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래부터의 글은 웃대특검에 올라온 바빌론님의 글입니다
웃대특검의 수준은 아시다시피 초딩여럿모인 수준입니다 저같이 무식한 사람으로서는
틀리다는걸 알면서도 무식하기때문에 반박을 할수가 없네요 토탈워카페 본좌님들 이글에
반박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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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말 한민족의 불행일까? -1-
흠. 최근 특검에서의 일본에 대한 논쟁이 불이 붙어 그 사이에 꼽살을 껴 보려는 Babylon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효용론과 비효용론은 아직도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잘나신 한국의 역사 교과서 편찬위원회
원들은 대부분이 민족주의적 사관을 머리에 주입한 분들이라, 아무래도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난하는 교과서
가 출판되어 그 내용과 사상이 또 다시 학생들의 머릿속에 전이될 수 밖에 없고, 그 교육을 받은 자들 대부분이
'혐일(嫌日) 바이러스'에 감염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만, 과연...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운이었는가?
1.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의 의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써 대하는 태도가 다른 서구 열강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단순한 수탈 식민
지로 만들었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단순한 수탈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일본은 조선인들을 '노예'로 만들
지 않고, 조선을 '합병'하였다. 그래서 1910년의 사건을 한일합방이라고 불렀다가, 최근 일(日)까사상을 더 고조
시키려는 사학자들이 사건의 명칭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어쨌거나, 즉, 조선은 일본의 단순한 식민지라기보다는, 일본의 일부 지역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참고
로, 나찌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노예국가'로 만든 게 아니라 '병합'하였다.)
2. 일본의 구 왕조에 대한 유화정책
흔히들 일본 제국은 민비를 죽이는 등 조선왕조를 해체시키려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다
른 서구의 열강들은 대부분 지배지의 옛 왕조를 짓밟아 흔적도 없애거나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였으나, 일본은 옛
조선의 이(李)왕가를 그대로 보존해 준다. 보존해 준 것 뿐이 아니라, 해마다 일화 250만엔을 이왕가에 지원해 주
었으며,(당시 일본 수상 연봉이 대략 1만엔이었다.) 일본 천황가(天皇家) 다음가는 대우를 해 주었다. 즉, 옛 이
씨왕가는 졸지에 일본 제 2의 가문이 된 셈이다. 물론 이 내용은 국사 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이
고, 이 쯤 되면 여러분들도 그 이유는 알 것이다.
3.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유화정책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만큼, 조선인에 대한 대우도 하였다. 이쯤 되면 731부대에 대한 반박이 나올 만 한데, 731
부대는 사실 만주지역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생체실험을 한 부대이다. 따라서 만주지역에 수가 적었던
일본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식민지인 차별대우라는 말이 돌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점에서는 일본 제
국의 과오가 크다. 하지만, 만주가 아닌 조선 국내에서는 나름대로 구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을 펼쳤다. 서구 열강의 점령지에서는 대체로 식민지인들은 해 봐야 하급관리 정도 계급까지 밖에 계급 승진의
기회가 없었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제국 의회의 수상이 될 자격까지도 주어졌다. 물론 일본 본토인들이 절대주류
인 내각에서 조선인 수상이 뽑히기는 아주 힘들겠지만, 고위직이 허용되었다는 것에만 해도 큰 의의가 있다.
또 일본은 조선인에게 신체의 자유 등 일본 본토민과 대등한 기본자격과 일본내의 기밀시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까지 주었고, 군부독재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어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실 이런 사례는 전 식민지를 통틀어 매우 드문 사례이다.
3.1운동이나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으로 인한 공출이나 폭동 진압 등등의 일이 있었으나, 그 일들은 모두 일
본 본토에도 있었던 일이다. 1910년이나 20년에는 일본 본토내에서도 사회적 빈부확대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노동조건 악화 등으로 인한 노동쟁의나 데모 등이 있었다. 본토 내의 혼란을 제압할 때에도 필요시에는 무
력이 동원되었고, 시위 참가자들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례도 빈번하였다. 양식,쇠붙이 공출이나 징병 등은 일본
본토에서도 실행되었으며, 유럽의 ww2 때에도 독일이나 영국, 이태리 등에서 한창 활성화되었던 정책들이다.
즉, 일본 제국은 조선인들에 대해 호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융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할 말
이 많은 관계상 다음 이야기는 뒤로 미루도록 하겠음.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말 한민족의 불행일까? -2-
안녕하세요^^ 제 시리즈가 큰 호응을 얻어 내심 기분이 좋은 Babylon입니다.
뭐 제 글에 대한 말들이 많은데요. 저도 사실 한국이 독립을 유지했으면 어쩌면 더 좋은 결과가... 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으나, 역사엔 터무니없는 if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열강에게 먹히는 편이 좋으냐...를 생각해 보
았습니다. 제 생각은 일본에게 먹히는 편이 독립 다음의 차선책이았다. 라고 생각합니다.
4. 같은 황인종으로써의 일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동남아 지역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고,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게 된다. 1904년, 일본
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조선 내부의 지식인들은 전반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었
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까대는 이완용은 대충
"야이, 황인종 따위가 어떻게 막강한 백인종을 이기겠느냐? 일본은 정신이 나갔는가."
