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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의 초여름
김 선 구
충남 보령에 있는 만수산으로 산행하는 날. 이곳으로 산행이 나에게 초행길이지만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이름만은 귀에 익었다. 언뜻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읊었다는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이 시 속의 산은 보령 만수산이 아니다. 경기도 개성시의 진산(鎭山), 옛 고려의 왕궁터 북쪽에 있는 산이다. 개성 만수산에는 칡넝쿨이 무성했던 모양이다. 칡도 꽃을 피우면 예쁠 텐데, 그 향기가 어떤지 자못 궁금했다. 칡 꽃 향기 속에서 숨어 있을 역사의 흔적을 생각하며 산행 길에 나섰다.
유월이라 하지만 기온이 서늘하였다. 지난밤 비를 뿌리고 간 여파로 공기가 청량하여 산행에 즐거움을 더 해 줄 모양이다. 대구를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활기가 넘쳤다. 흥겹고 멋진 노래 가락이 울려 퍼지고, 차창너머로 내다보이는 산색이 더욱 푸르렀다. 초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니 초목들의 색체가 더욱 농후하고 요염해 졌다. 부드럽고 연약하게만 보이던 신록들 모습이 어느새 숙성한 처녀처럼 변하여 기가 충만하였다. 건드리면 도전이라도 할 자세. 모든 것이 심기충천한 분위기이다.
우리가 탄 버스가 대전에서 서해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며 공주와 부여를 스쳐 지나갔다. 만수산으로 가는 연도의 야산들이 온통 밤꽃으로 덥혀있다. 온 산에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꽃이 만발하였다. 지나가는 객들을 유혹 하려고 추파를 떠는 것인지, 감히 접근하지 말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허지만 탐스러운 꽃들과 그들이 발산하는 향기가 기세를 내뿜으며 초여름을 대변 하는 듯했다.
유월은 밤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아카시아 꽃들이 오월을 장식 했다면 유월은 단연 밤꽃이 돋보이는 계절이다. 오월 훈풍이 아카시아 꽃향기를 멀리 멀리 실어내지만, 초여름의 햇살은 밤꽃 냄새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무게감을 더하게 할 것 같다. 아카시아 향기가 가녀린 여인의 채취라면 밤꽃 향기는 육중한 사내의 몸 내음이다. 바람난 여인네를 꽉 잡아 두려는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스쳐가는 허황된 생각들이 주책을 부린다.
어째서 이곳 지방에만 특별하게 밤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을까? 모두들 밤꽃이 활짝 핀 모습을 찬양하고 있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한마디 한다. “한 때 유행했던 유실수 심기 운동의 결과”라고. 소나무가 대부분인 우리나라 야산에 유실수를 심어 농가소득을 높여보려는 취지에서 벌인 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벌였던 운동이었는데 유독 이 곳에만 밤나무군락지가 형성된 것이 특이하다. 특히 이 지방에서는 밤나무심기를 독려했던 모양이다. 잘 살게 된 오늘에는 밤나무가 소득이 없는 작목으로 취급되어 돌보지 않는다고 한다. 의붓자식처럼 버려져서도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있으니 그 충직성만은 높이 평가해야 되지 않겠는가! 못살고 배고픈 시절의 영상이 밤 꽃 속에 서려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에 눈길을 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있는 동안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만수산은 해발 575m의 낮은 산이며, 보령과 부여 사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안성 칠장산에서 출발하여 태안반도를 향해 달리는 금북정맥에서 가지를 치고나온 산맥의 곁가지 끝자락에 한 덩이 사과처럼 달려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을 타고 흐르던 지맥의 정기가 여기에 멈추었으니 여기가 만수(萬壽)를 누릴 장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것일까? 산 이름에는 나름 데로 사연이 있을 터인데 그 내막은 알 수 없다.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경사가 가파르고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잠시 휴식하며 일행이 준비해온 오이 한쪽으로 목을 축였다. 산행 중에는 오이 맛이 그만이다. 산행 경험이 풍부한 L선생은 항상 오이당번이다. 토마토 당번도, 과자당번도 정해져 있어서 산행에 즐거움을 보태준다. 다시 일어서서 산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수군 데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 중 한사람이 휴식하며 벗어 놓았던 배낭을 잊고 왔다한다. 또 한 번 휴식을 갖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이가 드니 건망증이 도진 모양이지만 이것도 산행의 추억으로 기억 될 것이니 과히 괘념 할 일이 아니다.
