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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퇴계선생 상소문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추천 0 조회 33 16.12.22 21: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5.『퇴계 선생 상소문』과 용두사미

 

  어쨌거나 퇴계선생은 생전에 근 50여 회에 이르는 사직원(?)을 내면서 벼슬을 멀리하고자 했던 분이었다. 말하자면 퇴계 선생의 상소문은 대개가 사직원이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따라 퇴계선생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보아졌다.

이를 테면 윤형원의 횡포시대였던 그 당시, 퇴계 선생의 넷째 형이었던 온계 선생은 퇴계선생과 꼭 같은 입장에 처하여 정치현실에 남아 큰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소인배로 벼슬을 탐한 쪽은 아니었음) 끝내 비명횡사를 면치 못했을 만큼 당시의 시대상이 혼탁했었다.

흔히 군자를 난향(蘭香)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나는 분명 퇴계 선생의 생애를 더듬어보며 난향을 맡을 수가 있었고, 이제 관객과 함께 이 난향을 나눠 맡았으면 한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한 문학작품이다. 상식적이면서도 간단한 이 하나의 전제 때문에 희곡작가는 한평생 몸살을 앓아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집필하고 공연된 작품이 28편이나 되는데, 아직도 내 설합 속에는 빛을 못 본 작품이 몇 편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기적처럼 많은 작품을 공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가슴 속은 허하기만 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 연극은 집단창작이므로, 작품이 제 아무리 좋아도 실패할 확률도 많을 뿐만 아니라, 연출가의 작품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다를 때는 흡사 내 자식이 남의 집 자식 노릇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배우가 실수를 한다든가 생각만큼 연기력을 발휘 못해 작품이 축 처질 때는 달려가 후려 패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수십 명이 매달려 전쟁을 치루 듯 해서 드디어 막을 올렸는데, 작품은 좋다는 평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코배기도 보여 주지 않을 때는 그저 눈에서 눈물만 흐를 지경이었다.

언젠가 내 작품이 ‘공간사랑’에서 공연 되고 있는데. 무슨 놈의 시위 때문에 관객이 한 사람도 없어 막을 올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때 나는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이라도 발사하고 싶을 만큼 그들이 밉기만 했다. 놈들은 저희 밥그릇 챙기느라 지랄 발광하는데, 왜 죄 없는 예술인들이 피해를 봐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공연이 전제되지 않은 작품의 집필은 일단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작가가 공연단체의 입맛만 따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다운 작품을 낑낑 그리며 써보지만, 직접 제작을 하고 연출을 하지 않는 한, 그 작품들이 빛을 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연극쟁이들에게 작품을 읽어 보라고 주면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것 같아’, ‘요즘 관객들이 이런 주제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 ‘심사위원들이 요즘은 이런 작품을 뽑지 않아’ 등등 ‘공연이 어려워 레퍼토리 채택을 못하겠다.’는 대답은 여러 수십 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2000년 3월 10일이었다. 그날이 바로 못난 이 극작가 놈의 58회 생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재운 형으로부터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 형은 30여 년 전에 합기도 도장에서 만난 형벌의 친구였다.

수요자도 없는 ‘미술 연감‘을 10여 년 만들어 내느라 안동에 있는 알토란같은 땅마지기를 거의 다 날렸으나 꼿꼿한 선비기질 하나만은 여전한 사람이었다.

하여간 그날 그 형을 만나게 되어, 내가『퇴계 선생 상소문』이란 그 어려운 주제의 희곡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른바 ‘퇴계선생 상소문’의 작의가 다음과 같이 정리 되었다.

대 성리학자 퇴계 선생의 초상화를 그리며 이 작품이 집필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 보면 대략 이러하다.

이전에 몇 번 집적거려 본적은 있지만, 쉰 살이 되고서부터 나는 아예 작심을 하고『논어(論語)』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름대로의 까닭인즉 한국의 현대사를 주름 잡아 왔던 소인배 정객들의 철학이 얼마나 치졸하고 저급한가 하는 사실을 공자의 사상적 거울에 한번 쯤 비춰 보리란 생각에서였다.

이어서『맹자』를 읽었고,『대학』,『중용』을 읽었으며『서경』,『시경』,『역경』들도 뒤따라 읽었다.