라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한국인들이 독립투사로 떠받들었던 안중근 같은 사람들은 이 때까지
만 해도 일본이야말로 아시아를 구원해 줄 나라라고 믿고 있었으나, 러일전쟁 종전 후 일본의 태도가 바뀌자 변
심하여 결국 일본 초대 수상을 사살하기에 이른다. 일본이 자국 군사력의 10배 수준이 되는 강대국인 러시아를
이기자, 일본 지지자로 변하는 지식인의 숫자도 꽤나 많았었다.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때부
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5. 한일합방은 조선 지도자들이 자진 승인
구한말 친일파 세력 중 양대 거물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알다시피 이완용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송병준이었는데,
같은 친일파이면서도 두 사람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이완용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편이 낫다는 신념을 가진
케이스였고, 송병준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일본에 협력하는 케이스였다. 이완용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조선
지배에 대한 조건들, 즉 조선을 식민지로써 최대한 이롭게 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는데, 이완용의 조건들이
너무 거북한 나머지 일본은 송병준을 최고의 협력자로 만들고 한일합방을 추진한다. 이에 당황한 이완용은 자신
의 조건의 일부를 일본이 들어주는 대가로 한일합방에 협력하기로 한다.
6. 잠깐, 이완용은 어떤 인물인가?
이 내용은 내가 예전에 연재하려고 했던 어떤 시리즈에서 다루려고 했으나, 그 시리즈로 인해 로금을 먹은 후로
기분이 찝찝해져서 대신 이 글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완용을 모르면 일제 식민기간을 알 수 없다는 판단하에
쓰겠습니다.
일단 이완용은 조선 황해도의 청백리의 자제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유학공부를 한다. 그리고 다른 유력가문
의 자제들이 모두 뇌물로 관리가 될 때 자신은 과거에 수석합격하여 말단관리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신학
문에 눈을 뜨게 되고, 미국에 대한 큰 우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러시아가 고종을 보호해 주자, 그는 또
다시 러시아에 대한 큰 우호감을 갖게 된다. 흔히들 1905년의 을사조약은 이완용을 위시한 일본 세력들이 강제로
고종을 '협박'하여 체결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렇지 않다. 고종은 조선의 보존 '따위'의 일보다는 단지 왕
실의 안위만을 추구한 임금이었다. 백성들과 지식인들이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며 시위를 할 때, 별기군을 동원하
여 강제해산시킨 것만 봐도 고종의 가치관을 알 수 있다. 고종은 겁이 많았는데, 이완용이 항상 자신을 보호해 줘
서 이완용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했다. 아관파천 때에도 이완용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동행하였으며, 훗날 한
일합방 때에도 고종의 안위보존을 위해 힘써 결국 조선의 이왕가가 보존되게끔 해 준다, 고종은 이완용이 자신의
왕실을 보호해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1910년, 순종과 함께 이완용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합병되었다. 이완용은 조선인을 진정으로 위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 직전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독립협회
는 독립 선언 이전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들의 대표자로 '이완용'을 지목하였다. 이완용은 물론 거절했다. 얼
마 안 지나서, 일본의 상위 순사관들이 이완용에게 최근 조선 내부의 낌새가 수상하다, 뭔가 일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조선은 평안합니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반면에, 이완용을 지도자로 받들려 했던 독립협회는? 독립
선언서 낭독 직후 바로 33인 중 26인이 경성의 경찰서에 자수하는 웃을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3.1운동이 터
지자, 이완용은 조선인들에게 그러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 해산해 주시오라고 하였던 사람이다.
이완용은 현재 극심하게 까이고 있지만, 한번쯤은 다시 평가해 볼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7. 안중근 평가재고론
그에 반해 독립투사로 찬양받고 있는 안중근은 어떨까? 애석하게도 한국에서만 '영웅'이다. 저기, 38선 건너 있
는 북조선 왕조에서도 안중근은 민족에 해만 끼친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한다. 테러리스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적국의 기밀을 누출시키거나 주요건물폭파, 주요인물 암살 등이 그들의 임무이다. 자, 여기서 더 깊숙히 들어가
보자. 과연 자국과 전쟁하고 있지도 않은 국가의, 그것도 한일합방을 늦추자고 주장한 일본의 '문신'을 평시에 암
살한 자가 과연 위인으로 떠받들어 지는게 정당한 일일까? 여러분들의 이성에 맏기도록 하겠다.
8. 백성들의 민족적 투쟁? 당시 백성들이 '민족'의 개념을 알기나 할까?
한 때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제일 극심한 인종차별정책을 사용했던 나라가 아프리카에 있다.
바로 현재 포스트 브릭스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그 나라는 오랫동안 흑인들이 심한 차
별대우를 받아왔지만, 그리 큰 폭동사고는 없었다. 이유는 1960-70년대의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부유한 지하
자원을 바탕으로 연 10%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 엄청난 호경기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 싸이클이 불경
기 시기로 직면, 경제 성장률이 2-3%로 뚝 떨어져 불경기가 닥친 남아공에 갑자기 폭동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
한다. 남아공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의 선전이 불경기라는 상태를 통해 대대적으로 먹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
서 뒷날 넬슨 만델라를 주축으로 하는 흑인 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이 글을 통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맞다. 바로 국민들은 경제에 따라 성향이 바뀐다는 것이다.
