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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볶는 여자
최미희
……그러므로 소금은 빛이요, 생명이다.
백사장 너머로 강물이 낮게 흐른다.
둑길 끝, 몇 그루 미루나무 아래 던져진 슬레이트집은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르고 있지만 지붕은 군데군데 깨어져 바람이라도 불면 곧 날아갈 듯 쇠락하다. 미연은 차에서 내려 소금 포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가,‘소금 굽는 집’이란 간판을 받치고 있는 유치원생 용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유치원을 하는 친구가 망가졌다고 버린 것을 주어다 놓은 의자다. 오늘처럼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미연은 가끔 이 의자에 앉아 아이를 생각한다.
엄마예요?
제 아빠의 손을 잡고 뛰어 나와 반겨 줄 것만 같다.
미연은 처음 남편과 함께 이 집을 발견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연암사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던 날, 남편은 미연을 위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살자고 하였다. 마침내 이 집이 눈에 띄었고, 천우신조로 헐값에 내놓은 매물임을 알게 되었다.
여보, 꿈에도 그리던 풍경이에요.
그렇지?
부부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죽이 맞아 집을 사 수리를 하고 이사를 왔다. 이사래야 집 전체를 옮겨오는 게 아니라 별장 삼아 쓸 집이라 간단한 세간만 옮겨 오면 되었다.
우리 여기서 차라도 팔면서 살까.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남편은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소금도 볶을 거예요, 저도 연암 스님의 뜻을 따라야죠.
위암에 걸려 온갖 고생 끝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산사로 피접을 갔던 미연은 그 절에서 소금을 굽는 연암스님을 만나 다시 생환의 기쁨을 맞았던 것인데, 그 분도 몸이 안 좋아 산으로 들었다가 우연히 소금 굽는 노인과 인연이 되어 건강을 되찾았다고 했다. 미연은 자신도 출가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사람에겐 다 갈 길이 정해져 있지요. 스님은 물 흐르는 데로 살라고 하였다.
꿈만 같아.
다시 살아 돌아 온 아내가 믿기지 않은 듯 남편은 지붕을 덮은 잡 덩굴을 걷어내고 망가진 내부를 손질했다. 그리고는 <강변연가>를 연상 시키는 근사한 찻집을 만들었다. 먹고살 것은 여기서 스스로 마련해야할 것 아냐? 미연은 그 말뜻을 잘 못 이해했다. 당연히 남편과 함께 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인데 그게 아니었다. 강변연가는 둘이서 함께 하는 집이 아니라 미연이 혼자 경영하는 집으로 작정 되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모래사장 위로 늦은 가을볕이 내려와 빛나고 있다. 미연은 개량 한복의 적삼자락을 털고 일어선다. 마당으로 내려가는 경사 길에 세워놓은 빨간 우체통의 뻥 뚫린 입으로 손을 넣어본다. 아침에 나갈 때‘다녀옵니다. 미연이 써 놓은 쪽지만이 텅 빈 우체통 안을 지키고 있다.‘부치지 못한 편지’ 삐뚤삐뚤 쓰여 진 일곱 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는 우체통, 가끔은 엽서 같은 것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주로 납세고지서 같은 것을 받았다가 전해준다. 미루나무 이파리 몇 개가 우체통 대머리 위에 떨어져 있다.
이파리를 쓸어내고 쪽지를 수거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린 다음 또 두어 걸음 내려간다. 소금 포대를 들고 들어갈 때는 이렇게라도 쉬엄쉬엄 걷지 않으면 힘이 들어 안 된다. 마당은 비질이 잘 돼 있다. 비질을 말끔하게 해놓으면 그 위에 난 발자국을 보고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가 있어 좋다. 미연은 이 마당을 그림자 호수라 부른다.
누가 왔다 갔는지 그 그림자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들어간 발자국만 있고 나온 발자국이 없으면 손님이 아직 그 안에 있다는 이야기임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발자국이 큰 남자의 흔적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았었는데 혼자 있게 된 뒤부턴 그런 생각이 드는 미연이다. 제 주인의 기척을 들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 나온다.
“우리 해탈이 심심 했구나? 엄마 소금 사러 갔다 왔어. 미안해.”
