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5장1~9절
제목 : 안식을 잃은 자비의 집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두 가지 목적입니다(요20:31).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는 자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요한은 7가지 기적과 표적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안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주를 만들었고,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죽을 병을 고치심이고,
오늘은 세 번째 표적으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입니다.
이 표적은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생각 속에서 이 사건을 비난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유대 지도자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1. 예루사렘의 베데스다(1~4절)
1) 시기는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입니다(1절).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친 후에
"유대인의 명절" 오순절을 말합니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두 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합니다(신 16:9-12).
*유월절 :1월(닉산월=태양력 4월) 14일, 15~20 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2)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2절)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예수살렘의 양문(羊門)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1888년에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그 위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문의 명칭을 삼았습니다
[어문 (魚門), 마문(馬門) 등].
양문(羊門)은 예루살렘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이 문을 통하여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양문(羊門)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된 유래로
①그 성문 안에 양(羊)시장이 있었다(느3:1,32, 12:39)는 설과
②이 문을 통해서 제물로 쓰일 양(羊)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킵니다.
3)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이는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3,4절).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물이 동한 것은”,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하다”라고 하였습니다.
2. 38년 된 병자의 치유(5~9절)
1)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닙니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입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絶望)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십니다.
곧, (1) 그의 마음속에 소망(所望)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소망(所望)과 약속(約束)에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눅 4:25-27).
*눅4:25~27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이를 “하나님의 주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려 병자들 중에 ‘38년된 병자를 고침’은
“예수님의 선택적 치료”라고 합니다.
구원(救援)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주님의 선택적 구원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엡1:3~14절).
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선택의 복](엡1:4절).
➁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구원의 복](엡1:7,8절).
➂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장차 누릴 복, 영생의 복]입니다.
미래적인 [영적인 축복]입니다.
이와 같이 특별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항상 감사(感謝)할 처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물음에 병자의 대답입니다(7절)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외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습니다.
4)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8,9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그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습니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3.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치유.
1)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가 38년 동안 않았으나 많은 의사에게 병에 대한 상담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라고 하였습니다.
옛 어른들은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도 유명한 의사는 다 찾아 봤을 줄 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2) 약으로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가 38년 동안 않았으니 모든 약을 다 써 보았을 줄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만든 약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약도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약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도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고쳐주셨습니다.
3) 천사가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4절).
천사는 영적 피조물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환들입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왔어도 이 불쌍하고, 힘없고, 38년된 병자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38년 동안 몇 번 내려왔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왔을 줄 압니다.
그 여러 해 동안 천사는 병자를 외면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이 가련한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불가능을 넘어 모든 병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38년 된 병이 없을까?
주변 상황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과 자녀들에게까지도 마음이 아프게 합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남편이 소방관인데 상처를 입어 7~8년간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생활은 되지만, 여자는 바람이 나서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봅니다.
알콜 중독자의 자녀들의 예화.
우리에게는 사회적으로 고질병이 있습니다.
가정적으로도 그렇습니다.(남편, 자녀, 부인 등).
나는 고질적인 것은 없는가?
*아픈 사람들은 그 못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그리고 38년 도니 병자도 있었습니다.
소경이 어떻게 뛰어가는 가?
절뚝발이도 잘 뛰어가지 못합니다.
소경은 심지어 물이 동하는 것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당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옳은 것입니다.
지키기만 하면 다 됩니다.
율법을 다 행하면 의롭게 되고 생명을 얻고 축복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모두 죄인들로서 죄로 병들어 앉은뱅이가 도고 소경이 되었기에 지킬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키면 되지만,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주셔서 한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되겠지”아니라,
믿으면 역사가 이러나고야 마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명절이 되어 예수님이 찾으신 곳은 성전이 아니라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입니다(1~3,6절).
멸시받던 사마리아(4:5)처럼, 유대교에서 소외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죄 때문에 천형을 지고 사는 자들로 간주되어 예루살렘의 축제에도 초대받지 못한 병자들이 있던 38년 된 병자를 향했습니다.
세상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찾아가기 원하시는 세상은 어디이고 지체와 아웃은 누구입니까?
2)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은 ‘안식일’입니다(5~9절).
당국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10절)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치유하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역이 바로 안식일의 의도를 이루는 일임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또한 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에서 이기거나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안식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경쟁이 없어도 말씀이 역사하는곳에 ‘쉼’이 있습니다.
낙오될까 늘 두려움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안식을 주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베데스다는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4절).
‘자비의 집’이라 불렸지만 경쟁만 있을 뿐 자비는 없습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미신에만 기대어 연명하는 공간입니다.
병자들이 마지막 기대와 희망을 걸고 찾은 곳이지만 깊은 절망만 확인하게 하는 장소 였습니다.
“간절함으로 오랜 소망을 이룰 수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를 깊은 절망으로 몰아 가기도”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서 헛된 소망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2)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에, 병자는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만 합니다(6,7절).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잘 모르면, 우리도 예수님을 구원의 주(主)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사환으로 전략시킬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