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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 정성스럽게 장문의 내용을 소개한 글을 잘읽었습니다.
어차피 본문에 제가 거론되었으니 부득이 답변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일단 님의 글내용이 장문이다 보니 부득이 부분적으로 나누어 반론을 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비담과 염종의 난은 정말 많은 의구심을 만들게 합니다.
난이 일어나게 된 계기부터 해서 난이 끝나고 나서...
결국 비담과 염종의 난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김춘추와 김유신이죠.
저는 비담과 염종의 난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을 품고 이렇게 글을 써보려 합니다.
1.비담과 염종의 난, 왜 일어나게 되었나?
① 남존 여비 사상, 신라에도 있었나?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킨 것은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르지 못해서" 입니다.
철저히 유교적 사관에 의존한 것이죠.
하지만 화랑세기나 그런 것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라에서 저런 유교적 사관이 강했던 것 같지 않고(특히 혼인관계를 보면 조신시대 선비들을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을 정도....) 여성의 지위도 절대 낮지 않을 뿐더러
신라 왕실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엄청나게 높았다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내부 사회에서도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신라의 대표 구귀족인 저 두사람이 "유고적 사관"에 입각하여
선덕여왕을 비난하고 난을 일으키고 맙니다. 무언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② 신라 최고의 굴욕사건
비담과 염종에 난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이전에 선덕여왕과 신라의 최대 굴욕 사건이었던
"당태종 막말 사건" 을 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 한다.
이것이 세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해 보라. 장차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라고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황제는 그가 용렬[庸鄙]하여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5 선덕왕 12년
당나라가 신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 입니다.
당의 눈에 보이는 신라는 참으로 웃긴 나라죠.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여자를 왕으로
세울 정도 였을까.....그래서 당태종은 "친히"
자신의 왕족중 하나를 보내서 신라의 왕으로 삼아주겠다 라고 제안까지 합니다.
고구려도 백제도 일찍이 이러한 굴욕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신라도 역사가 수백년이 지났을 때인데 아직 생긴지 얼마 안된 당나라 놈들한테
이런 굴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된다는데....
화랑세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신라는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신라가 변방의 소국이었고 발달된 문물을
많이 접할 기회가 없었기는 했지만 수백년의 역사가 있고
스스로를 신국이라 부를 만큼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나름대로의 "선민사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대국(大國)이라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신라를 우습지 않게 보고 굴욕적으로 대하니 "신국의 백성" 인 신라 사람들,
특히 신라 구귀족들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만약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켰다면 그것은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다스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째서 우리 신국이 저런 굴욕을 당해야만 하는가!" 가 되야 정상입니다.
최소한 신라 구귀족들 만큼은 김춘추 김유신과 다르게 신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조공책봉 관계에서의 당과의 관계를 인정하지만 스스로 속국이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 이 부분에서 모두 사료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달리 사료적인 반론은 불필요하지만
님의 주관적인 해석에 대해 반론을 하겠습니다.
중국은 물론 신라와 달라서 당시 유교적인 사상이 분명히 있었기에 당태종이 위와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에 사료를 인용하였으니 사료내용를 끝까지 인용하여 말씀하셔야지요
중간에 뚝 잘라버리고 님께서 단정해 버렸으니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지요
그 뒤에 당태종의 행동이 어떠했는지요?
청병하러 온사신이 용렬[庸鄙]하여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라고 하질 않습니까?..당태종은 고구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 백제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역시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켜 자신의 고구려 정벌에 차질을 가져 오지 않겠다는 의도가 아닌지요?
물론 저러한 발언은 훗날 비담의 반란 명분인 여주 불능으로 전개된 것이지만요.
솔직히 말해 저런 내용은 당태종의 졸렬한 인품에서 나오는 소치이지요
그리고 님의 말씀대로 최소한 신라 구귀족들 만큼은 김춘추 김유신과 다르게 신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면
당시 자부심만으로 신라가 백제를 멸할 수 있었다고 봅니까?
신라의 김춘추-김유신의 신흥세력이 자부심이 없어서 그냥 굴욕하고 당나라의 속국이 되기위해서
당나라에 청병하러 간것인지요? 그렇다면 먼저 왜 고구려에 청병을 하였는지요?
오늘날 여자가 대통령 된 국가에게 아직도 유교사상이 강한 중국이 그따위 체신머리 없는소리를 하겠는지요?
신라의 청병 목적은 분명하나 당태종 이세민이 비록 소국인 신라사신에게 한 행위가 대국의
황제로써 체신머리 없는 행동으로 보아야지요..
③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결정적 차이점!
우리가 또 한가지 살펴볼 사실은 선덕여왕 때와 진덕여왕 때 신라의 대당외교노선에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선덕여왕때만 해도 당에 대한 외교 관계가 백제처럼
"조공 책봉" 관계 그 이상을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덕여왕 때 신라의 대당외교노선은 "조공 책봉"관계를 넘어서
스스로 "속국"이 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교노선의 중심에는 김춘추가 있었죠.
선덕여왕은 재위 내내 당태종의 비아냥과 무시에 시달렸습니다.
선덕여왕도 야망이 크고 포부가 큰 사람인데 당태종에게 저런 말을 듣고 화가 났겠죠.
하지만 신라의 입장상 당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염려해 참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조공도 보냈겠죠. 하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당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어디까지나 "당을 이용해 백제를 견제" 하는 선에서 당에게 고개 숙였지
진덕여왕처럼 연호도 당꺼를 쓰고 의복도 당꺼를 쓰고 오언태평송이라는 것을 갖다 받치면서까지
당나라 빠순이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덕여왕 때 오면 완전 달라지죠.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시대적 변화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아님 신라 내부에 큰 변화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 님께서 사학을 전공하신다고 하니 공학을 전공한 저와는 많은 생각차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신라가 그냥 당나라에 종놈이 되고자 단순히 저러한 연호를 고치고
의복을 고치며 태평송을 보냈다고 사료를 해석하십니까?
