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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 다만 알지 못하는 줄만(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견성이니라.」
이 게송은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선사의 <수심결(修心訣)>에 나오는 말이다.
보조국사는 한국 조계종의 개조로서, 불자의 수행법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했다.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ㆍ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등 다수가 있다.
윗글에서 ‘회(會)’는 일반적으로는 모임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이해하다, 깨닫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구회(求會)’는 깨달음을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회부득(會不得)’은 불회(不會)나 같은 뜻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단지불회(但知不會)’는 약욕구회(若欲求會)를 이어받은 말이다. 원래 이 게송은 아래와 같은 문장이다.
「약욕구회(若欲求會) 경회부득(便會不得)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 만일 깨달음을 (밖에서)구하고자 하면 바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다만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고자 하면) 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다만 깨달음을 (밖에서)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하는 말은 “(진심으로)다만 깨닫지 못할 것을 알면…” 등으로 ‘스스로의 부족함, 스스로의 한계를 (진정으로)알면 …’, 그리고 ‘그것을 자각(自覺)하게 되면’ 그런 말이다.
그리고 ‘단지불회(但知不會)’는 보조국사의 견성(見性)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다.
현재 일어나는 그 마음, 또는 지금 찾고 있는 바로 그 생각, 곧 현전일념(現前一念)을 떠나서는 자성(自性)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다만 지금 당장 일어나는 한 생각 밖에서는 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했는데, 깨달음을 밖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현전일념을 좇아서 자성을 철견(徹見)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단지불회(但知不會)’라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관련이 있다. ‘단지불회’는 “단지 알지 못함을 알라”는 말이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는 ‘모른다’는 것이 진리의 문에 들어서는 길이다.
중국 남송(南宋)의 양 무제(梁武帝)가 화가 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달마(達磨) 대사는 ‘모른다’고 했다. 그 게 정답이었을까?
아침에 화장하고 나온 내 얼굴이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다. 화장을 해서가 아니라 얼굴도 몸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 변하고, 마음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흔히 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며 맹세하기를 ‘마음이 변치 않기’를 언약한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적인 약속일 뿐,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다.
변치 않는 마음은 없다. 그러니 어느 것이 ‘나’며, 어느 것이 ‘나의 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누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떤 이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답이 없다.
사람마다 답이 다르니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때도 “모릅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의심이 ‘의단(疑團)’이 되도록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오직 ‘모른다’가 진리에 들어 갈 수 있는 문이고 일체의 앎이 끊어진 자리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란 것이다.
그리고 범부들이 안다는 것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그러나 성현의 문에 들어가는 이 견성에는 대상이 없다.
그래서 보조국사는 말했다.
「중생들이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한다. 자기 성품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지혜가 진짜 부처인 줄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번뇌 없는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이것을 돈오(頓悟)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수심결>에는 보조국사의 뛰어난 사상인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등장한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과 그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수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틀은 ‘깨달음과 닦음’이다.
올바른 수도(修道)는 먼저 마음의 바탕을 분명히 깨치고 나서, 그 깨침에 의지해 점점 닦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돈오(頓悟)’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면 한번 깨쳤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닦음이 또 필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 <수심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습기(習氣)는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空)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는 이것을 점수(漸修)라 한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참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따라서 꾸준한 노력을 하는 이에게 반드시 응분의 결과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점수(漸修)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엔 많은 지식인들이 있다. 유물론자나 유심론자나, 자연주의자나 합리주의자나, 철학자나 종교인이나 과학자나 다 그들은 아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조국사가 말하기를,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 다만 알지 못할 줄만 알면 이 곧 견성이다.” 이렇게 말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알지 못할 줄 알아야 하는가?
그 알지 못할 줄 아는 말 한 마디를 일러 보라는 것이다.
