을 사람도 살립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교회다운 교회!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으며,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요 13:34-35 / 이동원 목사
미국에서 아더 힝클리(Arthur Hinkly)라는 이름을 가진 18살 먹은 소년이 무려 300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트랙터(농장에서 일하는 자동차)를 혼자의 힘으로 들어올린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역도선수가 아니었고 타고난 장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날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자기 여자친구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소녀가 언덕에 세워둔 트랙터 아래서 놀다가 갑자기 밀려 내려온 트랙터 바퀴에 이 소녀가 깔리게 되자 소리를 질렀고 이 비명을 듣자마자, 아더라는 소년은 달려가서 트랙터를 들어올린 것입니다. 이 소년의 힘은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비단 트랙터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힘이 바로 이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독교회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소위 국교화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정교회가 없어지고 소위 예배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한 다음부터의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가정'(집)이라는 사랑의 현장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주신 소위 다락방 강화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12명으로 구성된 셀교회 교인들에게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생활수칙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명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목장교회가 왜 중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목장교회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첫째 메시지- 서로, 사랑하라-를 잘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사랑의 명령은 왜 중요합니까?
--주님의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란 결코 처음 이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옛 계명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계명을 요약하여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래 이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란 독선에 빠진 나머지 이웃사랑의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주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명령 곧 새로운 기대 이셨던 것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옵션이 아닙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사랑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공동체는 바로 이 사랑의 숙제를 풀어야 할 사랑의 교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과거에 교육현장에서 콩나물시루 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한 교실안에 학생들이 과다할 때 선생님에게는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신경 쓰는 것이 불가능했거니와 숙제검사조차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스타일이 만일 주일예배 중심이라면 우리에게는 사랑을 배울 기회도 실천할 공간 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목장 교회 안에 들어가 10명 내외의 이웃들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면 자신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 작은 목장교회를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이 세상을 향하여 할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12제자를 택하여 공동체가 되게 하신 주님의 기대요, 우리교회가 목장교회로 새롭게 출범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명령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 기초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기대요, 마지막 기대이십니다.
2.사랑의 명령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앞서 선행하는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랑의 케이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 케이스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이웃의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둘째 케이스는,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일입니다.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스스로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의지적 결단이란 감정적 결단과 비교하시면 됩니다. 감정적으로는 사랑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만찬의 식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잔을 건네어 주셨습니다. 저 유명한 화란의 할머니 코리 텐붐이 종전후 언니와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던 라벤스 부르크 수용소 간수를 만나 악수의 손을 건넨것도 마찬가지 결단이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의지적 결단을 먼저 했을 때에 할수 없는 일에 대한 도움도 따라올 수 있었다는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3. 사랑의 명령의 실천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작고하신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달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도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직도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세상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작은 공동체인 목장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만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외면한 까닭일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현저한 이유중의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직전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 가정교회 안에 있었던 사랑의 교제-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자력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애절한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가운데 앨리스라는 공주(Princess Alice)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왕실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그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딸과의 신체적 접촉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한날 밤중에 딸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고 공주는 잠을 깨었습니다. 딸에게 달려가 보았더니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공주 엄마에게 "엄마, 키스해주어요"(Mamma, kiss me!)라고 했고 공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딸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얼마 후 공주도 이 병에 감염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공주님, 왜 그렇게 하셨어요?"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앞으로 열 번이라도 키스할 것입니다." 공주는 갔지만 딸을 살렸고 영국인들에게 사랑의 영원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사랑으로 이웃이 살아나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제 사랑의 실습장인 우리의 가정으로 그리고 확대된 우리들의 영적 가정인 목장교회로 돌아가셔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새계명을 주노니
요한복음 13:34-35, 요한일서 4:7-12 / 최응희 목사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의 사랑은 쉽습니다. 감정을 따라서 사랑이 생기면 사랑하고, 사라지면 안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어떻게 감정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지적인 결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너를 사랑하는 것이 의지적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4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너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지적인 사랑은 항상 세 방향에서 이루어야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자기 사랑, 셋째 이웃사랑입니다.
1. 하나님 사랑
의지적인 사랑을 하려면 하나님 사랑을 먼저 깨닫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깨달음이 있을 때, 나도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랑의 힘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을 가장 잘 담아주신 말씀이 아마 이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3:16
예전에는 이 말씀을 모두 암송하며 성장했었습니다. 찬송을 불렀다 하면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라고 불렀습니다. 요즈음은 하나님 찬양, 예수 우리 왕...등의 노래들을 부르지만, 왜 하나님을 찬양하고, 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시는지에 대한 뿌리가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요, 그것이 가장 큰 은혜요, 그것이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요, 찬양해야할 이유요,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일서4:7-12
2. 믿음 안에서 자기 사랑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보이지 않는 이웃인 자기 자신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내 속에서 한쪽이 이것을 원하면서도 다른 한쪽은 저것을 행하기도 하고, 마음은 이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몸은 저쪽으로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 자신과 불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먼저 자기 자신과 화목해야 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자기 사랑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사실은 이 믿음이 모든 믿음의 시작이요, 모든 사랑의 뿌리입니다.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현대병의 70~75%가 상처 난 감정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파괴되면 육체에 질병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상처 난 감정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사랑만이 상처 난 감정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말씀했습니다(요일4:18). 상처 난 감정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치유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면 치유됩니다. 다른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받음으로도 치유됩니다.