만수산은 산세가 아름답거나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산이 아니었다. 그저 숲이 짙은 평범한 산, 순하고 걷기에 편안한 산이었다. 옛날에는 산이 깊고 험하고 인적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숨어 살았다 한다. 김시습이 누구인가? 천재시인이요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탄압하자 승려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다가 말년에 만수산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이곳에 은거하며 걸었던 길을 우리가 걷고 있음을 생각하니 도도히 흘러 온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김시습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니 고려왕조에 충절을 바쳤던 두문동 72인이 떠오른다. 두문동은 개성 북쪽 만수산 아래 동내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불출했던 고려유신들이다. 김시습은 이들의 행적을 생각하며 만수산에 은거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어쩌거나 보령의 만수산도 개성의 만수산도 충절의 고향임에 틀림없다.
산을 내려오니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는 절이 우리를 맞이했다.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다는 뜻일까? 무량겁(無量劫) 속에서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중생들을 보듬어 주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무량사는 통일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는 고찰이다. 극락전에 모셔진 거대한 불상이 모든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것 같다. 은둔생활 하다가 생을 마감한 김시습의 혼도 이곳에서 편히 잠들어 있었다. 사리를 담은 부도탑과 영각(影閣)에 봉안된 초상(肖像)이 그의 자취를 더듬게 했다.
김시습의 초상 앞에 서니 충절을 고집했던 그의 기상을 엿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밤꽃의 향연도 초여름의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청정한 공기가 절 도랑을 맴돌았다. 만수산에서 불어오는 청화된 공기가 무량사를 감싸고 있었다.
첫댓글 글 속에서도 시원한 오이맛이 풍겨납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했는데 산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밤꽃에 얽힌 이야기가 웃음을 머금게 합니다.
절 마당에 있는 울창한 늙은 나무를 머리속에 그리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수산의 자연풍광과 거기에 얽힌 선조들의 삶의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밤꽃하면 밤꿀만 연상했는데 밤꽃에 대한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그 날의 산행길이 새삼 떠오릅니다. 연출 같았던 황당한 에피소드의 주인공 이야기며 온통 산을 뒤덮은 하얀 밤꽃 이야기 이방원의 하여가가 떠오르는 만수산 이야기 시원한 오이 한토막에 느껴보는 행복감, 지나고 보니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 나는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만수산 무량사를 다녀 오게 됩니다. 무량사에 모셔진 부처님이 충신 김시습의 영혼을 위로하며 영원히 안식케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밤꿀의 색깔은 진하고 맛은 탁하면서 약간 독한 듯한 맛을 느끼게 합니다. 꿀맛과 밤꽃향기를 맡으며 밤꽃은 육중한 사내의 몸내음이란 표현에 공감하게 됩니다. 감미롭고 맛깔나는 표현의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만수산 산행 길과 무량사를 상세 하게 소개하신 글....마치 다녀 온 느낌입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산행을 하다보면 그저 주변을 스쳐 지나게 되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기억도 희미해서 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의 경험을 뼈대로 이렇게 풍성한 내용을 담아 좋은 글을 써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속에서 杜門洞72현을 읽고 반대의 뜻을 혼동했던 일이 기억이 부끄러움을 적습니다. 焚書坑儒시황제의 자신의 뜻과 다른사상을 적은 책을 불태우고 자신을 비난한 유학자를 산채로 묻었다는 유학자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분서갱유를 고려말 충신 유생들을 포위하여 불태워 죽인 조선왕조를 혼동하여 분서갱유를 조선조의 사건이라고 우겨 친한 친구를 당황케 한 일이 생각납니다. 친구는 분서갱유는 확실히 알고 두문동 72인은 알쏭달쏭 했는데 오늘 확실히 알았습니다.초한지와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책을 읽고 혼동했던 찜찜함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을 하며 우리나라가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다 누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다 같은 산의 풍광도 오월과 유월이 다르고 봄,여름, 가을, 겨울에서 느끼는 정취가 다름은 말할 것도 없구요. 저도 지난 주 서해안 쪽을 여행하며 오가는 길에 밤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만수산 산행 이야기 재미잇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수산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그 산에 갔다 온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등산길 힘들어도 벗이 가까이 있고 풍성한 자연의 의미를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읍니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편안한 상태에서 그날을 회상하니 추억도있고 이야기도 숨어있었습니다. 풍경과 밤꽃의 향연까지 느끼게 하여 감사를 드리며 자연스러운 글속에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