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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전도 스페인 국기 | 스페인Spain(España) *수도: 마드리드(Madrid) |
스페인은 유럽 대륙에서 남서쪽으로 삐쭉 내민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에 위치하며, 피레네 산맥(Pyrenees)을 국경으로 프랑스와 맞닿아 있는데 피레네 산맥 가운데에는 작은 나라 ‘안도라(Andorra / 인구 8만) 공국(共國)’이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은 대서양을 마주한 포르투갈(Portugal), 동쪽이 스페인(Spain)이다. 남쪽은 지브롤터 해협(Strait of Gibraltar/ The Pillars of Hercules)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 북단의 모로코(Morocco)와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은 지중해(Mediterranean Sea)이다.
* The Pillars of Hercules - 헤라클레스의 기둥, 땅의 끝(이베리아 반도 끝과 아프리카 북단)
<스페인 역사>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Santander) 지방의 선사시대 유적인 알타미라(Altamira) 동굴벽화가 보여주듯 스페인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500년간은 로마의 지배기로 이 지역을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했다. 당시 스페인은 덤불이 우거차고 토끼들이 많이 살았다는데 히스파니아란 ‘토끼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후 북유럽의 게르만족이 잠시 차지하였다가 7세기 초 아프리카의 무어(Moor)족이 침공하여 이슬람국인 그라나다(Granada) 왕국을 건설하고 15세기 말까지 800여 년 간을 통치하는데 이때 이슬람 건축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알람브라(Alhambra) 궁전, 헤네랄리페(El Generalife) 정원 등이 건축된다.
15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국인 동남 해안지방의 그라나다(Granada) 왕국과 북부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한 바스크(Basque) 지방의 나바라(Navarra) 왕국, 북동부 지역의 아라곤(Aragon) 왕국, 이베리아 중부의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4개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서쪽은 지금처럼 포르투갈(Portugal)이 있었다. 1474년, 이사벨(Isabel)여왕 1세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아라곤의 페르난도(Fernando) 2세와 정략결혼하고 카스티야의 왕위를 쟁취하는데 결혼당시 이사벨이 18세, 페르난도가 17세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총력을 집중하는데 결국에는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바라 왕국까지 합병하며 스페인 통일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
이사벨 여왕은 용기와 배짱이 두둑하여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게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까지 처분하여 배를 대어주는 이른바 벤처 투자를 하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엄청난 부를 안겨주어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끌어낸 여왕으로 유명하다. 그 이후 해양대국, 스페인 무적함대의 밑거름이 된 것도 이사벨 여왕의 업적이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피사로(Francisco Pizarro), 코르테즈(Fernando Cortés) 등을 앞세운 중남미 대륙의 진출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엄청난 부를 쌓게 되는데 후세에 약(藥)이 되었는지 독(毒)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들 정복자들이 중남미 인디오들에게 저지른 숱한 만행들은 지금까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고 유럽 백인들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디오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은 볼리바르(Bolivar), 체 게바라( Che Guevara)와 카스트로(Fidel Castro) 등으로 대변되는 혁명가들을 낳아 남미에 좌파정권이 들어서는 빌미가 되었다. 또 자본주의 선진국에 종속되어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후진국들의 탈 종속(脫從屬)을 부르짖는 해방신학(解放神學)이 싹트게 된다.
이로부터 수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대부분 나라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현재 인디오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모국어 대신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으니 스페인의 자랑일까, 수치일까??
스페인 내전(1936~1939) 이후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서 36년 간 군부 독재를 겪었고 그 이후 민주화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1>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포르투갈의 중세도시 포르투(Porto)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을 달려 스페인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있는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포르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언제 국경을 지났는지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비고(Vigo)를 지나는데 작은 강과 그 주변으로 그림처럼 들어선 조그만 도시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 있는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산티아고(Santiago)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종착점이다.
이곳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에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의미로,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별빛이 비추는 들판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 야고보 이야기>
성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데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데 어머니는 살로메이다. 이들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애제자로, 항상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최측근이었고 예수님이 야고보를 아꼈을 뿐 아니라 야고보도 예수님을 극진히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성질이 불같아서 예수님이 ‘천둥의 아들들’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고 한다.
신심이 깊었던 살로메는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묻는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그러자 둘이 동시에 “예, 할 수 있습니다!” 이 맹세를 들은 주님은 예언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이 말씀하신 잔은 바로 죽음의 잔, 고통의 잔,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잔이라는 뜻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낙담에 빠져있던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라고 하시자 야고보는 즉시 실천에 옮긴다. 당시 땅의 끝은 동쪽은 히말라야, 서쪽은 이베리아 반도였다고 한다.