제일 첫 번째 이웃인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자신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기적으로 자신만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자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믿음 안에서 자기를 감사하고,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 진정한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과 맞다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자신 밖에 모르고 산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작은 키에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싫어하였습니다. 가능하면 자기가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신의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돈과 권세를 추구하여 그것을 그래도 얻을 만큼 얻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편안치가 못합니다. 어딘가 허전하고, 어딘가 허무하고, 어딘가 텅 비어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삭개오는 이기심으로 살았습니다.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공허를 만듭니다. 함께하고 나누고 감사하는 참 사랑 속에 기쁨도, 충만도, 삶의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랑을 받지도, 사랑을 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삭개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치 않는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리가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불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자기 사랑을 회복하였습니다. 자기의 삶을 감사하게 됐고, 사람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을 사랑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랑의 감격이 그렇게 컸던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도 사랑만큼 가치있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만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큼 심령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점점 더 무르익어간다고 하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일까요? 교회를 오래 다니는 것일까요? 기도를 유창하게 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직분을 갖는데서일까요? 사랑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면 무엇을 닮는 것일까요? 그 다함없으신 사랑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오랜 세월과 교회생활에 익숙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고 그 사랑을 닮는데 있습니다. 오래 믿은 만큼 예수님의 사랑에 더 가까워지고, 직분이 무거운 만큼 더 사랑의 분량이 커지고, 많이 아는 만큼 사랑의 능력이 커가는 것이 믿음의 능력일 것입니다.
오늘 사랑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랑 사랑 말만 있고, 구체적인 사랑은 잘 실천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예배와 드림에 있습니다. 나 자신 사랑은 감사와 기쁨에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배려와 나눔에 있습니다. ‘미소’ 하나가 나눔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모습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능력도, 지식도 그치지만 사랑은 천국까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맺어야할 열매--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아름다운 열매들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늘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의 복음으로
창세기 21:8-21 ; 요한복음 13:34-35 / 박동호 목사
요즘 우리는, 조금 일찍 찾아온 ‘겨울 같은 11월 초순’을 보내고 있습니다. 11월을 보내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여유를 부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겠지만,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11월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저에게,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할 때입니다"라는 사랑하는 친구의 인터넷 아이디가 자꾸 마음에 와 걸렸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마땅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해야 하는 때입니다. 물론, 높은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우리 목회자들은 11월이 되기 전부터, 이미 10월 초부터 개척 1년 된 우리 교회의 목회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새해 목회를 위해서 준비하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년도 목회를 위한 큰 틀은 거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금년 11월을 보내면서 왠지 고민스럽고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마다 연말연시에 해야 하는 ‘목회적인 과제’를 풀기 위한 연례적인 부담감 때문이 아닙니다. … 저와 여러분이 다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보통 믿는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는 ‘나는 누구보다도 예수 잘 믿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면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못지않은 ‘신앙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정말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스러운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일어납니다. 그에 대한 부담감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해 묵은 그릇된 신앙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모순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자가당착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비 복음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섬기는 열심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이라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신앙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기준이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 가정의 문제를 복음적으로 다시 조명하므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브라함 가정에 있었던 하갈과 사라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葛藤)을 영적인 것이라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영적이라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데, 여러분들께서 쉽게 이해하시도록 편의상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영적이냐? 육적이냐?라는 이원론적인 시각에서 이해되는 흑백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것을 ‘복음적인 입장’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그 갈등과 그 갈등으로 인한 가정의 깨어짐과 상처와 아픔, 아니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후손인 아랍과의 대립과 싸움, 갈등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 대하여 상당히 유감이 많은 목사입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부인 하갈과 사라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으로 힘은 많이 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가정목회, 가정사역(家庭使役)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음적으로 잘 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역사적인 대립과 갈등,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전쟁과 싸움, 죽음이 없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는 분이라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느 가정 예외 없이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가족들에 대한 아픈 痕迹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우리도, 6.25전쟁도 치렀고,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도 받았고, 전쟁 후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과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그 아픔과 눈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픔입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은 경험하셨겠지만, 육로로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거나 비행기를 이용해 공항을 출입국을 할 때, 세계에서 이스라엘나라만큼 검문검색이 철저하고 까다로운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끝없는 대립과 갈등과 싸움, 전쟁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풀지 못한 갈등의 뿌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린 과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린 아브라함 가정의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모순적이고, 비복음적인 그릇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실수와 역사적인 과오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歷史)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에게 서로 사랑과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은, 그저 아브라함으로 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믿음의 선진(先進)이고, 많은 인생의 굴곡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믿었던 한 사람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저와 여러분과 모든 인류가 본받아야 하는 ‘신앙의 모델’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저와 여러분 모두의 궁극적인 신앙의 모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도 하나님을 믿었던 극히 불완전하였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볼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인생과 그의 삶과 그의 가정의 갈등들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볼 때, 그의 한쪽 면만을 집중적으로 보아왔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포장된 아브라함의 시각, 하갈과 이스마엘을 가정에서 쫓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종교적인 관점(Judaism)에서 본 아브라함을,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추종(追從)하고 맹종(盲從)해왔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복음적인 것인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장점과 단점 양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양면(兩面)을 보는 눈,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갈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화해(和解)를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주셨던 숙제입니다.
2.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주 귀한 분 두 분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전북 완주에 있는 세인고등학교 명예교장으로 계시는 원동연 박사님이고, 또 한 분은 일산에서 장애인 사역을 하고 계시는 선배 목사님입니다. 일산에서 농아인을 위한 장애인 사역을 하고 계신 선배 목사님을 뵙고 대화를 나눌 때는, 마음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고, 말할 수 없는 빚진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두 분을 만나면서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가슴 속에는, 모두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귀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귀히 여깁니다. 이 사회에서 낙오하고, 실패해서 소외된 버림받은 자들을 귀히 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세인고등학교는 공교육이 포기한 아이들을 맡아서 교육하는 학교입니다. 세인고등학교는 3가지 중요한 입학자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학교 성적이 최하위권인 학생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깊은 상처를 입고 실패한 인생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셋째는, 위와 같은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意志)가 있는 학생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열등생과 문제아만 학생으로 뽑는 학교입니다.
