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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사랑과 상실, 아름다움의 힘
이성혁(문학평론가)
『시와산문』 2022년 가을호에 실린 시들 중 이번 계간 평에서 다룰 시들을 뽑고 글 쓸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용산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다시 긴 우울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지 않았다. 다시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데 대해 참담한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가 뽑은 시들은 이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겠다. 이 참사를 어떻게 필자의 삶에 받아들이고 녹여내야 하는지 길을 찾지 못하겠기에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삶에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시는 이 비극적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을 잡고 필자가 주목한 시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운명에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것만 같아서 복숭아꽃 피는 봄을 내내 살 것만 같아서 어디서나 꽃밭일 것만 같아서 기뻤습니다
도화살 매화살 이 화살이 꽃살 무늬로 새겨진 방 안에 머물면
당신은 또 꽃 그림자처럼 스미겠지요
묵화로 그린 댓잎 같은 바람이 불어도 좋겠습니다
국화 향이 창호지에 스며 내내 달빛인양 고이면
당신의 도화살과 나의 도화살이 나란히 누워
꽃잎처럼 부드러운 서로의 살을 만지고
봄밤 같은 세월을 바위에 꽃잎 떨구듯 한 잎 한 잎 흘리면
바닥은 얼마나 놀랄까요?
꽃을 입게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의 모든 봄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아서
비 온 뒤 꽃 뿌리처럼 몰랐던 내가 돋아나는 것만 같아서
웃기만 해도 몸속에서 꽃향기가 출렁거렸습니다
- 이대흠,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전문
이 시는 우리의 유한한 삶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도화살桃花煞’은 좋지 않은 사주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도화살은 과도한 육체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화를 입게 된다는 사주이니 말이다. 하지만 육욕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도화’를 달리 해석해보면, 육욕을 넘어 아름다운 자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도화’를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으로 판정된 ‘도화살’ 사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도화살은 아름다움의 감각에 열려 있는 삶,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운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이다. 좀 더 좁혀 말한다면 도화살이 인도하는 아름다움은 자연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감각에 스며드는 세계, 그 세계가 주는 향취가 ‘도화살’의 아름다움이다. 국화 향이 달빛처럼 창호지에 스며들어 고이듯이 “꽃 그림자처럼 스미”는 당신과 함께, “부드러운 서로의 살을 만”질 때 느끼게 될 아름다움. 하여 위의 시에서 도화살의 ‘살煞(죽임)’은 세계의 살로 의미가 변전한다. 이 아름다움은 세계의 살들이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니, 철저히 육감적인 것이다. 도화살 사주를 가진 자는 자기 몸을 열고 세계의 살을 받아들이고 세계의 살을 만지고자 손을 뻗치는 운명을 살아간다. “꽃을 입”고 살아서 “몸속에서 꽃향기가 출렁거”리는 삶, 그것은 “봄밤 같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비 온 뒤 꽃 뿌리처럼” “내가 돋아나는” 삶이다. 세계의 살이, 그 아름다움이 ‘나’를 키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신’을 포함한 세계의 살과 필자의 살이 서로 스며들 때 느끼게 될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어떤 아득함을 느꼈다. 그리고 슬펐다. 필자가 잃어버린 어떤 삶이 시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필자에게 이젠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는 삶이었다. 아마 필자가 시인이 아니기에 더욱 슬픔을 느끼는 것이겠다. 시인은 바로 저 도화살의 운명을 사는 사람 아닐까. 시인은 언제나 세계의 살갗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 ‘임’, ‘너’를 그렇게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 모른다.
너에게 가는 길이 달팽이 속도였다면
너에게 돌아서 온 길에 들은 찬바람 소리는
시간의 어두운 쪽에서 흔들리고 흔들렸다
죽순이 뿌리내리며 흙의 내력을 아는 것처럼
너를 다 읽은 그 순간
세상의 푸른색이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불우한 사랑은 이른 저녁 빛이라서 아주 천천히 번지고
칸칸의 욕망을 그린 그림처럼
눈을 뜨자 여름 바람이 떨어졌다
그때 너를 기다리는 순간들이 모여들었다
다시 한번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움의 기도가 피어나는 하지에는
너에게로 갈 수 없는 날들이 빠르게 자랐다
- 문정영, 「모소 대나무」 전문
물론 시인이라고 해서 ‘당신’과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만남이 있다고 하더라도 헤어짐은 따라온다. 그래서 슬픔과 그리움의 서정시가 써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슬픔의 울림이 많은 독자에게 공명하면서 서정시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노래가 된다. 그리고 슬픔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이대흠의 시가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사랑보다는 헤어지고 난 뒤의 시간에 초점을 맞춘 위의 시는 이러한 서정시의 모범처럼 생각된다.
