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4:12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개역개정판)
잠언 4:12 네가 걸을 때에, 네 걸음이 막히지 않고, 달려가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번역성경)
고린도후서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개역한글판)
고린도후서 4:9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
시편 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개역개정판)
시편 4:7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표준새번역)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공격 가운데 하나는
절망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사망이 최악의 새드엔딩과 절망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이 절망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맛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조차도
부활을 맛보았던 예수님 당시의 나사로를 비롯한 소수의 인물들도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누리지 못했다.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를 불렀던 다윗은
3편에 이어서
4편에서도 곤란한 상황에 있었던 것 같다. (시 4:1)
어려서부터 사자와 곰을 상대해야 했던 사람 (삼상 17:34)
왕실에서 수금이나 타다가 그렇게 계속 지냈으면 좋았으련만(삼상 16:23)
자식을 셋이나 잃었던 사람...
왕이 되는 것이 인생 목표가 아니었지만
왕으로 지명된 사람
그것 때문에 현직 임금(?) 사울에게 도망다니느라 다보낸 청춘...
말년엔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던...(왕상 1:1)
누가 다윗의 인생을 평탄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윗은
그 모든 괴로움 가운데서도
마음의 기쁨을 간직했고
그 기쁨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알았으며
세상의 기쁨, 곧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임을 알았고 누렸다.
사도 바울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젊은 시절에는 인정도 받고 좋았겠지만
열정의 사람이었지만
사도행전 26장 14절 말씀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전의 삶을 가장 잘 갈무리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그 이후의 삶은?
고린도후서 4장에 잘 나타난 그대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괴로움이 이어졌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개역개정판)
어린 시절 남부산노회(남노회와 동노회로 분리되기 전) 성경암송대회
초등부 본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8절
짧다면 짧은 구절이었지만
글자 하나씩 틀리는 디테일한 틀림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암송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말씀대로 사는 것도 힘들지만
말씀을 외우는 것도 참 힘들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느꼈다.
성경암송대회와 사생대회는 봄에
독창, 합창, 중창 대회는 여름에
성경고사대회는 가을에 진행해서
연초에 전국주교연합대회에 중창과 성경고사대회를 실시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뭐 많이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부 시절, 생일에 암송대회였는데
얼마나 참가자가 많았는지 200명 가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뒤에서 다섯 번째...
(중간에 가버린 친구도 있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채점하지?
지금 학부모들이라면
AI의 채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따지고 들지도 모르지만
즐거운 아이들은 광안리 바닷가를 누비며 돌아다녔고
집에 가서 어머니께 이 사실을 보고한 다음 놀이터에서 그네 잠깐 타고 돌아온 다음
목숨 걸고 외우고 또 외웠다.
생일이라는 걸 인사 전에 말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킬 용기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의 피곤한 눈빛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잘 가다가
갑자기 끝에서 3,4초간 블랙아웃...
생일선물로
암송 좀 잘하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했지만
즐겁게 광안리에서의 시간을 보낸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우리 교회이었음에도 자리가 없어서..) 이리 저리 암송할 것을 찾아다니며 외웠던 노력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16절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말씀도 까먹었던 그 아이는
그 이후로 정말 그 말씀을 까먹었는지
삶의 작은 일에도 낙심하며
소망과 희망이 없는 자처럼 살아왔다.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잠 4:12)는 잠언 말씀을 믿기나 한 것이었을까?
인생은 대체로 곤고했고,
뭐 그리 열심히 외운 것같지도 않은 다른 교회(남부민동 모 교회...) 친구들이 상 받은 것을 축하해 주지 못한 옹졸함은 DNA탓이 아닌 내 탓이다.
맥가이버 본방 사수를 못할 것 같으니 녹화해 두어야겠다는 아버지는 많이 늙으셨고
(정작 그날 밤엔 비디오가게에서 빌린 다른 비디오를 보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족한 것 같은 순간은 부지기수였다.
(큰 실족, 작은 실족, 다양한 실족...)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가 부러웠다.
유명한 이들이 유튜버가 되면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는 더욱 풍성해지기도 할테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은 거의 없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거의 매번 곯아 떨어졌다.
자고 나서 일어난 아침은 늘 피곤했고
수면 시간은 4시간, 5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무리가 올 것 같아서 더 자려고 하면,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나의 한계가 드러난다.
지나간 과거를 포맷해달라는 기도는 절대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이다.
아니, 더 큰 문제는 지금이다.
말씀 암송을 다 못해도
말씀을 믿으면 되고
그 말씀을 의지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실족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지독한 불신앙이다.
하나님께서 핍박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엄청난 신성모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내 인생을 의도적으로 불행하게 하시면서,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을 주문하시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도전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크고 작은 슬픔의 파편들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들(고후 4:17)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일상과 일생을 망쳐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사탄 마귀 뿐이다.
그놈의 소원을 이뤄줄 필요가 없다.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보배를 가졌다 (고후 4:7)
어차피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 능력을 의지하며 걸어가는 이에게 실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관과 영화로운 면류관(잠 4:9)이 준비되어 있다.
일상의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다.
평안히 눕고
잘 수도 있다.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까 (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