그런 학생들만 뽑아서, 5차원전면교육을 통해서 공교육이 포기한 아이들에게 대안적인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입니다. 저는, 세인고등학교만 좋은 학교이고, 우리 시대의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학교의 교사들과 운영하는 분들이 가진 정신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사람을 귀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귀히 여기기 때문에, 소중한 자신들의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헌신하는 땀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정신이, 절망에 빠진 자들을 살리는 복음(福音)이 아닙니까?
신약신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아스(J. Jeremias)가 쓴 ꡔ예수 시대의 예루살렘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종교적인 신분계층이 있었다고 합니다. 7 가지 상하 신분(上下身分)이 있었습니다. 1) 사제들, 2) 레위인들 및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 서기관, 랍비), 3) 순수한 이스라엘인(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백성들), 4) 사제들의 사생아, 이방인 개종자들, 성전노예의 개종자들, 5) 사생아들, 창기에게서 난 사생아들, 고의로 고자 된 자들, 6) 자연적으로 고자 된 자들(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의미로 천대받았습니다), 성불구자들, 양성소유자들, 장애인들 그리고 7) 이방인들, 세리들, 창기들입니다. 이들 중, 사제들과 레위인들(바리새인, 서기관, 랍비들), 그리고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만 상류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류계층에 속한 사생아들이나, 창기에게서 난 자들, 고자 된 자들은 상류층의 사람들과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최 하위계층의 신분이었던 이방인과 세리들, 창기들은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고, 상류층의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 같이 취급받았고, 공식적인 죄인들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사회통념(社會通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하계층구조를 가진 그 사회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계층구조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얽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상류층의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먹기를 좋아하시고, 포도주를 잘 드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누구와 그러셨는가 하면 세리와 죄인들과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하기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 34 ; 마 11, 19)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식사하기를 즐기셨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장애인, 나병환자, 이방인, 사마리아인, 세리, 그리고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여인들입니다.
당시, 종교사회적인 통념으로 보면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술을 즐기는 방탕한 분이셨기 때문입니까? 먹기를 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의 중심에는,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자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유대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귀히 여기시는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서자나, 적자의 구분도 없습니다. 본부인과 첩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다처를 긍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인생의 아픔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 상처를 가진 자들까지도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예수 안에서는 회복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인 것입니다(마 21, 31).
우리는 아브라함 가정의 갈등 속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는 것과 버림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는 유대주의(Judaism) 속에서, 사람들 철저히 구별하고, 계층화시키는 바리새적이고, 서기관적인 비복음적인 그릇된 신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유대종교적인 그릇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하셨습니다(마 9, 17).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낡은 가죽 부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생명처럼, 진리처럼 붙들고 있는 유대주의 신앙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라를 차별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갈등과 반목과 대립의 신앙인 유대주의(Judaism)를 말합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립과 갈등, 끝없는 싸움과 전쟁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사라를 통한 이삭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철저하게 그릇된 비복음적인 유대주의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도 유대주의적인 그릇된 신앙에 있습니다. 유대주의는, 상대방과 서로 싸우고, 대립하고, 죽이면서도,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는 이율배반적인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이라는 종교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과연 그런 하나님인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정말 열심히 예수 잘 믿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남편은 장로님입니다. 시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순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한 번은, 제 설교를 듣고 제 방에 찾아오셔서 울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담을 하러 오셨습니다. 내용인즉, 친정 언니 되는 분이, 여호와의 증인 골수분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부딪히기만 하면, 언니하고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영적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언니는, 마귀야, 언니는 이단이야, 언니는 사탄이야”하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영적전투가 벌어져도,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점점 더 골 깊어지는 원수맺음 아니겠습니까? 누가 지고, 누가 이기는 게임이겠습니까? 그 권사님이 왜 언니하고 그렇게 싸웠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권사님이 옳고, 언니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니가 잘못되었고, 권사님의 신앙이 바르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영적전투를 해야만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권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언니가 여호와의 증인에 빠진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권사님이 언니보다 더 많이 잘못 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이 오히려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권사님에게는, 여호와의 증인에 빠진 언니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사님께 권면을 했습니다. “권사님, 이번 주일 되기 전에 언니 좋아하시는 좋은 선물 준비해서 언니를 찾아가시라” 고했습니다. “그러고, 가서 언니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그 동안 언니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정죄한 것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니와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언니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언니의 문제도 치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잘못된 기도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무슨 서원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 그래도 제가 목사인데, 저는 앞으로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거나 같이 살면서 아이 낳은 사람들 결혼 주례 하지 않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는 목사로서 너무 당연하고, 마땅히 목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의로운 목사인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법을 세우는 목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첫 번 결혼주례 상대자를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런 분들의 주례를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서원을 했습니다. 그 서원 파기합니다….”
