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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Re:[반론] 비담과 염종의난? 김유신과 김춘추의 난?
소호금천씨 추천 0 조회 502 07.12.01 00:41 댓글 3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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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2.01 02:06

    첫댓글 양이 왕이고 음이 신하? 저도 그쪽을 어떻게 강의 아닌 강의로나마 조금은 들었는데, 이때껏 그런 해석 쪽으로는 들은 적이 없군요. 당시 유교사상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죠..; 꼭 왕과 신하의 관계로만 따질 것이었으면 굳이 ' 자연 ' 의 음양이라는 비유까지 일부러 넣었을까도 의문이구요... 당시 유교적 입장이고 아니고의 차이를 떠나, 여자가 왕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시비를 걸고 들어간 당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보면 근거야 없더라도 반론하신 대상의 그 본문글 내용도 충분히 납득은 가는 내용 같습니다만? 김유신은 무인의 입장으로서 군신간의 해석만을 했을 뿐이라는 정확한 근거 역시 없잖습니까?

  • 작성자 07.12.01 09:12

    김유신 장군이 비담의 난때 저러한 표현을 했으면 일단 전쟁상태입니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으로 표현하고 양은 군주이며 음은 신하로 표현됩니다...따라서 왕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왕은 왕이라는 뜻이지요..신라가 선덕여왕,진덕여왕을 세움에 있어서 여자라고 하여 왕의 대우를 안해주었다는 말씀인가요?..남자 여자 따지기 전에 당시 전투상황에서는 군신과 신하라는 개념이 강했다는 뜻입니다.

  • 07.12.01 02:09

    그리고 신라라 하여 유교적인 국가 소양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구요. 근친혼은 신라나 고려나 약한 왕족이 좀 더 튼튼하게 존속되기 위한 방편이거나 고위 귀족들 간의 세습을 위한 방책, 즉 한다 해도 소수이지 이게 신라 전역에서 아무나 할 만한 덕목도 아니죠.. 이집트 왕조라든지 정말 몇몇 나라, 그것도 소수의 특정 집단을 제외하면 근친혼은 인류 역사동안 꾸준히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너무 근친혼쪽 근거에 강한 어조 같아 참고삼아 말씀드립니다.

  • 작성자 07.12.01 09:18

    당시 당나라 유학자들은 유교적 사상이 강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사상의 고리타분한 것 보다도 자신의 고유풍습을 더욱 존중한 내용이 김흠순공과 예원공 사이에 나오니 화랑세기 예원공편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요...자신의 환경에 따른 각자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모든 잣대를 오늘날 자신의 개인에 맞추어 1,300여년전 당시 풍습의 장단점을 단언 할 수 없다고 봅니다.

  • 07.12.01 13:19

    자연의 이치로 음과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하늘과 땅, 그리고 병법으로는 왕과 신하로 해석되는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기서 말하는 음과양은 여성과 남성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양을 하늘로 비유해서 천둥이니깐 강하고 음은 땅이니 대지니깐 부드럽다고 해석하신 님의 해석이 너무 돌아가는 해석에다가 너무 억지 인거 같습니다. 보편적인 상식으로 "자연의 이치로 말하는 음과 양"은 남성과 여성이니깐요.

  • 작성자 07.12.01 20:33

    간단하게 말해서 태극기 4괘(건곤감리)를 살피세요..그곳에 님이 질문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사료를 인용하셨는데 김유신 장군이 인용한"“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와 김부식이 인용한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내용과 어떻게 똑 같은 내용입니까?..漢字는 글자하나에도 그뜻이 달리 변하기 일쑤인데 저 사료처럼 김유신과 김부식의 견해가 확연히 다르건만 어떻게 사료를 해석하였기에 같다고 주장을 하시는지? 그것 참!

  • 07.12.01 13:33

    의복은 그 나라의 고유풍습입니다. 그걸 단순히 편하고 중국제가 좋아서 왕이며 신하며 다 바꿨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연호라는 것은 그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외교상 편리"를 이유로 바꾼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고구려도 고유의 연호를 썼고 신라도 그전까지 고유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선덕왕이 죽고 진덕왕 때 들어와서 완전히 의복 중국제 쓰고 연호바꿔쓰고 별에별짓 다하는데 그전의 신라왕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스스로를 신국으로 자처했고 그전까지 조국책봉관계를 넘어서지 않았던 신라의 대당외교가 말이니다.