1914년에 시작된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은 엄청난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 때가 일제강점기 36년
중 제일 폭동이 적었던 기간이다.) 따라서 그 호경기의 웨이브는 일본의 지역이었던 조선에도 파급된다. 하지만
1918년 가을에 세계대전이 종전하자 일본은 극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게 되었고, 물론 이 불경기의 웨이브는 조선
에도 파급되게 된다. ㅇㅇ; 따라서 이 때부터 실업자가 늘고 조선도 민심이 흉흉해 지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선전
이 대대적으로 먹혀들어감으로 인하여 3.1운동이 발발하게 된다. 뭐 아까도 말했듯이 민족대표란 것들이 모두 겁
쟁이였고 일본내에서의 폭동진압처럼 일부무력진압이 사용됨으로써 사상자만 생긴 그닥 의미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민족주의자들은 백성들의 대민족 항쟁이라고 엄청난 뻥을 까고 있는데, 과연 대부분이 조선어
도 제대로 몰랐던 백성들이 '민족'이라는 중국문화/한자로 풀이하면 오랑캐를 칭하는 듯한 단어를 알았을런지
나 모르겠다. 백성들은 언제나 지도자들의 선동에 잘 걸리는 무지한 자들이다. 즉, 실리를 모르고 명분만 추구하
는 민족주의자들이 그들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운동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한 마디만 더 하는 것인데, [만약] 당시의 조선인들이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면, 현대의 사람들이 민족이
라는 허울뿐인 가면을 내세워 그 자체를 부정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일본인이 되기 싫었더라면 그것
자체를 그들 스스로 부정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이미 일제치하 후기에는 자신들이 모두 일본의 백성이라는 것
을 알게 된다. 물론 자신들이 내지인과 다르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당시의 그
들이 일본을 싫어했다는 낭설만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것이다.
→ 다른 내용들은 다음 시리즈에 계속 이어지므로 위의 글 내용에 대해서만 태클을 걸었으면 합니다.
→ 본문에 태클을 걸지 못하고 얄구진 비난이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본문에는 태클 못 거는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고 상대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 계속~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말 한민족의 불행일까? -3-
안녕하세요. 이 시리즈도 벌써 3편이군요. 이 시리즈를 써 나가면서 댓글을 보며 저도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
였습니다. 물론 2편의 사족에서 쓴 것처럼 일단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는 코멘은 상대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런
코멘도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뭐 모든 댓글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만족스러운 댓글을
받기 위하여 오늘도 글을 씁니다. 이 소재는 오래전부터 제가 한 번 다루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민감한 소재이기도 하고 또 논란이 많은 소재이기 때문이입니다. 따라서, 파트를 연장하고, 제목과 다소 상관이
없는 파트도 전체적 주장의 견지강화를 위해 일부 끼워 넣었겠으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9. 구한말의 조선민생
일단 짤방을 보도록 하자. 목욕도 하지 않아 얼굴에 온갖 때와 땀, 얼룩 등으로 엉켜진 덩어리가 붙은 건 기본이
고, 포목 등 섬유와 옷감이 귀해 가슴조차 제대로 못 가린 여인들이 흔해 빠졌다. 한양에 들려본 외국인들은 도시
곳곳에서 풍기는 악취와 길가에 함부러 널려져 있는 오물들, 그리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가도와 낙후한
시설들로 인하여 큰 불편을 겪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야만적이고 지옥같은 국가로 묘사했다. 청결에 대
한 문제로는 민생이 모두 설명이 안 되므로 경제면을 들기로 하자. 1860년대, 고종의 치세 때 대규모의 흉년이 들
어 파악되지도 않을 숫자의 농민들이 아사하였다. 최근 역사학계는 아사한 자들의 숫자를 대략 100만으로 잡고
있다. 1905년에 집계된 조선인구가 약 650만이므로 얼마나 많은 숫자의 백성들이 아사하였는지 알 수 있다. 1880
년대의 조선 물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미곡 1가마니(80kg)의 가격이 6냥이었고, 국밥 한 그릇의 가격이
1냥이었다. 구한말의 1냥은 현재 화폐로 환산하면 8000원의 값어치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즉, 현재 경
제수준의 대략 1/50 수준으로 잡히고 있는 조선의 기본 식량인 쌀의 가격은 현재의 1/4 수준이었다는 충격적인
결론이 나온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조선의 지주들이 일본상인들의 요구를 수락, 미곡을 대량
판매함으로써, 쌀 값의 폭등을 부추겼다. 게다가 조선의 지주들이 일부러 소작농들에게 쌀 대신 엽전을 소작의
대가로 지불함으로써 민생의 파탄을 더욱 부추겼다.