저는, 잘 못된 서원이라도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흑백논리적인 신앙은 잘 못 되었다고 봅니다. 잘못한 서원은 파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런 실수와 아픔이 있어도, 그런 아픔을 가진 부부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저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삭이 되어 배부른 신랑신부도 결혼주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갈과 사라가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가정 안에 일어난 그 갈등 속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갈과 사라가,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가정을 잘 다스렸다면 오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내 하갈과 장자 이스마엘을 버린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버림받은 하갈과 이스마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이 버린 ‘에서’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랑의 언어
요 13:34-35 / 김상복 목사
최근 3천 명 정도의 주한미군이 철수해서 이라크로 간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국방력은 사실은 강력한 가정들입니다. 탄탄하게 서 있는 가정들보다 더 강력한 국방력은 없습니다. 가정이 불행하고 흔들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강력한 나라를 만들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자고 했습니다. 인정해주는 언어, 칭찬해주는 언어, 격려해주는 언어, 친절한 언어, 겸손한 언어를 배워서 실천하면 그것을 통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하신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어졌던 계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이란 전에 없던 계명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문제들에 발목이 잡혀서 해가 새롭게 떴는데도 새롭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더라도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말입니다. “One-way Street”가 아니라 “Two-way Street”입니다. 주고받는 것입니다. 한 쪽은 주기만 하고 한 쪽은 받기만 한다면 얼마 안 가서 주는 쪽이 지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 후에 어느 남자분이 울상이 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결혼생활 20년 동안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가 받아주질 않습니다. 이제 지쳤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노력을 했고 많이 참기도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라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때로 내가 방황하고 문제를 일으켜도 하나님의 사랑은 지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한번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도 나를 칭찬해줘야 됩니다. 한 쪽만 일방적으로 칭찬하고 상대방은 비판만 한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사랑을 느낍니까? 무엇보다도 나를 가치 있는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고 존중해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대개 처음에는 어떤 문제를 놓고 다투지만 나중에는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싸웁니다. “왜 날 무시해?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해? 후배가 선배에게 반말이네.” 존댓말로 시작했지만 누군가가 무시하는 투로 말하기 시작하면 원래 문제는 뒷전으로 가고 말 표현 때문에 싸웁니다. 사람은 무시당할 때 제일 억울하고 속상하지요.
어떤 처녀에게 어떤 종류의 남자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남자요.” 그 말은 맞았으나 저 여자는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약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그 때 생각한 것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재산, 시간과 노력을 다 바쳐 사랑해서 그의 소중함을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줄 사람을 만나야지,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한 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 가운데 “미안해요”는 간단하지만 아주 도움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이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서푼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이 말을 못합니다. 대부분의 문제가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는 기 싸움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안하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웬 젊은이가 저를 툭 치면서 탔습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눈치도 없어요. 내가 타는데 왜 막느냐는 식이지요.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서로가 좋지 않습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상대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사표시입니다.
“고마워요.” 이것도 사랑의 언어입니다. 큰 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짧은 단어를 그렇게 아껴서 언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년에 한두 번만 말고 많이 쓰십시오.
“사랑해요.” 역시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배우십시다. 훈련을 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사랑이 좋은 줄 알면서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연습하고 훈련해서 습관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얼마 전 목사님들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강의를 마친 후 질문시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니, 김목사님은 매일 웃으시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저는 얼굴이 굳어서 잘 안 됩니다.” 저는 제 얼굴을 못 보니 제가 웃는지 잘 모릅니다. 의식하며 일부러 웃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저더러 웃는다고 하는군요. 한 번은 TV에 나오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진짜 조금 웃기는 웃더군요. 아마 연습 탓이겠지요. 매일 하던 것이 저절로 몸에 익은 것이지, ‘이제 웃어야지’ 하고 웃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삶을 즐겁게 살려 하고, 사물을 아름답게 보려 하고, 사람을 사랑하려 하면 됩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참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라가’란 바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바보’보다 험한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을 멸시천대하고 짓밟는 단어가 수없이 많지만 비교적 경미한 ‘바보’라는 말만 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 천하보다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최소한 서너 명이 있으니 여러분은 부자입니다. 그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은 좋은 감정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큰 글씨 몇 자와 내용으로 볼 때 다른 교회에 나가시는 연세 드신 할머니이신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TV를 보니 목사님이 나왔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힘이 납니다. 너무 좋아요. 그런데 목사님 인물이 잘 났데요.” 저는 제 인물이 잘 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감정이 들게 하는 말과 행동이 사랑입니다.
어느 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하십니다. 딸도 마찬가지로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가 딸을 사랑해주기 때문입니다. 딸이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딸에게 계속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에 엄마만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들딸이 그렇게 말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심어주었던 부모가 같이 살자고 한다면 아마 싫어할 것입니다. 안된다는 말은 못하고 돌아서서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이걸 어떡하나?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걱정할 것입니다. 결혼 후에까지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계속 심어줄 부모를 어느 자식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준 부모와 어떤 자식이 같이 살고 싶겠습니까? 자녀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해주고 좋은 감정을 일으켜준 부모라면 혼자 살겠다고 해도 자녀들이 같이 살자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멀리 떨어진 한 호텔에서 휴일을 보내면서 어느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휴일이면 시댁과 처가를 번갈아 방문하며 지냈는데, 이번에는 시댁에 갈 차례이나 부부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곳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이 젊은 부부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부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재미없어서 자주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었더라면 자녀들이 그럴까요? 부모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또한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멸시하고 가치를 떨어뜨리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태도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것이 나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영원한 보편적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소중하게 여기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경시하면 경시를 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과 행동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각각 75세와 70세 정도 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를 섬기며 사셨는데 할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을 할아버지 앞에서 저에게 털어놓으셨어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제게 폭로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그러신 모양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겨우 허기를 면하려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 풍성한데, 이제 그만 아버지 집에 돌아가자.” 한편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식을 날마다 기다립니다. 저는 그 아들이 왜 집에 돌아왔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단지 배가 고파서 돌아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소중히 여겨주었고, 실수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반을 떼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며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 아들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먹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문 앞에서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자식에게 느낌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 것을 텔레파시라고 하지요. 사람은 참 정확합니다. 여러분도 느끼겠지만 저는 하나님과 사람이 전공이니까 이 점을 잘 압니다. 누군가를 내 마음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면 그도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만난 적이 없어도,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정확하게 압니다. 말을 좋게 해도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즉시 알아챕니다.