당의 연호가 신라의 연호보다 외교상 사용이 편리하거나 당제복이 신라 복장에 비해
보다 편리하고 아름답거나 좋게 보였다면 당연히 선진문화를 도입할 수도 있는것 아닌지요?
그러한 의식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신라인들의 의식에서 신라의 혼인제도 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예원공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화랑세기에서도 나옵니다.
오늘날 당시 한복으로 일관하질 않고 양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주성이 없고 서구에 사대하기 좋아서
복장을 바꾼 것입니까?. 그리고 외국에 나가 수출하기 위해 중국이나 동남아 바이어들에게 굽신거리며
영업하는 행위는 그런나라에 빠순이 짓을 하는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태평송을 갖다 주었다 하여 신라땅 한뼘이라도 당나라에 바쳤는지요?
오히려 당나라에서 선물로 받은것이 그까짓 태평송 립서비스에 비하여 훨씬 이득을 본것이
신라인데..태평송으로 인한 신라가 무엇을 손해 보았는지요? ,.
손익계산을 다시 해 보십시요 누가 더 실리적인지?
2. 비담과 염종의 난, 역사에 가려진 진실
①김유신과 김춘추 나름대로의 불만
선덕여왕 시절, 비담과 염종보다 더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건 김유신과 김춘추였을 것 입니다.
김유신 같은 경우는 아버지를 따라 낭비성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선덕여왕 기간 내내 별다른 활약이 없었습니다. 후에 압량주 군주가 되기는 하지만
낭비성 이후 무려 13년이라는 적지 않은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백기간은 선덕여왕 재위 기간 거의 내내죠.
분명히 김유신 입장에서도 불만이 많았을 것 입니다.
그리고 김춘추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 선덕여왕시절 알천장군의 활약이 매우 큰 시기로써 김유신 장군은 아직 군사적 기반이
그토록 큰 시기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병이 부족한 시점에서
별다른 활약이 있을 수는 없지요..그러나 불만이 잇었는지? 없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진지왕을 제거한 세력들로 부터는 견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에는 이해가 됩니다.
642년 신라 최고의 요충지인 대야성이 함락됩니다.
대야성 함락은 낙동강 하나를 두고 백제가 신라 수도 금성을 직공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정말 뼈아픈 손실이고 도성이 위협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신라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은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의 삽질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죠. 누가뭐래도 대야성의 함락 원인은
김품석의 잘못이니까요. 김춘추는 이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 입니다.
김춘추가 몇일 간 정신나간사람처럼 군것이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입을 정치적 타격 때문이었는지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구지 따지라면 전 후자 쪽이라 생각합니다.
==> 이부분은 사료들을 면밀하게 검토를 하시고 난 후에 보다 객관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김품석과 김춘추 물론 김품석의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순하게 김춘추의 책임을 묻는군요
당시 김품석은 이찬(2관등)의 직위에 있었고 김유신 장군은 소판(3관등) 김춘추는 대아찬(5관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따라서 김품석도 엄연한 진골출신 왕족이며
당시 신라사회의 혼인제도는 꼭 나이가 비슷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당시 신라사회는 죄다 친인척간이며 근친혼으로 정신이 없던 때인데 사위의 잘못을
장인에게 까지 문책을 했다면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요?
당대의 사정을 다른 역사서들과 교차하여 세밀히 검토 후에 따져야지요.
물론 김춘추 자신도 인간이기에 김품석의 잘못 보다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사랑하는 딸이 무참히 살해당하였으니 분노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구요.
그리고 자신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고구려 청병 외교는 김춘추 자신 목숨부지한것이
천만 다행일 정도로 대실패를 했으며 왜에 대한 외교도 실패했고 당에 대한 외교는
당태종의 막말로 인해 선덕여왕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만 했습니다.
김춘추가 정치적 위상을 만회하기 위해 하였던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구귀족들은 이때다 싶어서 이 모든 책임을 김춘추에게 몰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새롭게 떠오르는 이 신흥 진골과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가야파들을
미리 밟아 놔야겠다고 생각했을테니까요.
아무튼 그 시대적 상황이 모두 김유신, 김춘추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만 있었습니다.
==>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로 청병하러 신발이 닳도록 다녔는지?
백제를 멸하기 위해서 부지런을 떨었는지?는
잘모르겠으나 사료의 정황상 저는 분명하게 후자로 봅니다.
김춘추, 김유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면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갔다가 감금되었을때
뭐하러 김유신에게 일만(본기) 또는 3천의 정예병(열전)의 군사들을 내어 김춘추를 구하러 가게 한 것인지요?
일만 군사라면 그에 따르는 징집의 문제 군량미의 문제등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는데
그러한 군사를 어떻게 왕명도 없이 김유신 마음대로 서라벌에서 고구려 국경까지 진군할 수가
있었는지요??
비록 선덕여왕도 마찬가지 그런 별볼일 없는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분쟁위험을 무릅쓰고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가지는 군사동원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겠는지요?
이는 김춘추의 청병외교가 신라조정에서 결정되고 승인된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요?
이부분만 보더라도 대야성 함락이 무턱대고 김춘추, 김유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는
주장이 오히려 이상하군요
② 비담과 염종의 난 중에 일어난 선덕여왕의 갑작스런 돌연사
비담과 염종은 명활성의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왕성에 주둔했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열전에서는 김유신이 마치 왕의 편이되어
비담과 염종에 대항한 것처럼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선덕여왕이
비담과 염종의 난이 끝나고 바로 죽습니다. 물론, 나이도 있고
질병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너무 시기가 절묘합니다. 너무나 절묘한 시기에 선덕여왕이 죽은 것 입니다.
