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천주교 녹번동 성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5월 19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4 11.05.18 16: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 5 19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일행이 안식일 회당에서 설교를 한다. 바오로는 회중들에게 구약의 역사를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 주셨음을 설명한다(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난 다음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제자들도 당신처럼 종의 모습으로 남을 섬기면 행복하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즘은 서비스 업종의 직원들이 고객을 섬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백화점, 상가, 식당, 주유소 등 어디를 가나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고객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섬기는 자세를 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합당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해관계가 없는 관계에서도 이렇게 섬기는 분위기가 있는가 물으면 씁쓸해집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섬김의 문화라기보다는군림의 문화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군림하고 싶은 심리를 상업적 전략으로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업적으로 지나치게 고객을 섬겨야 살 수 있는 문화라면, 그 이면에는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군림하고자 하는천박한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돈으로 사고, 허영심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양쪽 다 돈이 주는 위력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핵심 리더십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우리보다 못한 처지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돈과 힘을 섬기며, ‘비굴한 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약한 이들을 섬기고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어떤 사람이 용을 좋아했습니다. 사모할 정도였습니다. 용 그림은 물론이고, 가구와 장식품에도 용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수저와 술잔도 용 그림이 없으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깥 정원에도 온통 용을 조각한 작품들을 진열해 놓았고, 연못까지도 용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집 안팎이 그야말로 용 모양으로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용이 소문을 듣고 가만히 내려왔습니다. 그러고는 정원에 서 있었습니다. 마침 용을 좋아하던 사람이 정원에 나왔다가 를 봤습니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더니만, 용이 꼬리를 살짝 흔들자, 벌벌 떨면서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만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용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가 좋아했던 것은 진짜 용이 아니라 용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용에 대한 심미안을 인정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용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를 그토록 갈망한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모른 척합니다.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느님을 믿는 것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표현의 교리적 해석이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한 분으로 계신다는 이론입니다. 완벽한 일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의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일치는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부부 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배어 나오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지니라는 당부입니다. 그래야 스승의 힘이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힘이 함께하면 아버지와 성령의 힘도 함께합니다. 놀라운 섭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의 배반까지 승화시킵니다. 유다는 떠나지만 스승은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훗날 제자들도 배신을 체험하지만 모두 받아들입니다. 고뇌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스승의 사랑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사랑하고 용서해야 주님의 제자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일치는 한 번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끝없는 용서가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가슴에 사랑을 담아야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힘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꽃들

- 반명순 수녀-

 

우리 본당 뒤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습니다. 여유로운 시간이 되면 한 번씩 오르는 산의 능선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반깁니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계곡과 오솔길이 분명하지만, ?·?여름?·?가을?·?겨울마다 자생하는 식물들이 다르고, 나무들도 철따라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하나가 전체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체 안에서 하나하나가 자신의 색과 향기를 갖고 존재하며 아우르는 까닭입니다.

능선의 한가운데 서 있노라면, 숲속 가족이 이야기를 건네옵니다. 나뭇가지로 날아들며 노래하는 새, 바스락거리며 솔잎 사이를 지나다니는 다람쥐, 이름 없는 작은 꽃들, 나뭇등걸에 기대 오르는 덩굴들도 덩달아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느 것이 더 크고 작음을 비교하지 않고, 권위를 세워 제자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하늘이 주시는 만큼에서 필요한 만큼만 고집합니다. 그곳에는 종은 있되 주인은 없고, 피조물은 있되 조물주를 자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더하며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지켜갑니다.
유독 사람만이 주인으로 자처하고,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농작물에 주고 남은 물이 한데로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아 계곡은 빼앗긴 냇물로 여위다 못해 시궁창이 됩니다. 산자락의 채소밭에 울타리를 쳐서 길을 막고 열쇠로 채워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며 뿌려놓은 제초제 앞에서 잡초마저 얼씬도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도 받아들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오시는 그분은 우리에게임마누엘의 삶
?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자연을 창조하셨고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2) 하신 이 세상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손을 잡으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은 이름 없는 꽃들 때문임을 아시는지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제가 어느 성당에서 강의했던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신기하면서도 무척이나 어색하더군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 본당을 가득 채울 만큼 신자들이 오셨었는데, 그분들이 굳이 성당에 강의를 들으러 오지 않아도 이렇게 쉽게 강의를 듣고 또 볼 수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내가 원하는 강의도 들을 수 있고, 각종 신앙에 관한 자료도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주님께 대한 믿음도 이렇게 쉽게 얻을 수가 있을까요? 혹시 쉽게 이 믿음을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시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너무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면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더 많이 추구할 수 있다면 믿음도 잠시 보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단순하게 미사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으로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도 성당에 얼마나 머무는 가로 믿음의 척도를 계산하려 합니다.

믿음의 생활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며 하느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직접 모범을 보여주시고 그 모습을 따라 살라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취하는 예수님을, 돈 많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보다는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열심한 신앙을 자랑하는 종교지도자들보다 오히려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나는 과연 하느님, 예수님을 지금의 삶 안에서 잘 맞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세우셨던 정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예수님을 내 안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이해는 깊이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이해는 거기에서 생겨난다(브라이언 피어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너는 종이고 파견된 이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환경만을 찾거

나 완벽한 조건만을 따지지 말거라. 주인이 그랬듯이 가난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하여라.’ 