탕자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해준 아버지의 이미지가 남아있었습니다. 평생 그 집에서 자랐으니 아버지의 모습을 알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감정을 많이 이입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한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너는 왜 형보다 못 하냐? 왜 속만 썩이느냐? 이 아무짝에도 못쓸 자식아. 너 같은 놈은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그 아들은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말 안 듣고 나가더니 꼴좋구나.” 이런 말을 들으러 오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봐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는 용기가 있어. 네가 네 인생을 구축해보려고 집을 나갔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젊은이라면 그런 것도 해봐야지.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야. 참 잘 돌아왔다.”
사랑은 또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이시고 선생님이신 소중한 분이 자기를 낮추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때 제자들이 사랑을 느꼈습니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높여주신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12:10) 했습니다. 존경이란 상대방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떡 먹으러 올 때에 서로 기다려주라”(고전12:25)고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찬 때 작은 떡과 잔을 상징적으로 받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저녁을 정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를 믿어 미숙했기 때문에 식사 때 먼저 가서 욕심을 내며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배려하고 앞세워주라고 하십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아내가 타면 문을 닫은 후에 운전석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내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열어주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외투를 벗겨주기도 하더군요. 처음엔 그런 것들이 참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문화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사실 남자가 노력을 많이 해야겠지요. 부부가 걸을 때도 미국 사람들은 꼭 보조를 맞춰 같이 걸어갑니다. 저도 제 아내와 같이 걸어가 보려 했는데 힘들더군요. 아내보다 제가 발이 기니까 자연히 앞서서 가게 되지요. 같이 가려면 제가 속도를 늦춰야 됩니다. 답답하지요. 하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다리가 짧으니 어쩔 수 없이 다리가 긴 쪽에서 배려를 해줘야 됩니다.
지난주에 어느 부인이 제게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예전에 남편과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길을 대여섯 번 건너는 동안 한 번도 아내를 돌아보지 않고 혼자 먼저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도착해보니 먼저 온 남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분인데 아직도 그 일이 한이 맺혀서 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 어두운 감정을 넣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칭찬해주고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절). 예수 잘 믿는 것은 찬송 잘 하는 것으로도, 성경 1백독 한 것으로도, 한 달 동안 금식기도 한 것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감정을 넣어주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최근 3천 명 정도의 주한미군이 철수해서 이라크로 간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국방력은 사실은 강력한 가정들입니다. 탄탄하게 서 있는 가정들보다 더 강력한 국방력은 없습니다. 가정이 불행하고 흔들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강력한 나라를 만들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자고 했습니다. 인정해주는 언어, 칭찬해주는 언어, 격려해주는 언어, 친절한 언어, 겸손한 언어를 배워서 실천하면 그것을 통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하신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어졌던 계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이란 전에 없던 계명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문제들에 발목이 잡혀서 해가 새롭게 떴는데도 새롭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더라도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말입니다. “One-way Street”가 아니라 “Two-way Street”입니다. 주고받는 것입니다. 한 쪽은 주기만 하고 한 쪽은 받기만 한다면 얼마 안 가서 주는 쪽이 지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 후에 어느 남자분이 울상이 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결혼생활 20년 동안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가 받아주질 않습니다. 이제 지쳤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노력을 했고 많이 참기도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라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때로 내가 방황하고 문제를 일으켜도 하나님의 사랑은 지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한번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도 나를 칭찬해줘야 됩니다. 한 쪽만 일방적으로 칭찬하고 상대방은 비판만 한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사랑을 느낍니까? 무엇보다도 나를 가치 있는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고 존중해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대개 처음에는 어떤 문제를 놓고 다투지만 나중에는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싸웁니다. “왜 날 무시해?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해? 후배가 선배에게 반말이네.” 존댓말로 시작했지만 누군가가 무시하는 투로 말하기 시작하면 원래 문제는 뒷전으로 가고 말 표현 때문에 싸웁니다. 사람은 무시당할 때 제일 억울하고 속상하지요.
어떤 처녀에게 어떤 종류의 남자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남자요.” 그 말은 맞았으나 저 여자는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약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그 때 생각한 것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재산, 시간과 노력을 다 바쳐 사랑해서 그의 소중함을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줄 사람을 만나야지,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한 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 가운데 “미안해요”는 간단하지만 아주 도움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이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서푼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이 말을 못합니다. 대부분의 문제가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는 기 싸움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안하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웬 젊은이가 저를 툭 치면서 탔습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눈치도 없어요. 내가 타는데 왜 막느냐는 식이지요.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서로가 좋지 않습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상대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사표시입니다.
“고마워요.” 이것도 사랑의 언어입니다. 큰 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짧은 단어를 그렇게 아껴서 언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년에 한두 번만 말고 많이 쓰십시오.
“사랑해요.” 역시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배우십시다. 훈련을 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사랑이 좋은 줄 알면서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연습하고 훈련해서 습관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얼마 전 목사님들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강의를 마친 후 질문시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니, 김목사님은 매일 웃으시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저는 얼굴이 굳어서 잘 안 됩니다.” 저는 제 얼굴을 못 보니 제가 웃는지 잘 모릅니다. 의식하며 일부러 웃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저더러 웃는다고 하는군요. 한 번은 TV에 나오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진짜 조금 웃기는 웃더군요. 아마 연습 탓이겠지요. 매일 하던 것이 저절로 몸에 익은 것이지, ‘이제 웃어야지’ 하고 웃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삶을 즐겁게 살려 하고, 사물을 아름답게 보려 하고, 사람을 사랑하려 하면 됩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참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라가’란 바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바보’보다 험한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을 멸시천대하고 짓밟는 단어가 수없이 많지만 비교적 경미한 ‘바보’라는 말만 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 천하보다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최소한 서너 명이 있으니 여러분은 부자입니다. 그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은 좋은 감정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큰 글씨 몇 자와 내용으로 볼 때 다른 교회에 나가시는 연세 드신 할머니이신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TV를 보니 목사님이 나왔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힘이 납니다. 너무 좋아요. 그런데 목사님 인물이 잘 났데요.” 저는 제 인물이 잘 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감정이 들게 하는 말과 행동이 사랑입니다.
