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스님은 순식간에 팔만대장경을 먼지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신 뜻은
말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는 것!
괴로움으로부터 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말’이라는 방편 활용하셨을 뿐이다!
➲ 강설
교학을 공부하다보면 여러 경론을 접하면서 서로 우열을 논한다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누구나 자기가 전공한 경론에 무게를 두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고 할 순 있지만, 깨달음의 분상에서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부질없는 일이 실제로 역사상 일어났었다. 처음에는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갈라졌는데, 요즘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보수파와 진보파이다. 그것이 점점 더 나눠지면서 나중에는 20여개 부파로 갈라졌고, 각 부파마다 자신들이 중시하는 것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흔히 이를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라고도 하고, 논서(論書)들 또는 논장(論藏)이 이루어진 시대라는 뜻으로 아비달마(Abhidharma)시대라고도 한다.
운문선사가 활동하시던 시절의 중국불교도 교학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기에 아마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많았을 것이다. 정상에 이르고 나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고 할 것이 없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가장 핵심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는 정상으로 오르는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어느 길을 따라 오르건 정상에 올라 사방을 다 살핀 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이건 정상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한 방위의 산자락만을 본 사람들끼리는 서로 자기가 봤던 산자락이 옳다고 우길 수 있다.
큰 나무의 동서남북 가지를 살펴보면 조금씩 다르다. 만약 가지만을 비교하고 따진다면 다른 나무라고 결론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큰 몸통까지를 살펴보면 사방의 가지가 환경적 영향으로 조금씩 다른 모양이 되었을 뿐으로, 사실은 한 나무임을 바로 알게 된다. 뿌리까지 살피면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본칙 원문
擧 僧問雲門 如何是一代時敎 雲門云 對一說
일대시교(一代時敎) 일대교(一代敎)라고도 한다. 여기서 복잡하게 천태대사의 교상판석(敎相判釋)까지 가져와 오시팔교(五時八敎)를 설명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평생 말씀하신 가르침’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께서 평생 말씀하신 가르침입니까?
운문선사가 답하였다.
“상대적인 한 말씀이지.”
➲ 강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모두 살펴보라. 표현이 모두 다르다. 주제도 다르고 주제에 따른 설명도 다르다. 부처님 말씀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한다. 이는 의사나 약사가 환자들의 병에 따라서 다른 약 처방을 하듯이 대하는 사람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셨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변비일 때와 설사를 할 때의 약 처방이 달라지듯,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괴로워하는 문제에 따라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하셨다. 표현만으로는 정반대인 말씀도 있다. 상태에 따라 살을 빼라고도 하고 살을 찌우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듣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맞추다보면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전혀 다른 각도의 해법을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표현된 해법을 절대적인 것처럼 집착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단다. 45년간이나 쉼 없이 가르침을 펴셨던 분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 그건 말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말씀을 남겨 기억시키는 데에 부처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말이라는 방편을 활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좌선이나 다른 수행법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법에 절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말씀들을 모은 갖가지 경전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이나 수행법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끝까지 정진해서 해탈하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해탈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아마도 질문을 던진 스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운문선사의 명쾌한 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과연 운문스님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상대적인 한 말씀이지!”
질문한 스님은 문제를 해결했을까?
아참! 운문선사께서 마음으로 일갈하신 것은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으니, 이를 어쩌나? 감춰진 그 일갈이 진짜인데….
관세음보살님의 손과 눈이 몇 개인지 헤아리려 들면 이미 어긋났다.
➲ 송 원문
對一說太孤絶 無孔鐵鎚重下楔
閻浮樹下笑呵呵 昨夜驪龍拗角折
別別 韶陽老人得一橛
무공철추(無孔鐵鎚) 구멍 없는 쇠망치. ‘구멍 없는 피리(무공적, 無孔笛)’라거나 ‘줄 없는 거문고(몰현금, 沒絃琴)’ 등의 표현과 같음.
염부수하소가가(閻浮樹下笑呵呵) 염부나무 아래에서 껄껄 웃다. 염부수는 염부제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을 뒤덮는 나무를 상징. 따라서 ‘온 세상 가득하게 껄껄대고 웃으니’ 정도로 번역하면 됨.
여룡(驪龍) 검은 용. 여기서는 지식에 능한 이를 가리킴.
➲ 송
상대적인 한 말씀이라니 너무나 뛰어나구나.
구멍 없는 쇠망치로 거듭 쐐기를 박도다.
➲ 강설
운문스님께서 딱 잘라 말씀하신 ‘상대적인 한 말씀’은 팔만대장경을 순식간에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먼지를 두고 또 이 먼지가 나으니 저 먼지가 위대하다느니 하겠는가? 그럴 사람이 있고말고!
운문영감님이 자루도 없는 쇠망치를 휘둘러 모양 없는 쐐기를 박으셨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람. 귀머거리와 봉사는 천만년이 흘러도 더듬고 있다.
송
온 세상 가득하게 껄껄대고 웃으니,
지난 밤 검은 용 뿔이 꺾여 부러졌네.
➲ 강설
가소롭다. 성질 사납고 재주 많은 검은 용이여! 천지를 뒤흔드는 웃음소리에 혼이 나가 뿔을 꺾이고 마는구나. 그러게 내 뭐라고 했나. 영험 없는 뿔 따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세상에는 광채도 없는 싸구려 뿔 자랑하는 무리로 가득하지.
➲ 송
다르구나 달라!
운문스님이 한 그루터기를 얻었구나.
➲ 강설
천하 사람들이 가지나 잎사귀를 모아 뽐내고 자랑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네. 화엄의 꽃으로 코를 풀고 법화의 꽃으로는 밑을 닦는다네. 그래도 그루터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차차! 그걸 어디다 쓸려고? 소용없는 짓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