그런데 우리는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고 할 줄 하는게 없어서 봉사할 수 없다

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인물들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핑계를 대며 주저하는 모습이 부끄러워질 거라

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은 노인이었고, 야곱은 불안한 상황에 있었으며, 레아는 예쁘지 않았고, 요셉은 매도되었으며, 모세는  

더듬이었고, 기드온은 가난하였으며, 삼손은 의존적이었고, 라합은 부도덕했으며, 다윗은 간음했을 뿐만 아니라 온

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자살을 생각하였고, 요나는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었으며, 나오미는 과부였

, 세례 요한은 괴팍한 행동의 소유자였으며, 베드로는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으며, 마르타는 늘 걱정이

많았고,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 차례 결혼 생활에 실패했으며, 자캐오는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였고, 토마스는 의심이

많았으며, 바오로는 건강의 문제가 있었고, 디모테오는 마음이 연약했습니다. 그들 모두 여러 가지 실패와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하느님의 일에 사용하셨습니다.(‘목적이 이끄는 삶참조)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약하고 부족한 우리도 하느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

하시고 일을 맡기셨다면, 그 일을 이룰 힘과 능력도 부어주실 겁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일을 나중으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취직하면 생각해 보겠습니

. 중간고사가 끝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토익점수가 나오면 다시 성당에 나오겠습니다. 돈 좀 벌고 시간이 여유

가 있으면 성당에 나오겠습니다. 할 일 없으면 한 번 나오지요...’ 그분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느님께서 그분들에게너는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였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게 되겠습니까? 아마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젊음이라는 좋은 시간은 저를 위해서 다 사용했고, 노년이 되어 힘도 빠지고 기운도 없을 때 성당에 나와서

기도를 좀 했지요... 맛있는 것이 있으면 살은 제가 다 발라먹고 하느님께는 생선머리만 드렸지요... 일을 해서 번 돈

의 대부분은 나와 가족들의 여가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고, 쓰고 남은 돈은 하느님께 봉헌하였지요.”

그러한 삶을 살고 하느님 앞에 선다면, 많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생

각한다면, 나의 가장 귀한 시간, 나의 가장 큰 힘, 나의 가장 큰 재능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먹다 남

은 것을 드리는 신앙인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장애를 넘어 하느님

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양승국신부-

 

<존재에 대한 감사>

 

애완견 키우다보면 정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기지요. 어떤 강아지는 자신을 개가 아니라 사람으로 생각한다지요. 안아주고, 귀여워해주고, 오냐오냐 하면서 떠받들어 주다보면 더 기고만장해져서 자신을 ‘상전’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답니다.

 

한 애완견 전문가는 TV 볼 때 주인은 바닥에 앉고 강아지를 소파위에 올려놓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 때 강아지는 주인을 아주 우습게 보기 시작한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경한 어조로 종과 주인과의 관계, 파견된 이와 파견한 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된 존재며, 그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단 한 번도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시고 낮출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신을 낮춘 종으로서의 삶에 충실하셨습니다.

 

그 결과 겸손과 순명을 통한 행복의 삶을 만끽하셨으며, 그 겸손과 순명의 삼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우리가 한결같은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면 자연스럽게 불평불만은 줄어들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의 마음은 커져만 갈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감사의 나무가 성장하면 할수록 불평불만이란 잡초의 입지는 줄어만 갈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내면에 불평불만의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감사의 자리는 좁아져갈 것입니다.

 

결국 불평불만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나날은 행복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일상 안에서 보다 자주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감사, 주어진 일들에 대한 감사, 나란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

 

대단하고 특별한 감사꺼리보다는 매일의 삶 안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소소한 감사꺼리들 말입니다. 작은 것에 자주 감사하게 될 때 큰 것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지속적인 감사의 삶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맞아들이기      

-박민서 신부-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을 보여줄 때 비로소 자신으로 인정됩니다
.
상대방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싶고 상대방이 나를 맞아들여주길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된 사람, 죄인, 병자들의 마음을 열 수

있으셨던 것은 그들보다 더 낮게 다가가셨고 마음을 먼저 여셨기 때문입니다
.
마음을 맞아들여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으로 상대의

좋은 점을 찾을 수 있고,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을 보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맑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말하게 되면 언젠가 자신의 좋은 점을 듣게 됩니다
.
힘든 일이 많은 세상이지만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한다면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양승국신부-

 

<학교아빠>

 

스승의 날을 맞아 저희 아이들 위해서 늘 수고하시는 자원봉사 선생님들에게 드릴 책을 고르다가 정말 감동적인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학교아빠"입니다. 저자는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전원하 선생님이십니다.

 

학년초 학생들과의 첫 만남 때마다 선생님은 이런 말로 일년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오늘부터 1년 동안 너희 아빠다. 너희들은 모두 형제간이며, 슬픔도 기쁨도 함께 한다. 앞으로 우리의 인사는 <사랑해요>."

 

교실 창문 너머 들리는 뻥튀기 장수 소리의 "" 소리를 듣고는 지갑을 꺼내며 "얼른 사와, 나눠 먹자"는 등 따뜻하고 넉넉하고 감동적인 선생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입니다.

 

전선생님은 세상의 모든 교육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아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요? 딱 한번만 그들의 편이 돼 일단 망가져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한 말씀하시는데,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 우리 죄인을 위해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겸손의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교육자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아이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제왕처럼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순간이 아니라 겸손하게 아이들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괴롭지만 아이들 사이에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며 부족하나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아이들로 인해 속상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총체적 실패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한심스러운 현 교육 시스템 안에서 우리 선생님들의 마음 고생 역시 보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선생님들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겸손하게 아이들 밑으로 내려가셔서 아이들을 섬기는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오늘 하루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존재의 이유, 삶의 첫째가는 기쁨으로 여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신문기자의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아서 그대로 한 번 올려 봅니다.