우는 아기를 어르는 엄마처럼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강아지가 미연의 발등에 턱을 얹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 전달식이 끝났다. 해탈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 보면 안에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겠다. 손님이 왔다 갔는지 차방에는 다탁 하나에 다기 세트가 놓여 있다. 미연은 언제부턴가 집을 비울 때도 문을 잠그지 않는 지혜를 배웠다. 이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주인이 없어도 들어와 차를 우려 마시고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손님에게도 자유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다기 아래 얌전히 접혀 있다.
차 잘 마시고 갑니다. 쪽지도 놓여 있다.
미연은 소금 포대를 다탁 위에 올려놓고 쪽지를 학처럼 접어 방명록 벽에다 꽂아 놓는다. 이 학이 천개가 되는 날까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무슨 목적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주술적인 마술이라도 걸어두어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가게를 처음부터 무인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교육을 핑계로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간 이후, 자주 집을 비워야 했던 미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당신은 여기가 좋으면 여기 그대로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사건건 시어머니하고 부딪치는 것보단 여기 있는 게 더 마음 편할 거야. 그게 소박인 줄은 몰랐다. 암이란 그게 언젠가는 집구석 말아먹는 병이잖아? 그러니 일찌감치 정리를 해야 한다는 시가집 식구들의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차 지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문득 마음에서 남편에 대한 분노가 불처럼 일면 훌쩍 떠나야 했던 미연에겐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그렇다고 가게 문을 닫아놓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좋았던 풍경도 남편과 아이와 함께였을 때의 일이었지 홀로 남은 후로는 견뎌내야 하는 생활의 터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주인 없는 차방에서 차를 마신 손님들이 방명록 벽에다 지폐나 메모를 꽂아놓고 간 것을 보고 미연은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하다는 것을 느낀다. 간혹은 남이 남기고 간 찻값까지 들고 가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일거라고 미연은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도 없을 때‘소금 굽는 집’을 찾은 손님들의 사연을 접고 접어 학을 만든다. 그 추억을 남기라고 색 색깔의 메모지까지 마련해 두었다. 천 마리의 학이 날개를 다는 날 나도 날개를 달리라. 날개를 달고 훨훨 학춤을 추리라. 그때까지 만이라도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학춤을 떠올리니 또 다시 끄윽 끅 트림이 올라온다. 요즘 들어 속이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미연은 받아놓은 지장수 한 사발을 마시고 뒤란으로 나간다. 흙 담을 타고 담쟁이 넝쿨이 부지런히 기어오르고 있다. 넝쿨손의 가느린 촉수가 역광을 받아 그 속살까지 드러내고 있다. 저 가느다란 손이 잡을 것을 부여안고 기어올라선 기어이 덩굴을 만들고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든다.
미연은 문득 오래 전 읽었던 오 헨리의 마지막 잎 새를 떠 올리며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를 쓸어보다가 그 중 제일 큰 옹기 독의 뚜껑을 열어본다. 어제 길어놓은 샘물 속에 도공의 손놀림인 듯 귀얄무늬 구름이 가득 담겼다
. “녹여도 되겠네.”
소금 녹일 물을 미연은 항상 독에서 하루 동안 묵힌다. 천연 유약인 잿물을 입혀 구운 옹기는 온도조절 효과가 크므로 소금이 녹기에 가장 알맞은 상태로 물을 보존해 준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물의 온도, 미연은 소금을 볶는 일에 있어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당신 이 정성을 먹는데 낫지 않을 병이 없을 거야. 남편은 미연이 소금 녹일 물을 마련하는 것을 보며 탄복을 했었다. 촤르르…….소금이 항아리 속으로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미연은 남편을 생각했다. 그 전 같았으면 소금포대를 번쩍 들 엄두도 못 냈을 뿐더러 이렇게 힘든 일 같은 것은 의례 남편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슨 일이거나 혼자서 다 해결해야 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시작도 말아야 한다. 기다란 주걱으로 소금을 막 저으려는데 안에서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연은 주걱을 걸쳐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예요.”
“…….”
상민이다. 아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남편의 아들이다. 미연은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목소리를 듣는데 왜 답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어떻게…지내세요?”
목소리보다 눈물이 먼저 흘러 미연은 한 움큼의 눈물부터 삼킨다.
“그냥….”
해 놓고 보니 상민도 미연도 말이 없다. 얼굴 못 본지 이태가 넘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엄두가 안 났다. 한 동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미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지내니?”