저의 미천한 눈에는 이것이 우연으로 그냥 넘기기에는 의심스러운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사학과에 와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식으로 왕이 죽은 것은 대부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살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역사가 저에게 알려주었으니까요.
그런데 왕성을 장악하고 있던건 비담과 염종이 아니라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유신의 보호를 받고 있던 선덕여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된것이죠.
천수를 다해 죽었거나 아니면 김유신에 의해 제거되거나 둘 중 하나겠죠.
최소한 비담과 염종이 죽인 것은 아니니까요.
==> 님 말씀대로 가능성이라 하였으니 확실하게 단정하는 것은 아니니 생각하기 나름이군요.
타이밍이 절묘한 것은 하늘의 뜻으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 주위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 합니다.
뭐 그 부분은 별 반론의 대상이 되질 않지만 선덕여왕 살해설은 섬뜩한 발상이군요
당시는 귀신의 존재를 오늘날 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대부분 믿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이 선덕여왕을 살해해 놓고 비담을 난신적자라고 백마를 잡아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는 천벌을 받을 짓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김유신 장군이 아무리 용이주도했다 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지요.
선덕여왕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요?
만일 김유신 장군이 그런 짓을 하였다면 분명히 누구의 입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징후가
입으로 몰래 통해서라도 구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비담의 난을 제거하던지
아니면 다른 내용으로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야지요.
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늘도 귀신도 완벽하게 속인 김유신 장군이 되겠네요...ㅎ.ㅎ
그런데 무엇보다도 선덕여왕을 무었 때문에 살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시나요?
연개소문 장군이 영류태왕을 시해한 뚜렷한 목적이 잇듯이
꼭 시해할 만한 동기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납득이 될만한 시해 조건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위의 본문내용으로는 그저 황당한 고의적인 폄허 목적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③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그렇게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것은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한 삼국사기 찬자의 사론입니다.
사론(史論):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氏)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천자(天子)가 아니라 복희(伏羲)를 도와 9주(九州)를 다스렸을 뿐이다.
여치(呂雉)와 무조(武)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정치를 행하였으나,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
황후(高皇后) 여씨(呂氏)나 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 썼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서
경(書經)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 하였고, 역경(易經)에
『파리한 돼지가 껑충껑충 뛰려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제 5 신라본기 5 선덕왕 16년
철저히 유교적 사관에서 서술한 기록입니다. 선덕여왕을 깍아 내리고 욕하고 있죠.
하지만 우리는 굵은 글씨로 해놓은 부분을 주목해봐야 합니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게 있습니다. 아니 재미있다기 보다 무섭고 소름끼치는 것이죠.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
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9족(族)을 죽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 유명한 연을 써서 비담을 물리친 장면이죠.
근데 김유신이 한 말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
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 아닙니까?
삼국사기 찬자가 했던 사론과 매우 흡사한 말입니다.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온다..... 물론 앞에 말한 "임금은 높고 신하가 낮은 질서"를
말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 앞에 말한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운 질서"까지 포함한 말로 들립니다.
삼국사기 찬자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는 것을 내세워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김유신 역시 삼국사기 찬자와 똑같이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 는 말을하고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김유신 역시
삼국사기 찬자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게 만듭니다.
==> 오히려 똑 같은 내용이라면 비담의 난 당시에는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없었던 시기로
별로 유교사상이 덜 할때 김유신 장군은 벌써 저런 말을 했군요.
그렇다면 비록 같은 표현일지라도 사상의 내용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고는 생각을 못하시는지요?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이 부분은 병법에서도 흔히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병법으로 보는 장군의 사상과 유학자인 김부식이 보는 사상을 똑같이 보는 님의 해석이 이상하군요
양은 하늘이니 하늘의 위력은 천둥, 벼락, 태풍등으로 그 위력이 강하지요
하지만 땅은 지진 정도인데 우리나라 지진이 일본처럼 땅이 갈라지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니 곡식이 생산되는 대지는 한결 부드러울 수 밖에요
하지만 "하늘과 땅" 곧 병법으로는 "왕과 신하"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유학자의 눈에는 여자가 왕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장군의 눈에는 왕이 양이고 신하가 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략과 군략 즉 학자와 무인의 차이 이지요
당시 김유신 장군의 신분은 비담과 전투를 치루는 중에 엄연한 병법적인 해석으로 무인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난이 끝난 후 선덕여왕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만약 선덕여왕이 김유신이 한 저 말을 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 참....
==> 반복되는 내용이라 위에 자세한 반론을 다시금 살펴보십시요
아무튼 이후 정권은 완전히 김춘추 김유신 손에 들어갑니다. 알천이 상대등에 임명 되지만
사실상 이건 우두주 군주로서 군권을 가지고 있던 알천을 도성에 불러들여 군권을 회수하고
군사행동을 못하게 만든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미 구귀족들이 대거 처형되었고
병권이 김유신 손에 들어온 이상 알천이 상대등이 되봤자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 이 부분에서 님에게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비담의 난때 알천은 무었을 했을까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군권이 회수당하고 그의 군사행동을
막았을까요?..
일선 군주나 오늘날 군단장이 나이가 들고 승진함에 따라 상대등이나 국방부 장관이 되는것이 뭐가 잘못 되었나요? 그러면 무조건 군권회수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비담의 난때 알천공은 오히려 진압군 편에 섰거나
최소한 방관하여 자연스럽게 승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춘추가 바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보는 눈들이 무서웠겠죠.