얼마 전 TV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뉴스 인터뷰를 보았다. 인터뷰의 대상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 11세 소년. 소년은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브랜든 포스터라는 이 어린이가 기자와 나눈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 지금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브랜든: 저의 생명은 앞으로 1주일을 못 넘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왜 나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나 생각도 해봤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즐거운 삶이었습니다.

기자: 소원이 뭐지? 제일 하고 싶은 일말이야.

브랜든: 한 가지 있어요. 병원 갔다 오다 목격했는데 거리에 노숙자가 너무 많더라고요. 그들이 배고파 보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싶어요. 그게 나의 소원입니다.

나는 이 소년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기자의 질문에 유명한 야구선수와 만나거나 마지막으로 디즈니월드를 가고 싶다고 답변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이 인터뷰를 마치고 6일 후에 숨을 거뒀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브랜든의 소원은 불씨가 되어 미 전역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브랜든의 이름으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캠페인이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사우디에서도 독지가가 나섰다고 한다.

소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담긴 소원은 실제로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만약 이 소년이 유명 야구선수 만나는 것을 소원으로 내걸었거나 디즈니월드 가는 것을 소원으로 말했다면, 소원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금방 잊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소원이었기에 잊혀 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실천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내가 만나는 이웃입니다. 그 이웃을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갖고서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앞선 소년의 소원은 결국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고 싶어할까요? 혹시 나만 사랑하는데도 바쁘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늘 뒷전에 모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소년의 큰 사랑에 한없이 작아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을 움직이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소크라테스)

 

파견된 이들

-전삼용신부-

로마로 여행 중이던 한 자매가 제가 아는 신부님의 성당 신자라고 하기에 그 신부님 잘 계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 잘 계신 거 같아요. 근데 강론을 너무 못하셔요. 매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성경과는 맞지도 않고... 그런 사람이 무슨...”

저도 그 신부님이 강론말씀을 잘 준비하지 못하시는 것을 알지만 그 본당 신자의 말을 통해 들으니 같은 사제로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강론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당신께서 파견하시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제들이 강론을 잘하고 못하고 성격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의 제자들을 마치 당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라고 하여 물 한 컵을 주어도 그 상급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아야 할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또한 그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질이 어떻고를 따지지 않고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큰 그릇과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또 다른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보다가 화가 난 신자에게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는데 그 신자는 버젓이 미사를 끝까지 하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겠지만, 아버지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있으신 것처럼, 그리스도 이전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몇몇의 신자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우리나라 신자들은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잘 받아들입니다.

한 제 단체 자매님은 스스로평신도를 사제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병신도라 칭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말할 때우리 병신도들은 사제님들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안에는 신자로서 사제를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나타납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제로 몇 년 본당에 있지도 않았지만 아무리 겸손하려해도 신자들이 우대해주는 것에 쉽게 물들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항상 모임에 맨 나중에 나타나고 강복 한 번 주면 고마워하고 노인 어르신들까지도 굽신굽신하고 신앙 없는 정치인들까지도 사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 거만해지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중엔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교황님을종들의 종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낮아지신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 안에서만이 사제직이 완전히 수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시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던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이 주님이고 스승으로서 이 일을 하였으니 당신의 제자들인 사제들도 신자들에게 그런 종의 모습으로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종의 모습으로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들을 정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항상 큰 것을 희망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꿈이 작으면 잘해봐야 그 꿈을 꾼 사람만큼만 될 수 있지만 꿈이 크면 그 꿈대로 되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꿈이 소방관나 경찰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잘해봐야 그 꿈을 이루어 소방관이나 경찰로 살 수 있지만, 꿈이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결국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국회의원까지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어렸을 때부터 그런 꿈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였고 지금은 대통령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돼!’, 혹은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처럼 처음부터 포개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디까지 희망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할 사람을 처음부터 아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뽑으시어 그에게 죄를 지을 빌미를 마련해 주신 것이기에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배반할 것까지 아시고 있는 유다를 뽑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분은 한 인간으로서 모르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믿는 것도 희망하시는 것도 있었음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아마 유다가 끝까지 뽑아달라고 졸랐을 테지만) 그를 뽑으신 이유는,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이제 네가 할 일을 하여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미예정 되어 있는 것까지 희망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까지 희망하시어 그를 구원하려 하셨던 분이기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것들은 우리가 아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예정 되어 있는 것까지 희망하셨다면, 우리가 희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크기는 비례합니다.

행복하려면

-김찬선신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발을 씻어준 다음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행복의 비결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실천을 할 수 없으니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알고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를 때보다 더 괴로울 수 있습니다.
자책감 또는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적어도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적 자기 비하감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을 위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나는 종이라는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고
종이기에 주인보다 높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아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자기가 종이라는 주제 파악을 확실히 하고 있으면
첫 째 주제 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고
둘 째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제 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함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임입니다.
주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바뀌길 바라고
원하는 대로 상황이 바꾸길 종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종들은 바라지도 말아야 하고
요구는 더더군다나 말아야 합니다.
되지도 않을 것을 바라고 요구하면 그것이 고통이고
그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현 상황을 “왜?”하고 거부하지 않고 “예!”하고 수용할 때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행복의 요건이 갖추어집니다.