야고보는 두 제자와 함께 수만리 떨어진 땅 끝 이베리아반도(스페인)의 갈라시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주후 44년) 야고보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했으며”(사도 12,2)
이리하여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데 이는 어머니 살로메가 간청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님의 오른쪽에”,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 야고보를 중세 스페인어로 “성 이아고(Saint Iago)”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합쳐져서 산티아고(Santiago) 가 됐는데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 이다. 또 일명 산디에고(San Diego)로 표기되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는 제자 둘과 함께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오며 자신이 죽으면 복음을 전한 이곳 땅 끝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야고보 순교 후 두 제자는 야고보의 시신을 모시고 이곳 갈라시아로 와서 묻으니 곧 오늘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그러나 실은 야고보의 무덤을 찾지 못하다가 814년, 은수자(隱修者) 성 펠라지오가 한밤중에 빛나는 이상한 빛을 보고 부근의 동굴 속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즉시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시고 이곳 산티아고로 와서 모셨다고 한다. ‘별빛이 비추는 들판을 따라 걸어서....’ 그 후 유해를 봉안하기 위한 성당 건축에 착수해 829년 첫 성당 건물이 완공되어 유해를 모셨고,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Jean-Pied-de -Port)에서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Pyrénées)의 기슭을 따라 걷는 길인데 대략 800km 정도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25일 정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한 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하며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있다. 이곳은 세계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이 찾지만 특히 한국의 순례자들이 많아서 우리가 갔을 때도 여러 한국 팀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단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젊은이들도 있어서 놀라웠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길 표시 가리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데 우선 웅장한 건물에 놀라게 된다. 본당 건물 앞에는 널찍한 광장이 시원스럽고 부속건물들도 엄청나게 많고 웅장하다. 뒤쪽에도 널찍한 공원도 조성되어있고 건물들 사이로 여유 있는 공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내 어느 곳에서나 성당을 향하여 언덕의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길바닥에 놋쇠로 2m 정도 간격으로 가리비모양을 붙여 놓았는데 방사선 모양의 선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성당에 도착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천 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온 길로,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위와 같은 가리비껍질 표식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성당 앞 광장에는 조개껍질과 조롱박을 매단 지팡이를 팔고 있다. 이 순례길의 순례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12세기에 “산티아고 기사단(Orden de Santiago/일명 성 야고보의 검우회(劍友會)”이 조직되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스페인군은 전쟁 때 돌격함성이....‘¡Santiago y cierra, España!’ 산티아고와 함께 돌격, 에스파냐!
성 야고보 유해 참배 법석이는 참배객들 혼자 순례를 온 청년
대성당의 입구에는 야고보 성인의 동상이 있는데 모두들 만지고 입을 맞춘다. 대성당은 내부수리를 하는 중이어서 어수선한데 특히 이 성당의 자랑은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이름의 어마어마하게 큰 향로(香爐)를 성당 천정에 매달아 사제 8명이 줄을 당겨서 분향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수리를 하느라 칸막이를 하고 천으로 막아놓아 보이지 않는다. 성당 정문은 닫혀있고 뒷문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하고 있다. 다행으로 성 야고보의 유해는 참배할 수 있었는데 본당 제단 밑 지하에 모셔져 있었는데 너무나 작고 소박해서 서글픈 느낌이 들었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니 눈물이 난다.
이곳에서 혼자 순례길을 걸어온 전북대 출신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짬을 내서 25일 동안 걸어 오늘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너무 대견해서 격려의 말을 건네고 순례 내내 들고 왔다는 태극기 귀퉁이에 격려의 글도 써 주었다. 맨 마지막에 “73세 세계배낭여행가 白忠基Augustino..”
그런데 이 녀석, 말은 안했지만 태극기의 깃대를 반대쪽에 매었다!! 멍청한 녀석... ㅎ
이곳에서 2박을 했는데 다른 곳은 가지 않고 이곳을 두 번 와서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그늘에 앉아 쉬다가 5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 둘... 45일 동안 걸어서 도착했다고 한다. 헐~
<2> 수도 마드리드(Madrid)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곧바로 마드리드로 왔는데 버스로 장장 10시간이나 걸린다. 스페인 북부지역인 이곳은 넓은 산지(山地)가 분포하는데 제법 높은 산들도 있고 산림이 울창하다.
마드리드(Madrid)는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인구는 330만 정도지만 인근의 도시들을 합친 광역인구는 650만 정도로 명실 공히 스페인의 정치, 경제의 중심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당시 수도(首都)였던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인데 서기 1561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수도를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서 오늘의 마드리드가 되었다. 구시가(舊市街)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는데 중심부는 라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 있고 서쪽에는 마요르(Mayor) 광장이 있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넓은 프라도 가(街)가 길게 뻗어있고 그 동쪽에는 프라도 미술관(Prado Museum)이 있다.
