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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바닷물 수온이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것은 바닷속 생명체들이 활동을 시작한다는 표시입니다,
밤바다가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바다로 나갑니다. 이른바 해루질을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강력한 것로 장만하려 했더니, 광고가 떴습니다. 가격도 괜찮고, 사이즈도 적당하고, 그 랜턴 하나로 마을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진다는 광고였습니다.
혹시라도 품절될까 봐, 초스피드로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품이 도착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포장지를 뜯어냈습니다. 제품을 조립하고 충전하고 켜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과장 광고에 속았습니다. 마을 전체가 밝기는커녕, 방 한 칸도 밝힐 수 없는 과장광고였습니다.
할 수 없이 정식 랜턴을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니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 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빛이 강제하지 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언젠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반영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반영하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가장 예수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잘 반영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모님이셨고, 또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 성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은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반영하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의 목숨은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주님 안에서 보다 풍요롭게, 보다 자연스럽고 충실하게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2,44-50
말씀을 예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12,48-49)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결론을 선포하시며 아주 서늘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하신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단죄하는 잣대가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설계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주신 '영원한 설계도'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1m의 자가 진짜 1m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프랑스 파리 근교에는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국제 미터 원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는 이 '원기'와 대조하여 자신의 정확성을 검증받습니다.
만약 이 원기가 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길이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원기'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하느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원기'이자 '완벽한 설계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잘생기셨거나 말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모든 말과 행적이 하느님이 미리 주신 설계도(구약)와 단 0.001mm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설계자의 명령'만을 집행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심판은 '건축 현장'의 원리입니다.
설계자(성부)가 그림을 그렸고, 건축기사(예수님)가 그 설계도대로 "이 벽돌은 여기에 놓으라"고 명령(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부가 "나는 내 마음대로 다른 곳에 놓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합시다.
기사가 그 인부를 미워해서 내쫓는 게 아닙니다. 설계도와 맞지 않게 놓인 벽돌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고, 건물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기사가 내뱉은 그 '명령'이 그 인부를 '부적격자'로 자동 분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주의 설계도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거부한 자는 스스로 '비존재'와 '파멸'의 길을 선택한 꼴이 됨을 의미합니다.
2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성 유스티노는 진리를 찾아 모든 학파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유스티노에게 철학책을 덮고 '예언자들의 기록(구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유스티노는 구약의 설계도를 꼼꼼히 뜯어보았습니다.
특히 그를 전율케 한 것은 수백 년 전의 예언들이 예수라는 인물의 '물리적인 수난 기록'과 소수점 아래 숫자까지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수백 년 뒤의 죽음의 시각, 방식, 심지어 입고 있던 옷의 처분까지 맞출 수 있단 말인가!'라며 경악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설계도가 가리키는 이 기사만이 유일한 진리다!" 유스티노는 설계도의 완벽한 성취를 보았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기사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에게 심판은 기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자기만의 좁은 철학(가짜 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성 유스티노,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스티노가 그토록 놀랐던 구체적인 설계의 성취는 바로 ‘메시아의 옷’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옷을 벗기고 새로 입히는 공정’이었습니다.
① 에덴의 가죽옷과 무화과 잎의 파기 (창세 3,2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스스로 ‘무화과 잎’(자아의 가짜 자존감)으로 자신을 가렸을 때,
하느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 을 입혀주셨습니다.
죄인의 수치를 덮기 위해 죄 없는 생명이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내놓아야 한다는 최초의
설계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가죽과도 같은 옷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② 에사우의 옷과 빌려 입은 의로움 (창세 27,15-27):
야곱은 형 에사우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사악에게 나아가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야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의 향기’를 맡고 축복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의 옷(본성)을 입어야만 하느님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정교한 예표였습니다.
③ 요셉의 무지개 옷과 구덩이의 수난 (창세 37,23-24):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긴 소매 옷(무지개 옷)’이 벗겨지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 옷을 뺏기고 죽음의 구덩이(무덤)에 들어갔다가 온 민족을 살리는 통치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밑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뺏기셨고, 그 대가로 형제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④ 시편의 옷 제비뽑기와 이사야의 고난 (시편 22,19; 이사 53,5):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겉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천 년 뒤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사진처럼 현상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옷이 벗겨진 채 모욕당할 것을 설계도에 기록했습니다.
⑤ 그리스도의 옷 벗기심과 우리의 ‘그리스도 입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지신 이유는, 당신의 ‘의로움의 옷’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수치스럽게 벗겨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신성의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고 명령했고,
갈라티아서 3장 2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설계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파견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설계도를 몸소 이행하신 분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설계 원리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자기 심판’의 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아버지의 설계도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하느님의 설계도 규격에 맞춰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다룬 태생 소경이 "Ego Eimi(나는 나다)"라고 고백했듯, 우리가 설계도대로 완공될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성령을 알레고리적으로, 예언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감시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올가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장 나지 않도록, 우리가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도록 보내주신 '생존 매뉴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는 안다." (요한 12,50).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과 동기화되어 살아간다면, 마지막 날 우리를 찾아올 그 말씀은
무서운 판사가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기분 좋은 '패스포트(Passport)'가
될 것입니다.