“네.”
그 뿐 또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녀석의 목소리는 너무 변해있다. 예전엔 계집애처럼 쫑알쫑알 무슨 말인가를 쉴 새 없이 나불거려 미연에게 입술을 꼬집히기도 하곤 했는데, 하긴 이제 변성기에 들 나이이기는 하다.
“상민아!”
“…….”
“나… 안 보고 싶니?”
차마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단 소린 못하겠다. 널 품에 안고 엄마야 누나야 노래도 불러주고 싶고, 모래사장에 나가 같이 마주보고 앉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모래무덤을 만들고 싶단 말도 하고 싶지만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아빠가 아파요.”
아빠 소리에 그만 온 몸의 감각기관이 날을 세운다.
“됐다! 그만 끊어라.”
“많이 아파요. 어쩌면….”
지붕 위 미루나무 가지에 새들이 열심히 뭔가를 물어 나르는 것을 보며 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여자는 어쩌고? 왜, 할머니가 시키던? 할 말이 많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진찰을 하기 전에는 내 몸이 왜 아픈지 알 수 없습니다. 진찰을 해야만 알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내 몸속에 들어와 이렇게 통증을 유발하는지요. 스님은 소금을 녹이는 과정이 진찰을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정화된 물에 소금을 풀어보면 온갖 나쁜 찌꺼기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했다. 그 찌꺼기들이 있어 소금 빛이 이렇게 탁한 것이라고 했다.
미연은 기다란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조금 전 상민의 전화를 떠 올린다. 아빠가 아파요. 그 평화롭던 생활을 깡그리 뒤엎고 갔으면 잘 살아야지 아프긴 왜 아파? 미연은 입술을 감쳐물며 주걱을 잡은 팔에 힘을 가한다. 휘휘, 소금이 풀리면서 말갛던 물빛이 희끄무레 탁해지기 시작한다. 주걱 끝이 가벼운 걸 보니 소금이 거의 다 녹은 모양이다.
이제 녹은 소금물에서 찌꺼기를 거를 차례다. 빈 옹기 독 위에 삼베 보자기를 걸친다. 미연은 박 바가지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남편의 이마에 있는 몇 개의 곰보자국이 생각난다. 우둘투둘 바가지의 내부를 한번 쓸어보고는 녹인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렸다. 잘 닦아둔 빈 옹기 바닥으로 소금물 떨어지는 소리가 투명하게 울려 올라온다.
잘 구운 독일수록 맑은 소리가 납니다. 스님은 손가락을 퉁겨 독을 때리곤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소리가 탁한 그릇에 장을 담아보면 영락없이 장맛이 안 좋아요. 좋은 그릇이 좋은 음식 맛을 내듯 좋은 그릇에 소금을 녹여야만 최상의 약효를 냅니다. 스님은 유독 옹기 그릇 고르는 일에 신중했다. 그런 스님의 정신을 따라 이 독도 소리를 들어보고 골라온 독이다. 두 번째 바가지에서 떨어지는 소리는 처음 소리보단 약간 탁하다. 세 번째, 네 번째…. 녹인 소금물이 걸러지면서 떨어지는 소리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소리도 달라진다. 섞인다는 뜻이다. 맨 밑바닥을 채우는 맑은 소리를 시작으로 이제 깊어지는 소리로 변하는 것이라 했다. 소리가 깊어질수록 삼베 보자기엔 이물질이 쌓이기 시작한다. 미세한 티끌로부터 제법 굵은 덤불 같은 것도 걸러지고 어떤 때는 머리카락이 걸러지기도 한다. 이렇게 걸러내는 작업은 소금 볶는 일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다.
미연은 삼베 보자기 위에 걸러진 찌꺼기를 보며 꼭 남겨진 자기를 보는 것 같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결혼 초기부터 자주 아프기 시작한 미연이 결국에는 암 진단까지 받고 그 독한 항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마음이 허전해졌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딴 여자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산중에 들어가 절간생활까지 했으니 시집에서 내쳐질 만도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한 상태다. 까짓 구차한 소리 해가며 다시 합할 이유가 없다.
생활도 이만하면 밥 먹고 살 정도는 된다. 그런데 갑자기 애 아빠가 아프단 전화를 받고 보니 안절부절 못하는 미연이다. 하마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인데 아닌 모양이다.