10. 조선 자멸론
최근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주축으로 한 조선 자멸론이 힘을 모으고 있다. 그들의 우파 교과서 포럼은 일본에 대
한 맹목적인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이 결국 일본이 조선을 먹을 결정적 찬스들을 제공해 주었다고 주장하며, 기존
교과서를 작성한 민족주의적 사학파들을 비난하고 있다. 즉, 일본 초대 수상 이토는 한국을 침탈하기 보다는 한
국을 강한 세력으로 길러 일본에 협조적인 세력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실제로 이토는 조선이 근대적 군대를
갖는 일에 동조적이었으며, 정한론을 끝까지 부정했던 인물이라고 하며, 일진회의 이토 압박, 헤이그 밀사사건,
이토 암살사건 등으로 그의 설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모두 지적하였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는 학생으로 하여금 하나의 관점만 가르쳐서 결국 하나의 관점으로밖에 역사를 볼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
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 세력의 의견에 동조할지 반대할지는 모두 여러분의 몫이다.
11. 백성을 탄압한 '조선 군대'
위에도 말했듯이 대흉년을 겪으며 민생이 더욱 더 열악해 지자, 참다 못한 농민들이 1860-70년대에 들어 대대적
인 민란을 일으키는데, 대표적 예가 동학 농민군대이다. 동학농민군대는 한 때 삼남을 제패하였으나 결정적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 이유는 더러운 일본군대가 농민군을 모두 학살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조선군대하면 무조건 쾌자를 걸치고 200년전의 포루투칼식 머스켓을 장착한 허접군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 또한 그렇지 않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 별기군의 수도 대폭 증가하게 되는데, 별기군들은 러
시아의 모신이나 영국의 엔필드 등과 같은 신식 라이플로 무장하고 게틀링 머신건과 같은 신식무기까지 수입하
여 군대에서 활용하게 된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구식 군대의 숫자가 많았으나, 어쨌든 별기군대는 구미
의 군대에 비교해 보아도 부족한 점이 없는 군대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조선군은 가도의 양옆에 매복하고 [일본
군은 전장 후방의 방어를 맡는다.] 따라서 예전 전투에서 이긴데다가 미신적 신앙이 강헀던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학군대는 매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가도를 따라 진군하다가 매복해 있던 고종의 군대에 의하여 대부분이 썰리
고 동학농민군은 해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의 숫자는 학자들에 따라 1만에서 40만으로 매우 다양하다. 숫자야
어쨌든 자국의 선량한 농민들을 모두 죽인 민비의 만행은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을사조약 후의 민란 진압
에도 군대가 해체되기 전까지 조선 군대가 적극 개입되었다. 조선 군대가 죽인 의병의 숫자는 최소한 5만명 이상
으로 집계되고 있다.
12. 일본의 조선 통치 시작
1910년 이조가 망하고 일제시대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치수를 개량하고 관개
를 함으로써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내의 쌀부족으로 많은 쌀들이 조선
지방에서 일본으로 수출되어 조선 농민의 1인당 쌀 소비량 1930년대엔 대략 0.5석 정도로 일제통치 초기에 비해
줄어들었으나, 구한말(0.3석대로 추정)에 비하면 증가된 수치이며, 20년대부터 해마다 조선인 1인당 기타 소비
재 소비량은 늘어났다. 조선반도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1910년 20만이었던 서울의 인구는 해방 후 약
80만으로 늘어나고, 특히 중공업화되었던 한반도 북부 지역의 중심지 평양도 1910년 5만의 인구에서 해방 직후
인구가 60만 가까이 되는등 도시화도 산업화와 동시에 진척되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낙후해 인건비가 싸고 같은 국가령이었던 조선에 공장을 세워 제품들을 생산한다. 물론 이 때에 고위 기술자들
을 일본인으로 하였다는 데 대하여 불만들이 많으신가 본데, 그럼 이건 어떨까? 예를 들어, 개성공단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있다. 개성공단의 공장들도 모든 최고기술자를 한국인으로 뽑는다. 그렇다면, 북한사람들이 "이건
북한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네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네까?"...라고 하겠습니까? 대답은 No입니다. 왜냐하면 최고
기술자는 자국인으로 해야 말도 잘 통하고 게다가 해외 등에 자회사의 기술이 누출될 위험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게 되므로 대부분의 기업에서 최고 기술자는 대체로 자국인으로 하는 겁니다. 글로벌화된 현재에도 이런데, 일제
시대는 오죽했겠죠? 아무래도 조선 지방의 사람들은 언어도 일본 본토와 다르고 사상도 좀 달랐으므로 일본 본
토민들이 조선 지방민을 자국민이긴 해도 아무래도 동일민족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조선은 공업과 농업의 비약적 생산량 증가를 통해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구한말엔 정체되어 있
던 인구 성장률이 일제치하에서는 연당 3%로 올라 민생이 비약적으로 좋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금이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줄고 생산력이 신장되어 결과적으로 민생이 나아져서 출생률이 오르고, 의료 시설이 충당되
고, 아동들의 영양 섭취량도 올라가 인구 사망률이 이전시대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41년
에는 전체 조선인의 4%밖에 안 되는 일본인이 조선 전체 부의 20% 가량을 차지하게 되는데, 동인도 회사에 의하
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체 인구에서 1% 밖에 안 되는 영국인은 남아공 전체 부의 8%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고,
인도 인구의 0.3% 정도 밖에 안 되는 영국인은 인도 전체 부의 10%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자본이 강력한
쪽이 큰 부를 차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섭리이다. 당시의 조선인 중 대부분은 무지하고 자본의 개념도 모르
는 조선인이 흔해 빠졌으므로 자본주의를 조선에 전파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부를 많이 차지했다고 해서 그 사실
에 대해 비난하고 헐뜯을 일은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합니다.