태종 이방원이 그러했던 것처럼 진덕여왕을 왕위에 올립니다. 하지만 사실상 권력은 모두
김춘추 김유신이 가지고 있던거죠. 진덕여왕은 말그대로 "잠시 왕좌를 맡아 둔것뿐" 이었습니다.
실제로 진덕여왕 때 가면 김춘추 김유신 둘이서 다해먹습니다.
전쟁은 김유신, 외교와 정치는 김춘추. 신국(神國) 신라는 이 날부로 완전 사라졌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신라가 남았을 뿐이죠. 오직 살아남기 위한......
==> 어쩌면 나이든 알천은 승진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세대교체라고 보는게 타당한데
김춘추, 김유신 장군이 왕명도 없이 마음대로 알천의 군권을 회수하는 전횡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새로 부상하고 세력이 커진 김유신 장군의 위엄에 복종햇을 지라도 당시 "칠성우"라하여
국사를 서로 의논한 것으로 나오며 김유신 장군은 국가의 대사를 자신보다 유약하지만 보종공을
깍듯이 모시며 매사 그와 의논했다고 화랑세기에서 나옵니다. 그 부분을 보다 상세하게 부정하고
난뒤에서야 김춘추, 김유신이 다 해 먹은 것으로 주장함이 올바를 듯 합니다.
④ 난 김유신이 무섭다.
제가 저번에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개도 꼬리를 밟히면 주인을 문다" 라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습니다. 소호금천씨님의 글이였죠.
그게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소호금천씨님은 말하셨지만
김유신이 한 그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생각한다면 정말 무서운 것 입니다.
당을 주인 신라를 개로 비유한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주인-김춘추 개-김유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말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말입니다.
더구나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주군인 김춘추라는 점,
또한 김유신은 그 당시 김춘추와 맞먹는 권력을 갖고 있었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주인을 물 수 있는 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린 생각해야 합니다.
==> 비유법에서 개에 대한 이야기는 대야성 보복전투에서 김품석부부와 백제장군 8명을 교환할때
"지금 너희의 부장(裨將)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짐승을 비유합니다.
다음은 조미압이 백제좌평 임자에게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라고 짐승에 비유된 문구가 있군요
그 뒤에 옹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우를 두고 말함이라!??"
얼마든지? 짐승에 관한 비유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당시 다미공이 백제군사 복장을 하고 당을 치자고 헀을때? 무열왕이 망설이는 상황에 나온
짐승의 예를 비유하여 다미공의 의견에 동조하는 내용인 것을 가지고
이를 이상하게 확대 해석하여 "김춘추의 살해설"까지 몰고 가는 것이 대부분 님의 주장과 한치도 틀림없는
오래전 부터 일관되게 폄허된 주장이었습니다. 님은 그것을 계속 답습하고 있구요
김유신은 우리에게 있어서 신화이면서 전설입니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는 존재 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해주고 또한 절대적인 도덕성 마저 부여합니다.
"김유신 장군과 무열왕은 절대 다툴리 없다. 그들은 정말 사이가 좋았다."
"김유신 장군이 그럴리 없다."
"그렇게 김유신 장군 까시면 좋으세요?"
==> 위의 3가지 답글들이 아무 이유없이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김유신 장군을 무조건 신봉해서
저러한 답변들이 나왓다고 보십니까?
저러한 답변이 왜 나왔는지? 님께서 저런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주장을 하였다고는
생각해 본일이 없는지요?
모든 사람들은 김유신을 감싸고 돕니다.
==> 모든 사람이 감싸고 돌아요? 고구려를 멸망시켜 오늘날 우리나라 국토가 작아지게 만든
민족의 반역자라는 사람들이 김유신 장군을 감싸고 도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 같던데요?
하지만 역사서에 남아있는 그가 툭하고
내뱉은 말들을 보면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주인을 무는 개" 발언과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는 말을 천천히 되뇌여 보십시요.
한 나라의 신하된 사람이 자신의 주군한테 할 말이 절대 아닙니다.
==> ㅎ.ㅎ.ㅎ....^^*
단채 신채호 선생은 김유신을 지혜와 용기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한 정치가라고 평가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말에는 일부분 동의합니다. 김유신의 전과는 분명 과장되어있는게 많습니다.
==> 단재 선생의 평가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한 다른 내용없이 일관되게 같은 논리로 주장을 하고 있지요
단재 선생은 김유신이 왜 지혜가 없었는지? 어떤 부분에서 용기가 없었는지?
하나도 예를 들어 밝히지 않고 멋대로 저렇게 달랑 주장을 했지요
그리고 음험한 정치가에 대해서는 조미압 내용으로, 게다가 사료에도 없는 금화까지 끌여들여
성충을 제거하는 과정을 들었는데 이는 손자병법이나 기타 병법에서 상승 장군들이 필히
가져야 할 조건의 모공편을 무시한 단재선생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어떻게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가 있겠는지요?
하다못해 단재 선생께서 병법의 어느부분에서 음험한 정치가에 해당 된다고만 주장했었어도
제가 감히 이런식으로 답변을 못하지요
그리고 저는 김유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 전쟁에서 적군 얼마나 많이 죽였기 때문에 또는 항상 승리를 했기때문에 높게 평가한다면
그건 차라리 을지문덕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이 되어야 마땅하지요
그리고 김유신, 이순신 장군 보다 훨씬 높게 평가 되어야 하겠지요
김유신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다 잡거나 죽인 숫자를 합해봐야 을지문덕, 강감찬 장군에
따를 수가 있는지요?