어느 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하십니다. 딸도 마찬가지로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가 딸을 사랑해주기 때문입니다. 딸이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딸에게 계속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에 엄마만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들딸이 그렇게 말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심어주었던 부모가 같이 살자고 한다면 아마 싫어할 것입니다. 안된다는 말은 못하고 돌아서서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이걸 어떡하나?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걱정할 것입니다. 결혼 후에까지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계속 심어줄 부모를 어느 자식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준 부모와 어떤 자식이 같이 살고 싶겠습니까? 자녀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해주고 좋은 감정을 일으켜준 부모라면 혼자 살겠다고 해도 자녀들이 같이 살자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멀리 떨어진 한 호텔에서 휴일을 보내면서 어느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휴일이면 시댁과 처가를 번갈아 방문하며 지냈는데, 이번에는 시댁에 갈 차례이나 부부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곳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이 젊은 부부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부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재미없어서 자주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었더라면 자녀들이 그럴까요? 부모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또한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멸시하고 가치를 떨어뜨리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태도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것이 나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영원한 보편적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소중하게 여기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경시하면 경시를 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과 행동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각각 75세와 70세 정도 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를 섬기며 사셨는데 할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을 할아버지 앞에서 저에게 털어놓으셨어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제게 폭로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그러신 모양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겨우 허기를 면하려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 풍성한데, 이제 그만 아버지 집에 돌아가자.” 한편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식을 날마다 기다립니다. 저는 그 아들이 왜 집에 돌아왔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단지 배가 고파서 돌아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소중히 여겨주었고, 실수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반을 떼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며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 아들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먹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문 앞에서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자식에게 느낌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 것을 텔레파시라고 하지요. 사람은 참 정확합니다. 여러분도 느끼겠지만 저는 하나님과 사람이 전공이니까 이 점을 잘 압니다. 누군가를 내 마음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면 그도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만난 적이 없어도,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정확하게 압니다. 말을 좋게 해도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즉시 알아챕니다.
탕자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해준 아버지의 이미지가 남아있었습니다. 평생 그 집에서 자랐으니 아버지의 모습을 알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감정을 많이 이입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한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너는 왜 형보다 못 하냐? 왜 속만 썩이느냐? 이 아무짝에도 못쓸 자식아. 너 같은 놈은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그 아들은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말 안 듣고 나가더니 꼴좋구나.” 이런 말을 들으러 오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봐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는 용기가 있어. 네가 네 인생을 구축해보려고 집을 나갔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젊은이라면 그런 것도 해봐야지.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야. 참 잘 돌아왔다.”
사랑은 또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이시고 선생님이신 소중한 분이 자기를 낮추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때 제자들이 사랑을 느꼈습니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높여주신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12:10) 했습니다. 존경이란 상대방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떡 먹으러 올 때에 서로 기다려주라”(고전12:25)고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찬 때 작은 떡과 잔을 상징적으로 받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저녁을 정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를 믿어 미숙했기 때문에 식사 때 먼저 가서 욕심을 내며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배려하고 앞세워주라고 하십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아내가 타면 문을 닫은 후에 운전석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내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열어주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외투를 벗겨주기도 하더군요. 처음엔 그런 것들이 참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문화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사실 남자가 노력을 많이 해야겠지요. 부부가 걸을 때도 미국 사람들은 꼭 보조를 맞춰 같이 걸어갑니다. 저도 제 아내와 같이 걸어가 보려 했는데 힘들더군요. 아내보다 제가 발이 기니까 자연히 앞서서 가게 되지요. 같이 가려면 제가 속도를 늦춰야 됩니다. 답답하지요. 하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다리가 짧으니 어쩔 수 없이 다리가 긴 쪽에서 배려를 해줘야 됩니다.
지난주에 어느 부인이 제게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예전에 남편과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길을 대여섯 번 건너는 동안 한 번도 아내를 돌아보지 않고 혼자 먼저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도착해보니 먼저 온 남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분인데 아직도 그 일이 한이 맺혀서 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 어두운 감정을 넣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칭찬해주고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절). 예수 잘 믿는 것은 찬송 잘 하는 것으로도, 성경 1백독 한 것으로도, 한 달 동안 금식기도 한 것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감정을 넣어주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날마다 나타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 엄기호 목사
성경에는 여러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십계명이요, 또 그 십계명을 하나로 축소하면 사랑이란 새 계명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완성시키심으로 모든 계명을 다 지키신 분이 되셨습니다.