13. 일본 점령 후기의 대략적 서술
1945년 여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조선은 자연히 독립이 되었으나 분단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어
쨌거나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조선에서 이탈함에 따라 조선경제는 혼란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
독립 이후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의 부를 스스로 모두 포기합니다. 많은 열강들의 자본가들은 옛 자국의 식민지
가 독립한 후에도 그 식민지에 남아있는 자국의 민간 재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은 모든 부를 포기하였
다. 공업은 조선 자체의 기술이 부족하여 일본자본이 이탈한 후 생산이 줄었으나 농업은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
다. 일본이 자국민이 소유했던 조선 농토를 모두 포기함으로써 옛 일본인 지주의 농토들은 모두 국유지가 되었
다. 하지만 독립을 이룩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 농토들을 농민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농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또 다시 농촌에서의 빈부격차가 증대되고 생산력을 감소시켜 쌀값이 폭등하는 큰 요인을 제공하였다.
또 우리는 흔히 일본이 식민지배 보상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독일 : 나찌 독일에 의해 피해를 입은 '타국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피해 보상을 한다.
일본 : 일본제국에 의해 식민지화된 '국가들을 대상'으로 피해 보상을 한다.
는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에게 받은 보상금은 대한민국 국고에 들어가 조국근대화 자금으로 요긴히 쓰였다.
또, 일본은 자국의 재벌들에게 한국에 기술을 제공할 것을 당부하여 한국 산업 고도화를 도운 국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 식민지배의 보상까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할 여지가 있다.
더 있지만 오늘도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일제 치하의 다른 문제점들이나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글은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 물론 오늘도 글 내용에 대한 반박만 해 주시길 ~
→ 물론 오늘도 뻘플러는 무시하겠음 ~
- fin.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말 한민족의 불행일까? -4-
뭐 이 시리즈를 쭉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역시 제가 이 글을 올린 기본의도조차 파악 못 하시는 분이
흔하군요. 저는 일본의 선동가나 혹은 저도의 일빠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저는 당시 조선에 있어서 제일 나은
길은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물론 '어쩌면' 그보다 좋은 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제일 최선책이
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글을 쓴 것입니다. 따라서 글 내용의 본질을 잘 파악해 주시길 바랍니다.
14. 위안부 문제
모든 20세기 초중반의 제국주의 국가 군대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위안부가 존재하였다. 18-19세기 즈
음에는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를 금지하는 국제법 조항 자체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
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에 징용하였으나, 20세기 초 이를 제재하는 국제법이 발효되자 대부분의 국가들이
심해도 극소수만 강제로 징용하고, 나머지는 민간업자나 혹은 고용을 하는 방식으로 위안부들을 구했다.
조선의 여인들은 20세기 초반부터 매춘업에 종사하려고 한 경향이 진하다. 그리고 항상 매춘부 일자리의 경쟁은
치열했다.(현재도 그러함.) 대부분의 여성들이 유곽이나 보수를 많이 주는 야간술집 등에서 일하기를 원하였는
데, 그 이유는 보수가 크기 때문이다.
일단 위안부 배상을 요구하는 소수의 '강제로 끌려가거나 사기를 당한' 할머니들을 예외로 하겠지만, 다수의 '지
원한' 위안부는 전자와 같이 다룰 처지가 못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높은 보수를 얻기 위해 자원한 것 뿐이기 때
문이다.
국제법에는 21세 미만의 여성을 매춘에 이용하지 말 것 이며, 강제로 이용하지 말아라라는 말까지 붙었으므로
선자를 동원한 케이스는 불법이지만, 후자를 동원한 케이스는 합법이다.
또, 현재에도 5만명에 육박하는 한국인 여성들이 일본에서 원정 매춘을 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단지 돈을 많
이 벌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는 제발 앞서 말한 '자원한 위안부'들은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했기 때문에 민족의
수치이고, 후자는 개인직업이기 때문에 아무런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실제로 3년 전에 한 한국인 기자가 일본의 재일 한국인 1만명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질문의 내용은 "선대에 일본에 이주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였다.
뭐 전형적인 한국인이라면 대다수의 재일 한국인이 이유를 "일본의 강제동원", "조선 지방의 탄압이 심해서" 등
등으로 생각하겠지만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다. 즉, 현재의 한국인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구미
등지로 이주한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위안부에 대한 제국주의의 만행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나,
평소의 우리가 생각한만큼 심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과 전후 보상]
15. 일본을 좋아하는 옛 동남아 식민지들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일본이 잠깐이라도 지배했던 옛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은 모두 일본 안티다"라는 근거없
는 낭설을 자주 듣게 된다.
또 우리는 일본 우익들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인들에게 독립의 용기를 줬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자주
같게 된다. 일본 우익의 말은 중국과 한국에서는 해당이 안 되겠지만,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해당이 된다.