점차 아시아적(?) 가치관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극작가가 아니냐?‘ 하는 반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 생애는 그간 무수한 작품들 (소설, 연극, 영화 등)로 재해석 창조되고 형상화되어 왔는데, 어째서 공자의 생애는 작품화되질 못했느냐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렇다면 내가 한번 도전해 보리란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다소 거창한 목적을 세우고 보니, 또 섭렵해야한 자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로소 뚜렷한 목적의식이 생겼으므로 딱딱한 고전들도 꼼꼼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독서는 목적의식이 분명할 때 되는 법이었다.

그럴 즈음 우연히 퇴계선생의 방손이자 ‘한국 미술 연감사’를 운영하는 이재운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나의 30년 지기인데다 피차간에 지금까지는 두터운 신의를 지켜오던 터수였다.

한담을 나누다 말고 이재운 대표는 내년(2001년)이 이황선생 탄신 500주년이라고 했다. 그래서 몇 가지 사업을 벌리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렇다면 이 기회에’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이윽고 나는 이재운 대표에게 사실은 수년전부터 혼자 유학공부를 해 왔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공자 일대기의 작품화에 앞서 ‘퇴계선생의 생애’를 한번 다루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렇게 되어 이재운 대표로부터 흔쾌히 퇴계 선생 관련 자료들을 입수할 수가 있었다. 물론 나는 서둘러 퇴계 선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편의 희곡 구상에 들어 갈 수가 있었고, 퇴계는 누구이며 나는 이 연극 무대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며 관연 관객과 어떤 감동을 공유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수많은 고뇌 끝에 매달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연극적 형식에 있어서는 사실주의 기법을 기본으로 삼되, 표현주의 수법도 원용하기로 하고,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허구적 구성보다는 사실 위주의 사건이나 인물 묘사를 앞세우기로 했다.

한 마디로 퇴계선생은 군자(君子. 혹은 참 선비)의 본을 몸소 보여준 어른이었다.

원래 유학은 지식습득만으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는 학문이 아니라, 지행(앎과 실천) 병진의 학문이요, 철학이기에 유학자는 자연 구도자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로부터 비롯된 성리학은 전래의 유학을 인간학적인 해석으로 전환, 스스로의 수양에 의해 인내천(人乃天)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실천 윤리학이었다.

일찍이 중종조 때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다가 좌절당한 정암 조광조에 대해서 퇴계가 평한 인물론을 보면 퇴계 선생의 학문관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조정암은 타고난 바탕이 뛰어 났지만, 학문의 힘이 가득 차지 못했고, 그가 하는 바가 지나쳤기에 마침내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만일 학문이 충실하고 덕기(德氣)가 이루어진 다음에 세상에 나가 일을 담당했더라면, 그 성공은 쉽게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퇴계선생은 생전에 근 50여 회에 이르는 사직원(?)을 내면서 벼슬을 멀리하고자 했던 분이었다. 말하자면 퇴계 선생의 상소문은 대개가 사직원이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따라 퇴계선생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보아졌다.

이를 테면 윤형원의 횡포시대였던 그 당시, 퇴계 선생의 넷째 형이었던 온계 선생은 퇴계선생과 꼭 같은 입장에 처하여 정치현실에 남아 큰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소인배로 벼슬을 탐한 쪽은 아니었음) 끝내 비명횡사를 면치 못했을 만큼 당시의 시대상이 혼탁했었다.

흔히 군자를 난향(蘭香)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나는 분명 퇴계 선생의 생애를 더듬어보며 난향을 맡을 수가 있었고, 이제 관객과 함께 이 난향을 나눠 맡았으면 한다.

경상도 안동 땅 귀퉁이에 있는 도산서당에서 유명을 달리 했을 때,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선비들이 약속이나 한 듯 비통한 곡을 토했을 뿐만 아니라, 자고로 왕이 시호를 내리자면 고인의 행장(살아생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 글)이 마련된 연후에나 가능한 법인데, 선조는 조정중신들의 주청에 못 이겨 퇴계선생에게만은 예외로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연적에 이어 퇴계 선생 이황 또한 문묘(文廟)에 배향하란 어명을 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처음부터 드라마가 보이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봐도 드라마가 없어 보이는 인물도 있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드라마란 이른바 갈등의 구조이다.