위의 시에 따르면, 시인의 사랑은 ‘너’를 읽으면서 이루어졌다. ‘너’를 읽는다는 행위는 “죽순이 뿌리내리며 흙의 내력을 아는 것”과 유사하다. 이대흠의 시를 독해할 때를 따라 생각해 보면, 흙은 너의 살, 세상의 살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너’가 세상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시인의 사랑은 ‘너-세상’의 살 속에 뿌리내리며 ‘너-세상’을 읽어나가는 일이다. 이때 ‘나’ 안에 “세상의 푸른색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시인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사랑은 ‘달팽이 속도’처럼 더뎠다고 한다. 이에 반해 너와 헤어지고 난 후 “너에게로 갈 수 없는 날들이 빠르게 자랐다”라는 것. 사랑은 불우해서 “이른 저녁 빛”처럼 천천히 번지는데, “너를 기다리는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눈물은 ‘여름 바람’처럼 순식간에 떨어진다. 위의 시는 이처럼 사랑의 시간과 슬픔의 시간이 보여주는 속도의 차이를 섬세하게 포착하면서 서정을 창출한다. 특히 너와 헤어지고 돌아올 때의 심정을 “시간의 어두운 쪽에 흔들리고 흔들렸”던 ‘찬바람 소리’로 형상화한 대목은, 청각과 시각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상실감을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독자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다.
1990년쯤 영화일 겁니다
어려서 본 영화라 다시 보고 싶은데
줄거리만 생각나고 제목은 기억이 안 나요
주인공 소년은 다른 세계로 가게 됩니다
동화 나라 같은 곳에서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그들의 왕국에서 살게 되죠
소년은 그곳에서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재밌는 설정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원이 이뤄질 때마다
현실 세계에서의 소중했던 기억을 잊게 됨을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되죠
마지막에는 부모님의 이름도 잊게 됩니다
소년은 도망치기 위해 성벽을 오르는데
디디거나 잡을 것이 필요해 소원을 빌게 됩니다
소원은 이뤄지고 그것을 잡고 오르며
스스로에게 묻죠, 무엇을 잊었는지를
사촌 형 집에서 졸음과 다투며 봤던 기억이 나네요
- 이날, 「영화 제목 궁금해요」 전문
이날의 위의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화법과 멀리 떨어져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기억나는 일을 편하게 말하는 화법으로 시가 전개되는 것이다. ‘시적’ 이려고 하는 어법을 버리고자 한 시겠다. 하지만 이 시가 말해주는 우화가 시적인 것을 제공한다. 어떤 ‘소중했던 기억’을 잃어버리는 역설적인 과정이 그 우화의 내용이다. 필자가 이 시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 상실이라는 주제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며 이젠 그것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상념에 빠지곤 하는 필자로서는, 위의 시에 등장하는 소년이 필자 자신을 가리키는 듯했던 것이다.