알다시피 타이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 지역은 200~400년 가량 서양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식민 제국에 대
한 투쟁을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감이 크게 쌓였었다. 하지만 황인종 국가인
일본이 3년만에 모든 동남아 지역을 제패하자, 동남아인들은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일본이 물러간 뒤, 옛
식민제국들의 군대가 재침입하자, 그들은 대대적으로 항쟁을 하여 식민제국군대를 완전히 축출해 낸다. 참고로
현재의 동남아인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제 지원과 문화 교류 등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우호
감이 아주 강한 상태이다.
실제로 근래에 베트남의 장관이 중국과 한국의 뻔뻔한 정치적 선전의 일환으로 일본을 이용하는 것을 비열하다
고 비난한 바가 있다.
실제로 일본은 아세안과 동아시아가 가까워지도록 하게 만든 장본인이며, 동남아 지역에 대한 세계최고 수준의
무상원조를 해 주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현재에도 자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 개발도상국/저개발국 지
원금을 자국보다 경제규모가 2.5배나 더 큰 미국이 내는 지원금액의 140%에 육박하는 지원을 해 주고 있다.
또한 일본경제는 동남아의 성장에 제일 큰 영향력을 50년동안 발휘해 왔다. 물론 최근 동남아 경제에 중국과 한
국경제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동남아에서 슈퍼파워를 유지하
고 있다.
동남아에서 중국의 도시인 홍콩 다음으로 부유하고 한국보다 15년이나 더 오랜 일본의 통치를 받은 대만인들은
대만이 일본이며, 일본이 대만이다라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우호감이 높은 상태이다. 실
제로 대만은 일본이 최고의 우호국가이며, 일본은 대만이 제 2의 우호국가이다.
즉, 다른 옛 동남아 지역의 식민지들은 일본이 남긴 유산을 최대한 긍정적이고 효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의 전후 지원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고 있다.
16. 중국과 일본
중국은 옛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제국의 주요전장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따라서 일본에 의해 입은 피해
도 막대하고, 일본 통치의 혜택은 모두 만주 지역에만 집중 되었다.(실제로 만주지역은 1945년, 중일전쟁 종전
시 중국내에서 제일 부유한 지역이었다.) 중국인들은 일본을 혐오하며 무조건 악이라고 평가해 왔으나 최근 들
어 움직임이 바뀌고 있다. 일본은 중국이 개방 초기에 자금이 부족하여 괴로워 할 때 자금 1000억엔 이상을 무상
융자한 것으로 시작하여 개방 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지원과 보상을 시작하였다.
몇 가지만 들자면, 중국은 20여년 전부터 황사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고, 그에 대응해 식목 프로젝트
를 추진하였다. 이를 돕기 위해 일본은 5년에 걸쳐 5조 엔에 달하는 거금을 지원하였고, 또 그 정책의 일환으로
석탄발전소 대체 프로젝트를 시행할 때, 일본은 자국의 원자력 발전 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며 또 다시 3조 엔을
지원하였다. 일본은 중국 제 2의 투자국이며 중국은 일본 자본이 빠져나가면 자국이 혼란에 빠진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최근 강택민 중국주석이 일본과의 외교상태를 기존과는 완전히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도쿄를 1년에
수차례 방문하며, 중일 우호의 중요성을 연일 강조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을 바꾸
자는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 중국의 공중파 방송에 일본에 대한 시각을 바꾸자는 방송까지도 방영된 것을
보면 중국이 일본이 얼마나 자국에 필요하며, 그들의 지원이 값진 것인지 깨달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17. 끝으로 명분과 허울만 내세우는 자들에게...
물론 일에 있어서 명분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명분이 없거나 비뚤어지면 아무리 옳은 일을 했다고 해도
인정받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 것을 따지는 것은 여전히 배부른 자의 특권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족이라
는 개념이 당시에는 중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배부른 자들의 개념일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
다. 통계 수치 어쩌고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이 것만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의 가족이 배고프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매우 비참한 삶을 산다고 가정해 보자. 밥도 못 먹는데, 만일 어떤 자가 와서 나를 위해 일한다면 밥은 먹여주지
라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떄 당신은 가족의 앞을 막아서며 노예가 되느니 굶어 죽는 게 낫다!라고 할 자신이
정녕 있으십니까? 저는 절대로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당신들은 만약 그랬을 자신이 정말
의리가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 식민지가 되지 않는 편이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주 약
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일제 치하에 드는 편이 더 생활수준이 높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난해도 독립해서 사는 편이 낫다고 하는 당신들의 머리구조를 이해 못 하겠습니다. 물론 당신
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봉건시대 때 자신의 전답을 바치고 유력자의 노예를 자처한 자들을 비
웃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고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앙이라고 탈무드는 전합니다. 또 많은 민중들이 그렇
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상을 권하는 건 잘못이지만, 저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해라고 설득해 보고 싶습니
다. 이상 가상의 상대를 대상으로 쓴 파트입니다.
→ 5편에는 마지막으로 다른 제국들의 식민통치에 대해 쓰겠음.
→ 뻘플을 다는 사람은 역시 무시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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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한번 말하지만 웃대특검의 바빌론님의 글이고요 많은 반박들 부탁드립니다
카페 게시글
동양사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말 한민족의 불행일까?(반박좀해주세요)
구름에달빛
추천 0
조회 891
07.02.16 23:45
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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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일파?