예를 들면『박정희. 박정희』를 그릴 때는 드라마가 너무 많아 어느 곳에다 포커스를 맞추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에 고심을 거듭 했는데, 퇴계 선생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그와 반대로 아무런 드라마가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가장 극적인 상황은 복수(復讐)이며, 그 복수를 극적국면으로 잡아 가장 성공한 예가 셰익스피어의 작품『햄릿』이 되리라.

그리고 일삼아 극적인 사건들은 무대 밖으로 밀어낸 작가는 러시아의 체홉이 될 것이다. 퇴계 선생의 경우는 당연히 체홉적 분이기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드라마는 잡아야 하는데 그게 영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퇴계 선생은 내 연극의 주인공이다’ 하는 전제를 머리속에 넣어 두고, 관련 자료들은 무조건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김성한 선생의 장편 소설『이퇴계』도 읽어 보았고, 정순목 선생의 ‘퇴계 평전’도 읽어 보았고, 장입문 선생이 집필한 ‘퇴계 철학 입문’도 읽어 보았고, 김유혁 선생이 집필한 ‘이퇴계의 인간상’도 읽어 보았다. 뿐만 아니라 600 쪽이나 되는 ‘퇴계학 연구’와 씨름을 하기도 했고, 경북 대학교 내의 ‘퇴계 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의 철학’지들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소위 하나의 이미지가 무지개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이를 테면 퇴계 선생의 생애가 마치 구도자(求道者)처럼 ‘자기 인격적 완성을 향해 생애를 불사르는 모습’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래, 이거야.’

하고 나는 마침내 설계도를 그려 나갈 수가 있었다. 별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한 평생 퇴계선생을 사랑한 두향이란 관기(官妓)를 과연 등장 시킬 것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을 하기도 했다. 후손들은 분명 싫어 할 것 같았지만, 추하지 않게만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일단 그녀를 등장인물로 잡기로 했다.

단 퇴계 선생의 서자(庶子)인 이적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만은 차마 그려 넣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퇴계 선생이 가장 가슴 아파할 문제였겠지만, 그러한 사실은 그 가문의 치부(恥部)로 여길 것만 같아서였다.

퇴계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이 아들을 낳고 사망하게 되면서, 그 유모의 몸에서 그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작품이 탈고되었다, 나는 일단 그 작품을 이재운 형에게 보여 드렸다. 역시 양반이라 이재운 형은 막역한 친구지간이지만 깍듯이 작가의 의도를 존중해 주며, 별 탈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해 주었다.

성균관 대학교 옆에 ‘퇴계 연구원’이 있었다.

거기서 작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서 찾아 갔다가 상당히 불쾌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퇴계 선생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 한 친구가 내 작품을 읽었다며 무척 흥분된 어조로 하는 말이 ‘틀렸다’는 식이었다.

‘무엇이 틀렸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퇴계선생 연보’를 펼치면서, 내가 그린 극적 사건과 연보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퇴계 선생의 넷째 형이 대사간 및 대사헌 등을 역임 하다가 성격이 너무 강직해서 일찍 태형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길에 죽게 되는데, 나는 극적 대비를 위해 사실과는 좀 다르게 어느 시기까지 살려 두었는데, 그러한 구성이 틀려먹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무식한 놈!’ 하는 말이 울컥 내 입에 차올랐으나, 나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꾹 참고 드라마 논리상에서는 그런 것이 다 가능한 일이라고 젊잖게 타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 젊은 학자는 마뜩찮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그 무식한 친구는 작품 공연 때 퇴계 연구원 후원인지 협찬이란 명의사용도 허락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소위 학자연하는 사람들이나 관리들을 상대해 보며 항상 느꼈던 문제점은 도대체 예술적 논리에 대해 무식하기가 이를 데 없더라는 사실들이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적 미학으로 보고, 소설은 소설적 미학으로 보아야지, 어째서 픽션의 세계와 넌픽션의 세계도 분간 못하는지 그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쓴 오페라 대본『광개토 호태왕』이 공연되기 전에 그 작품을 읽어 본 국사 편찬 위원회의 모씨가 엄청난 분량의 메모지를 사무실에 보내 왔다면서 기획담당 아가씨가 울상을 지우며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일언지하에 ‘그 따위 달밤에 개짓는 소리로 여겨!’하고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 개새끼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대본 한번 써 보라고 해!’ 하는 말도 해 주었다.