김유신 장군의 진정한 평가는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까지 약1,000여년 동안을
아낙네나 어린아이들까지 익히 알며 그 무덤을 지나면 모두 공경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또한 무열왕과는 吾與公同體 가 되었고 문무왕과는 如魚有水가 되어 삼한을 통합것과
三韓一家 사상이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지요.
만약에 비담과 염종의난이
비담과 염종에 의해, 그리고 순수히 그들의 잘못에 의해서만 일어났다면
김유신이 연개소문같은 쿠데타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높은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일생 일대 동안 단 한번도 견제를 받지 않은 말 그대로 최고의 권력을 누립니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했던 대사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김유신은 계백에게
"너는 전쟁은 알고 정치는 모른다" 라고 말했고
김유신이 김법민에게
"너랑 니 아버지는 정치는 알고 전쟁은 모른다" 라고 말한 대사 입니다.
이보다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한 대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준익감독과 영화 황산벌을 높게 평가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김유신은 이준익감독의 김유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지 따지자면 장군 김유신보다 정치가 김유신을 좀 더 높게 평가합니다.
3. 결론 - 진실은 항상 가려져 있다.
쓰다보니깐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_-;;
물론 욕 된통 먹을 각오를 하고 썼습니다. 어디서든지 김유신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
항상 욕부터 먹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자랑스럽게 사학도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제가 역사를 하면서 한가지 마음속에 품은게 있습니다.
백제본기보다 많은 김유신 열전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신라사를 보면서 같이 느낀 것이죠.
"강자를 위한 역사를 하지 말고 약자를 위한 역사를 하자" 라는 것 입니다.
강자에 의해 부풀여진 역사를 바로 잡고
강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축소된 약자의 역사를 그리고 진실을 찾아내자는 일념하나로
지금껏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있습니다.
==> 비전공자가 바라보는 소견은 이렇네요
강자를 위한 역사를 하지 말고 약자를 위한 역사를 하자" 라기 보다는
사료가 부족한 부분을 보다 연구하고 발굴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꾸며 정확한 비판은 물론 타당하지요
새로운 내용이 별로없는 흔히 떠도는 통설로 폄허하고 비판하는 것에 얽매는 것 보다는
반론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를 발굴 보완하여 연구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
보다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삼국항쟁의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이후 신라는 완전 당의 속국화 됩니다.
선덕여왕 이후 신국(神國) 신라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것도 당의 강요가 아닌 신라인들, 아니 엄연히 따지면 김춘추등에 의해서
스스로 속국이 되기를 청합니다.
김용만 선생님이 쓰신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맨 뒤에 각주에서
국사편찬 위원장이셨던 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 조상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중국화를 걸었다."(맞나? 기억은 잘안나지만;; 비슷한 거였음)
그 각주를 읽으면서 가슴속에 무언가 응어리가 맺혔습니다.
예, 그 당시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 당을 끌어드리고 속국이 된것은
신라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들은 그런 신라를 평가하고 재판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축소 시키고 스스로 속국이 된 신라를 말이죠.
==> 신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각자 취향과 사고의 문제이니 달리 반론이 있을 수는 없으며
신라때문에 우리 역사가 축소되었다는 부분은 발해를 완전히 남의 역사로 때어버리면
님의 주장에 일부나마 이해가 됩니다.
고구려는 이미 신라가 개입이전에 요동지역을 상실하면서 연개소문 장군 사후 내부 분열로
자멸의 길을 걸었기에 당대 국가의 흥망성쇄를 예리하게 꼬집은 김유신 장군의 충고가
바로 그해답 입니다.
"백제는 오만으로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 위태롭다"
그리고 "창업은 쉬우나 이를 지켜나가는 수성은 어렵다"라고 ......................
엄연히 말하면 김춘추 김유신에 의해 만들어진 신라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삼국통일의 최고의 수혜자는 김춘추도 아니고 김법민도 아닌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은 무결점 영웅이 되어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추앙받고 있습니다.
살아서는 최고의 권력을 죽어서는 왕이되고 신이 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김유신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접근해 봅니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개가 주인을 무는" 발언 이 후 김춘추와 김유신에 관계에 대한 글을
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해김씨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부득이하게 김유신을 까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주 이씨 앞에서도 조선왕조를 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송구스럽지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김유신이 작게는 한 가문의 조상이지만
크게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김유신은 김해 김씨로서의 김유신이 아닌
인간 김유신이라는 것을 정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장문의 님의 주장에 대해 잘 읽었습니다.
다만 특이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거의 보이질 않고흔히 인터넷상에 떠도는
통속적인 비판내용이라 그에 따른 반론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 아쉬움은 있습니다.
인간 김유신 장군을 재조명 하실려면 후대(고려, 조선) 우리 조상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을 어떤식으로 우대를 하였는지?
그의 무덤과 모표를 어떻게 세웠는지? 그리고 화랑세기에서 그가 젊었을때
어떻게 처신을 하였으며 보종공과는 어떤식으로 지냈는지? 이런 부분 모두를
검토하시고 보다 정밀하게 재조명 하여 보십시요.
김해 김씨 눈치 때문에 그가 명백한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말도 안되지요.
아무튼 보다 상세하고 납득이 될만한 "개가 주인을 무는" 발언에 대한 님의 글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혹시 저는 님 개인에 대한 어떠한 감정은 추호에도 없으며 다만 님의 글 내용에 대한 비판인지?
