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옛날의 귀한 것을 새기고자 붓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친 김종춘 모필장(毛筆匠)을 인터뷰했다. 중구 문화의 거리 동헌 앞의 죽림 산방에서였다. 언론과 방송에 숱하게 출연해 참고자료가 넉넉했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는데 3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우선 그가 워낙 달변인데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사실 평생을 바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면 1박 2일의 시간으로도 모자랄 터이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김 옹은 6.25전쟁을 겪고 3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던 형이 휴전으로 전역하자 밀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은 붓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첫걸음이었다. 스승 김형찬 옹은 일제강점기 소아마비로 한쪽 발을 절어 만주로 떠나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갖은 고생을 했으나 나중에 붓 공장을 운영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온 가족까지 부양할 만큼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김 옹은 그런 스승으로부터 붓 만드는 일을 사사받았다. 50여명의 기술자들 속에서 김 옹도 부지런히 기술을 전수받으며 3년을 지냈다. 그 후 대전ㆍ광주ㆍ목포를 비롯해 전국을 다니며 기술을 익히며 생활했다. 24세에 논산훈련소를 거쳐 군에 입대한 김종춘 옹은 제대 말년에 가족들도 모르게 월남전에 자원하여 파병되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무사히 귀국하고 전역했지만 세월이 흘러 전우들이 고엽제의 피해를 입은 것을 알게 되었고, 본인도 이 일로 2014년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결혼 후에는 서울에서 필방을 차려 제작한 붓을 판매했다. 붓을 만들고 먹을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치다보니 자연스레 가족들도 함께 참여하며 일을 거들었고, 울산에는 1993년 중구 성남동에 죽림칠현 필방을 열면서 지역 화방과 서실에 수십 년간 붓을 거래하게 되었다. 김 옹은 2004년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모필장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현재 따님이 모필장의 전수자로 기술을 익히고 있다. 언론과 방송에 소개되자 단양의 유명한 사찰의 주지가 찾아와 수백만원어치의 붓을 사간 것을 비롯해 붓을 써본 사람들은 이구동성 "최고의 제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청솔모와 족제비의 털과 노루 겨드랑이 털로 붓을 만드는데 김종춘 옹은 말꼬리를 재료로 해서 붓을 만드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연필이나 볼펜, 만년필 같은 필기구가 등장해서 붓글씨는 전보다 활용빈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전국의 유명한 문화재의 현판은 거의가 붓글씨인데 그것은 `붓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정서가 아직까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의 모필장 김종춘 옹은 일생 붓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두동의 먹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두꺼운 철판이 스쳐지나가 목숨까지 잃을 뻔한 사연을 말했던 김종춘 옹의 얼굴에는 희미한 상처자국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필자에게 그 상처는 머물렀던 장소마다 지나왔던 세월마다 수많은 삶의 편린들이 있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붓 만드는 과정은 엄정한 재료선정이 필수인지라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해외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그렇게 구한 재료로 150번의 손길을 거쳐야 비로소 붓 한 자루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김 모필장은 마지막 소원으로 "수년째 진행해서 곧 가시화될 문방사우 전통체험관을 통해 일생의 절차탁마 기술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붓과 먹을 만드는 체험학습과 더불어 붓으로 글씨를 적으며 인생을 관조(觀照)해 보는 경험을 남겨주고 싶다는 것이다. 봄날, 한평생 붓과 함께 걸어온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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