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무상 무아)의 수행은 주문으로 가능한가?
염불진언은 불교가 아니다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한 주며, 큰 지혜의 주며, 깨달음의 주며, 비교될 수 없는 주다.
신이라는 것은 신묘하다는 거예요. 대명할 때, 명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경에 보면, 우리가 지혜라고 붙여 쓰지만 지혜 지(智)자와 지혜 혜(慧)자를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밝을 명(明)자도 쓰고, 빛 광(光)자를 쓰기도 하고. 그러니 지와 혜와 명과 광, 이 네 가지는 유사한 같은 개념이에요.
무상(無上)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아뇩다라를 번역하면, 무상이 돼요. 무상, 위 없는, 즉 깨달음을 말해요. 중국 선종에서는 이 무상이라는 말을 향상이라고 하는 말로 고쳐서 썼어요.
향할 향자, 윗 상자, 향상(向上). 특히 중국 오대 시대 때 운문 문언선사는 향상과 향하(向下)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선종에서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향상일로라 그러면, 위로 향한 한 길, 그렇게 직역할 수 있지만, 뜻은 깨달음의 한 길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유일한, 한 길 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향상의 반대되는 말로, 운문선사는 향하라고 하는 말을 썼죠. 향상이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향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고 보면 맞죠.
무등등주(無等等呪), 비교될 수 없다. 무등등은 비교될 수 없다고 하는 뜻이에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呪)라고 하는 말은 주문(呪文)이예요. 만트라(Mantra). 보통 우리가 번역해서 진언(眞言)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천수경을 보면 전부다 만트라로 되어 있잖아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은 수리수리, 신묘장구 대다라니, 이게 다 만트라죠.
본래 부처님은 이 만트라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붓다는 아타르바 베다의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을 강도 높게 비판하걸랑요. 아타르바 베다는 인도 고대의 바라문교의 이 만트라,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베다예요. 지금 힌두교의 가장 원형이 되는 성전으로 이 아타르바 베다라고 하는 것은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요. 그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들을 부처님은 강도 높게 비판해요. 그리고 주법(呪法)을 엄격히 금지해요. 불교는 원래 주법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도 불교가 주법의 관행을 벗어던지지 못해요. 그리고 붓다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죠. 부처님이 주법을 금지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요.
부처님이 그렇게 엄격히 주법을 금지하는데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법으로 이해해 버리걸랑요.
그리고는 앉아 가지고 맨날 수리 수리 마수리만 하고 있잖아요. 하지 말라는 걸 하면서 복받기를 바라니, 이게 참 웃기는 얘기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부처님이 금지하는 걸 하면서 복 받기를 바래? 참, 예쁜 사람 복주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 안 듣는 애까지 챙겨야 돼. 그래서 나는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제 아무리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얻고, 멸진정을 설사 얻었다할지라도,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는 한 열반이라고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수행은 과거의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
이 예를 보면, 인간이 기억의 의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보죠. 기억의 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특히 나쁜 기억의 의식을 발라내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야만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아요. 이성의식은 평형이 회복이 되죠.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것이 열반이에요.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는 한 열반은 없어요. 나는 기억의식은 잘라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은 발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은 과거의 기억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태까지 살면서 입력되어 있는 기억의식을 잘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이성의식이 평형이 안 돼요.
우리가 현재 경험의식의 판단오류가 생기는 것은 결국은 이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을 말해요. 그저 앉아서 들숨/날숨을 보고, 몸의 현상을 보고, 이거는 그저 수행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의 준비과정이지, 이것을 수행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거예요. 수행이라는 것은 내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거예요. 완벽하게.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자의식이 해체되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걸랑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발라내야 되는데, 그걸 못 발라내거든. 그러니까 맨날 똑같은 것에,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은 생활에 똑같은 생각을 하죠. 보세요. 우리는 항상 똑같은 것을 가지고 충돌하잖아요.
두카는 자유의지가 박탈된 윤회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 윤회를 끊는 것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능히 일체의 고를 소제 하느니라. 능히 일체의 모든 두카를 제거한다는 것이죠.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열반에 이른다. 사실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거라고 보면 맞아요.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 이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두카의 강을 건넌다는 거예요. 두카는 다른 말로 하면, 윤회입니다. 윤회와 두카가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는 윤회와 두카를 분리해서 이야기하지만 두카가 윤회고, 윤회가 두카예요. 왜냐하면 윤회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자유의지가 박탈된 것을 말해요. 이거보다 더 큰 두카가 없죠.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예요.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이 뭐예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하고 같아요.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도 자유를 이야기하죠. 불교는 복종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기독교는 복종이에요. 오직 복종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얻어지죠.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복종은 행복이 아니에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복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노예는 아무리 행복해도 노예일 뿐이에요. 마치 복종이 행복인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장 편한 것은 복종하는 거죠. 복종하면 지시만 받고, 행동하면 되니까요. 자유라고 하는 거는 내가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성이 많아요. 실패할 수도 있고. 오너의 선택은 기업을 망치기도 하고, 흥하게도 하죠. 그렇지만, 노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아요. 그저 복종만 하면 되죠.
진실불허(眞實不虛).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기에 다르마죠. 진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예요.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라.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진실하라! 그러잖아요. 부처님은 오직 한 말씀만 하셨을 뿐이라, 진실해라!... 진실이 다르마라. 진실하지 않으면, 사선 팔정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건 다 허구고 망상일 뿐이라.