마드리드(Madrid)라는 도시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는데 옛날 한 소년이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고 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곰이 소년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소년의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려고 무작정 달려오자 나무위에 있던 소년이 “마드레 이드(¡Madre, id!/‘엄마, 도망가!’) 하고 소리를 쳤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는... 정말일까? 『¡Madre, id!⇒Madrid』
마드리드 시내 중심 솔(Sol) 광장의 가운데에는 나무를 붙잡고 위를 쳐다보며 서 있는 곰 동상이 있는데 꼬리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나 어쩐다나...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다 나도 꼬리를 만졌다. ㅎ
이 곰이 서 있는 포인트가 마드리드의 정 중앙이라는 설명... 마드리드 명칭 유래와 연관이 있을까?
마드리드 왕궁 알무데나 성당 솔 광장(Puerta del Sol)의 곰
스페인 건축물의 절정이라고 평가받는 마드리드 왕궁은 18세기에 지어진 왕궁인데 원래 9세기에 지어진 이슬람의 요새인 알카사르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왕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2,800여 개 이상의 방과 135,000m²의 크기로 유럽을 통틀어서 단연 최대의 크기라고 하는데 그 화려함과 규모에 놀랄 만하며 마드리드 관광의 대표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다.
황금수레(마드리드 대성당) 마드리드 대성당 마요르(Mayor) 광장
마드리드 대 왕궁 바로 앞에는 고딕식의 너무나 아름다운 알무데나(Almudena) 성당이 있다.
7~8세기 경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점령하며 성벽 안에 숨겨 놓았던 마리아 상을 300여 년이 지난 후 발견되어 이 자리에 성당을 건축하여 모셨다고 하며 정식명칭은 ‘Catedral de Santa Maria real de Almudena’이다.
또 크지는 않지만 소박해 보이는 마요르(Mayor) 광장은 가운데 필리페 3세의 기마상이 있는데 주변은 붉은 3층 건물로 빙 둘러싸인 4각형 광장으로 온통 카페와 야외 식당들이 들어서 있는 휴식공간이다.
이 광장에서 투우 경기나 야외극, 종교재판 등이 열렸다고 하고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300년 전통 통돼지구이집도 있다고 하던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았던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프라도 미술관은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박물관에 가깝다고 하겠는데 수많은 대작의 성화(聖畵)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프라도 미술관 아담과 하와(루벤스) 고야 동상(정원)
12세기 초에서 19세기에 걸쳐 제작된 유럽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보유하고 있는 미술품은 회화(繪畵)작품 7,800여 점(장소가 없어 1,300점 정도만 전시), 판화(版畵) 2,000여 점, 동전과 메달 컬렉션 1.000여점, 장식 미술작품 2,000여점 등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관람객이 찾는 박물관 중에서 세계 11위, 연 관람객 2백 73만 명(2010 통계)라고 한다.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고 방마다 감시원이 지키고 있어서 틈을 보아 재빨리 루벤스 그림 앞에서 한 장을 찍었다.. ㅎ 무엇보다 어머 어마한 크기의 17~8세기 성화 대작들이 관람객들을 압도하고, 세계적인 유럽 대가들의 작품들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사진을 못 찍게 하니.... 인터넷에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작품들을 몇 점 추려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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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십자가 내림(바이덴)②성모의 죽음(만테냐)③양과 함께 있는 성가족(라파엘)④세여신(루벤스)
⑤무염시태(無染始胎/무리요)⑥십자가를 짊어짐(그레코)⑦파리스의 심판(루벤스)⑧불의시험(베루게테)
⑨성삼위일체(레스파뇰레)⑩아담과 이브(뒤러)⑪마르가리따공주(베라스케스)⑫옷입은 마야(고야)⑬옷벗은 마야(고야)⑭카를4세 가족초상(고야)⑮바쿠스의 승리(베라스케스)
우리가 갔을 때 미술관을 수리하는 중이어서 바깥을 온통 철골과 천으로 감싸여있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부는 공개한다. 바깥 휘장에 미술관 역사가 200년이라는....
성 제로니모 성당 까를로스 3세 기마상 아름다운 거리의 분수대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 제로니모 성당(Catedral San Jeronimo el Real)이 있는데 너무나 건물이 아름답다. 솔(Sol) 광장 앞에 있던 까를로스 3세 기마상도 멋있어서 올려본다. 마드리드는 너무나 볼 것이 많아서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도 알쏭달쏭하다. 길거리의 분수대도 너무나 멋지다.