반론인지? 여하튼 명백히 차이가 나므로 혹시 내용상 불쾌하거나 감정상 문제가 있으면
즉시 지적해 주십시요..즉시 그 부분은 사과하고 수정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첫댓글 양이 왕이고 음이 신하? 저도 그쪽을 어떻게 강의 아닌 강의로나마 조금은 들었는데, 이때껏 그런 해석 쪽으로는 들은 적이 없군요. 당시 유교사상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죠..; 꼭 왕과 신하의 관계로만 따질 것이었으면 굳이 ' 자연 ' 의 음양이라는 비유까지 일부러 넣었을까도 의문이구요... 당시 유교적 입장이고 아니고의 차이를 떠나, 여자가 왕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시비를 걸고 들어간 당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보면 근거야 없더라도 반론하신 대상의 그 본문글 내용도 충분히 납득은 가는 내용 같습니다만? 김유신은 무인의 입장으로서 군신간의 해석만을 했을 뿐이라는 정확한 근거 역시 없잖습니까?
김유신 장군이 비담의 난때 저러한 표현을 했으면 일단 전쟁상태입니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으로 표현하고 양은 군주이며 음은 신하로 표현됩니다...따라서 왕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왕은 왕이라는 뜻이지요..신라가 선덕여왕,진덕여왕을 세움에 있어서 여자라고 하여 왕의 대우를 안해주었다는 말씀인가요?..남자 여자 따지기 전에 당시 전투상황에서는 군신과 신하라는 개념이 강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라라 하여 유교적인 국가 소양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구요. 근친혼은 신라나 고려나 약한 왕족이 좀 더 튼튼하게 존속되기 위한 방편이거나 고위 귀족들 간의 세습을 위한 방책, 즉 한다 해도 소수이지 이게 신라 전역에서 아무나 할 만한 덕목도 아니죠.. 이집트 왕조라든지 정말 몇몇 나라, 그것도 소수의 특정 집단을 제외하면 근친혼은 인류 역사동안 꾸준히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너무 근친혼쪽 근거에 강한 어조 같아 참고삼아 말씀드립니다.
당시 당나라 유학자들은 유교적 사상이 강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사상의 고리타분한 것 보다도 자신의 고유풍습을 더욱 존중한 내용이 김흠순공과 예원공 사이에 나오니 화랑세기 예원공편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요...자신의 환경에 따른 각자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모든 잣대를 오늘날 자신의 개인에 맞추어 1,300여년전 당시 풍습의 장단점을 단언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자연의 이치로 음과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하늘과 땅, 그리고 병법으로는 왕과 신하로 해석되는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기서 말하는 음과양은 여성과 남성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양을 하늘로 비유해서 천둥이니깐 강하고 음은 땅이니 대지니깐 부드럽다고 해석하신 님의 해석이 너무 돌아가는 해석에다가 너무 억지 인거 같습니다. 보편적인 상식으로 "자연의 이치로 말하는 음과 양"은 남성과 여성이니깐요.
간단하게 말해서 태극기 4괘(건곤감리)를 살피세요..그곳에 님이 질문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사료를 인용하셨는데 김유신 장군이 인용한"“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와 김부식이 인용한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내용과 어떻게 똑 같은 내용입니까?..漢字는 글자하나에도 그뜻이 달리 변하기 일쑤인데 저 사료처럼 김유신과 김부식의 견해가 확연히 다르건만 어떻게 사료를 해석하였기에 같다고 주장을 하시는지? 그것 참!
의복은 그 나라의 고유풍습입니다. 그걸 단순히 편하고 중국제가 좋아서 왕이며 신하며 다 바꿨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연호라는 것은 그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외교상 편리"를 이유로 바꾼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고구려도 고유의 연호를 썼고 신라도 그전까지 고유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선덕왕이 죽고 진덕왕 때 들어와서 완전히 의복 중국제 쓰고 연호바꿔쓰고 별에별짓 다하는데 그전의 신라왕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스스로를 신국으로 자처했고 그전까지 조국책봉관계를 넘어서지 않았던 신라의 대당외교가 말이니다.
유인궤님 간단하게 답글에서 일단 편리성이라고 했으면 스스로 알아 들어야지요..그럼 현재 우리는 그 기상 높던 고구려시대 복장을 안하고 서구의 양복은 왜 입는지요..그래서 대통령도 양복 입고, 너도 입고 나도 입고 현재 대한민국은 별의 별짓을 다하네요?.그리고 달력도 단기를 안쓰고 서기는 왜 쓰며? 리, 자, 척, 말, 되 이런 우리 고유의 측정단위를 안쓰고 뭐하러 양놈들 미터법을 쓰지요?..그럼 현재 우리는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별에별짓으로 영어나 외국어를 배운답니까?...에이~ 우리 수준 좀 올려서 토론합시다!..^^*
만약에 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신라가 삼한통일을 위해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대신해 동아시아문명권을 이어받고 구축하려 했다면, 의복 바꾸고 연호바꾸고 그런 짓 못하죠. 그냥 말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됩니다. 신라의 자주성 논쟁을 하면 끝도 없겠거니와 이 글의 논지는 신라의 자주성이 아니라 비담의난과 김유신에 관한거라 자주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신라의 속국대당외교를 걸고 넘어진 것은 비담의 난이 끝나고 선덕왕이 죽고 진덕왕이 즉위한 다음에 신라의 대당외교가 그전까지 왕들의 "조공책봉관계"에 벗어나 완전히 속국청병외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문명권을 이어받고 구축하려 했다면, 의복 바꾸고 연호바꾸고 왜 못해요?..편리하고 좋으면 바꿔야죠..그래야 발전이 되는거죠..그런데 속국청병외교에 너무 집착하시는데 무슨 속국이죠? 신라가 당나라에 땅을 팔아먹었나요? 아니면 당나라 왕족이 단 한차례라도 신라왕을 밀어내고 왕노릇 한번 해 봤나요?? 그까짓 말로만 속국청병..목적만 달성된다면야 백번도 더해야지요 하면 할수록 이익인데..못하는게 더욱 바보라고 생각됩니다
동아시아 문명권을 구축할 나라가 스스로 중국문명안으로 뛰어듭니까? 동아시아문명권을 구축할 나라가 그렇게 굴욕적으로 외교를 합니까? 그럼 신라 문명권안으로 들어올 다른 민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나라가 과연 우리들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이 되기나 하는걸까? 라는 의심을 품지 않았을까요?