“계십니까?”
미연은 얼른 뒤란을 돌아나간다‘주인이 없어도 들어와서 쉬다 가세요, 당신이 얻은 기쁨의 무게만큼 찻값은 두고 가시면 됩니다.’젊은 여자 둘이 마당에 서서 무인 찻집임을 알리는 문구를 보고 있다.
“들어 가시잖구요.”
길 위에서 보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가게를 손님들은 잘도 찾아온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도 있지만 그저 강변 풍광을 좇아 즐기다가 스스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나!”
작년 가을에 따다 쪄 말린 국화차와 뽕잎차를 다기 째 내려놓자 여자들이 반색을 한다.
“여기서 혼자 지내세요?”
“…….”
“무인 찻집, 너무 멋져요.”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떤다. 그녀들은 자기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둥 부럽다는 둥 하다가 어제 저녁 외박한 남편 이야기로 옮아간다. 미연은 속이 답답해 조용히 차방을 나와 뒤란으로 간다. 차방 앞에 웅크리고 있던 해탈이가 쪼르르 따라온다. 남편과 상민이 떠나고 깜깜 적막을 달래주던 녀석이다. 녀석은 이름을 닮아 순하기 그지없다. 주인의 기분을 미리 알아차리고 까불거나 얌전하거나를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래서 없는 듯하면서도 늘 있는 존재다. 요즘은 차라리 말 많은 사람보다 마음을 더 잘 알아주는 친구 같다. 미연은 해탈이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또 손을 씻는다. 이제 걸러놓은 소금물을 끓일 차례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수분이 모두 날아가고 순수한 소금의 결정체만 남는다. 이때의 소금 빛깔은 투명에 가깝다. 그것은 이 과정을 거치기 전 소금에 얼마만큼이나 불순물이 많이 있었든지 알게 해 준다. 미연은 걸러놓은 소금물을 가마솥으로 퍼다 붓는다. 이 과정이 힘들다. 허리가 아프고 등짝이 다 쑤신다. 그렇지만 묵묵히 이 일을 해낸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겨울에 한 차 사 두었던 장작은 잘 말라 있다. 불이 붙은 불쏘시개 위에 얹자마자 장작은 금방 불꽃을 일으킨다. 낟가리를 쌓듯 이리저리 겹쳐가며 얹으니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는 장작불. 불땀 속에서‘아빠가 아파요’하던 상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연은 생각을 자르듯 장작 하나를 불땀 속에 더 쟁여 넣는다. 따 다 다 닥, 장작에서 떨어진 가시랭이 타는 소리 사이로 흙 담 넘어 여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제 아예 철판을 깔았어요.”
“그래 넌 어떡할 건데?”
제법 심각해진 목소리들이다. 넌 어떡할 건데? 마냥 넋을 놓은 미연을 보고 친구 보미도 저렇게 물었었다. 상민이 교육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하겠니? 너 참 바보구나, 정말 그 말을 믿니? 나더러 함께 가자고 하더라. 얘, 얘, 너 정말 맹꽁이구나, 네가 도시에서 살지 못한다는 걸 잘 알면서 하는 소리, 그 입에 발린 소리를 모르겠니? 그게 다 널 슬그머니 밀어내려는 수작 아니겠어?
그러나 속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에 대한 미련 외에는 아무 욕심이 없던 때였다. 한번 죽었다 다시 산 이상 세상사 아웅다웅이 다 무슨 소용이랴 싶던 때였다. 삶이란 현실적인 욕망 외에 조용히 음미해 볼만한 것들도 있다. 자연이 그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사는 일도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처음에는 이따금 안부전화가 왔었다. 도시 아이들 사이에서 잘 적응한다며 학교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한다고 했다. 방학 때 가겠다고 했다. 미연도 아이의 교육 때문이라는데 어쩌겠나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남편도 아이도 전화가 뜸 해 지더니 방학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매일같이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친구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 서운함이 원망으로 바뀌고, 원망은 미움으로 변했다. 급기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새가 허공을 나는 것이 보였다. 새의 날개가 침략자가 휘두르는 칼날 같았다. 그 새의 날개에 하늘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땅을 보았다. 강 너머 모래를 채취하는 포클레인이 보였다. 포클레인이 파내는 모래가 납작하게 죽어 엎드린 상대를 물어뜯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이 가해자와 피해자처럼 보였다. 가게 문을 닫고 달팽이처럼 웅크려 잠만 잤다.
