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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다
본문 / 요한복음 3:1-8 / 이규현목사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의 신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에 비밀리에 찾아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마름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그가 예수를 찾아올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구도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구도자란 자신의 영혼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늘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찾습니다. 문제는 많은 것을 손에 쥐었지만, 여전히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갈증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은 배만 부르다고 만족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마약까지 손을 댈까요? 인간 심연의 고통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할 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와 마약은 매우 가깝습니다. 종교를 찾는 사람도 마약을 찾는 사람도 비슷한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면의 갈증을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가끔 자동차 중에 리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은 멀쩡한데 타고 보니까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가정도 꾸려나갑니다. 겉으로 보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무엇인가 목이 마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영혼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노력할수록 종교라는 세계에 속박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상태가 됩니까? 영혼이 빈사 상태가 되고 맙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것은 일종의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구원 사건은 철저한 자기 절망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지금 만족스럽지 않다’라는 솔직한 인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 5년, 10년을 다녔지만, 영혼은 방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의로 자신을 감싸고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꾸미고 늘 근사한 말을 하고 다닙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쌓아온 사회적 신분 안으로 숨어 버리고, 어떤 이들은 영혼의 갈증을 느끼지만 그냥 갈증으로 끝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일의 세계에 빠져들어 영혼의 갈증을 무시합니다. 목이 마르면 마르다고 해야 합니다. 아닌 척해서는 안 됩니다.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인데 그냥 덮으면 어떻게 될까요? 큰 사고가 납니다. 영혼에 일어나는 답변을 얻을 때까지 질문해야 합니다. 갈증이란 아직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질문에 답을 얻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용기가 있습니다.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칭찬할만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갈증을 가진 사람은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답을 얻는 것입니까? 질문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목이 마른 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목이 마르면 콜라를 마시듯이 적당히 해결하려고 합니다.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보지 않습니다. 몸이 아플 때마다 병원을 드나들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공허하고 절망적인 영혼의 상태에 놓여 있는데도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영적인 게으름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영혼의 갈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신자들도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그 영혼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데 영적인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처음 교회에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까?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본문 2절에 “그가 밤에 예수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무언가 충격과 도전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니고데모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 니고데모는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5-6절에서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며 영과 육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가를 이야기하십니다. 영과 육은 엇비슷한 길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길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길입니다. 마치 기찻길의 선로와 같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영의 일이 친숙한 것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같이 사는 가족이라도 아득한 이야기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할 때 육이란 어떤 것입니까? 죄의 본성의 지배 아래 사는 인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기능이 거의 작동 불가능한, 퇴화할 때로 된 영입니다. 상대적으로 죄악의 본성이 강력한 것입니다. 육은 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거부합니다. 육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육에 아무리 덧칠하고 아름다운 악세서리를 달아도 소용없습니다. 육은 그냥 육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육의 힘이 밀고 올라옵니다. 육은 우리를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말초적이고 육감적인 세계로 이끕니다. 니고데모는 육적인 상태로는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부분의 갈망이 목까지 차올랐던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서 9절에는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니고데모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답은 한가지, ‘거듭남’이었습니다. 오늘 대화를 보면 주님은 지성적이었던 그에게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영혼의 거듭남을 몰랐기에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냐고 질문합니다. 성경은 영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영혼이 곧 생명입니다. 육체가 건강해도 영혼이 떠나면 끝입니다. 저는 임종 시에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영혼이 떠나는 순간 육체는 그냥 육체입니다. 육체가 존귀한 이유는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그냥 고깃덩어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신 다음 그 육체에 생령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생령이 영혼입니다. 그 영혼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영이 죽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밥만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신령한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모릅니다. ‘평안하다, 기쁘다, 행복하다, 만족하다’라는 표현은 내 영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진정한 기쁨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혼이 채워질 때 기쁨의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불안하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사업의 실패 때문이 아닙니다. 때로 세상의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상태가 건강하고 부요하면 그 실패로 인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영혼이 빈사 상태에 놓인 사람은 성공해도 무너집니다. 성도 여러분, 성공이 구원이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이 영혼의 부를 결정해 주지 못합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오늘 외형적 변신, 어느 정도의 보기 좋은 변화를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며 술·담배를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영적인 거듭남을 말합니다. 거듭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기대할 것이 없고,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처음에는 구도자의 태도로 교회를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도자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구도자로 왔지만 거듭남의 작업이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 없이 교회의 문화를 먼저 익혀버립니다. 봉사도 하고 교회 프로그램, 양육 프로그램에 다 참여했어도 거듭남의 경험이 없으면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 없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익숙해집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다릅니다. 외적인 활동이나 결과 이전에 내가 거듭났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거듭남,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보수, 개조, 재조립, 수정이나 보완이 아닙니다. 주님은 재창조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적당히 뜯어서 고치는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존재론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가짜 변화입니다. 새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은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 자격을 얻었다고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중생 혹은 거듭남에 대해서 별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난(non)크리스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듭남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만으로 회심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 회심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세속화라고 합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질 때 교회는 자동적으로 세속화가 진행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온전한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 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듭남의 경험이 있는가 없는가를 꼭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출발이 많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한 답을 해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영적 세계에 눈뜸을 의미합니다. 내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내가 어떻게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인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출발지점을 잘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돌이킴, 다시 태어남이 없으면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변질이 일어납니다. 회심이 없는 사람은 예배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에 대해 이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식과 영적인 깨달음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관해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그 성경을 영적으로 깨달았는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우리 안에 거듭남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어제 보던 것이 오늘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고 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 좋았던 것들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들이 좋아지는 관심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특별히 죄에 대한 태도가 현격히 달라집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었고, 죄의식을 느끼는 기준도 매우 낮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포장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신자는 다릅니다. 죄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고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더 이상 무덤덤하게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전에는 누군가 죄를 지적하면 화가나고 싫었는데 이제는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는 새로운 자기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구제불능한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심각한 죄임을 깨닫고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분명한 경험이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어떤 교육이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실 때 일어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 주변에 맴돌았지만, 그는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교회 출석이나 봉사, 제자훈련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인으로 세월만 보내다가 끝이 납니다.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분이 하시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때 그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전혀 믿을 것처럼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복음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그 입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미 성령이 내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지금도 사람들을 계속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태어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각자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나 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입니다. 나만 놀라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놀랍니다. 아무리 보아도 설명이 안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신비한 일입니다. 거듭난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뭉클해지고 주님을 묵상하면 가슴이 북받쳐 오릅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듭니까? 이성적 작용을 넘어선 무엇인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안과 절망, 삶의 방황과 끝없는 갈증은 내가 속해 있어야 할 곳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영혼은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갈증으로 시달리는 분들이 있습니까?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영혼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똑똑함이나 세상적으로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면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의 놀라운 선물을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만 내밀면 누구든지 그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라도 그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까? 그 안에서 깊은 확신 속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돌아선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글을 깨친 사람이 글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에 우리는 거듭났고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거듭남은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전의 삶의 방식과 죄에 길들어져 있는 성향이 남아있긴 합니다. 그렇기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왔다면 이제 중요한 출발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영화로운 단계로 이끌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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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