유인궤님은 순진하신 분인가요? 실리를 팽개치고 알량스런 자존심들 내세우시는 분들 ? 님의 말씀대로 굴욕적인 외교를 한 결과가 자신의 땅덩어리를 2배이상 늘인 결과이고..그 알량스런 자존심 때문에 굴욕적인 외교를 안한 결과가 남의 장수 말발꿉아래 머리 쳐박고 항복하고 술따라주고 남의 나라에 끌려가고, 나라 망치고....그래서 님의 말씀대로 다른민족이 이들 세나라의 외교과정과 결과를 보고 어떻게 평가했을까요?..온전한 정신을 가진 나 자신의 경우라도 차라리 굴욕적이더라도 골백번도 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실리적인 신라의 방법을 택할 것 같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의복이랑 연호바꾸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였다면 진평왕 때나 선덕왕 때도 고구려 백제의 위협이 심각했는데 왜 그 왕들은 그런 생각 못했을까요? 그리고 김유신이 다해먹었다는 것은 일단 먼저 진덕왕조 신라본기에 나오는 전쟁기사에는 모두 김유신이 나옵니다. 또 한 국사를 논할때도 매사 김유신이 누구와 상의하면서 결정 했다고 나오니깐 상의의 주체는 김유신이 되버렸습니다. 선덕왕시절에 별반 활약이 없던 김유신이 이제 국가대사를 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합니다. 김유신이 알천과 상의해서 춘추를 왕으로 세운것만 봐도 김유신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유인궤님 의복 연호 바꾸는것과 고구려 백제 위협과는 무슨 관련이 되는지?.그런데 님의 주장 목적이 뭐지요?..무슨 내용이 왔다 갔다 혼란스럽군요..김유신 장군이 남다르게 자신의 관리에 철저하여 삼한통합의 과업달성과 타의 모범이 되었기에 이에 흥무대왕을 추봉했노라고 역사서 내용은 대충 이렇네요
김유신 열전에 보면 유신이 알천과 상의해서 춘추를 왕에 세웠다 라고 나옵니다. 김유신이 신라내에서 이러한 위치에 오르게 된것이 비담의난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복과 연호를 바꾼것이 엄청나고 또한 급작스러운 변화입니다. 선덕왕의 이상한 죽음, 그리고 진덕왕때 들어서 급속도로 기울여진 대당외교가 비담의 난이 끝나고 선덕왕때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들이 정치를 잡게 됐다는걸ㄹ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알천이 최고 수장인 상대등이기에 당연히 알천이 대표가 되는 것이고 열전은 김유신이 주인공이니 그렇게 쓰여진 것이며 비담의 난에 무관하지 않았다는 표현의 뜻이 무었인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시요..비담의 난을 부추겼다는 뜻입니까? 비담의 난을 제압한 결과 춘추를 왕에 세우는 위치에 까지 올랐다는 뜻입니까?..전자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 의미를 모르겠고 후자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군요!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은 군권회수 측면과 회유책의 측면으로 생각해본 것 입니다. 물론 알천이 비담의 난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담의 난이 끝나고 김유신 김춘추 독재체제로 신라가 흘러가는데 이 때 그들과 맞먹을 수 있는 힘을 가진이는 알천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두주군주로 계속 나두면 직속에서 병사들을 부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꺼림직하겠죠. 차라리 상대등자리를 주면서 알천을 회유하는 동시에 군사적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것이 김유신 입장에서 더 나은 선택이었겠죠. 뭐 나이가 있으시니 전선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의견도 맞을수 있는 의견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할 문제죠.
이부분은 유인궤님께서 그냥 생각해 본 것이라기에 그냥 PASS 하겠습니다.
고대사가 다 그렇듯 몇줄의 사료로 추측할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식으로 한 번 생각해볼수도 있겠다, 제 나름대로 참신하다(?)고 생각해서 올린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덕왕 이전의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너무나 다르니깐 말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못얻은 글이 되었다면 더 논리를 가다듬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볼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쓴글입니다. 전 인터넷을 잘안해서 떠도는 글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고요. 그냥 사료를 보면서 의문점을 품어본것에 대해 쓴 것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면 검색을 생활화하지 않았던 제 불찰이 크군요;;;;
그렇죠 단몇줄의 사료로 추측밖에 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이를 더욱 연구보완하여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누가 반대를 합니까?..하지만 제대로 있는 사료와 정황마져 왜곡시키면서 폄허하는 형태는 결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물론 보다 고증적으로 불가능한데도 과장된 거품은 당연히 제거시켜야지요..그러나 거품을 제거해도 제대로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이나 능력을 갖춘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거품아닌 것을 억지로 손상시켜버리면 차라리 아니한 만 못하지요.!
저도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쓸려고 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그게 가장 힘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글에도 편견이 있고 님들의 반론에도 편견이 존재합니다. 내가 더 객관적이다 난 편견없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이 글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가능성에 대해 열어 둔것이고 이렇게도 생각해볼수 있다고 글을 쓴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추측한거 말하는데 돈드는거 아니지 않습니까? ^^ 사료에 정황이라는 것이 맞고 틀리고의 기준은 누가 제시해주는거죠? 각자 생각하는게 틀린만큼 해석하는것도 각자 다 다르지 않나요?