지난 한 주간 아주 힘들게 보냈습니다.
소리에 예민한 제 탓입니다.
밖의 공사 소음은 3년 이상 계속되니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는데
근자에 새로운 소음이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중국에서 신부님이 한 분 와 계신데
기도를 할 때 음을 저희와 맞추지 못하시고
불협화음을 내시는 것입니다.
당장 소리를 맞추시라고 요구할까 하다가
다른 형제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저만 예민하게 신경쓰는 것 같아서 저의 수덕 차원에서,
다시 말해서 이 소리에 괘념치 않는 내가 되는 훈련 차원에서
아무 소리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옛날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갔다 오는데 껌 씹는 소리가 딱딱 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다들 자는데
저는 잠도 못자고 몇 시간 오는 내내 그 소리를 들어야 했고
다른 좋은 소리 듣지 못하고 밖의 아름다운 풍경도 보지 못하고
괴로워했고 그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신부님의 기도 소음을 이렇게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데
러시아-카자흐스탄 선교단 총회를 하느라 3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1
주일 이상 같이 지내며 모르는 러시아말로 시끄러우니
정신이 없었고 괴로웠습니다.
상황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음은 물론
상황이 어떠하든 “왜?”라는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는 종이 되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습니다.

둘째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음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음입니다.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종은 주인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모든 사람의 뜻을 받드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발 씻음으로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고
주님이요 스승인 당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

- 서동원 신부-

 

신앙을 갖지 않은 비누 생산업자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신자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누 생산업자가 신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그 복음이 한 일이 뭐요? 세상을 한번 보시오. 아직도 죄악이 많고 악한 사람들 천지가 아니오?” 신자는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얼마 후 도랑에서 흙장난을 하며 노는 아이를 발견한 신자가여보시오, 비누도 한 일이 별로 없군요. 내가 보기엔 아직도 세상에 더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과 더러운 곳이 많으니 말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비누 생산업자가허참, 그러니까 비누란 사용될 때만 효과가 있는 법이 아니겠소?” 하고 말하자 신자는바로 그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마찬가지라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과 실천하는 삶의 중요함을 전해주는 예화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마르 14,22-­26과 병행구절 참조)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에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례를 보도합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주인이 외출했다 돌아오면 종은 제일 먼저 물을 떠다가 주인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를 제자들도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3,14-­15)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3,16-­17).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주님의 파견을 받아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종이 주인을 섬기듯 겸손한 자세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나 봉사자는 겸손한 자세로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을 넘어서는 주님의 섭리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교회의 사목자와 봉사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13,20) ‘2의 그리스도로서 예수님께 파견되어 봉사하는 사목자를 만날 때 비록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들이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 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 시작을 용기 있게    

-정병덕 신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바로 직전이 가장 연료가 많이 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비행기에서 연료가 가장 많이 들 때는 언제일까요?
맞습니다. 비행기 역시 출발하기 직전, 즉 활주로를 돌면서 이륙 준비를
할 때 가장 많은 연료가 든다고 합니다. 연료가 많이 든다는 것은
그때가 가장 많은 힘을 필요로 할 때이죠. 그런데 그 순간이 바로 출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 삶 안에서도 어떤 시작의 순간이 가장 힘이 드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출발선상에서 항상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며, 또한 머뭇거리고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견주어보곤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첫 시작만 어려웠을 뿐,
일단 시작을 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희망이라는 연료가
우리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그 연료로 충전하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면서 머뭇거리게 되는데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도 혹시 머뭇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힘차게 생활하십시오.

 

 믿고 보내시는···

- 김연희 수녀-

 

아직 이동하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른 본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은 신부님에게 “어르신께서 믿고 보내시나 봅니다.” 하고 감히 말씀드렸다. 올해 새로운 곳으로 소임 이동을 하는 동창 수녀에게 “그곳의 적임자는 수녀님이라서 장상 수녀님이 믿고 보내시는가 봐요!”라고 말했다.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볼 때 스스럼없이 신뢰성을 운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 적용했을 때는 선뜻 ‘나를 믿고 파견한다.’는 신뢰심이 약해진다. 그동안 파견을 받으면서 ‘왜 하필 그곳이지?, ‘왜 나야?’ 하는 불만이 먼저 튀어나오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파견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공생활을 마무리하시고 이제 당신 제자들만 곁에 두시고 고별 담화를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고 신뢰 깊고 친밀한 대화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온통 사랑으로 감싸여 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라는 말씀에서 섬김의 봉사와 사랑의 사명을 받는다. 주님한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파견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
세상을 향한 우리의 파견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이다.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믿고 세상 곳곳에 보내시고, 크고 작은 봉사에 파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우선적으로 떠올린다면 우리의 순명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응답이 될 것이다. 언젠가 성서모임 봉사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수녀님을 통해 저를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니 주님께서 마쳐주시겠지요.”라고 한 자매의 응답을 듣고 고개 숙여 고마워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하느님과 하나되기
-오상선신부-

기도생활의 발전 단계를
옛부터 Oratio(구송기도) - Meditatio(묵상) - Contemplatio(관상)
이라는 삼단계로 표현해 왔다.
또 이러한 기도생활과 관상의 최고 목표는 다름아닌
<지복직관>, 즉 하느님을 맛대면하고 뵈옵는 것이라 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만나고 대면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생활 가운데서도
하느님 그분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나의 기도가 Oratio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인가?
즉 입으로만 묵주기도를 바치고 기도문을 외우지만
실제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그리워하지도 않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면
묵상을 한다고는 하는데
머리로만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소위 명상이라는 훈련들이 이 수준에 머물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훈련되지 않으면 묵상이 망상이 되고
온갖 잡생각에 시달리는 시간으로 끝나고 만다.
하느님은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관상의 단계에서는
이제 마음으로 그분을 느낀다.
그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고 의향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정확하게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뭔가를 느끼게 된다.
이제 뭔가 잡힐 듯 하지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실천(Actio)이 관상(Contemplatio) 다음 단계에 놓여져야 한다.
실제로 희미하게 깨닫게 된 것이 명료하게 되기 위해서는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지면서
신비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그때 하느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이렇게 가르치신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보기 위해서는
이렇게 매개자가 필요하다.
그 매개자, 중개자가 곧 예수 자신이요.
예수 자신은 우리가 만나는 일상 가운데 현현하신다.