삼위(三位)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사랑이요(요 3:16), 성령을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이고(롬 5:5), 죄인을 위해 아들을 죽이시는 사랑이며(롬 5:8), 무궁하신 사랑(렘 31:3)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몸을 버리시는 사랑이요(갈 2:20), 넘치도록 풍성한 사랑이고(딛 1:4), 성도를 강권하는 사랑이며(고후 5:14), 정죄하지 않는 사랑(요 8:11)이십니다. 성령님의 사랑은 연약함을 도우시는 사랑이고(롬 15:30), 성도를 위로하시는 사랑이요, 성도에게 진리를 증거해 주는 사랑이며(요 15:26), 세상 끝 날까지 성도와 함께 해주는 사랑(마 28:19)이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세계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우리 가정에는 사랑에 이상이 없는가', 또한 '우리 교회에는 사랑에 이상이 없는가' 늘 재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사랑이란 무엇이고 또한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젖꼭지를 빨며 자라난 어린아이는 성격이 유해지고 다정해지기 쉽지만, 우유를 먹으면서 젖꼭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어린아이는 자칫 성격이 비뚤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요사이 계속 증가되는 청소년 문제는 부모의 애정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인데도 문제아가 되는 경우의 대부분이 부모의 애정결핍이 아니면,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교회학교 선생님의 사랑이 부족한 데 있습니다. 내 자식 성적만 좋으면 다른 사람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성적중심의 잘못된 자식사랑, 친구들 사이의 왕따 현상과 폭력문제, 학교에서의 공교육 기능마비 등이 우리의 아이들을 범죄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 5일, 광주 계림동 K아파트에서는 인터넷 엽기사이트와 패륜게임을 탐닉하던 중학생 양모 군(14)이 "살인을 하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서,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11)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하였고, 작년 3월14일, 최모 군(14살)이 여중생 3명이 웃고 얘기하는 것을 보고, 이 중 1명을 쫓아가 흉기로 살해를 했는데, 이 소년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매질을 당해온 가정폭력 피해자였다고 합니다. "자기 가족은 아버지 때문에 불행한 데 '왜 저 애들은 행복하냐'는 질투심에서 범행했다"라는 것이 그의 변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청소년의 범죄가 크게 증가하면서 그 연령층도 낮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수법 또한 더 흉폭해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발생한 전체 강도범죄의 48.2%가 청소년들에 의한 범죄였다 하는데, 더 충격적인 것은 범행의 주동기가 용돈 및 유흥비 마련이나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애정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이혼율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는 문제도 다 애정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생활이 가난하여도 사랑하면 행복하고, 부부간에 어느 한 쪽이 병들어도 사랑하면 정성껏 간호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어느 곳에서도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사회도, 이웃도, 가정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적은 믿음을 가지고도 천국가는 데는 족합니다.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도 낙원에 갔습니다(눅 23:43).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봉사가 힘들고 예배드릴 때 권태를 느끼며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까워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라고 했습니다. 실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노인들이 나와서 보여주는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프로그램에 일흔 살과 여든이 되신 노인 내외분이 함께 나왔습니다. 진행자가 그 노부부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한평생을 같이 살아온 그런 관계를 뭐라고 합니까? 사실 답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큰소리로 "웬수!"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청객은 방송국이 떠나라 웃었고, 할아버지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습니다. 안타까워하던 진행자가 다시 질문을 합니다. "할머니, 넉 자로 말하세요, 넉 자로." 그러니까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평생웬수!"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을 원수와 더불어 산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반역하였고,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과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들은 그래서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목이라는 말은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성경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롬 5:10)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가능한 일인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영원하다
세상에는 타락하게 하는 사랑이 있고 나약하게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슬픔을 주는 사랑도 있고 가슴을 저미게 하는 사랑도 있고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보호하는 사랑, 주는 사랑, 살리는 사랑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희생하고 봉사하게 하는 사랑이고, 방황하는 자를 지혜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는 사랑, 죄인을 깨끗케 하는 사랑, 죄의 노예된 것에서 해방하는 사랑, 거룩하게 하는 사랑, 죄에서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모두 받았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고, 용납이며 친절이고 용서입니다. 사랑은 정열이고, 관심이며 겸손입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힘입니다. 사랑은 정의입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복이고,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 헌신적인 사랑, 활동적인 사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느끼는 것, 존중히 여기는 것, 이해하는 것,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 그러나 언젠가는 후하게 받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어도 사랑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사람은 남에게 줄 수 없으리만큼 사랑이 없는 자도 없고, 남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풍부한 자도 없다. 사랑은 줄수록 생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두시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가지고 가서 나눠주고,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가서 품어주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힘닿는 데까지 도와줍시다. 따뜻한 마음을 서로 나누며 서로 사랑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은 명령이다
요 13:34-35 / 이정익 목사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선물은 친히 몸을 상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적극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생각하면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정신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신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이 주신 대표적인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고 표준이고 기준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랑의 샘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샘물처럼 사랑이 솟아났고 울어났고 표현되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요 12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것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에 와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요한복음 17장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유명한 고별설교를 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고별설교 내용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이 말씀은 고난주간 목요일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요일 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때 심정은 참으로 비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 말씀은 유언이라고 보아도 좋은 말씀입니다. 유언은 참 중요한 뜻을 지니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경의 말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뜻을 지니는 그런 말씀이라고 보아도 좋은 말씀입니다. 그 마지막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냥 교훈용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이 사랑하는 일을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마지막 명령으로 주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일까를 깊이 음미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에 큰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좋은 정신