뭐 그다지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일본 우익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에선 저렇게 항변을 하는 것 같은데...... 저런 내용들은 하도 많이 봐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등등히 대햇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당시를 격었던 어르신네들의 증언은 상당히 차이가 있던데요. 결코 평등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상위구릅은 일본인 하위구릅은 한국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전 밝혀진 총독부 문서에선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한국인들을 만주로 이동시키고 일본인들을 한반도로 대거 이동시킨다는 문건도 나온적이 있습니다.
미쳤나봐! 세계에서 가장 징하게 식민통치를 한 나라한테 식민지된게 축복이란 말인가? 거기다 안중근의사 테러리스트론까지! 북한도 이순신이 찌질이라고 하면 우리도 찌질이라고 해야 된단 말인가?
제가 받은 느낌은 마치 고대 스파르타에 비유하면 일본인들은 상위 전사계급 한국인들은 하위의 농노계급 뭐 그런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각종 데이터들도 과연 한국인들도 해당사항인가도 의문이고 모든 자본, 자원, 행정등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일본인들이 자선사업하는 것도 아닐테고....정신대 문제는 당시 한국여성들의 성향으로 뫘을때 과연 자발적이었을까는 상당히 의문이군요. 요즘 여성들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대 아시아 지원은 과거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들도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한것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방이후 한국의 고도 성장도 일본의 대한 투자도 꽤 작용한면도 있으니... 다만 독일처럼 과거의 반성이 없는 이중성을 깔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틀린 점을 일일히 거론하기도 힘들겠네여^^;; 일본의 한국 지배 당시의 실상을 알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부 일본인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답변해주신분들 감사합니다 돌아다니다가 이런글들을 보면 틀리다는걸 알면서도 지식이없어서 반박못하는게 좀 아쉬워요..ㅠㅠ
이 친구 개념은 12시로 정찰 보낸건가 . . . . . 정찰갔다가 드론한테 맞아죽었나;;
지나가는 중립동물1이랑 노는중..
1921년 관동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약 6천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우리 선조들이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학살되었습니다. 그걸 감안한다면 과연 일제시대가 축복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일제 시대가 축복이라면 독립운동가분들은 모두 테러리스트 이겠네요. 참나..
글로 반박하고 픈데 귀차니즘발동!-_-;;
제가 그동안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군요. 일제식민통치가 교과서에 나와있는것과는 달리 나쁜것만은 아니었네요 ^^ 그럼 우리도 이 '은혜'를 잊지말고 일본을 식민화시켜 '보은'해야겠군요.^^ 植民(식민)의 의미나 알고 쓴건지 원...
정신나간 놈의 넋두리로 보이네요 -_-;;;;
여기 쓰신 리플들좀 스샷으로 찍어갈게요 물론 아이디는 그림판으로 안보이게 나름모자이크 처리하고요 혹시라도 안되시는 분들음 말씀해주세요 바로 지우겠습니다
어떤놈이 쓴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가지만 반박해 보겠습니다 우선 11번 당시 조선군은 조선국왕의 야심찬 계획하에 근대화가 착실히 되가고 있었습니다 영국제 엔필드 라이플이라던가 일본의 무라다식, 나중에가면 러시아제국 군사고문단의 영향으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베르당식, 무기독점을 견제한 고종황제의 생각이 반영된 독일제 모젤식 소총등 다양한 무기로 무장해 근대화되가고 각국 교관들이 훈련을 맡아 지휘해 상당수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들은 의외로 자신의 나라민중들과의 전투에서는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황토현전투가 그 단적인 예
동학운동에서 일본군에 학살된 농민의 수에대한 의견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적게는 5만~많게는 20만이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주력으로 참전한 일본군 1천여명은 서남전쟁 참전등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최정예부대였고 수많은 동학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남의나라일이었으니 일본군도 멍청이가 아닌이상 조선정부의 토벌군에 일본군을 가담시키는 형식적인 겉치레를 하는건 당연한 이치겠죠
5번의 경우는 야비한 이토의 험악분위기 조성에 따른 일부찌질한 지도부가 협력해 한일합방이 체결된 경우지만 당시 전제군주국(제정러시아를 모델로 고종황제가 광무개혁을 추진한결과)이었던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권리를 위임하는데는 대한제국 황제가 조약에 직접 서명하거나, 최소한 고종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은 외무대신이 서명해야하는데 고종황제는 분개해 조약체결장을 박차고 나가 조약에 참여 하지 않았었고 외무대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었던 조약입니다