오늘부터 관구 분할을 앞두고
수도회의 쇄신과 조직구조 개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 수녀원 특강을 나간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나를 파견하신다.
내가 또다른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그들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될 때
나를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분께서는 나를 통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통해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보고
그분이 진정 사랑이심을 믿게 되리라.
그분이 진정 자비이심을 믿게 되리라.
그분이 진정 기쁨이심을 믿게 되리라.

그리고 다시 감사와 찬미의 기도(Oratio)를 드리리라.
그리고 그분이 이루신 일에 대해 묵상(Meditatio) 하리라.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마음속 깊이 다시 느끼게(Contemplatio) 되리라.
그리고는 다시 만나리라(Actio).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신 자연을...

하느님의 Initiative
-김찬선신부-

안식일에 안티오키아 회당에 간 바오로는
사람들을 격려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바오로는 격려의 말을 시작하면서
자기의 말을 들을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하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바오로는 그들을 추켜세우며 자연스럽게 격려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른 점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바오로는 그들이 경외하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뽑으시고
들어 높이시고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고
판관을 세워주시고
왕을 세워주시고
구원자 예수님을 주셨는지 죽 얘기합니다.
주도권, Initiative가 하느님께 있음을 얘기합니다.

바오로의 이 격려의 설교는 프란치스코의 유언을 상기시킵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와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생활을 시작하게 하셨고
나환자에게 데려 가셨고
자비를 행하게 하셨고
입맛을 바꾸어주셨고
신앙심을 주셨고
형제들을 주셨고
살 방도를 알려주셨음을 얘기합니다.
주도권, Initiative가 역시 주님께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하느님의 섭리를
강하게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인간의 집단이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간들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이
인간들의 모든 역학관계를 안에서,
인간들의 모든 활동들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들의 모든 관계를 통해서,
인간들의 모든 활동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역사는 이렇게 세속의 역사와 다릅니다.
세속의 역사는 세상을
하느님 없는 인간들의 요지경 속으로 보지만
신앙의 역사는 세상을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주시고
그리고 당신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場으로 봅니다.

<독서> :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
-
경규봉 신부 ?

 

바울로 일행은 키프로스 섬을 떠나 밤필리아 지방의 베르가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까지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여하였다. 예배순서상 격려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자 회당장은 바울로에게 설교를 부탁한다. 회당장은 바울로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들었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로는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한다.

바울로는 먼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어 가나안 땅을 주시고 그들을 이끌어 가시며 구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가리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내 뜻을 다 이루어 줄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며,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였음을 설명한다.

바울로의 설교나 베드로의 설교(2,14-39; 3,12-26) 및 스테파노의 설교(7장)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셨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하느님의 권능을 누리신다는 내용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주님을 전하는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고, 믿음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의 첫 번째이다. 그리고 그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 다른 어떤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전해야 한다. 정의와 자유, 민주와 평등, 윤리나 도덕, 사회봉사나 자선 등 그 어떤 것도 주님을 전하는 도구일 때에만 가치가 있을 따름이다. 주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는 주님이 삶의 중심이며, 주님 외에 그 어떤 이도 삶의 중심에 놓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주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 주님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임을 설교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필요한 재물, 살아가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는 지식이나 지위 등 그 어떤 것도 내 삶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통하여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님만을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천국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처럼 살고,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함을 설교한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요한 13,34)을 사는 사람,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요한 15,13)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예수님처럼 자신을 바치는 희생적 사랑을 사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임을 설교한 것이다.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우리 선조들은 일생을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놓고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으며(필립 3,8),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오직 주님을 통하여 기쁨과 행복을 누림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자..................◆

 가장 큰 구원의 선물로 다가오신 예수님
-
장훈철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의 기쁨을 나눈지도 벌써 한달이 지나가고 있는 부활 제 4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아 왔다고 증언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 역사 안에서 항상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안식일 회당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의 구원 역사 안에서 무한히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극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택해서 강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 또한 에집트의 고난받는 종살이에서 해방 시켜 주신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을 거부하기도 때로는 반항하기도 했던 광야의 생활 속에서도 절대로 굶주리지 않게 돌보아 주시고 가나안땅으로 인도 해주시는 자비의 하느님, 그리하여 수많은 판관들과 왕들을 통해 왕국을 이루게 돌보아 주신 무한한 은총의 하느님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금까지 돌보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이러한 자비로운 사랑은 항상 인간을 당신에게로 초대하는 화해의 손짓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렇게 화해의 손짓을 보냈지만 인간은 항상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고 거부하고 반항했습니다. 하느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인간 자신의 교만은 날로 커져만 가고, 인간은 계속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만 가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가장 큰 화해의 손짓으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세상에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온갖 대립과 충돌로 갈라진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화해의 장을 열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큰 구원의 선물로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받아온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구체적이고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완성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역사의 시작 때부터 보여준 하느님에게 대한 반목과 거부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아니 하느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한히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삶은 하느님과 인간의 삶의 중개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고 화해할 수 있게 만드신 구원자이셨습니다. 우리가 막연히 알았던 무한한 신비로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지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신비는 단순히 당신의 뛰어난 인내력을 시험하거나, 아니면 아주 신비로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통한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화해의 손짓을 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한 부활의 신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무한한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힘을 받았기에 우리 또한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기에 우리는 용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빠다킹신부-

 어떤 형제님께서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친구에게 말을 합니다.