성경에서 가장 많이 말씀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다함이 없는 정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정신이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새 계명이 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모습은 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성적인 사랑도 좋습니다. 젊은 청춘이 짝을 만나 사랑을 나눕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좋은 모습입니까. 그렇게 사랑하다가 결혼을 합니다. 그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자식 사랑도 좋은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부모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또 자식의 부모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할수록 좋습니다. 이웃사랑은 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랑이 가장 좋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랑은 그 사랑하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전염됩니다. 사랑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랑의 모습이 있는 곳에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주변으로 전염되고 파급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은 매년 인근 대학과 농구시합을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농구시합을 하는데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 들었습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관중석 한쪽에서 하얀 스크린 천이 펴지면서 큰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Susan, will you marry me"(수잔, 나와 결혼해줘요). 어느 남학생이 여자 친구에게 공개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신청한 것입니다. 그 순간 장내는 고요해졌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Say yes” (예라고 대답하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관중 모두가 함성을 질렀습니다. “예라고 대답하세요, 예라고 대답하세요.” 그때 관중석에서 어느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yes I will"(예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이것은 연극이 아니고 연출한 것도 아니고 실제상황입니다. 그러니 그때 상황이 얼마나 극적이었겠습니까. 가장 극적인 것은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그때 모든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서로 옆 사람끼리 포옹하고 키스하고 환호하고 야단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랑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발견한 정신가운데 이 사랑을 능가하는 정신이 없습니다. 사랑이 가장 좋은 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유언으로 당부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모습이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정신입니다. 극복하게 하는 정신입니다. 포용하게 하는 정신입니다. 모든 문제를 풀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 교훈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 땅의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호젓한 곳에서 남녀가 속삭이는 그런 사랑도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우애 있게 살아가는 모습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밤에 아이가 울면 몇 번이고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는 어머니의 마음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침몰해 가는 배안에서 사람은 많고 구명조끼는 몇 개 안 될 때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에서도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우리들이 죄인이었을 때 주저 없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사랑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사랑이 최고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섬김
우리 주변 어디를 보아도 나의 환경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입장과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상처 입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갈등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거운 어려운 짐을 지고 있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우면 때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잘 일어설 수 있도록 주위에서 섬기는 모습이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섬김이고 행동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모두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회복되고 인격적으로 승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그렇게 불행한 사람들을 두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왜 이 시대 나를 부르셨고 직분을 주셨고 그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 불행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고 또 하나님이 나를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시고 나를 일찍 부르셨고 나에게 직분을 주신 것을 그들을 섬겨서 일어나도록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손길이나 배려나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셨고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신 이유는 그렇게 누군가를 세우고 일어나게 하는데 사용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세움이 바로 나의 세움이 되고 나의 영적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섬겨 보십시오. 우리 주변을 보면 내가 섬겨야 할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먼저 아내를 섬겨 보십시오. 그리고 남편을 섬겨 보십시오. 또 이웃도 섬겨보십시오. 교우들을 섬겨보십시오. 그러면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느끼고 있던 것 보다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틀리고 관계가 달라지고 느낌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섬기면 체면도 자존심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섬기다 보면 진정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이웃으로 옮겨지고 전염되어 세상으로 펴져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삶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삶을 유언으로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섬기는 마음은 더 아름답습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 나도 감동하고 너에게도 감동이 주어지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이 주어집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서부 개척 당시 영국 청교도로 미국 필라델피아 보스턴에 어느 부부가 도착합니다. 이 부부는 참 사랑이 지극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서로 선물을 사기 위해서 각각 백화점엘 갑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선물을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가서 무엇을 살까 생각하다가 아내의 빗과 작은 거울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은 손목시계를 팔아 그 돈으로 아내 선물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가 남편의 시계 줄이 다 닳아서 낡은 것을 알고 남편의 시계 줄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내에게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좋은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남편의 시계 줄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각각 준비한 선물을 내어 놓는데 남편은 시계를 팔고 아내는 머리를 잘라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이 부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상상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 정도면 가난해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이면 섬김의 극치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 사랑이 최고이고 섬김이 최고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침내 부부사랑의 개인적인 차원을 훨씬 넘게 만듭니다. 이 사랑의 힘은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으로 발전하게 하고 이 사랑은 또 마침내 인류 사랑의 정신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에 감동이 있고 행복이 있고 변화가 있고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비장한 시간에 마지막으로 이 사랑을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얼마나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엊그제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까 부부가 함께 살면 얼굴이 닮아지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부부가 오랜 세월동안 같이 살게 되면 감정이 같아지고 같이 웃고 똑같은 환경이 주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름살이 같아지고 표정이 같아진다고 했습니다. 또 이런 부부는 살아가다가 배우자가 크게 아프게 되면 같이 아파지는 경향이 있고 한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얼마 못가서 또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부부로 오래 살았으면서도 서로 닮지 않은 부부가 있으면 뭔가 생각 좀 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이 많으면 뭘 합니까. 오늘 돈 많은 부부들은 이런 감정이 없습니다. 이런 섬김도 없습니다. 이런 행복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집집마다 갈등이 가득하고 원망이 가득하고 불화가 가득한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뭘 합니까. 집이 좋으면 뭘 합니까. 신앙생활 오래했으면 뭘 합니까.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이 행복의 원천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은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뭐냐 하면 사랑은 섬김입니다.
가장 높은 기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에는 아주 신비한 힘이 들어있습니다. 사랑 속에는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언으로 이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언도 차원이 있습니다. 보통 부모들이 주시는 유언은 잘 살라는 유언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유언을 보통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유언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내가 죽거든 조상의 묘에 묻으라고 유언했습니다. 요셉도 조상의 묘에 묻으라고 유언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를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꼭 지키라고 유언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무슨 유언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기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은 참으로 높은 뜻을 지닌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지극히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높은 뜻을 지닌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시도도 해 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부끼리도 원만하게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형제들끼리도 교우들끼리도 원만하게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웃을 조건 없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지니고 있는 수준이고 한계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그냥 한번 사랑하라고 말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삶에 모든 것의 해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안에 모든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안에 모든 삶의 이유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까지는 이 섬김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사순절이 끝날 때쯤이면 여러분의 모습이, 삶이, 관계들이 뭔가 변화가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복음이 여러분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