위의 시는 액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1연과 4연에서 화자는 제목은 기억 안 나고 줄거리만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그 중간의 2연과 3연은 바로 그 영화의 줄거리가 서술된다. 테두리의 내용과 영화 줄거리는 기억 상실이라는 내용으로 조응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소년 이야기가 바로 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영화 줄거리가 보여주는 우화의 핵심은, 동화 나라에서 무엇인가 소원이 이루어질수록 “현실 세계에서의 소중했던 기억을 잊게” 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는 도중에는 그 사실을 모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부모님 이름도 잊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또는 잊었을 때야 상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늦게 그 상실의 사실을 인지하게 되며, 결국 무엇을 잊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도달해버린다. 다만 무엇인가 상실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 그래서 저 소년처럼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을 잊었는지 알게 해달라는 것이 될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물음. 위의 시는 무엇인가 소망하고, 그 소망을 달성해나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삶의 양태에 관하여 물음을 던진다. 한편, 죽음을 조명하고 있는 아래의 시는 삶의 본질에 대해 위의 시와는 다른 방향에서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안개의 길 헤매고 와 여기
이렇게 바람으로 닿으면
서로 다른 빛을 한 가벼운 구름들을 만나지
정적이 흐를 뿐이야 아주 가끔씩 뛰어가는 다급한 구두,
우리 생활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인생 별거 없어 종족 번식인 거 같어
밤새 아픔을 견딘 링거병이 흔들리며
딱딱한 표정의 흰 벽에게 인사를 하지
헐떡거리며 들어온 금요일이
나는 잘 견뎌냈어, 아직은 더 살아야 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툼한 약 봉투가 들어찬 가방 속으로 들어와
이젠 자신을 돌볼 여유를 가져야 해
나이 들수록 급해지고
복지관에선 부동산보다 연금이 인기 있고
노인정은 왕년보다 소주 삼겹살 쏘면 최고라지
텅 빈 바다를 섬으로 메우며 살아도 좋은데
친구 부음 소식을 받고
밥 약속을 미룬 것이 후회되어 허공만 바라보지
모든 죽음에는 이야기가 있듯이
모든 이별에도 이야기가 있고
다니던 일터에서 치워진 의자처럼
소모품이 되어가는 누군가
오늘의 수명이 가벼워지고
죽어가는 꽃들을 향한 경건한 마음이 들어
약점이 모여 강점이 되고 있는 나는
병원 문을 비집고 들어와
숨을 토하는 실핏줄 도드라진 여윈 햇살을 한 움큼 움켜쥐지
- 안명옥, 「종합병원 의자에 앉으면 모든 게 잘 보이지」 전문
시가 보여주는 죽음에의 직면이 시를 읽을 때 숨 막힘을 유발한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는 다가온 죽음을 인지하면서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사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 다른 빛을 한 가벼운 구름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삶은 구름처럼 가벼워지고(“오늘의 수명이 가벼워지”는 삶), 바람에 가까워지리라. 바람으로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종합병원이다. 그곳은 투명한 곳이다.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단순성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합병원은 ‘모든 게 잘 보이’는 곳, 삶의 본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시인은 “흰 벽에게 인사를 하”는 “밤새 아픔을 견딘 링거병”이나 “아직은 더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금요일’의 입을 빌려 고통과 싸우는 병자들의 마음을 말해준다. 씁쓸한 것은 죽음에 직면한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 생활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인생 별거 없어 종족 번식”일 뿐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인생은 인류라는 종족의 번식에 사용된 삶일 뿐이라는 것. 게다가 화자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이 “일터에서 치워진 의자처럼” 사회에서 소모품으로 사용되다가 폐기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삶에는 마음을 동반한 ‘이야기’가 있다는 깨달음. “친구 부음 소식을 받”았을 때 “밥 약속을 미룬 것”에 대한 후회의 마음은, “모든 죽음”과 “모든 이별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깨달음으로 시인을 인도한다. 죽음은 허망해 보이지만, 남은 자들에게는 깊은 마음을 일으키고 이야기를 남긴다. 시인이 병실에서 “경건한 마음이”든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이 마음은 어떤 사랑을 생성시킨다. 시의 마지막 행에서 “실핏줄 도드라진 여린 햇살을 한 움큼 움켜쥐”는 행위가 바로 사랑의 표현 아니겠는가. 곧 사라질 것 같은 햇살, 이는 숨을 힘겹게 토하고 있는 병자의 살갗이기도 할 것이다. 이 죽어가는 이의 살갗과 접촉하는 것은 허망에 빠질 수 있는 그의 삶을 껴안는 행위다. 죽음의 앞뒤에 사랑이 남는 것이다.