“이보게. 오늘 나에게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네. 정말로 감사할 일이야.”

“무슨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정말로 주님께 감사할 일이야. 주님, 감사합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어서 말해 봐.”

“오늘 내가 성당에서 집으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네. 그러면서 내 차가 자그마치 5바퀴나 돌았지. 그런데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다네. 내가 얼마나 주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 오늘에서나 깨닫게 되었네. 자, 이러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군. 그런데 나는 자네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네.”

그 형제님께서는 눈이 동그랗게 뜨면서 묻습니다.

“아니, 자네도 나와 같은 일을 경험했나? 그럼 자네는 여섯 바퀴 이상 굴렀겠구만?”

이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네. 즉, 내게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지.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요? 물론 큰 사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한 것, 분명히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사고가 나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요? 아니지요. 당연히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이겠지요. 따라서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때요?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으로 하고, 그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내게 아무런 사고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큰 은총이며 감사할 일인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주님께서는 내게 아무런 은총도 내려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은총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할까요? 이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주님께서 보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들의 이웃들이 아닌가요? 당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나의 이웃 하나 하나가 주님께서 내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을 보내신 하느님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인지요? 바로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고, 특별한 만남이 있어야지만 주님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분명히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할 일 찾아보세요. 정말 많습니다.

  

 청출어람
-노성호 신부-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서 뛰어난
지능을겸비하고 소질을 계발해 나간다면 스승보다 나을 수 있겠지만, 인생의
경험이라든지 생활의 지혜 같은 정신적 부분에서는 결코 더 나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스승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스승보다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써 이미 자신이 스승보다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제가 된 후 은사님들을 찾아뵙기 위해서 모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칭찬과 꾸중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 사제가 되어 나타난 저를 보시더니 계속해서 존대를
해 주시며 어려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스승님은 그 순간에도 너무 소중한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셨던
것 같습니다.
바로 겸손이라는 가르침이었죠. 사실 사제로 살아가다 보니 인사나 칭찬도
많이 받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스승님들의 제자였고, 부족함투성이인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하늘의 주인을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알고 제대로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반대가 되리라 생각했지요.
분명 푸른빛은 쪽빛보다 더 푸르나 그 쪽빛이 만약 없었다면, 결코
푸른빛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박아미 수녀-

◆요한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장중한 표현의 관용구인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이 복음의 앞뒤를 장식하고 있어 말씀을 대하는 순간부터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오늘은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의 삶에 관여하시려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은 유다교의 라삐나 율사와는 달리 가르침에 앞서 행동으로 먼저 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스승의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이지만 먼저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신 분이셨다(필리 2,7 참조).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곁에 머물수록 그 인격에 매료되는 것 같다. 그런 분께서 오늘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단 형성에 실패했던 체험담을 담담하게 털어놓으신다. 마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데 그 실패가 필연적인 조건이라도 되는 양. 그분의 자유로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실패를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구원의 역사로 엮어가시는 빛나는 지혜는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
「장자」에 장천하 어천하(藏天下 於天下) 곧 ‘천하를 천하에 감춰둔다’라는 말이 있다. 천하를 그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손을 대지 않고 그냥 거기 둔다는 뜻이다. 예컨대 물고기를 그릇에 담아두면 그 물고기는 그릇에 갇힌 것이 되지만, 바다에 집어넣는 순간 더 이상 갇힌 신세가 아니라 넉넉한 바다의 품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가 되듯이. 이처럼 가장 큰 대상, 곧 절대자에게 매일수록 사람은 다른 속박에서 풀려나고, 그분께 대한 순종이 철저할수록 인간은 더욱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리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그분 말씀에 철저히 예속된 분이셨다. 크신 하느님께 매인만큼 그만큼 자유의 깊이와 너비가 한량없는 분이셨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답답함을 느낄 때마다 성찰해 보면 영락없이 주님 이외의 것에 매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런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양한 모습으로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나의 일상 안으로 누구를 보내실 것이며,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실까? ‘진실로 진실로’ 깨어 귀기울일 일이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양승국신부-


<그분의 슬픈 눈동자>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이다 보니 끔찍한 일을 겪는 이웃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만일 이런 일을 겪으셨다면 여러분들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무리한 사업의 확장으로 빚더미 위에 앉게 된 친구, 그로 인해 구속 수감되기 일보 직전인 친구, 가정 역시 풍비박산될 위험에 처한 절친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내 형편도 그리 여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절박한 모습을 보니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습니다.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며 친구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진짜 친구’라는 생각에 일단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족들 몰래 꽤 큰돈을 인출해 우선 급한 불을 끄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정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따로 직장잡기 힘든 친구를 위해 자신의 회사에 ‘한 자리’를 마련해서 앉혔습니다. 비록 예전 같지는 못하더라도 그나마 친구 가족이 살아남았습니다. 친구의 얼굴에 다시금 찾아온 희미한 미소를 바라보며 너무도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그 친구의 본색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회사의 경리 시스템을 즉시 파악한 친구는 교묘하게 공금을 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네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따지는 친구를 향해, 그 인간은 회사의 약점, 아킬레스건을 제시하며 막대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너무도 큰 충격에 휩싸인 착한 친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심한 배신감과 그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로 덜컥 큰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큰 고통이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이자, 벗으로 생각했던 유다로부터의 배신을 당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정말이지 너무나 슬픈 복음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극과 극이 교차되는 특별한 체험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그 순간 예수님께 발을 내민 한 제자는 배신을 계획했고, 조금씩 실행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으셨습니다. 넌지시 제자들을 향해 이 사실을 알리십니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일어져야 한다.”고 예언하십니다.


