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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기도와 성사(聖事)]
제11장 저녁 영성 수련과 양심 성찰
이를 위해 아침 묵상 중에 특별하게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을 다시 묵상해도 좋고, 그대가 원하는 다른 소재를 택해도 좋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음과 같이 양심 성찰을 해 보십시오.
아침 기도는 그대의 영혼에 정의의 태양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의 창문을 여는 것이고, 저녁 기도는 밤사이 지옥의 암흑이 그대 영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영혼의 창문을 닫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며 언제나 그대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향해 “주님께서는 나의 피난처, 나의 산성이시며, 비를 막는 지붕이시고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십니다.”(시편 91,2.9; 61,4; 62,3 참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이후부터 성녀는 어느 누가 괴롭히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 비밀스러운 작은 성당에 숨어 하늘에 계시는 배필이신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녀의 영적 딸에게 마음속에 작은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수행하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대도 때때로 주위 사람들과 떨어져 하느님과 만나 마음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대 마음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는 또한 구세주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신 구세주께서는, 굶주린 자기 새끼에게 자기 피를 먹이는 광야의 펠리칸과 같으시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적막한 곳에서 슬피 우는 부엉이와 같으시며, 또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무리를 떠나 하늘로 날아가는 한 마리의 외로운 새와 같으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피난처를 지으면 번잡한 세상사 가운데서도 그곳에 숨을 수 있습니다.
“그리운 아내여, 나는 잘 지내고 있소. 만약 나를 만나고 싶으면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로 오시오. 나는 그곳에 있소. 다른 곳에서 나를 찾으면 헛수고일 뿐이오.” 그가 표현한 예수님의 옆구리는 그의 피난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또한 그대 마음을 끊임없이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그대 마음의 눈을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리고,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손을 내밀어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향기로운 꽃다발을 가슴에 안듯이 주님을 그대 마음에 껴안고, 휘날리는 깃발처럼 그대 영혼을 주님 앞에 들어 올려 그분을 찬미하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대의 천상배필이신 주님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하려는 여러 가지 수행을 실천하십시오.”
이미 언급한 영적 은둔과 이 기도는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그네가 입술을 축이고 기운을 차리고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포도주를 조금 마신다고 해서 결코 여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걸음이 더욱 가볍고 빨라져 여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시편에 많이 나오는 화살기도들과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의 속삭임 등과 같이 특별한 힘을 주는 기도문들도 있습니다. 또한 성가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르면 같은 효과를 내는 화살기도가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처럼 끊임없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살며, 주님을 열망하고 주님에 대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새기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나 깨나 연인만을 생각합니다.
연인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상 만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거룩한 염원을 일깨우는 사랑은 하느님을 사모하는 많은 기도에서 우러나온다.” 하고 말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거닐고 있을 때 해변에는 바다가 토해 놓은 작은 조개와 해초, 굴 껍질과 온갖 찌꺼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파도가 밀려오자 그것들은 물결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바위만은 세차게 휘몰아치는 엄청난 파도에도 꿈쩍하지 않고 버텨 냈습니다.
이것을 본 성인의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해변의 조개껍질처럼 나약한 사람들은 운명의 물결이 밀어닥칠 때 이리저리 흔들리는구나. 이와는 달리 우뚝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신심이 굳건한 사람은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성인의 머릿속에 시편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목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가 없습니다. 물속 깊은 곳으로 빠져 물살이 저를 짓칩니다.”(시편 69,2-3) 이때는 그레고리오 성인이 막시모에게 주교좌성당을 빼앗기고 무척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 주님, 지상 로마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하늘나라 예루살렘은 어떠하겠나이까?
세상의 헛된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처럼 화려함을 주시는데 후세에서 진리이신 주님을 뵈올 때에는 얼마나 큰 영광 중에 저희를 머물게 하시겠나이까!”
(그분이 우리처럼 시골 출신이어서 더 자랑스럽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말을 타고 갈 때 사냥개에게 쫓기던 산토끼 한 마리가 별안간 말 밑으로 뛰어들어 와 숨었습니다. 사냥개는 짖어 대며 성인이 탄 말 주위를 맴돌았으나 감히 가까이 와서 토끼를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수행원들은 재미있다며 크게 웃었으나 성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어떻게 저 불쌍한 토끼를 보고 웃을 수 있는가?
우리 영혼도 일생 동안 마귀에게 쫓겨 다니며 죄악의 올가미에 걸려 시달리다가 임종 때에 마귀의 손을 피하려고 최후의 피난처를 찾아다닐 것이며,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마귀도 재미있어 하며 웃을 것이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길을 떠났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에워싸여 계신 우리 주님을 보는 듯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숫염소가 어린양을 뿔로 들이받아 죽이는 것을 보고는 “오! 어린양아, 너는 우리 구세주의 죽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듯하구나!”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냥을 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신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뒷날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냥매가 주인의 손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나무에 붙들어 매어도 얌전하게 돌아오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미꽃에 가시가 있듯이 이 세상 아름다운 것에도 슬픔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즐거움 뒤에는 후회가 따르고, 결혼한 뒤에는 배우자를 잃고 홀아비나 과부가 될 때가 찾아오며, 아이를 낳으면 근심거리가 생기기 마련이고, 영광 뒤에는 치욕이 따르기 마련이며, 즐겁게 지낸 다음에는 불쾌감이 생기고, 건강하다가도 병에 걸릴 수 있다. 장미꽃은 정말 아름답지만 나를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 가시덤불을 돋게 한 원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 주님, 주님께서 저를 하늘나라에 있는 당신의 성전에 살게 해 주시는 날에는 저 아름다운 별들이 제 발아래 있게 될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또한 저 별들이 이 시냇물 속에 비치듯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하늘나라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샘물에 비치고 있음을 알고 있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 맑은 시냇물처럼 고요하고 감미롭게 흐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화원에 서서 “성교회의 화원에서 왜 나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탄식했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병아리가 어미 닭 품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주님, 당신의 날개 그늘에서 쉬게 해 주소서.”라며 기도했고, 해바라기 꽃을 보고는 “주님, 제 영혼이 이 꽃처럼 당신의 사랑으로 환하게 피어날 날이 언제쯤 오겠나이까?”라고 말했으며,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색색의 오랑캐꽃을 보고는 “내 생각도 이와 같구나.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아무런 실천도 하지 못하니…….” 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 찬송하도록 피조물을 돕는 사람들에게는 큰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나는 세상 만물을 나의 영적 진보에 이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바울라 성녀를 위해서 비석에 새긴 경건한 글을 읽어 보십시오. 성녀가 항상 품고 있었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영적 생각을 알면 매우 놀랄 것입니다.
화살기도 없이는 관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노력을 한다 해도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화살기도가 없으면 휴식은 나태로 변하고, 노력을 해도 초조함만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을 신심 수행에 자주 이용하기를 바랍니다. -신심 생활 입문에서 발췌(2016년 3월 26일 토요일 부활성야 예수 부활 대축일에)
복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2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3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9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10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루카 24,1-12)
오늘의 묵상
이 밤은 우리가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하느님께 건너간 기념의 밤입니다. 이 밤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늘 우리 곁에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그분이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영원히 함께 머무르시려고 다시 오실 그 영원한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두 남자는 여인들의 정성에 응답하신 주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이 무덤에까지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했기에, 그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맨 처음 접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 무덤을 들여다보고, 일어난 일을 놀라워하며 돌아갑니다. 부활 소식을 듣는 것도, 또 그 소식을 믿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직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밤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는 은총의 밤입니다.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부활성야 예수 부활 대축일 매일미사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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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