경전에 “석가모니도 알지 못했거니 어찌 가섭에게 전할 수 있으랴[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라고 했는데, 그러면 부처님도 무엇을 알지 못했다는 말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신 분인데 무엇을 모른다고 하시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이 법문은 어렵다 쉽다는 두 가지 명사를 다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아니요, 쉬운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 철학, 자연, 비자연, 각 종교에도 다 안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마음인가, 법인가, 성품인가?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한 마디 일러 보라.
시방 세계,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다 이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한 마디 속에 포함돼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내게 그것을 묻는다면 그것은 파설(破說)하지 못하는 법이라, 그 뜻과 꼭 같은 비유로 나는 답하리라. “단단부지단(團團不知團), 곧 둥글고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 혜암 선사
※파설(破說)---진실 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르칠 수 있는 이단적 논쟁을 말함. 자기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에 자기가 설하는 바에 잘못이 있어서 부처님 뜻에 일치되지 않고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그것은 파설(破說)이다.
또한 파설(破說)이란 선문(禪門)에 있어 그 도리를 교문으로 깨트려 일러줌(破說:死句)으로써 참학인의 화두참구 공부에 알음알이를 키워주게 돼 공부에 장애를 주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옳은 설명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지 못할 줄을 알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혜암 선사는 둥글고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도 이해가 잘 안 되니 화두로 삼아서 꾸준히 참구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허긴 우주생명의 모든 앎을 합쳐도 그건 모름의 대 허공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할 것이다. 앎이 모름을 인정하고 모름이 앎을 끌어안으니 바로 여기에 광명의 빛이 깃드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다. 이 말은, 나는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데, 그대는 왜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가와 같은 내용의 뜻이다. 다만 모른다는 것만 똑똑히 알면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은바 연기법을 바르게 알고 또 항상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고 행한 대로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참구하면 쉽게 그 참 뜻이 밝아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아는 것 다르고, 행하는 것 다르니,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龍樹)보살이 연기법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해서 <중론(中論)>이라는 책을 썼고 중도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공(空)’으로 시작해 ‘공’에서 끝을 맺으니,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연기와 중도 실천 간의 논리적인 전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중도란 양변을 여읜 자리를 뜻한다. 참으로 가운데, 곧 중도(中道)를 알려면 중도도 버리고 변견(邊見)도 다 버려야 한다. 만약 변견을 버리고 중도를 취한다고 하면 이것은 새로운 변견이 된다. 우리가 중도를 알려고 하면 중도도 버리고 변견도 버려서 실제로 참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해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중도만 주장하고 변견을 배격한다면 중도병(中道病)에 걸려서 ‘진실의 중도’는 영원히 모르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들께서도 중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양변을 여읜 데서 하시는 말씀이지 중도와 변견을 다시 상대로 두고 하신 말씀은 결코 아니다. - <돈오입도요문론> 발췌
중도를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실천의 측면에서 강조할 때, 연기의 깨달음이 어떻게 중도의 실천으로 이어질까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잡다한 지식만을 쌓아서는 세상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부처님처럼 성불을 하겠다고, 혹은 도를 깨우치겠다고 산사나 사원, 암자 안에 들어앉아 있으나 사실은 진리는 그런 곳에 있지 않다. 속세 어디에도 진리의 세계가 존재하며, 바로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런 사실도 모르면서 깨달음을 구하려 하니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 한 것이다.
아래 나오는 내용들이 ‘수심결’로 들어가는 시작이고 중요한 대목들이다.