위 성경구절은 예수님께서 시편 41잘 9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이 아퀴디페르라는 절친한 친구에게 각별한 애정을 건넸었고, 그를 자주 앙의 식탁에 초대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데 그 친구가 한 순간 돌변해서 다윗 왕을 배신합니다. 군사를 일으켜 다윗 왕을 곤경에 빠트립니다.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회상하며 다윗 왕이 노래한 탄원의 시편이 바로 시편 41장 9절인 것입니다.


“제가 믿어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 마저 발꿈치를 치켜들어 저에게 대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제자였습니다. 그토록 신뢰했었고, 그 결과 총무역할을 맡겼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랑과 집중교육을 쏟아 부었던 제자 유다였습니다. 늘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빵을 나누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사랑하던 제자였습니다.


유다의 배은망덕한 계획은 예수님의 마음에 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 앞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시는 예수님, 너무나 큰 충격 앞에 할 말을 잇지 못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배신의 길을 걷는 유다를 향해, 오늘 우리를 향해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사랑의 예수님, 그분의 슬픈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나를 섬기는 주님을 체험했을 때
                      비로서 나는 그 누구를 섬길 수 있습니다.

  -홍성만 신부-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파견된 사람이고, 이어서 또 어딘가로 파견될 사람이며 종으로서 규명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무엇은 아느냐' 하면,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은 의미가 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종이 되시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섬기고 나에게 봉사하신 스승이신 예수님을 알고 체험했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이 되시어 나를 섬기고 나에게 봉사하시는 그 주님을 알고 체험했을 때, 비로서 나는 섬길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알고 체험한 만큼, 비로서 그 누구를 섬기고 봉사하는 복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서 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백합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끝없는 봉사와 섬김,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채득하며 이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 여기에 넘치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 이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축복입니다.

 

~ 오늘 말씀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
-이기양 신부-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킨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선교 여행이 오늘 독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은 1장에서 28장까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1장에서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어 가는 과정을, 13장에서 28장은 바오로 사도를 중심으로 하여 안티오키아에서 로마까지 다른 민족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3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1차 전도여행(45-49년경)은사도행전13-14장에 언급되어 있지요. 전도사들은 바르나바,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콜로4,10) 그리고 바오로입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셀레우키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 땅인 키프로스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파포스에서 전도하였습니다.

파포스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지역 페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사도13,13) 페르게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터키 중부 지역으로 가다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고(사도13,14) 사도행전 13장14-52절에 따르면 전도사들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리스트라에서 전도합니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에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요 바오로는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사도14,8-18) 리스트라는 제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오로의 애제자가 된 티모테오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이들 일행은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14,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거꾸로 가면서 보살피고 나서, 아탈리아 항구에서 전도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배를 탑니다.(사도14,25-26)

2차 전도여행(50-52년경)은 사도행전 15장 36-18,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전도사들은 양분되어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시민인 실라스(사도15,22.32.40:16,38)는 바오로가 이미 1차 전도한 바 있는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가지요.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제자로 삼기도 합니다.(사도16,1-3) 이어서 당시의 갈라티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 수도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에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티아 지방에 다른 민족 중심의 여러 교회를 창립하게 되지요.(갈라4,13-15:사도16,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16,8-10: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 에게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은(사도16,6-11)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피, 테살로니카,베로이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코린토 교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바오로는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km 내륙으로 들어가서 필립피에서 전도합니다.(사도16,13-15) 필립비 교회야말로 바오로가 구라파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입니다. 필립피 교회는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유일무이한 교회이지요. 필립피를 떠나 바오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테살로니카로 가서 전도합니다. 바오로가 베로이아 마을에서 전도하는데 테살로니카 유다인들이 들이닥쳐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베로이아에 남겨두고 홀로 아테네로 떠났다가(사도17,10-15)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km 떨어진 코린토로 가서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제법 큰 교회를 세웁니다.(사도18,1-17)

3차 전도여행(53-58년경)은 사도행전 18,23-21,16절에 실려 있습니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갈라티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내려가서 무려 27개월 가까이 활약합니다.(사도19,8-10:참조20,31) 사도는 한편으로 전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많은 편지들을 써 보냅니다.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로 내려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20,3)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으니 그것이 곧 로마서입니다. 장차 로마 교회를 방문한 다음 스페인으로 가서 전도할 작정을 한 사도인지라(로마15,22-29) 자신의 신앙을 알리는 뜻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그런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이지요. 코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필립피 교회로 가서 58년 과월절을 보내고(사도20,6) 에페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밀레토스, 그리고 오늘날 레바논의 항구도시 티로,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 프?레마이스, 이스라엘 총독부가 위치한 카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사도20,7-21,6)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 때마다 바오로 사도는 긴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 때에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제2차 전도여행 때에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 때에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의 그리스인들에게 각각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 내용은 제1차 전도여행으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의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다윗 가문에서 나올 것이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시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구약성경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선택하시어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내시고 강대국으로 키워주셨지요.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그들을 먹여주시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판관을 세워 다른 민족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셨고, 예언자 사무엘에 이르러 백성들의 요구를 들으시어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특별히 다윗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사울의 뒤를 잇는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가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를 보내주셨지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였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해 가르치는 바오로 사도의 교리 교육으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준비된 메시아임을 깨닫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 차례에 걸친 광범위한 전도여행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를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선전한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습니다. 사도는 다마스쿠스에서의 예수님 체험을 이제 복음 선포로 옮겨 세계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그 결실을 맺어갑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 역시 복음의 사도로서 실천적인 삶을 살 때 그 은총이 깊어지고 계속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내 안에