설계도와 기사의 완벽한 일치, 그 진리 안에서
구원이라는 건물을 완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빛으로 오신 분으로 드러내신다. 또한, 당신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당신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한 스승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행위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을 보는 이는 곧 아버지를 본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들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Adversus Haereses IV,6,6)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현현이시다. 아들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성 치릴로는 이렇게 풀이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비추는 빛이시다. 이 빛을 통해 무지는 사라지고 진리가 드러난다.”(In Ioannem Commentarius VIII,6)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는 결코 어둠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빛을 거부하는 이는 스스로 어둠 속을 택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이는 그 말씀으로 심판받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아들은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이들은 스스로에 의해 심판받는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53,6) 즉,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분이다. 심판은 우리가 스스로 빛을 거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아버지의 명령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다. 곧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의 명령이시다. 교리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의 계시이며, 그분의 전 생애는 아버지를 드러낸다.”(516항)라고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빛을 등진 채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저는 정신력이 약해요. 계획대로 무엇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늘 작심삼일로 끝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정상일까요? 비정상인 것 같으면서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뇌과학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합니다. 뇌와 마음은 원래가 변화를 싫어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순조롭게 해내는 경우가 특이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괜찮아. 나는 약한 인간이야.”라고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냥 위로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스트레스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자기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해 볼까?”
이런 말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변화의 시작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습관화의 원리는 ‘일단 움직여라.’라고 합니다. 몸이 먼저 행동하면 거기에 뇌가 열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습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 비율이 자그마치 45%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 묵상, 사랑의 실천 등도 일단 해 보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됩니다. 뇌와 마음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당신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완벽한 대리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보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죄와 절망의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잘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세상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외침은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동아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주님 뜻을 따르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탈무드)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4.29.수.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
가타리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내면이었습니다.
내면 없는 개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실천 없는 내면은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내어맡겼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그 어둠을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빛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사랑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으로
초대하여 존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그녀에게 진리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그 고통 안에서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 인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은
결국 세상을 향한
담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오늘 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외침으로 문을 엽니다.
특히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통해서
세상에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한
예수님의 고심이
얼마나 무겁고 깊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그날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항상,
눈에 보이는 당신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통하여
온 세상이 참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믿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의 믿음의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죄 많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사랑이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사랑이신 분을
마음으로 보고 굳게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의 전부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사도12,24-13,5ㄱ 요한12,44-50
삶은 선택이다
“구원의 선택; 예수님”
“성녀 가타리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써 주님과 일치되었도다. 알렐루야."
오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저녁성무일도 성모의 노래 후렴이 좋습니다. 이런 성인이 되는 것도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피정이나 미사에 참석한 분들에 대한 우선적 칭찬은 참 좋은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월례 모임이 있었고 여러분들이 20년 이상 약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성실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두 부부도 있어 <예수성심형제자매회>라 불러야겠다고 덕담도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성숙되어가는 친구같은 부부의 우정관계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상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옛 현자의 조언도 이와 일치합니다.
“그 어떤 특별한 순간도 일상만큼 반복하지는 못한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만큼 비범한 일은 없다.”<다산>
삶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여 늘 새롭게 시작하는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경건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지켜야 한다.”<논어>
공자 또한 평범한 일상에 충실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베네딕도회의 정주서원도 이와 일치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인용하는 <담쟁이>시가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기쁨이요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무려 2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담쟁이들이요, 정주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고 있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중요한 결정적 선택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중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빛이라고 다 빛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참 빛입니다. 이런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안에 머물 때 어둠에서 벗어나 빛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빛으로서 파견되신 주님을 믿는 선택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습니다. 믿음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래서 수도공동체가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공적 가르침은 끝납니다.
그러나 끝은 시작입니다.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사울이 뒤를 이어 이방 선교 여정이 펼쳐집니다. 참으로 선교의 일상에 충실했던 두 사도입니디.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퍼져나갔고 두 사도가 주님의 사람으로 교회로부터 파견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떠나보냅니다. 말씀의 사도, 성령의 사도, 교회의 사도로서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마침내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우선적으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파견은 예수님에 이어 그분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계속됨을 봅니다.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선교 파견은 계속될 것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가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의 제자리가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입니다. 성녀는 25남매중 23번째 아이였고 시에나의 하층 중산층에 속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33세, 예수님 나이만큼 참 짧은 생애였지만 불꽃같이 100% 연소시킨 삶이었습니다. 성녀는 어려서부터 비일상적 거룩한 신비체험을 하였고, 16세 도미니코회 제3회원 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영적지도자가 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이자 심오한 신비가 성녀 카타리나는 아비뇽을 방문하여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로마에 돌아오도록 설득했고 성공합니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아빌라의 성 데레사와 함께 교회박사 칭호를 수여합니다. 교황은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와 함께 시에나의 카타리나를 이탈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타리나 성녀를 성 베네딕도. 성 치릴로와 메테디우스, 스웨덴의 브리짓,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도(에디트 슈타인)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어제는 4월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 제48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충무공 역시 주어진 일상의 삶의 제자리에서 충실히 책임을 다함으로 나라를 구했던 영웅이었습니다. 모두가 각자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했던 성인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역시 일상의 삶의 제자리에서 파견된 자로서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67.2).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신앙의 신비!'
오늘 복음(요한10,22-30)은 '유다인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그토록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10,24)
유다인들은 왜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을까?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 그들이 만들어 놓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강하고 힘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초라한 메시아였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죄 중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메시아, 마침내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메시아였습니다.
당신을 배척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10,25-26)
그런데 참으로 아니러니하게도 그 배척이, 그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졌고, 그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구원)이 온 세상으로 전해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의 박해가 오히려 복음(구원)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퍼져 나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메시아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 메시아를 잘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하느님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두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다인들처럼 배척하는 믿음은 아닌지?
한번 성찰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2,24―13,5ㄱ
그 무렵 2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