적어도 프로작가는 생명을 걸고 작품을 쓰는데, 예술이 뭔지, 드라마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들이 무조건 ‘틀렸다’는 말을 해야 거지같은 권위가 올라가는 줄 아는 모양이어서 그간 분통이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작가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느 방송국에서 매일 생방송으로 나가는 원고를 몇 년간 썼는데, 담당 피디가 바뀌어 처음으로 그 친구에게 원고를 넘겼더니, 그 친구는 댓바람에 내 원고 표지를 꾸겨서 휴지통에 집어넣은 적이 있었다. 나는 단 열장짜리 원고라도 표지를 따로 쓰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그 피디와 약 일 년 간 함께 일을 하면서도 ‘커피한잔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저런 감정이 쌓여 있어서 나는『퇴계선생 상소문』의 프로그램에다 아예 이런 말을 휘갈겼다.

공자님도 위대한 예술가였다

오랫동안 피부로 느껴서 하는 말인데 나는 곧 잘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비록 문맹(文盲)에서는 벗어났지만 예맹(藝盲)에서는 못 벗어난 상태로 살고 있다’

우리들이 언제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단 말인가.

예술(혹은 미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이니, 우리 연극인을 광대패거리로 홀대하지 않았던가.

사실 예술(미학)이란 철학에 해당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미를 창조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자아내는 작품을 창작하기란 고등고시 공부 이상의 고통과 수련이 필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예술인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하등의 보상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로서는 공자님을 늦게 만났는데, 공자님이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님은 예(禮)로서 질서의식을 바로 잡은 다음에 악(樂)으로서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펴셨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선비들은 무슨 연유로 악(樂)을 무시하려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마디로 출세 지향적인 소인배의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퇴계 이황 선생이 벼슬을 멀리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사실 이황 선생은 딱딱한 성리학자로서만 널이 알려져 있는데, 그 분의 진면목은 시가(詩歌)와 음악(音樂)을 남달리 사랑했음에서도 밝혀 질 수가 있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참 선비상의 본(本)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초상을 그려 보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무대 형상화 과정에서 뜻 데로 되어 지지 못해 한이 남게 되었다.

기관 및 단체의 비협조는 물론,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로 실효를 거둘지 두렵기까지 하다.

끝으로 이번 연극에 참여한 스텝 및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리면서, 부족했던 많은 점들은 차후에 갚아야 할 빚으로 가슴 속 깊이 새겨 두겠다.

어차피 ‘기관 및 단체의 비협조’란 말이 프로그램에도 나오게 되었는데, 빌어먹을 이『퇴계 선생 상소문』의 막을 올리느라 작가 김영무는 뭐가 빠질 뻔 했었다.

처음 이재운 형은 만약 밖에서 협조를 얻을 수 없더라도 자기가 2, 3억원은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작품 집필에 임할 수가 있었다.

물론 이재운 형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수집해 놓은 미술 관련 자료를 처분하면 돈이 될 수가 있고, 심의 신청을 해 둔 국보급 보물 몇 점이 곧 지정이 될 테니, 그때 얼마 정도의 여유는 있을 수가 있다는 등이었다.

그런데 미술 관련 자료는 미적거리기만 할뿐 팔리지가 않았고, 국보급 보물 지정이 떨어져서 돈이 5억인가 6억이 나왔으나, 조카와 의견이 맞지 않아 가만히 보니 이재운 형은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뛰어야지’ 하고, 오랜 친구 이종성 화백과 나는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 시작했는데 도대체가 씨알이 먹히지가 않았다.

그때 안동에 유교문화 축제인가 무슨 행사비 명목으로 10억인가 얼마가 내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나름 데로 손을 써 봤는데, 가부간의 결정이 열 번도 더 번복되기만 했다.

처음 나는 이재운 형의 말을 믿고 일단 극단 성좌의 권오일 교수에게 대본을 넘겨 둔 상태였다.

어쨌거나 일을 만들어 보려고 대구에 있는 경상북도 도청으로, 또는 안동으로 꽤나 여러 차례 오르내리기도 했고, 생전에 만나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을 만나 혀 굳은 소리도 해 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세계유교문화축제’ 집행위에서 3천 만 원을 줄 테니, 연극을 만들어 오던가 말든가 하라는 식이었다.