-강영구신부-

 +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종이 주인보다 더 나를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를 수는 없다.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대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이 편지를 쓰는 저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매일 아침 성당 앞뜰의 행복한 느티나무를 봅니다.
느티나무가 행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 자태(姿態)를 보면 압니다.
신록(新綠)으로 싱싱한 모습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티나무의 행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느티나무를 바라보면 저도 행복해집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제 자리에서 제 할 바를 다하는 느티나무는 행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밖에서 찾습니다.
출세하여 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남보다 더 많은 돈과 재물을 가지면, 더 많은 지식을 쌓으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신분(身分) 상승(上昇), 재물과 지식의 축적(蓄積)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만만 증폭(增幅)시킬 뿐입니다.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파견된 사람은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종의 행복은 주인을 내쫓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관철하려한다면 그는 이미 파견된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은 느티나무의 느티나무다움, 아버지의 아버지다움, 어머니의 어머니다움, 아들의 아들다움, 사제의 사제다움, 수도자의 수도자다움에 있습니다.

느티나무가 장미꽃을 피우려고 하면 불행해집니다.
당신의 행복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당신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一明)

 

   -정현진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나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의 마지막엔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께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묵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에 새겨지는 말씀이나 그분이 말씀하신 사상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분의 모든 삶입니다. 복음을 머리로 듣고 지식으로 성서를 공부하고 말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나의 온 삶으로 받아들일 때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던 그 행위를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당시 유다 사회에선 노예들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노예들이 했던 일을 제자들에겐 스승이었고 지금 우리들에겐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너희들도 모든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면서도 당신의 피조물이었던 사람들을, 그것도 세상의 권력가나 왕이 아닌 비천하기 짝이 없었던 무리였던 제자들을 그분께서 섬기셨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섬겨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기보다 강하고 높은 사람에겐 개보다도 더 비굴해도 오히려 그것이 더욱 현명하고 자기보다 못하면 한없이 업신여기는 것이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그래서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늘 기도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모습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의 모습에 가까울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기를 바라고 낮은 자리보단 항상 높은 자리가, 섬기기보단 섬김을 받는 것이 항상 더 행복하다 생각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것을 우리는 늘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신앙이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임을 믿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께서 살아가셨던 모든 삶까지 우리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넉넉한 사람이 선심쓰듯이 행하는 봉사가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던 주님의 섬김을 우리 또한 살아가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종이 되어 서로를 섬겨야...
-박상대 신부-

요한 1장

요한 2,1 ~ 12,50

요한 13,1 ~ 20,31

요한 21장

도입부

계시의 책

영광의 책

결문

-서문(1,1-18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1,19-51) 

<일곱가지 계시로 구성됨>
1. 사랑 대신에 사랑을(2,1-4,45)
2. 생명을 주시는 분(4,46-5,47)
3. 생명의 빵(6,1-71)
4. 나는....이다(나다)(7,1-8,59)
5. 빛의 심판(9,1-10,39)
6. 생명이 죽음을 이기다(11,1-54)
7.죽음을 통해 생명이(11,55-12,36)
+ 표징의 책의 결론(12,37-50)    

+ 고별사(13-17장)
- 나는 길이다(13,1-14,31)
-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장)
- 내가 세상을 이겼다(16장)
- 아버지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17장)
+ 때(18-19장)
+ 죽음과 부활(18-20)
- 제자들이 신앙에 이르다(20장) 

주님과 베드로,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 


요한복음의 제2부(13장-21장)에[*두올강론 : 위 도표에 의하면 제3부(13-20장)] 속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마지막 가르침(13장-17장)을 들려준다. 이 가르침은 곧 고별사이다.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극진한 사랑, 즉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요한 13,1-11(주님 만찬 성목요일 복음)의 내용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12-15절) 이는 스승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행위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자들이 서로간에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어디까지 따라해야 하는지 본(本)을 보여 주셨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자주 서열(序列)다툼을 벌였다.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를 두고 다투기도 하였고(마르 9,34),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영광을 차지하시는 그 날에 영과의 자리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마르 10,37).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누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35), 또 "너희 사이에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 라는 역설적인 가르침을 내리셨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한 발 더 앞서간다. 공관복음은 '누구든지 첫째나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종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요한복음의 핵심은 서열(序列)에 관계없이 '모두가 마땅히 서로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서열(序列)과 무관(無關)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마땅히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겸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반론의 제기도 예외도 용납되지 않는다. 주인이시며, 스승이시고 파견하시는 주님 스스로가 본보기를 보이셨으니 말이다. 종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칭찬 받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마땅히 서로를 섬기는 일을 실천하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신다.(13,17) 이 축복은 곧 행복이며, 겸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 겸손한 사람 ○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나치게 우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자화상을 가지고 삽니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거나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잘하려고 힘쓰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으면 나은 대로, 못하면 못한 대로 그를 시기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남이 나보다 나으면 견디질 못하고 조금 나보다 못하면 멸시를 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 남에 대해 자주 섭섭해하는 사람, 남이 하는 것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교만한 자아(自我)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환경에도 잘 적응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탓하는 까닭은 내가 그런 환경보다 더 좋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부유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환경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항상 자족(自足)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하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까닭은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정말로 겸손하고 거지와 같이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한 경우에 처해있고,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으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빛소리 교회>의 이철 목사의 '겸손한 사람'에 관한 글에서]......◆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