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1-16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 두 천사가 있었다. 마리아는 두 천사에게 주님을 누가 가져갔는지 묻다가 뒤돌아보고 예수님을 보았지만 알지 못하고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울고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 이라고 불렀다.
이전 말씀에서 베드로의 말을 들은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하고는 베드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지는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빈 무덤의 증인이 되었던 두 제자들은 떠났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무덤 밖에 남아 있었다. 물론 마리아도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남아 있던 것은 아니다. 아직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에 그 자리에 남아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간지 알지 못해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알렸지만 그들은 빈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가버렸다. 결국 두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싶어 그 자리에 남아있던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 계시던 동안 그 은혜를 다 못 갚았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 은혜를 갚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울다가 마리아는 무덤 안을 향해 몸을 굽혔다. 원어에는 보았다는 말은 없다. 번역자들이 말이 되도록 채워 넣은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울다가 갑자기 무덤 안을 향해 몸을 굽힐 리가 없다. 무슨 소리나 나든지 빛이 보였든지 뭔가 변화가 있었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12절에서는 흰 옷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주목해서 보았다는 뜻으로 구경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말이다. 그 중 하나는 머리맡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발치에 있었다. 그곳은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이라 했다. 흰색은 정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색이다.
13절은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천사들이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말했다. “여자여!” 라는 말은 성숙한 여인을 높여서 부르는 존칭이다. 마리아는 2절에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누군가가 나의 주님을 가져갔고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2절과 다른점은 2절에서는 우리가 모른다 했는데 13절에서는 나는 모른다고 한 점이다. 다른 여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을 따라 갔는지 모른다. 어쨌든 요한은 천사들을 직접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마리아는 뒤로 돌아섰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뒤 돌아서 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여기서도 보았다는 말은 주목해서 보았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뭔가 특별했기 때문에 주목해서 바라본 것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이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완전히 몰랐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보았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에 이내 무덤쪽을 향해 돌아서서 울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다시 무덤을 향해 돌아섰다는 말은 없지만 16절에 ‘돌이켜’ 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빈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보고도 바로 고개를 돌려 울고있던 마리아나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이다.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등지고 무덤을 향해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라고 부르신 뒤 왜 우느냐고 말씀하셨다. 천사들이나 예수님이나 똑같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는 것은 울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우는 것이 잘못이란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기쁜 순간이기에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누구를 찾느냐?” 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미 부활하셨는데 왜 그 시신을 찾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주 대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역시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다 알아보지 못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활한 모습도 처음에는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아내가 제일 걱정을 한다. 천국에 가서도 함께 산다고 하고 만약 안 된다면 옆집 살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조른다고 늘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고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에 답이 나오니 안심 하시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신경 끄고 다시 돌아서서 울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울면서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모셔가겠다고 했다. 예수님이 합법적으로 자신의 가족의 무덤에 묻힌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 주인이 옮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전히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리아는 다시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며 예수님에게 ‘랍오니’ 라고 불렀다. 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마리아야!’ 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 부르는 음성을 알아 들은 것이다. 요한복음 10: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양들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따라간다고 했다. 우리 고양이도 우리 부부가 ‘하비야!’ 하고 부르면 ‘응애!’ 하고 대답하며 달려온다. 우리 하비는 야옹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마리아도 목자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그 음성을 알아듣고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한 우리도 서로의 말을 듣고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부활한 뒤에는 부활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볼지도 모른다. 부활하지 못한 사람이 영광의 몸을 입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니까.
두 제자들과 마리아의 차이가 무엇인가? 믿음인가? 아니다.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물론 마리아가 먼저 보았고 두 제자들도 보았지만 모두 부활의 주님을 믿은 것은 아니다. 차이는 사모하는 마음의 차이이다. 감사해서 그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이 마리아에게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던 마리아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에서 출세할 줄 알고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저들에게는 마리아처럼 간절하게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를 찾아가 만나준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신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믿고자 찾은 것은 아닌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