미연이 씨 뿌리고 물 주어 키우던 화초들도 목이 말라 하늘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꺾었다. 이젠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방치해 죽는 꼴이 되었다. 스스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누구나 스스로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지 쪼대로 하라고 하지 뭘….”
“그러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수가 있지….”
드디어 가마솥에 김이 오른다. 미연은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불땀을 조절해 놓고 일어선다. 그녀들의 나누는 이야기에서 멀어지고 싶다. 강변으로 나가면 백사장이다. 신발을 벗고 백사장을 걸어 나간다. 아직도 온기 다사로운 볕살을 받은 모래의 촉감이 맨발로 전해져 온다. 죽어 있던 모든 감각 기관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소금은 만음식물 가운데 으뜸이다. 부패를 막고 맛을 되살린다. 소금의 결정체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순수무구 그 자체라고 한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정제해 내는가하면 산에서 파내기도 하고 땅 속에서 캐내기도 한다. 애시 당초 바닷물 속에 함유되어 있던 이 염기는 신이 내린 축복이다. 그래서 성경에는‘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이 있다. 소금을 아홉 번씩이나 볶는 일은 신이 내린 축복 위에 인간의 정성을 더 하는 작업이다. 이 정성으로 불순물을 가려내고 사랑을 가미 시킨다. 이 사랑이 병을 고치게 한다. 미연은 그러한 사랑을 받아 암을 치유 했다. 하므로 그 누군가에게 그 사랑의 끈을 이어주어야 한다.
스님은 소금 볶는 모임을 통하여‘사랑의 소금띠 잇기’를 시도 하고 있다. 그런데 남편은 그동안 그 작자와 그것뿐이었냐? 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아내의 병을 낫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까탈을 부렸고 종내에는 그걸 빌미로 미연을 몰아내는 구실로 삼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아프단 전화를 해 왔다. 설마하니 그러라고 시킨 전화는 아닐 테지만 깜깜무소식이던 곳에서 걸려온 전화이니만큼 그 상태가 심각한 것만은 틀림없을 일이었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는데 물리칠 순 없는 노릇이다.
“해탈아, 이제 가자.”
발바닥의 모래를 탈탈 털고 손에 벗어든 신발을 신는다. 언제부터인지 맨발로 모래밭을 걷는 일이 일과 중 하나로 되어버렸다. 발바닥 지압도 지압이지만 발과 땅이 하나가 되는 느낌이 좋다. 그것도 사박사박한 모래땅은 그 감촉이 그저 그만이라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여자들은 아직까지 수다다. 장작은 거의 타서 벌겋게 숯이 되었고, 소금물은 뿍떡뿍떡 메밀묵이 끓듯 끓고 있다. 수분이 거의 날아가고 소금의 결정체들이 뻑뻑하게 남은 상태다. 투명해진 소금을 가장자리로 모으고 우물처럼 가운데를 비운다. 남은 수분이 우물에 물이 솟듯 고여 든다. 미연은 가장자리로 모은 소금을 바가지로 퍼서 준비해 둔 구시에다 퍼낸다. 그것을 퍼 낼 동안 남은 열기로 인해 물기는 사라진다. 물기가 가신 말간 소금의 결정체를 보고 있노라면 꼭 상민의 어릴 때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엄마, 오늘 내 짝꿍 미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녀석은 간식을 만드는 미연 곁에서 쫑알쫑알 지줄 댔다. 그러면 미연은‘참새’했고, 녀석은 순진하게도 하려던 미지 이야긴 잊고‘짹짹’하고 장단을 맞췄다. 꽤 죽이 맞는 모자였다. 봐라, 내가 뭐라던? 소식이 끊겼다는 소릴 들은 친구는 보란 듯이 나무랐다. 그게 다 저 집안의 흉계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잘난 이 찻집 하나 때내 주고 그걸로 입 닦으려는 수작이라는 거였다. 절대로 물러서지 말 것을 종용하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미연은 깨끗이 마음 정리를 했다. 사람 관계가 어디 돈 뿐이냐, 제 싫다고 가는 사람을 더 이상 어찌할 것인가. 더 이상 아픈 몸으로 남의 집 짐 되긴 싫었다.
“소금도 파세요?”