4번같은 경우는 당시 청일전쟁이후에 청제국이 추진했었던 양무개혁의 한계를 몸으로 바로 체험했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의 명치유신을 조선이 따라야 할 '완변한 개혁으로 인식'했기때문에 그외 다른개혁추진국(제정러시아같은 경우)들의 개혁을 반대하게 됩니다(단적인예가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황제권을 강화하려했던 고종황제에 반발한 독립협회(보통분들이 알고있는 독립협회는 사실 어두운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와는 완전히 다른내용이죠)를 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을 압록강해전 단판으로 꺾기는 했지만 이류국가끼리의 싸움이 아닌 육군력 세계1위(주력은 유럽주둔군이긴 했습니다만, 극동주둔육군은 제정러시아육군의 주력군이라 할 수 없는 수준의 군대였습니다)대영제국, 프랑스공화국에 이어 세계3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당당한 일류제국주의국가(아직 주산업이 농업이고 산업화가 진행중이었던 경제기반이 약한 국가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인 러시아제국과의 싸움에서는 일본이 이길가망이 없다고 봤었습니다
실제로 극동, 흑해, 발틱으로 분산되긴 했지만 각각의 분함대가 일본의 연합함대와 맞먹는 전력을 가졌었던 해군력이었고 최정예였던 유럽주둔육군을 완공되지도 않은 시베리아횡단철도로 극동으로 운송하기 힘들었긴해도(실제로 전쟁기간내내 러시아는 최정예인 유럽주군육군 85만을 한번도 극동으로 배치시키지 않았습니다, 즉 계속 일본의 쨉과 훅을 얻어맞으면서도 자기의 살인펀치를 굳이 날리지 않더라도 일본정도는 이길수 있던 상대로 계산한 러시아 지도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예입니다)극동에 주둔한 지상병만해도 일본의 만주원정군과 거의 맞먹는 전력을 가졌던
엄청난 군사대국 러시아의 아성을 무너뜨릴수 있는 존재의 일본은 조선의 지식인을 포함해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일본이 포트아서(여순항)함락, 그리고 그에 따른 극동함대의 집단자침, 봉천대회전에서의 러군 격퇴, 러시아의 마지막 승부수 발틱함대마저도 대한해협에서 수장시켜버리는 잇단 속사포펀치를 날리며 러시아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경제기반이 약하고 국내의 혁명기운을 잠재워야했던 러시아를 강화협상테이블로 끌어내자
조선의 지식인들 일부는 당시 거역할 수 없었던듯한 시대의 대세인 서세동점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일본을 보게 되고 이번전쟁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것이란 보기좋은 겉치레이긴 했지만 그 겉치레를 그대로 믿고 일본을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뒤 일본이 가면을 벗고 속내를 드러내자 조선의 지식인들이 느꼈을 실망감이 어느정도였을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입니다(당시 일본의 '순수해보이는'이상에 동조한 인물은 안중근의사뿐아니라 중화민국의 아버지 손문선생과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 노신선생같은 세계적인 인사들까지도 포함되었으니 실망이 어느정도였을지는...)
3번같은경우는 H.B.헐버트 박사가 저술한 대한제국멸망사를 읽어보시면 그당시 조선인들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대우했나 아실수 있을겁니다
13번은 박정희대통령의 필사적이었던 상황하에서 벌인 대일청구권교섭이 굴욕적외교로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샀고(일본은 교묘하게도 어려웠던 한국의 급박했던 사정을 잘 이용했었던 거죠) 박대통령이 보상금으로 주장한 금액도 실제 보상가치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대응한 금액은 경제원조라는 포장까지 더해졌음에도 겨우 푼돈정도였죠(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오하라 비밀회담을 참조)
15번문제에 대해서도 동남아국가들은 오랜세월 서구열강의 수탈을 당해오던터라 일본의 점령을 초기에는 해방군성격으로 환영했지만 후에 진주한 일본군역시도 열강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할게 없는 잔혹한 수탈을 행하자 오히려 나중에는 앞서 자신들을 지배한 열강들에 협력해 싸우게 됩니다(미국에 협력한 필리핀, 네덜란드에 협력한 인도네시아, 영국에 협력한 버마같은국가들...)현재 그국가들이 일본을 지지하는것은 일본이 국제적이미지, 체면문제 때문에 직접수탈을 가했던 한국,중국같은 국가들보다 동남아국가들에 대해 경제적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결과이고
최근에 쓰나미사태때 있었던 UN안보리 상임이사국진출을 노렸던 일본의 야비한 대대적인 돈뿌리기 로비(지원금이 정말 천문학적이었죠)의 영향도 없다 할 수는 없겠습니다
대만의 경우는 UN상임이사국자리를 중공에 내준뒤 UN에서도 탈퇴하고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중공의 외교파워에 눌려 맹방이었던 미국에게조차 버림받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꺼리는 국가로 전락해 소국들과의 외교에도 경제력을 사용해야하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절실한 국가인 대만에 친절한척 손을 내민 일본을 무시할수가 없었던 경우이죠
다른것도 일일히 반박해버리고 싶지만 너무피곤한관계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님하 글로쓰시지 왜 댓글로.....힘드셧겠삼 600자도 맞추어야하고...-_-;;
바빌론이라는 작성자 만나면 산채로 회를 떠주고 싶군요...낚시글도 정도껏 써야죠. 전 첫 줄 읽고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고 말았습니다. 반박하기도 짜증날 정도입니다. 이런 글 자체가 선조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뭐병, 뎀질래 [...]
출처가 없는 얘기는 just무시. 위안부 731하나만으로도 족히 까일가치가 있습니다.
반박할 의욕조차 안 생깁니다만;;
ㅉㅂㄹ,ㅅㅂㄴ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