“온 세상이 불타는 집과 같은데, 그대로 참고 머무르면서, 그 기나긴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부처'를 찾는 길이 최고이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부처란 바로 이 마음일 뿐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참으로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흐려진지가 너무 오래돼 자신의 마음이 부처인줄 모르고, 자신의 본성이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를 구하며 여러 성인들의 말만 받들 뿐, 부처를 찾고자 하며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들여다보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본성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가벼운 지식에 집착해 '부처의 길'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온갖 고행이나 수행을 통해 닦음을 한다고 해도, 이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같아서, 단지 스스로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단지 자신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황하사처럼 많은 가르침과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뜻을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해 보니 모두 다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진리를 닦는 사람들이여, 절대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으며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단지 허망한 인연을 떠나가면 곧 항상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단계를 밟지 않고 곧장 부처의 경지에 오르고, 걸음걸이 모두 삼계를 초월하며, 고향집에 돌아가 단박에 의심을 끊는 경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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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전강선사 No.008)—‘단지불회(但知不會)면 시즉견성(是卽見性)이다’ 혜월 스님께서 거기서 견성을 했어 | 경허 큰스님이 묻기를 “관세음보살님이 북으로 향한 의지가 여하냐?” 대답 탁! 허니까 거기에 “염득분명(拈得分明)이여 등등상속(燈燈相續)이니라” 인가(印可)를 했어.
무애(無礙)라는 것은 '법체(法體)에 걸림이 없다'는 말. 계행(戒行) 지킬 걸 꼭 지켜야 그것이 곧 자체가 무애(無碍) | 혜월 스님, 짚신을 삼으며 보림(保任).
*염득분명-잡을 염, 얻을 득. 잡아얻음이 분명하다.
*등등상속-깨달음의 법맥이 이어진다는 말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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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번갯불 같다며/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노자께서 말했다./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나는 너무 덤볐고/시끄러웠다.”
천상병 시인의 `불혹의 추석'이라는 시 앞부분이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바 있으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자신의 시 제목처럼 1993년 귀천(歸天)했다.
천상병 시인이 40세가 되던 해 가을 `불혹의 추석'이란 시에서 언급한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하다'는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 `知者不言(지자불언) 言者不知(언자부지)'를 인용한 것으로,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자불언 언자부지'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開口卽錯(개구즉착), 즉 입만 열면 어긋난다는 선가(禪家)의 가르침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수심결'을 저술한 고려 중기의 보조 국사가 설파한 `但知不會(단지불회) 是卽見性(시즉견성)', 즉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 것이 견성'이라는 가르침 및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종종 말했으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아는 것 자체가 진실한 앎을 얻는 근원'이라고 강조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와도 그 근본적 의미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노자 도덕경의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을, 입을 열면 어긋난다거나 알지 못할 줄 아는 무지의 지가 의미하는 바처럼,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주객(主客)이 일체(一體)된 형이상학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극한 시킬 필요는 없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단순 명료한 가르침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천상병 시인이 나이 40이 되던 해 추석에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해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고 고백한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피부에 닿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아는 자는 무엇을 알고 있기에 말이 없는 것이고, 말하는 자는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말을 한 것인가? 조금만 궁리하면 `지자불언 언자부지'의 형이하학적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이 없는 자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고, 말하는 자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너무 덤비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지자불언 언자부지'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겉만 그럴듯한 번지르르한 말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 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말하지 않는 것이 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이다.
단 한 순간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꾸며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을 모르는지 잘 알아서, 모르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것이 성공적 삶을 담보해 내는 지름길이다. 이 같은 까닭에 공자님은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역설하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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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知不會(단지불회) 시즉견성, H+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견성(깨달음-부처의 경지)이다”
H+ 수소이온 ; 수소원자에서 전자가 빠진 상태 = 즉 양성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명제 의 ‘생각’= 자아= 존재
물리학으로 생각이란? <원자들의 배열 패턴> 이다
바야흐로 <인공 지능 A I >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공지능을 수학으로 표현하면 삼각함수 Cos 코사인 세타 이고,
인간의 생각을 수학으로 표현하면? 사인 코사인 탄젠트 각도 값 이겠지만
생각이란 한마디로 [기울기] = 방향 이다
오직 점 하나 찍히는 순간, 우주는 태동하고 그 한 점에서 어디를 바라보기 시작하는가?
그리고 그 바라다본 방향에서 또 어디를 향해 관점이 움직이는가?