미연이 차방으로 들어오자 여자들이 일어나려다 다시 앉는다.
“네, 아홉 번 볶은 소금을 팔아요.”
“아홉 번씩이나요?”
“네.”
“그럼 죽염하고는 뭐가 달라요?”
미연은 약간 피곤했지만 볶은 소금에 대한 설명을 한다. 아홉 번을 장작불로 직접 볶는다는 소리에 여자들은 턱을 고이고 앉아 눈을 반짝인다. 그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며 아궁이 앞으로 모여들기까지 한다.
“피부 마사지에도 일반 소금보다 낫겠네요?”
미연은, 피부 뿐 아니라 잇몸 건강과 입 냄새 제거에도 탁월하며 두피 마사지를 하면 탈모와 비듬방지가 되고 뾰루지와 여드름 치료에도 상당한 효과를 낸다고 일러 준다.
“환절기가 되면 각질이 많이 일어나던데….”
“스크럽 효과야 말해 무엇 하겠어요. 전 이 소금 먹고 죽음 목숨 다시 살아났는데요.”
여자들은, 미연이 한 때 위암으로 죽기를 작정하고 산사에 갔다가 우연한 인연으로 이 아홉 번 볶은 소금으로 꾸준히 장 청소를 하고 식음을 한 결과 암 세포를 이겼다는 이야기에 입이 딱 벌어지며 단박에 주문을 해 온다.
“먹어 보고 좋으면 선전 많이 해 줄게요.”
여자들이 돌아가고 식은 밥을 숭늉에 말아 끓이고 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뭐하니?”
친구다
“밥은 먹고 사니?”
“그냥….”
먹고 살아라, 혼자 있다고 안 먹어 버릇하면 또 속에 탈난다며 걱정이다.
“소금 있니?”
“볶고 있어.”
“너 그러다 유명인사 되겠다?”
그러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유치원의 자모가 미연의 사랑의 소금 띠 잇기에 대해 알고 있더라며, 주문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했다. 그러잖아도 인터넷 주문이 쇄도 해 주문이 밀렸다는 미연의 말에 친구는 덩달아 신이 났다.
“다른 사람 주지 말고 나부터 먼저 줘.”
친구가 전화를 끊고 나니 불현듯 상민의 전화가 생각난다. 아빠가 많이 아파요, 아파요. 문득 남편 생각이 난다. 지금은 남의 여자와 살지만 그래도 한 때는 즐거운 사이였다. 그렇게 갔으면 천 년 만 년 건강하게 잘 살아야지. 아프긴 왜 아파. 미연은 잡념을 털어내듯 일어나 뒤란으로 간다. 강물은 노을빛을 받아 발갛게 물이 들었다. 해가 지려니 제법 한기가 느껴진다. 강가의 날씨는 해가 지면서 급격히 떨어진다. 미연은 안으로 들어가 누비 조끼를 걸치고 나온다. 지금부터 밤을 꼬박 새워야 한다. 한 번 볶고 식히고 또 볶고 식히기를 아홉 차례 반복하려면 새벽녘에야 일이 끝날 것이다.
다시 장작을 넣는다. 아직 꺼지지 않은 숯이 있어 불은 쉽게 붙었다. 지금부터의 불땀은 붙는 듯 마는 듯 은은해야 한다. 너무 약하면 불순물이 날아가지 않고 너무 세면 소금이 타 버린다. 아홉 번을 다 볶았을 때 엷은 갈색을 띄어야 가장 잘 볶아진 소금이다. 소금을 볶는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그래야 하겠지만,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드는 일에 한 치의 잡념이나 망상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스님은 이르셨다. 오직 사랑의 마음만 담아야 한다. 원망이 있으면 볶아 내고, 미움이 있으면 녹여 낸다. 그 과정이 바로 소금 볶는 일이며, 자신을 정화 시켜내는 일이라고 했다.