파도가 삼킬 수 없는 만큼만 남아
그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너무 엄청나서
마치 육지인 것처럼 착각하여
내일을 모르는 물개가 되어
유빙에 올라앉은 방랑자처럼
날카로운 각을 허물며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침내 뜨거운 적도의 바다까지 가서
사람들 기억 속 오래오래 기억되겠지
마지막 빙산의
마지막 헤엄을
- 심우기, 「빙산」 전문
죽음은 인간이나 동물의 삶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기성의 자연에서도 죽음은 시시각각 이루어지는 중이다. 알다시피 현 인류 앞에 놓인 가장 큰 위기인 ‘기후 위기’는 기성 자연의 붕괴를 가져오고 있다. 심우기의 위의 시는 녹고 있는 ‘빙산’의 모습, 다시 말해 죽어가고 있는 빙산의 모습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간명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스케일이 크다. 빙산의 해빙이 가져올 결과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많은 도시가 물에 잠기게 되리라는 것을. “마지막 빙산의/마지막 헤엄”이 “사람들 기억 속 오래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그 마지막 헤엄이 끝났을 때 인류에게 큰 재앙이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적도까지 내려가면서 바다에 완전히 용해되어버릴 빙산의 존재는, 인류의 안위를 상징한다. 빙산이 사라지면 인류의 숱한 삶도 사라진다.
아직 빙산은 뜨거운 적도까지 흘러가지 않았다. 적도까지 흘러간다면 빙산이란 존재는 사라지고 없을 터, 저 빙산은 아직 다 녹지 않았지만 겨우 “파도가 삼킬 수 없는 만큼만 남아”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이다. 빙산은 현재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인데, 하지만 “조용히 부드럽게” 무너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인류의 운명이기도 한 빙산의 운명은 “마치 육지인 것처럼 착각하여” “유빙에 올라앉은” 물개처럼 “내일을 모르”게 되었다. 다만 방랑자처럼 바다를 떠돌 뿐이다. 하지만 그 방랑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까지 위의 시를 현 인류 문명의 위기를 고지하는 비판적인 시로 읽은 셈인데,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서정적 주체의 실존적 상황을 말해주는 서정시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시대에 위의 시를 이러한 방식으로 읽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기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래의 시는 그 대안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어떤 방향은 시사해주지 않나 생각된다.
냉장고에 메모지를 붙이는데
조그만 자석이 큰 냉장고를 덥석 문다
자석의 강인한 턱을 실감하는 순간
세상을 물고 있는 것은 골리앗이 아니라
다윗인 걸 알았다
너를 감동하게 만든 것도 사소한 진심,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구리반지다
태풍은 잔인하지만, 봄바람은 꽃향기를 남긴다
0.3평에 외롭게 핀 거제도 민들레
들꽃이 피는데 넓은 땅은 필요하지 않았다
기댈 구석도 없는 연약한 자세로
코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작은 것의 힘,
세상을 들어 올리는 힘은 덩치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작은 마음에 있다
민들레의 고공행진
새처럼 날아 하늘에 닿고
우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 전선용, 「작은 것의 힘」 전문
위의 시는 우리가 우리 앞에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해준다. 인류의 위기라는 문제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우리는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큰 문제도 작은 것의 힘을 인식하고 이로부터 위기 극복의 힘을 길어 올린다면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들어 올리는 힘은” “너를 생각하는 작은 마음에 있다”라는 시의 전언을 믿는다면 말이다. 세상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질 위기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일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위기에 빠뜨린 원인인 “크고 강한 것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당위를 붙잡게 될 것이며, 그 “크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작은 것의 힘”을 찾아내기 시작할 것이다.
작은 것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너와 나의 마음속에서도 이 작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시에 따르면 ‘큰 냉장고’에 붙어 있는 ‘조그만 자석’도 작은 것의 힘을 보여주며, ‘사소한 진심’이 “너를 감동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고 강”한 태풍의 잔인함보다 “꽃향기를 남”기는 봄바람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작은 장소에서 피어나는 민들레는 봄바람에 향기로운 아름다움을 싣는다. 이 아름다움이 태풍이 할퀴고 간 대지를 다시 풋풋하게 재생시킨다. 이 향기를 남기는 민들레의 아름다움이 바람에 날리며 “새처럼 날아 하늘에 닿”으면서, 하늘을 위로 들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점점 낮아지고 있”는 우리와 대비되면서 말이다. 인간인 우리는 저 작은 것의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작은 것들의 힘을 박탈하면서 크고 강한 것들만을 만들어내고 숭배한다. 그러면서 가볍게 비상하지 못하고 점점 크고 강한 것들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우리가 만든 것들에 우리가 종속되면서 빙산처럼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저 민들레의 ‘작은 것의 힘’을 복원하여 ‘하늘-세상’을 들어 올리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소한 진심’을 복원하는 것에서부터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일인 것,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복원하며 만들어내는 시의 작업이 바로 ‘작은 것의 힘’을 끌어 올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