  • 작성자 07.12.01 20:00

    유인궤님 간단하게 답글에서 일단 편리성이라고 했으면 스스로 알아 들어야지요..그럼 현재 우리는 그 기상 높던 고구려시대 복장을 안하고 서구의 양복은 왜 입는지요..그래서 대통령도 양복 입고, 너도 입고 나도 입고 현재 대한민국은 별의 별짓을 다하네요?.그리고 달력도 단기를 안쓰고 서기는 왜 쓰며? 리, 자, 척, 말, 되 이런 우리 고유의 측정단위를 안쓰고 뭐하러 양놈들 미터법을 쓰지요?..그럼 현재 우리는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별에별짓으로 영어나 외국어를 배운답니까?...에이~ 우리 수준 좀 올려서 토론합시다!..^^*

  • 07.12.01 13:43

    만약에 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신라가 삼한통일을 위해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대신해 동아시아문명권을 이어받고 구축하려 했다면, 의복 바꾸고 연호바꾸고 그런 짓 못하죠. 그냥 말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됩니다. 신라의 자주성 논쟁을 하면 끝도 없겠거니와 이 글의 논지는 신라의 자주성이 아니라 비담의난과 김유신에 관한거라 자주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신라의 속국대당외교를 걸고 넘어진 것은 비담의 난이 끝나고 선덕왕이 죽고 진덕왕이 즉위한 다음에 신라의 대당외교가 그전까지 왕들의 "조공책봉관계"에 벗어나 완전히 속국청병외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07.12.01 20:02

    동아시아문명권을 이어받고 구축하려 했다면, 의복 바꾸고 연호바꾸고 왜 못해요?..편리하고 좋으면 바꿔야죠..그래야 발전이 되는거죠..그런데 속국청병외교에 너무 집착하시는데 무슨 속국이죠? 신라가 당나라에 땅을 팔아먹었나요? 아니면 당나라 왕족이 단 한차례라도 신라왕을 밀어내고 왕노릇 한번 해 봤나요?? 그까짓 말로만 속국청병..목적만 달성된다면야 백번도 더해야지요 하면 할수록 이익인데..못하는게 더욱 바보라고 생각됩니다

  • 07.12.02 11:56

    동아시아 문명권을 구축할 나라가 스스로 중국문명안으로 뛰어듭니까? 동아시아문명권을 구축할 나라가 그렇게 굴욕적으로 외교를 합니까? 그럼 신라 문명권안으로 들어올 다른 민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나라가 과연 우리들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이 되기나 하는걸까? 라는 의심을 품지 않았을까요?

  • 작성자 07.12.02 13:01

    유인궤님은 순진하신 분인가요? 실리를 팽개치고 알량스런 자존심들 내세우시는 분들 ? 님의 말씀대로 굴욕적인 외교를 한 결과가 자신의 땅덩어리를 2배이상 늘인 결과이고..그 알량스런 자존심 때문에 굴욕적인 외교를 안한 결과가 남의 장수 말발꿉아래 머리 쳐박고 항복하고 술따라주고 남의 나라에 끌려가고, 나라 망치고....그래서 님의 말씀대로 다른민족이 이들 세나라의 외교과정과 결과를 보고 어떻게 평가했을까요?..온전한 정신을 가진 나 자신의 경우라도 차라리 굴욕적이더라도 골백번도 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실리적인 신라의 방법을 택할 것 같습니다

  • 07.12.01 13:57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의복이랑 연호바꾸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였다면 진평왕 때나 선덕왕 때도 고구려 백제의 위협이 심각했는데 왜 그 왕들은 그런 생각 못했을까요? 그리고 김유신이 다해먹었다는 것은 일단 먼저 진덕왕조 신라본기에 나오는 전쟁기사에는 모두 김유신이 나옵니다. 또 한 국사를 논할때도 매사 김유신이 누구와 상의하면서 결정 했다고 나오니깐 상의의 주체는 김유신이 되버렸습니다. 선덕왕시절에 별반 활약이 없던 김유신이 이제 국가대사를 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합니다. 김유신이 알천과 상의해서 춘추를 왕으로 세운것만 봐도 김유신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 작성자 07.12.01 20:04

    유인궤님 의복 연호 바꾸는것과 고구려 백제 위협과는 무슨 관련이 되는지?.그런데 님의 주장 목적이 뭐지요?..무슨 내용이 왔다 갔다 혼란스럽군요..김유신 장군이 남다르게 자신의 관리에 철저하여 삼한통합의 과업달성과 타의 모범이 되었기에 이에 흥무대왕을 추봉했노라고 역사서 내용은 대충 이렇네요

  • 07.12.02 12:07

    김유신 열전에 보면 유신이 알천과 상의해서 춘추를 왕에 세웠다 라고 나옵니다. 김유신이 신라내에서 이러한 위치에 오르게 된것이 비담의난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복과 연호를 바꾼것이 엄청나고 또한 급작스러운 변화입니다. 선덕왕의 이상한 죽음, 그리고 진덕왕때 들어서 급속도로 기울여진 대당외교가 비담의 난이 끝나고 선덕왕때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들이 정치를 잡게 됐다는걸ㄹ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7.12.02 13:11