보살님은 저 히말라야 차마고도를 넘는 캬라반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소금을 실은 낙타를 몰고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눈 덮인 히말라야를 넘는 소금장수들이 있다고 했다. 이들은 단순한 소금장수이기 이전에 인간의 목숨과 가축들을 살리기 위해 소금배달을 한다고 했다. 돈만 생각한다면 그 짓은 못합니다. 소금 볶는 일도 돈만 생각한다면 못할 짓이지요. 소금 샘에서 물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여인네의 숨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수 십 미터 깊이에 있는 소금 샘에서 길어 올린 소금물을 햇볕에 말려 소금을 만들어 내는 고산 여인들의 당그래질을 생각해보라. 저들은 돈도 돈이지만 애타게 소금을 기다리는 고산지대 유목민들과 그 가축들을 위해서 조상 대대로 하루도 쉴 새 없이 반복 작업을 한다.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못할 짓입니다. 미연은 소금을 한 번, 한 번, 볶을 때마다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주걱을 젓는다. 이제 밤새 뜬 눈으로 소금과 싸워야 할 것이다. 소금과의 전쟁은 곧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다. 이는 잠과의 전쟁이며 상념과의 전쟁이다. 때문에 소금을 볶는 일은 일종의 수행과정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머니….”
상민이다.
“…….”
“도와주세요.”
상민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빠… 많이 아프시니?”
“암…이래요.”
“…….”
…너, 새엄마는? 상민은 대답이 없다. 불길한 예감이 덮친다. 남자도 마누라가 아프면 내팽개치는데, 돈을 벌어오던 가장이 아파 들어 눕는데 어떤 여자가 붙어 있을 것인가. 좀 와 주실 수 없어요? 녀석은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할 아이라곤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말이 조심스럽다.
“아빤 어떡하고 계시니?”
살아서는 묻지 않으려던 말이다.
“병원에 계신데….”
바람에 흔들리던 갈잎이 칼날처럼 서걱거리던 바람을 잠재우고 제 자리에 조용히 눕듯 날이 섰던 미연의 마음이 눕기 시작한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그 여자는? 네 할머니가 그렇게 시키던? 할 말이 많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를 위한 길이다. 아이에게는 아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다 젖혀두고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남자가 살아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미연은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미연은 수화기를 가슴에 붙이고 흐르는 콧물을 닦았다.
“알았다.”
뭘 알았단 말인가? 상민의 차분하게 애걸하는 소리가 가슴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린다. 미연은 차방을 나와 체와 지퍼 백을 가지고 장독대로 간다. 아까 그려 놓았던 귀얄무늬가 파문처럼 번지고 있다. 미연은 회오리 같은 귀얄무늬를 지우고 소금을 편편하게 다져서는 손바닥을 꾸욱 눌러본다. 손바닥 모양의 인화문 하나가 또렷하게 찍힌다. 이야, 엄마 손바닥 안에 내 손바닥이 쏘옥 들어가네. 백사장에서 미연이 찍은 손바닥 위에다 제 손바닥을 겹쳐 얹으면서 즐거워하던 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미연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낸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미연은 처마 밑 외등을 끄고 아홉 개의 콩알을 갖다 놓는다. 볶은 횟수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작업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시작하여 동이 틀 무렵까지 이어진다. 장작불을 다시 본다. 녹차를 덖는 이들이 솥바닥 밑의 화기를 가늠하듯 소금 볶는 일도 그 불의 온도에 의존한다.
“치지직.”
물기가 완전히 가신 무쇠 솥에다 구시에 담아 두었던 소금을 반 만 쏟아 붓는다. 미연은 소금을 볶을 때마다 이 소리를 시작으로 긴장을 한다. 앞서의 과정에서 들였던 정성이 잘 마무리 되는 과정인 까닭이다. 그 작은 알갱이들이 적당한 화기를 받아 속에 든 불순물들을 증발시킬 수 있도록 불을 잘 조절해야 하고, 무쇠 솥의 열기를 골고루 받게 하기 위해서는 주걱 젓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미연은 쏟은 소금을 주걱으로 천천히 젓기 시작한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소금은 바위덩어리처럼 딱딱하다. 이 물기를 없애는 과정이 가장 힘이 든다. 이때는 두 손으로 주걱을 잡고 가마솥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한다. 바닥이 조금씩 더 닳아 오를수록 주걱을 젓는 손놀림이 빨라진다. 먼저 십자모양으로 깊게, 그리고는 가위표를 그린다. 다음은 둥글게둥글게 반복하며 젓는다. 그렇게 적당히 물기가 가시면 그것을 다시 빈 구시에 쏟고 나머지 반을 또 붓는다. 그렇게 절반을 볶는 사이, 절반이 식는 과정을 아홉 차례 반복해야 한다. 당신 그 정성에 안 나을 병이 없겠다. 어둠을 뚫고 남편의 호쾌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느 새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소금은 땀과 눈물을 먹으며 자라는 결정체인가. 이마에서 땀이 방울방울 또 옥 똑 떨어진다.