최초 바라다 본 방향(가)에서 새로운 방향(나)으로의 이동 기울기
.... (가) 에서 마이너스 (나) = 벌어진 원운동 각도 = 생각 이다
다시 수소원자(전자하나 양성자하나)로 돌아와서,
양성자의 배열 – 또 다른 양성자의 배열 = 그 사이 간극 에 확률분포된 전자 = 생각
https://youtu.be/Xxwb_Fhimi4?si=yM0H334GTGYC2LkN
“기억용량은 무한대이다” 배열의 패턴(the pattern of arrangement)= 생각, 어렴풋이 이해된다
인지(認知) , 메타인지
무한대의 간극에 내적 경로(원자들의 배열 패턴)가 생기는 것이 인지 작용이고
그 패턴들이 뇌의 배외측 전두엽으로 몰려들면 뇌에 <목표의식> 이 생긴다
자각, 지각, 의식, 느낌, 생각, 마음, 정신, 감정, 감각, 정서, 충동
......한글(또는 한자어, 일본식 번역어) 도 뇌의 활동에 대한 언어가 이렇게 많은데
영어 원전, 뇌과학 분야의 영어 전문용어를 나열하면 용어만 해도 한 페이지가 된다
감각에 의한 충동 - 인간이 아닌 동물도 공유하고 있는 뇌 작용이지만
생각이란?
두 회로(궤적) 사이의 소통 이므로 [뇌 세포들 사이의 대화] 라 정의하면 조금은 수긍이 간다.
감정이나 느낌이 민주 1.0 버전이라면, 생각은 민주 2.0 쌍방향 소통이다
감정이나 느낌을 포함한 뇌의 정신작용이 100 이라면, 그 중 일부(대략 5%)가 생각이다
통계학에서 95% 신뢰도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인간의 뇌 활동의 95% 가 [생각 없는] 활동이다 ”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해 보면 생각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생각이 아니다
불교 선종에서 일컫는 단지불회 시즉견성(是卽見性) 역시
의식과 깨달음 생각의 경계를 허문 경지를 일컫는 사자성어이다
정확하게 아는데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상황,
생각=언어 등식에서 깨달았다 함은 알아 채린 상태인데
인류의 어떤 단어, 언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상태 – 불립문자
소소 (昭昭) 영영(靈靈)
일체에 밝고 또렷함. 소소 (昭昭)는 밝은 모양, 영영 (靈靈)은 정신작용의 불가사의 함.
즉 심식 (心識)이 미묘하여 명백한 양상을 형용하는 불교 용어
알긴 아는데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 = 의식(마음 상태)은 인공지능의 범주 밖이다
마음은 지구, 의식(意識)은 ‘바다’, 무의식은 육지 에 비유할 수 있다
바다의 표면에서 출렁이는 물결이 생각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함은
출렁이는 바다표면이 나의 에고(ego)이고 나의 자아(self) 라는 그런 표현이다
초월의식
* 국어사전적 의미
철학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불가사의한 신비경으로 들어가는 의식
뇌과학적 의미는 <언어와 감각이 사라진 = 언어영역과 신경세포를 벗어난 감각상태>이다
의식 이라는 바다에서 잠시 벗어나 지구 전체를 바라다 보고 있는 광경을 연상하면 된다
바다에서 잠시 벗어나 육지와 바다를 같이 바라다 보다가 결국 바다로 돌아오는 과정이
명상, 수양, 선수행, 인도의 요기 , 선각자 들이고 바다에서 영영 벗어나 버리면 <정신병자> 가 된다
뇌는 최첨단 (신경)세포 배양기이다
산소공급 중단 3분, 포도당 공급 중단 30분이면 인간의 뇌는 그 즉시 사망한다
3분, 30분 지극히 짧기 때문에
뇌가 최신식 배양기일 수 있고, 뇌를 젊게 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