    알천이 최고 수장인 상대등이기에 당연히 알천이 대표가 되는 것이고 열전은 김유신이 주인공이니 그렇게 쓰여진 것이며 비담의 난에 무관하지 않았다는 표현의 뜻이 무었인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시요..비담의 난을 부추겼다는 뜻입니까? 비담의 난을 제압한 결과 춘추를 왕에 세우는 위치에 까지 올랐다는 뜻입니까?..전자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 의미를 모르겠고 후자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군요!

  • 07.12.01 14:09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은 군권회수 측면과 회유책의 측면으로 생각해본 것 입니다. 물론 알천이 비담의 난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담의 난이 끝나고 김유신 김춘추 독재체제로 신라가 흘러가는데 이 때 그들과 맞먹을 수 있는 힘을 가진이는 알천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두주군주로 계속 나두면 직속에서 병사들을 부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꺼림직하겠죠. 차라리 상대등자리를 주면서 알천을 회유하는 동시에 군사적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것이 김유신 입장에서 더 나은 선택이었겠죠. 뭐 나이가 있으시니 전선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의견도 맞을수 있는 의견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할 문제죠.

  • 작성자 07.12.01 20:05

    이부분은 유인궤님께서 그냥 생각해 본 것이라기에 그냥 PASS 하겠습니다.

  • 07.12.01 14:15

    고대사가 다 그렇듯 몇줄의 사료로 추측할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식으로 한 번 생각해볼수도 있겠다, 제 나름대로 참신하다(?)고 생각해서 올린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덕왕 이전의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너무나 다르니깐 말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못얻은 글이 되었다면 더 논리를 가다듬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볼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쓴글입니다. 전 인터넷을 잘안해서 떠도는 글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고요. 그냥 사료를 보면서 의문점을 품어본것에 대해 쓴 것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면 검색을 생활화하지 않았던 제 불찰이 크군요;;;;

  • 작성자 07.12.01 20:06

    그렇죠 단몇줄의 사료로 추측밖에 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이를 더욱 연구보완하여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누가 반대를 합니까?..하지만 제대로 있는 사료와 정황마져 왜곡시키면서 폄허하는 형태는 결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물론 보다 고증적으로 불가능한데도 과장된 거품은 당연히 제거시켜야지요..그러나 거품을 제거해도 제대로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이나 능력을 갖춘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거품아닌 것을 억지로 손상시켜버리면 차라리 아니한 만 못하지요.!

  • 07.12.02 12:11

    저도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쓸려고 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그게 가장 힘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글에도 편견이 있고 님들의 반론에도 편견이 존재합니다. 내가 더 객관적이다 난 편견없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이 글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가능성에 대해 열어 둔것이고 이렇게도 생각해볼수 있다고 글을 쓴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추측한거 말하는데 돈드는거 아니지 않습니까? ^^ 사료에 정황이라는 것이 맞고 틀리고의 기준은 누가 제시해주는거죠? 각자 생각하는게 틀린만큼 해석하는것도 각자 다 다르지 않나요?

  • 작성자 07.12.02 13:23

    유인궤님 역사학을 전공하신다고 말씀하셨나요? 님은 참신해 보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사료들을 여러가지로 종합하고 신중한 생각 끝에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그져 개인 감정에 의한 폄허하고 헐뜯는 수준 그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아서 상당히 실망스러웠습니다...이건 김유신장군 뿐만아리라 어떤 선조들을 비판해도 마찬가지 입니다...적어도 김유신 장군을 비판하실려면 철저하게 하시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세심하게 파악한 후에 비판을 하던 옹호를 하던 하는게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님과 같은 역사학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 작성자 07.12.02 15:54

    김유신 장군을 비판 하실려면 여러 논문들도 많지만 일반서적으로는 적어도 강무학 선생이 쓴 "김유신의 정략과 군략" 그리고 정순태 기자가 쓴 "시대와 영웅 김유신"을 읽고 그내용을 상당한 수준까지 논파할 수 있는 능력이 될 때쯤이면 한번쯤 신명나게 비판해 보세요..기자출신이라서 그런지 매우 논리적이며 대부분 정사나 화랑세기를 온전하게 인용하여 소설보다는 논설에 가까운 내용이니 그 내용을 논파할 실력이면 지금처럼 수준 낮은 토론 내용들이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 조금 아쉽습니다....^^*