이제부터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소금은 물기가 가시고부터 볶이면서는 악취를 풍긴다. 그것은 소금 속에 포함되어 있던 아황산가스와 탄산가스가 휘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여섯 번 볶았을 때가 소금으로서 가장 자연 상태가 된다고 한다. 간수가 완전히 제거되고 모든 유해성분이 휘발한 상태다. 그 후 세 번을 더 볶을 동안 미네랄을 포함한 각종 약효가 생겨난다 하는데 아홉 번 볶은 소금의 효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삼투압을 유지시켜 체액의 균형을 잡아준다. 위액을 원활히 분비하게 해 소화를 돕고 위장 기능을 강화시킨다. 설사가 심할 때, 따듯하게 녹여서 먹이면 설사가 멎기도 하거니와 상실한 수분을 보충해 준다. 명치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다. 명치의 통증은 위경련이나 위신경일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도 잘 볶여진 소금을 녹여 먹으면 통증이 멎는다. 그 외에도 지혈작용, 인후통, 탈장이나 탈항 치료, 치질과 소변 불통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효능을 나타낸다. 밤이 깊어 갈수록 콩알이 옮아간다. 하나…두울…다섯…일곱…. 곁에 둔 아홉 개의 콩알이 옮아가면서 소금 볶기는 횟수를 거듭해 간다.
“이제 마지막이야.”
눈꺼풀이 내리 누른다. 힘을 내자. 멀리서 부엉새 우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드디어 마지막 콩알이 옮겨졌을 때는 강물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따뜻한 수면 위를 지나는 차가운 공기에게 자기의 온도를 나눠주는 강물, 이제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는 때다. 가을이 깊을수록 안개가 잦다. 강변 생활 중 가장 멋진 때가 이맘때다. 벌써 몇 년을 이 강변 안개 속에 묻혀 살았다. 허리를 펴니 밤새 떨어진 낙엽이 발아래 수북하다. 푸르렀던 한 때를 잊고 낙엽들은 땅으로 돌아온다. 땅은 마른 잎들을 받아들인다. 이 잎들은 다시 땅 밑으로 녹아들 것이고 그 녹은 물이 다시 나무를 타고 올라 잎이 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며 순환이다. 화해이고 용서이다. 이제야 가장 편안한 갈색이 된 소금의 결정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은 덩어리를 치는 일이다. 한 포대의 소금이 한 주먹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욕심덩어리의 몸을 화장해 담은 재 봉지 같다. 아니면 한 줌 사리로 남은 결정체라고나 할까. 미연은 이 재를 한 바가지 퍼서 체에 올린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체의 테두리를 탁탁 친다. 보드라운 입자가 체 밑으로 떨어진다. 고운 모래 산처럼 곱게 쌓이는 아홉 번 볶은 소금, 미연은 그 소금을 조그만 비닐 백에다 담고 꼭꼭 지퍼를 누른다. ‘당신이 내게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상민을 보내 줬기 때문이에요. 이제 아프지 말고 일어나요.’ 하얀 백지에 쓴 메모와 함께 미연은 지퍼 백을 들고 빨간 우체통으로 간다. 뻥 뚫린 가슴에 아홉 번 볶은 소금을 넣고 돌아서니 안개 걷힌 강 위로 아침노을이 깔리고 있다.
.끝.
동양일보 신인 문학상 당선작
문장력과 구사력이 좋아서 혼자 읽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어휘력도 좋고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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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종이학을 접어 놓은 소금 찻집
꿈꾸게 만드는 소설의 힘
흐미~
넘 길어..ㅎㅎ
천천히 감상 할게요
무인 카페에 앉아 누군가을 기다리면 9번 소금을 볶은 미연
을 그리면서 보고 갑니다
틈날때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한 포대의 소금이 한 주먹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욕심덩어리의 몸을 화장해 담은 재 봉지 같다
잘 읽었습니다 ^^ 안 그래도 일하기 싫은 데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길긴한데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 되더라고요.
일과 중이라 주말에 찬찬히 읽으려 합니다
올 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