유인궤님 역사학을 전공하신다고 말씀하셨나요? 님은 참신해 보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사료들을 여러가지로 종합하고 신중한 생각 끝에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그져 개인 감정에 의한 폄허하고 헐뜯는 수준 그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아서 상당히 실망스러웠습니다...이건 김유신장군 뿐만아리라 어떤 선조들을 비판해도 마찬가지 입니다...적어도 김유신 장군을 비판하실려면 철저하게 하시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세심하게 파악한 후에 비판을 하던 옹호를 하던 하는게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님과 같은 역사학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김유신 장군을 비판 하실려면 여러 논문들도 많지만 일반서적으로는 적어도 강무학 선생이 쓴 "김유신의 정략과 군략" 그리고 정순태 기자가 쓴 "시대와 영웅 김유신"을 읽고 그내용을 상당한 수준까지 논파할 수 있는 능력이 될 때쯤이면 한번쯤 신명나게 비판해 보세요..기자출신이라서 그런지 매우 논리적이며 대부분 정사나 화랑세기를 온전하게 인용하여 소설보다는 논설에 가까운 내용이니 그 내용을 논파할 실력이면 지금처럼 수준 낮은 토론 내용들이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 조금 아쉽습니다....^^*
이런식의 논쟁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이기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면서 발전해나가는 역사를 지향하니까요. 서로의 부족한 논리를 채워가는데는 이것만큼 좋은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ㅋ
저는 님과의 논쟁은 사양하겠습니다..그냥 토론이나 반론 정도이면 몰라도...ㅎ.ㅎ
반응이 이렇게 냉랭들 하시니 더 말해봤자 저는 변명밖에 하지 않는 걸로 들리겠네요. 저는 글을 쓰고 반론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것에 댓글을 달면서 즐거웠는데 두분께서는 그러지 못하신거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논리가 부족하다면 가다듬고 좀 더 "의미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유인궤님 토론과 반론은 어느정도 학문성과 발전성을 가지지만 논쟁은 감정적인 비난이나 소모전을 유발하기 때문에 제가 논쟁을 않겠다는 것이며, 토론과 반론은 환영한다는 이유이지요
제가볼땐 반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왕을 차지했던 김춘추 김유신파가 비담파보다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것은 사실이죠. 이래서 항상 왕을 차지하는게 가장 중요하죠. 삼국시대처럼 기록이 부족한 시대일수록 왕을 차지한 자가 착한세력이 되기때문이죠. 반란군과 진압군이라는 차이는 왕을 차지했냐 안했냐 차이가 아닐까요? 소위 비담의난은 어찌보면 김춘추파와 비담파간의 권력투쟁이 아니었을까요? 패한 세력을 나쁜게 만드는건 승리자에겐 쉬운일입니다. 저도 전에 소호금천씨님과 토론을후에 생각해보았는데요. 김춘추파의 반란유도가 아닌 권력투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왕성을 선점한 김춘추파와 그에 도성근처의 반월성에서 세력을 결집시킨 비담파... 뭐... 어쩌든 왕성을 차지하고, 전술적으로 뛰어난 김유신을 가지고 있었던 김춘추파의 승리가 되죠. 뭐 이건 지극히 저만의 생각입니다.
당시 겨우 소판(3관등) 직위의 김유신과 파진찬(4관등) 또는 대아찬(5관등) 직위에 있을 법한 김춘추, 이들이 상대등인 비담과는 년령상으로나 직위상으로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조건도 아니며 오히려 선덕여왕의 비호아래 한창 능력을 발휘할 즈음의 시기 였습니다. 비담과 알천 이들 사이는 동지? 아니면 라이벌? 계급순이든 년령순이든 이해가 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비담의 동조자들이 일단 반란을 일으키고 김유신을 비롯한 젊은 화랑들과 가병들 그리고 왕궁 호위병들로 어려운 방어를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는 압량주(경산) 군사들이 지원됨에 따라 반란군이 비로소진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비담의 반란이 진압되고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혼란 과정에서 진압의 최고 공로자인 김유신장군 세력의 급성장은 당연한 것으로 이때 부터 신라조정은 김춘추-김유신 세력의 주도하에 정국이 운영되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주장일 것입니다..비담세력과 김춘추세력간의 권력 다툼인지? 아니면 비담세력과 동조하지 않은 구 귀족끼리 세력다툼에서 반란을 제압한 일등공신인 신흥세력이 중간에 갑자기 어부지리를 얻었는지?는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세력다툼과 비담의 반란은 충분한 개연성은 있어 보입니다.
뭐 김춘추파 vs 비담파간은 아니더라도 어쩌든 세력간에 알력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일이일어났겠죠. 기록부재가 가장 크다고 생각되네요. 결정적으로 신라의 복잡한 혈연관계가 이런 세력을 알아내기가 더욱 힘들다고 생각되네요. 어쩌든 좋은 토론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라에 관해서는 소호금천씨님의 내공에는 많은것을 배우네요. ㅋ
추모왕님 반갑네요!..^^*.. 저도 역사전공 출신이 아니다보니 중국사서를 제대로 접할 수는 없는바, 고구려, 백제 역사 분야에서는 삼국사기로는 어림도 없으니 잘 몰라서 입도 뻥긋 못하고 주로 고수분들의 글들을 눈팅만 하고 있지요 , 다만 신라사는 자료가 많고 접하기 용이하며 비교적 이해하기가 쉬워서 그런가 봅니다..고구려, 백제사는 너무 어렵군요!..차후 시간이 나면 또한 백제사나 공부 좀 할까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