  • 07.12.01 14:19

    이런식의 논쟁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이기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면서 발전해나가는 역사를 지향하니까요. 서로의 부족한 논리를 채워가는데는 이것만큼 좋은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ㅋ

  • 작성자 07.12.01 20:06

    저는 님과의 논쟁은 사양하겠습니다..그냥 토론이나 반론 정도이면 몰라도...ㅎ.ㅎ

  • 07.12.02 12:17

    반응이 이렇게 냉랭들 하시니 더 말해봤자 저는 변명밖에 하지 않는 걸로 들리겠네요. 저는 글을 쓰고 반론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것에 댓글을 달면서 즐거웠는데 두분께서는 그러지 못하신거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논리가 부족하다면 가다듬고 좀 더 "의미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 작성자 07.12.02 13:52

    유인궤님 토론과 반론은 어느정도 학문성과 발전성을 가지지만 논쟁은 감정적인 비난이나 소모전을 유발하기 때문에 제가 논쟁을 않겠다는 것이며, 토론과 반론은 환영한다는 이유이지요

  • 07.12.01 21:04

    제가볼땐 반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왕을 차지했던 김춘추 김유신파가 비담파보다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것은 사실이죠. 이래서 항상 왕을 차지하는게 가장 중요하죠. 삼국시대처럼 기록이 부족한 시대일수록 왕을 차지한 자가 착한세력이 되기때문이죠. 반란군과 진압군이라는 차이는 왕을 차지했냐 안했냐 차이가 아닐까요? 소위 비담의난은 어찌보면 김춘추파와 비담파간의 권력투쟁이 아니었을까요? 패한 세력을 나쁜게 만드는건 승리자에겐 쉬운일입니다. 저도 전에 소호금천씨님과 토론을후에 생각해보았는데요. 김춘추파의 반란유도가 아닌 권력투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 07.12.01 21:07

    왕성을 선점한 김춘추파와 그에 도성근처의 반월성에서 세력을 결집시킨 비담파... 뭐... 어쩌든 왕성을 차지하고, 전술적으로 뛰어난 김유신을 가지고 있었던 김춘추파의 승리가 되죠. 뭐 이건 지극히 저만의 생각입니다.

  • 작성자 07.12.02 16:19

    당시 겨우 소판(3관등) 직위의 김유신과 파진찬(4관등) 또는 대아찬(5관등) 직위에 있을 법한 김춘추, 이들이 상대등인 비담과는 년령상으로나 직위상으로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조건도 아니며 오히려 선덕여왕의 비호아래 한창 능력을 발휘할 즈음의 시기 였습니다. 비담과 알천 이들 사이는 동지? 아니면 라이벌? 계급순이든 년령순이든 이해가 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비담의 동조자들이 일단 반란을 일으키고 김유신을 비롯한 젊은 화랑들과 가병들 그리고 왕궁 호위병들로 어려운 방어를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는 압량주(경산) 군사들이 지원됨에 따라 반란군이 비로소진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작성자 07.12.02 16:22

    따라서 비담의 반란이 진압되고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혼란 과정에서 진압의 최고 공로자인 김유신장군 세력의 급성장은 당연한 것으로 이때 부터 신라조정은 김춘추-김유신 세력의 주도하에 정국이 운영되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주장일 것입니다..비담세력과 김춘추세력간의 권력 다툼인지? 아니면 비담세력과 동조하지 않은 구 귀족끼리 세력다툼에서 반란을 제압한 일등공신인 신흥세력이 중간에 갑자기 어부지리를 얻었는지?는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세력다툼과 비담의 반란은 충분한 개연성은 있어 보입니다.

  • 07.12.02 21:22

    뭐 김춘추파 vs 비담파간은 아니더라도 어쩌든 세력간에 알력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일이일어났겠죠. 기록부재가 가장 크다고 생각되네요. 결정적으로 신라의 복잡한 혈연관계가 이런 세력을 알아내기가 더욱 힘들다고 생각되네요. 어쩌든 좋은 토론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라에 관해서는 소호금천씨님의 내공에는 많은것을 배우네요. ㅋ

  • 작성자 07.12.02 21:58

    추모왕님 반갑네요!..^^*.. 저도 역사전공 출신이 아니다보니 중국사서를 제대로 접할 수는 없는바, 고구려, 백제 역사 분야에서는 삼국사기로는 어림도 없으니 잘 몰라서 입도 뻥긋 못하고 주로 고수분들의 글들을 눈팅만 하고 있지요 , 다만 신라사는 자료가 많고 접하기 용이하며 비교적 이해하기가 쉬워서 그런가 봅니다..고구려, 백제사는 너무 어렵군요!..차후 시간이 나면 또한 백제사나 공부 좀 할까 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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