물론 권오일 선생은 포기하자는 쪽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애초에 그린 작품에는 등장인물만 해도 자그만치 40여명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만들려면 최소한 2억원 정도는 있어야 할 판이었다.

나로서도 며칠간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다 말고 오기를 발동시켰다.

그래서 권오일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3천만 원짜리 연극을 만들기로 하자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2여명의 등장인물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연출은 권은아가 맡았다.

그 작품에 출연 했던 배우들로는 이황 역에 유민석, 해설 역에 이창회, 이현보, 이징, 기대승 역에 박정순, 이해 역에 최홍일, 윤원형 역에 박영재, 이이, 김성일, 승임 역에 오병남, 김안로, 이이 역에 방재승, 김인후, 이몽필, 선조 역에 권영민, 이언적, 조목, 이치 역에 윤석호, 중종, 이원록, 이영 역에 강주영, 두향, 권씨 역에 황현주, 박씨, 미화 역에 김인숙 등이었다. 1인 2,3 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작가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런 식으로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니, 계속 서글픈 마음이 들기만 했다.

2001년 10월 9일과 10일 이틀간 안동 시민종합회관에서 2회 공연이란 스케줄이 잡혔다.

하루 전날 내려가 보니 극장인지 공회당인지 모를 공연장에 현수막 한 점 하나 걸려 있지 않았고, 시청 직원들은 코앞에서 무슨 연극의 공연이 있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문화과 직원을 만나 ‘이렇게 무성의할 수가 있느냐‘고 야단을 치니까,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는 척 했지만, 누가 무었을 어떻게 알고 관객이 몰려 올 것인가.

첫 공연은 비상을 걸어 시청 직원들로 대충 때웠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비까지 내렸다.

마침 서울 송파구청에서 2명의 직원이 내려 왔다. 물론 우리가 섭외를 했는데, 공연을 보고 좋으면 송파구에서도 2회 공연 정도는 유치하겠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개막 공연이 끝나자 그나마 작품은 뜻밖에 좋다는 평들이 나돌았다. 송파구에서 온 직원들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주었다. 서울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연이라며 뜻밖의 수확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진성이씨 후손이라는 모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고 봉투하나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세계유교문화 축제’에 사실은 이런 연극이 메인이벤트가 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도 전해 주었다.

하기야 안동 양반들의 눈에는 연극이 광대놀음 이상도 이하도 아닐는지 모를 일이었다.

타 지역에 가서 공연을 하고 보면 기관장들이 대개 뒤풀이를 책임지든가, 하다못해 금일봉이라도 주면서 고맙다는 예의를 차리기 마련인데, 그때 안동 시장은 구경(?)을 한 다음에 쓰다 달단 말 한마디 할 줄 모른 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송파구 직원들이 서울로 가겠다고 해서 우리는 함께 뒤풀이 장소로 가자고 했으나, 그들은 부득불 가겠다고만 해서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우리 단원들은 안동까지 왔으니 그때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는 안동 찜닭이나 먹고 가자며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 건너 편 테이블에 앉은 젊은 두 놈이 끊임없이 욕지거리로 떠들기에만 바빴다.

웬만하면 단체 손님이 들이 닥치고 보면, 눈치껏 자리를 좀 양보해 줄 만도 한데 놈들은 막무가내 식이었다.

듣다못해 우리 단원 중의 누가 그들을 향해 ‘좀 조용히 합시다.‘ 했더니, 놈들이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우리들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놈들은 깡패수준도 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깡패라면 그런 분위기에서는 외려 고분고분해야 할 판이 아니었을까.

그러자 우리 단원 중의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안동이 양반 동내라더니... 거지같은 쌍놈들 동네구만’

가게 주인이 나서서 가까스로 그 두 놈을 달래며 밖으로 내 보냈다.

하여간 그때 우리 단원들에게 안동이란 이미지는 ‘영 아니올시다.‘가 되고 말았다. 어느 누구는 안동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송파구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안동에서 연극을 본 그 두 직원의 평가 보고서가 최하위의 수준이어서, 송파구의 공연은 무산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 소문을 들은 어떤 친구는 ‘놈들에게 쥐약을 먹이지 않아 그런 결과가 나타났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요즘은 공무원 사회가 깨끗해 져서 그럴 리는 있을 수 없고 우리가 만든 연극이 졸작이라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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