<3> 성곽(城郭)도시 톨레도(Toledo)
톨레도 알카사르 엘 그레코 미술관 산토토메 성당
톨레도(Toledo)는 스페인 중남부 카스티야라만차(Castilla-La Mancha)지방 톨레도 주의 주도(州都)로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70㎞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기원전 2세기, 로마군이 점령당하여 성벽을 둘러쌓고 톨레툼(Toletum)이라고 했다는 중세도시인데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알카사르(Alcázar) 성채가 아름답고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수도교, 고딕식 산토토메(Santo Tome) 가톨릭 성당, 엘 그레코 박물관 등이 있는 고색창연한 역사도시이다. 톨레도는 1085년 알폰소 6세에게 점령당한 후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적ㆍ사회적 중심지가 되었다는데 1560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인구 6만의 중소도시로 전락했지만 스페인의 ‘작은 로마’라 불릴 정도로 오래된 도시이다.
톨레도에서 가장 유명한 톨레도 대성당은 13세기에 페르난도 3세(Fernando III)에 의해 이슬람 사원의 유적지 위에 건축된 것인데 이사벨 여왕의 아들인 후안 왕자가 14살에 죽자 이곳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아들이 죽자 이사벨여왕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하늘에서도 이곳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이곳을 영원히 변화하지 말도록 하라 이르고 세상을 떠난다. 덕분에 이사벨 여왕이 죽은 지 500년이 넘었지만 톨레도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사벨 여왕은 딸 넷, 아들하나 5남매를 낳는데 큰 딸 캐서린은 영국왕 헨리 7세의 큰아들 아서(Arthur Tudor)와 결혼하지만 5개월 만에 죽어 16세에 미망인이 된다. 헨리 7세가 죽자 아서의 동생 헨리 8세가 왕위를 이어받고 캐서린은 그와 재혼하여 왕비가 된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시녀였던 ‘앤 불린’에 눈이 뒤집혀 그녀와 이혼하고 앤과 결혼한다. 종교법으로 이혼이 불법이라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헨리 8세는 성공회를 만들어 합법화하고 자신은 성공회의 수장이 되고....
그런데 그 앤이 저 유명한 ‘1.000일의 앤(Anne of Thousand Days)’의 앤 불린(Anne Boleyn)으로 런던탑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바로 그녀이다. 헨리 8세가 죽은 후 캐서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메리 1세(Mary I)로 등극하지만 건강이 나빠 5년 만에 왕위를 내 놓고, 앤이 낳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알칸타라 다리 관광 꼬마기차 톨레도 전경
대성당 정면에는 문이 3개 있는데 가운데 있는 문이 ‘용서의 문’ 오른쪽에는 ‘최후의 심판의 문’ 왼쪽에는 ‘지옥의 문’이 있으며, 엘 그레코, 고야, 반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박물관도 있다.
마드리드에서 1시간여 달려 버스를 내리면 성 바깥에서 내리게 되는데 언덕을 오르는 긴 에스컬레이터가 나온다. 성문을 통과하여 꼬불꼬불 골목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그만 광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톨레도 성채의 중심부인 소코도베르광장(Plaza de Zocodover)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에서 투우도 하고 축제도 열리는 중앙광장이었다는데 너무나 협소하고 항상 관광객들이 바글거린다. 톨레도는 여러 갈래의 좁은 골목과 플라자, 회랑으로 미로처럼 얽혀있고 로마와 유대인의 예배당, 아랍인의 모스크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사방팔방으로 내려가는 작은 골목들이 있는데 이슬람 양식의 건물들도 섞여있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광장에서 귀여운 꼬마기차 조코트렌(Zocotren)을 타고 골목길을 따라 꼬불거리며 내려가 성 밖으로 나오면 타호(Tajo)강을 가로지르는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를 건너가게 된다.
이 다리는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 지방에서 발원해서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타호강(Rio Tajo)의 협곡을 건너는 중세풍(中世風)의 다리이다. 타호강 협곡에 거대한 교각을 세우고 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다리로 로마시대의 석재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리 양쪽으로는 거대한 망루도 있었는데 지금은 톨레도 성곽 쪽 망루만 남아 있다. 알칸타라(Alcantara)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라는데 강변의 뷰-포인트(View-Point)에서 보는 톨레도(Toledo)시의 풍경은 동화속의 도시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아래로는 타호(Tajo)강의 거센 물살이 굽이치고, 성벽너머로 웅장한 중세풍의 건물들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위풍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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